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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Author: 유애
열이를 만나러

원경릉이 잠시 멍하니 있자니, 일련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시동이 다치기 하루 전날, 몸의 원래 주인은 시동을 혼내며 때리고는 헛간 나무덮개를 꼭 맞게 잘 덮어 놓으라고 명령했다. 시동이 그렇게 다친 건 헛간에서 굴러 떨어지다 못이 박힌 게 틀림없다.

게다가 헛간 수리는 원래 그 아이가 할 일도 아니다.

어디 이번 뿐이랴. 자기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종이 팔려 나가자, 초왕이 보내준 시종들에게 화풀이를 해대며 평소 하인을 툭하면 때리고 욕설을 퍼 붓곤 했는데, 기상궁도 그녀가 던진 잔에 맞아 피를 흥건하게 흘린 적이 있다.

몸의 원래 주인 성격이 이렇게 고약하다 보니 사람의 미움을 사는 것도 당연했다.

“네가 기상궁에게 좀 물어봐 주면 안될까? 내가 직접 걔를 보러 가도 될지.” 원경릉이 말했다.

“왕비님 심사가 진짜 이리 고우셨으면 이 지경까지 떨어질 리도 없었을 텐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집어 치우세요. 기상궁이랑 열이는 왕비님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녹주는 말을 마치고 홱 몸을 돌려 나갔다.

문이 다시 닫혔다.

원경릉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애 상태가 위독한가?

시동 열이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이 시대 의원은 어떻게 상처를 치료하는지 모른다. 만약 처치가 적절하지 못할 경우, 각막이 탈락하면서 안구 파열에 감염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사람의 목숨은 그녀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경릉은 도무지 태평하게 앉아 밥을 먹을 수 없어, 약 상자를 열어 항생제 몇 알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

기상궁은 왕부에 팔려온 하인으로 시동 열이는 날때부터 노비라 봉의각 뒤에 있는 담장이 낮은 집에 살았다.

원경릉은 몇 바퀴를 돌아 겨우 찾아냈다.

“왜 왔죠?” 기상궁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원경릉을 노려보며 말했다.

“열이 좀 보려구요.”

“가요, 손자도 나도 구역질 나니까!” 기상궁은 차갑게 말했다.

원경릉은 사과를 시도하며, “미안해요, 그 아이에게 헛간 수리를 시킨 게 이렇게 되리라고 전혀…”

“전혀? 걔는 아직 9살입니다, 그저 청소나 좀 할 줄 아는, 그런 애한테 가서 헛간을 수리하라고? 아니 수선하고 유지하는 일은 왕부 내에 전담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은 못하게 하고 걔더러 하라니요, 걔를 일부러 난처하게 만들었다고요, 걘 아직 9살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가 있나요?”

분노에 차 큰 소리로 힐난하는 기상궁에게 원경릉은 무어라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경릉은 현대나 지금이나 말주변이 없다.

그저 항생제 몇 알을 기상궁 손에 쥐어 주며 “이 약 손주에게 먹이세요, 하루 세번, 한번에 두 알 씩…”

기상궁은 손에 든 알약을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으며, “필요 없으니, 나가요, 가급적 욕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손자 대신 공덕이라도 쌓아야지.”

원경릉은 가루로 바스러진 약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약 상자의 항생제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상궁의 분노에 찬 얼굴을 보니 어떤 말도 소용없음을 깨닫고 그저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열이의 상태는 위독해 졌다.

초왕은 기상궁을 아껴 손자인 시동 열이의 정황을 듣고, 특별히 가신을 시켜 수도에서도 유명한 이의원을 청하게 했다. 이의원은 상태를 보더니 약방문을 쓰지 않고 고개를 흔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기상궁은 가슴을 찢으며 울었고, 울음 소리가 원경릉의 귀에 들리자 버선 발로 달려나가 다급히 가던 녹주를 붙들어,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다.

“열이가 위독한가 봐요.” 녹주도 경황이 없는지라 그녀를 증오하는 것도 잊고 사실대로 말했다.

원경릉은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약 상자를 가지고 따라서 뛰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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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 명의 왕비   제3367화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 명의 왕비   제3366화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

  • 명의 왕비   제3365화

    제3365화공주가 웃으며 말했다."그 도적이 내 손을 만지긴 했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부마께서 그의 손을 잘라버렸으니!”원경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싸늘한 눈빛을 내뿜는 이리 나리를 올려다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리 나리의 성격으로는 공주를 잡아간 자의 손만 자른 것이 아니라 고깃덩이로 만들어도 모자랄 텐데…'"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어머님께서 아시면 걱정하실 테니, 이 일은 밖에 알리지 말아 주시오."공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녀는 시어머니가 예전에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정말 너무 놀랐소."원경릉은 공주의 혈압과 심박수를 확인했고,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부마께서 분명 나를 구하러 오실 것이라 알고 있었기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소."공주는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존경이 가득했다.평소 두 사람의 관계는 늘 이랬다. 그녀는 그를 존경했고, 그는 그녀를 아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리 나리의 눈빛에 평소와 같은 다정함 대신 어둡고 진지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아!"공주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안색이 곧바로 어두워진 이리 나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검을 뽑아 들었다. 원경릉은 그의 모습을 보며, 공부보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이리 나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이 말했다."그저 손톱이 부러졌을 뿐입니다."그제서야 이리 나리는 천천히 검을 내리고 착잡한 눈빛을 지었다."아, 그런 것이었소."원경릉은 다시 공주를 자리에 앉히고 몇 마디 나눈 뒤, 이리 나리를 향해 말했다."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공주의 곁을 떠나기 싫은 이리 나리가 입을 열었다."할 말 있으면 이곳에서 하거라.""그저 몇 마디면 되니, 밖으로 가시지요."원경릉이 재차 권했다.이리 나리는 공주를 힐끔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그럼 여기서 기다리시오. 어디 가지 말고."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의

  • 명의 왕비   제3364화

    공주는 결국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비단 망토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덮은 덕분에 그녀는 이 잔인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이내 그녀는 익숙한 품속에 안겼고, 그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공주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비단옷이 떨어지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고, 얼굴에 묻었던 피는 이미 닦여 있었다.그녀가 상황을 제대로 보기도 전, 그는 비단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미색아!"이리 나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그러자 미색이 곧바로 공중에서 날아와, 이리 나리의 손에서 공주의 손을 뺐다."가시지요!"혈전과 살육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색은 공주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덕분에 공주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물론 서방인 이리율의 싸늘하고 무서운 표정마저도 말이다. 오 씨는 곧바로 붙잡혔고, 그와 함께 있던 녹림의 도적들은 반항을 한 죄로 모두 살해되었다. 그들은 조용히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 검으로 한 번에 숨을 거두었다.오직 오 씨만, 이리율의 손에 넘겨졌다.한 손이 잘린 오 씨는 염라대왕과도 같은 이리율의 모습을 보고,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하지만 이리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훼천, 멸지, 오늘 너희의 검을 써야겠구나."그러자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이리 나리에게 던져졌고, 이리 나리는 검을 받아 들자마자 바로 휘둘렀다. 검이 내뿜는 싸늘한 빛에 오 씨는 겁을 먹고 뒤로 기어갔다.검이 번쩍이자, 오 씨의 또 다른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렀고, 이리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검을 동시에 휘둘러, 오 씨의 두 발을 깔끔하게 잘라냈다.오 씨는 비명을 지르다, 기절할 뻔했다.이리 나리는 여전히 두 검을 휘두르며, 오 씨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검은 그의 몸을 관통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이리 나리는 훼천과 멸

  • 명의 왕비   제3363화

    한편, 낭당산에서 공사를 담당했던 오 씨는 도적 무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 있었다.오 씨는 난폭하고 독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도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산적들을 단속하기 시작하자, 바로 도망쳐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얌전히 지내겠다고 맹세하며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그의 잔인한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많이 해왔지만, 용케도 파장이 크지 않아, 관아의 눈에 띄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남들처럼 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았고, 큰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공주를 납치하였다."형님, 돈을 받고 정말 공주를 놓아줄 셈입니까?"술을 한참 마시다가 그의 부하가 물었다.오 씨는 묶여 있는 공주를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먼저 데리고 다녀야지. 방서를 붙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경성을 떠나자마자 죽여버릴 것이다!"공주는 몸도 묶여 있고 입도 막혔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 나리가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임을 믿고 있었다.그녀는 이 일을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공주는 애써 가냘파 보이려 노력했다. 연약한 척해야 도적들이 그녀를 해치려는 순간 반격할 수 있었다. 무예를 배웠으니, 도망칠 기회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어야 했다.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다들 오늘 술 한 잔 마시고, 내일부터 보초를 서야 하네. 이리율이라는 자는 아주 소식을 얻는 것에 능한 자이네. 아마 이틀이 지나면 이곳에 찾아올 것이니, 미리 함정을 설치하고, 그자의 부하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네. 그래야 순순히 돈을 내놓을 것 아닌가? 우린 곧 떼돈 버는 거네."녹림의 도적들은 모두 일어나서 환호했다."오 대감 덕분에 우리가 돈도 벌고 좋소! 자, 마십시다!"술이 끊임없

  • 명의 왕비   제3362화

    이번에는 공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공부는 호국사가 다른 지역의 승려들을 수용하고, 불법을 교류할 수 있도록, 호국사의 재수리와 확장을 맡았다. 조정은 불법을 널리 알려, 번화한 성시에서 점차 불안정하고 공리주의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여러 공사를 외주로 맡겨야 하고, 호국사 수리도 큰 공사가 아니기에 외주로 진행하였다.민간에서 공사를 맡은 일꾼들은 대부분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호국사 일로 공부시랑과 연락한 자는 모두 과거에 도적 출신이었다.공부가 공사를 외주로 진행하려 하자, 공부시랑은 몰래 뒷돈을 받아, 그 공사를 그런 그들에게 맡긴 것이었다. 호국사 수리 공사는 시작된 지 3개월이 넘었고, 주 사원 수리 외에도 옆에 새로운 사원이 건축되었는데, 그러다 며칠 전, 큰비가 내리면서 새로 지어진 사원이 결국 무너져버렸고, 몇 명의 일꾼이 깔려 죽기까지 했다.일꾼들은 공사 담당한 자가 외부에서 고용한 일용직이었기에, 그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일에 공사 담당자는 보상하지 않으려 했고, 사망자들의 가족이 난동을 피우다 호국사까지 찾아가 난동을 피우게 되었다.공사 담당자는 조정의 일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난동을 피우자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세 명의 가족을 때려죽이까지 했다. 그중 한 명은 심지어 임신한 여인이었기에, 두 명이 목숨을 잃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그 일로 인해 이 사건의 파장은 더욱 커졌다.죽은 일꾼의 부인에게는 경조부에서 일하는 관리인 오라버니가 있었다. 그녀는 산에서 도망쳐 내려오자마자 바로 오라버니를 찾아갔고, 그녀의 오라버니는 즉시 경조부윤인 제왕을 찾았다.그 사건은 이렇게 드러나게 된 것이고, 경조부는 사원이 무너져 사람들을 압사시킨 일과 공사 담당자가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리 나리는 이 일에 비리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했다.하지만 공부 쪽에서 미리 소식을 건넨 탓에, 공사 담당자는 이미 도망쳐 숨어버린 뒤였다.공사 담당자는 몇 년 전 녹림에서 활

  • 명의 왕비   제3361화

    원경릉은 추 어르신이 영상도 편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추 어르신이 이곳에서 1, 2년 더 지내면, 얼마나 많은 기적을 창조할지 모를 것 같다고 생각했다.추 어르신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가이드가 영상 편집을 가르쳐주고 대신 편집해 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이드와 대화를 나눠보니, 어르신들이 곧 편집을 익힐 것 같아 이제 더 이상 그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 했다.그리고 가이드는 추 어르신이 영상을 많이 찍는 이유는, 영상을 남겨 부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을 덧붙였다.원경릉은 그 말에 매우 감동했다. 비록 희 상궁이 그들의 여행에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추 어르신이 희 상궁을 대신하여 여행에서 본 풍경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영상을 다운로드한 후, 북당으로 돌아가자마자 희 상궁에게 보여주었다.기쁨에 겨운 희 상궁은 나이가 많은 소요공이 아직도 정정하다며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눈가에는 이내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추 어르신이 이 영상을 찍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추 어르신이 그녀에게 그가 본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희 상궁이 원경릉에게 말했다."밖으로 나가보면, 더 많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네. 그의 몸이 그다지 좋진 않지만, 나는 그가 이번 여행으로 즐겁게 지내며, 그 덕에 건강해지길 바랄 뿐이네."그러자 원경릉은 그녀에게 분명히 그럴 것이라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가 풍경을 보고 돌아온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함께 늙어가며 오붓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원경릉은 환타가 상을 받은 이야기부터 꺼냈다.그 소식에 우문호는 흥분을 금치 못했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그리고 원경릉은 그에게 소요공의 영상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부러웠던 그는 퇴위한 후, 그들처럼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말했다.잠시 후에 원경릉은 란오의 약을 개량한 3세대 약을 가져왔다.다섯째는 약을 주사한 후, 살짝

  • 명의 왕비   제3360화

    전화를 끊은 후에도 원경릉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사실 그녀 마음속에는 늘 자식이 대학에 가서 지식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집념이 있었다. 지식은 끝이 없으니,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더 열심히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이들이 대학 생활을 경험하기를 바랬다. 대학 생활은 반드시 아이들의 인생에 있어, 다채로운 시간이 될 것이고, 이런 인생 경험은 그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환타가 받은 상은 국제적인 대회의 상장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 된다.그는 벌써 자신의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좋은 소식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려던 원경릉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올 수 있는 일요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축하해주기로 했다.그렇게 며칠 후, 식당에 앉아 그녀는 두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그들은 이란성 쌍둥이었기에 비슷한 외모를 가졌지만, 떡들처럼 쏙 빼닮진 않았다.환타는 교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깨끗하게 세탁된 하얀 옷 덕분에 전체적으로 매우 깔끔해 보였다.그리고 점잖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눈빛도 맑고 순수했다. 그의 외모를 보면, 그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형제의 성격 또한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차이점이 있었다.칠성은 차가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음은 따뜻한 아이다. 친해지기 전에는 쌀쌀맞게 구는 듯 보일지 몰라도, 친해지면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환타는 차분한 성격이라, 일을 급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어 가족 외의 다른 사람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하지만 가족과, 집안 어르신들 앞에서는 그는 항상 따듯했다. 활발하고 장난도 치며, 농담도 하고, 가끔은 애교도 부렸다.가족과 외부의 구분이 매우 철저한 편이었다.그녀는 그런 두 아들을 바라보자, 순간 앞으로 그들이 그들만의 무대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잠깐 함께 쇼핑하며 학교로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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