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비는 배가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궁인들은 애가 타서 소리를 질렀고, 호비는 아픔이 점점 퍼져 천천히 숨을 토했는데, 눈 앞이 오히려 더 캄캄해 지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편, 건곤전에 있던 어의 두명이 갑자기 채명전으로 갔다. 아무 말 없었지만 원경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약 상자에 옥시토신이 아무 이유 없이 나타난다는 가능성은 없으니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임신한 여자들은 아직 예정일이 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출산한다면 조산이다. 아이가 살지 못할 것이다. 어의가 와서 황귀비에게 보고하니 황귀비도 얼른 일어나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자리를 떴다. 그러자 원경릉이 따라 나와 황귀비에 물었다. “무슨 일이죠?”황귀비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채명전 사람이 와서 그러는데, 열째가 호비 배에 박치기를 해서 복통이 심각하대. 그래서 호비한테 한 번 가 보려고. 넌 나오지 말고 여기서 재상을 돌봐줘. 만약 정말 위험한 상황이면 폐하께서 널 부르실 테니까.”주재상도 수액을 걸어 놓아 금방 약을 바꿔줘야 해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불러 주세요.”“알겠다.” 황귀비가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무거운 몸을 이끌고 채명전으로 갔다.명원제는 어서방에서 회의를 하다가 호비가 배가 아파서 혼절했다는 말에 얼른 채명전으로 왔다. 열째가 호비에게 박치기해서 이렇게 됐다는 말을 들은 명원제는 벽력같이 화를 내며 호비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을 전부 끌어내 곤장을 마구 쳐댔다. 그리고 호비 곁에 앉아 위로하며 손을 잡았다. 잠시 후에 호비가 깨어났으나 고통을 참을 수 없었고 출혈도 심했다. 급히 어의를 불러 진맥하자 어의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명원제에게 어서 쑥을 태워 보태약의 (保胎藥: 유산을 방지하는 약) 양을 늘려야 한다고 전했다. “어서 쑥을 태우거라!” 명원제가 바로 명을 내렸다.명원제의 커다란 손이 식은땀이 흐르는 호비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명원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엔 열째가 장난치다가 호비에게 부딪힌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부러 박치기를 하고 도망갔다는 것을 사실에 화를 참지 못했다. “열째는?!”궁인이 놀라서 덜덜 떨며 울먹였다. “마마를 들이 받고 십황자는 달려나가서 유모가 쫓아갔는데 아직 채명전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당장 데려와!” 명원제가 호통을 쳤다.“예!” 궁인이 재빨리 십황자를 찾으러 사람을 보냈다.한참 뒤에 십황자가 왔는데 잔뜩 억울한 얼굴로 채명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울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십황자가 달려 들어와 명원제 앞에 무릎을 털썩 꿇어 앉더니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명원제는 십황자에게 이미 상당히 실망했기에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너는 어찌 이토록 마구잡이에 비열한 것이냐? 네 어마마마가 아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배를 들이 받다니.. 너는 어마마마가 가엾지도 않느냐?”십황자가 울먹였다. “어마마마께서 절 혼내고 때리셨어요. 아바마마도 절 때리지 않으시는데. 저도 무섭다고요… 그러니까 누가 절 때리래요?”자기 기분이 상한게 더 중요하다는 듯한 십황자의 얘기에 명원제는 등골이 오싹했다.십황자가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것이라고 명원제는 믿었다. 하지만 잘못했다는 소리는 입에 발린 말에 불과했고 조금의 반성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십황자는 자신이 총애 받는다는 것에 기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 못해 어마마마조차 함부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원제는 분노로 가득차 손가락 끝을 덜덜 떨었다. “어마마마가 널 혼낸 건 네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고 혼나야지. 감히 반박을 하느냐! 짐이 너에게는 곤장을 못 때릴 것 같으냐?”명원제가 화가 나서 소리치자, 십황자는 그 자리에 굳어져 우는 것도 멈추고 당황한 눈으로 명원제를 바라봤다. 어쩔 수 없지만 억울하다는 눈빛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명원제는 당연히 그를 용서할 생각이었으나, 이번
호비는 말없이 다시 눈을 감고 황귀비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목여태감이 명원제의 상처를 소독했는데 십황자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문 거라 살갗에 이빨자국이 2개나 났다. 하지만 물린 상처는 명원제의 마음에 난 상처에 비하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명원제는 자신이 그토록 총애하는 아이가 설마 자신을 깨물 거라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원제에게는 자녀가 많다. 과거 우문군이 어렸을 때 명원제는 그를 총애했었다. 하지만 우문군은 명원제에게 말 한마디도 건방지게 하지 못했으며, 명원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쑥을 태우는 냄새가 채명전을 가득 채워 황귀비가 재채기를 하자 호비가 얼른 황귀비를 놔주었다. “마마도 몸이 무거우실텐데 어서 나가세요. 김 쐬시면 안됩니다.”황귀비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난 여기 네 곁에 있을 테니 마음 편히 해도 된단다.”호비가 황귀비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황귀비도 잘 알고 있었다. 호비는 황귀비가 타는 냄새를 들이쉬어 기침하지 않도록 하녀에게 손수건을 가져다가 황귀비한테 주고 했다. 쑥을 태우고 약을 먹자 복통은 여전했지만 호비의 안색은 매우 호전되어 명원제는 그제서야 안심했다. 황귀비가 호비 손을 놓고 명원제에게 함께 있도록 한 뒤 어의와 얘기하러 밖으로 나갔다.“어의는 내게 사실대로 말하거라. 호비의 태아는 어찌되었느냐?” 황귀비가 묻자 어의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황귀비 마마, 호비 마마께서 요 며칠 속이 좋지 않으신 것은 몸이 차기 때문으로 설사를 며칠째 하시다 보니 태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심하게 부딪히셔서 쑥을 태워 통증을 멎게 했으나 많이 위험할 것으로 생각됩니다.”황귀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위험하다니? 네 말은 아이가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냐?”어의가 답했다. “마마,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이 말을 듣자 황가비는 매우 다급해졌다. “하지만 호비가 방금 많이 좋아졌다고 했는데.”어의가 매
어의가 고개를 저었다. “호비 마마께서 일단 얘기하지 말고 소신에게 이렇게 하라고 이르셨습니다.”황귀비는 호비가 왜 태아가 불안한 상태임을 숨기려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호비가 황제에게 알렸다고 해도 태아는 버티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어 황제는 그녀를 더욱 불쌍하게 여기고 사랑했으면 했지, 절대 그 일로 호비를 책망하거나 소홀히 여길 리는 없기 때문이다.“마마, 태자비 마마께 와서 보시라고 할까요?” 어의는 황귀비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건의했다.황귀비는 답하지 않고 천천히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더니 어의에게 물었다. “호비의 아이는 너희 내의원에서 최선을 다하면 1,2할의 자신은 있느냐?”어의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저었다. “소신은 자신이 없습니다!”황귀비는 너무 괴로웠으나 바로 분부를 내려, “폐하 앞에서 태자비를 청해 진찰한다는 말은 꺼내지 말아라. 지금 재상의 상처가 위중하니 태자비는 그쪽을 지켜야 하므로 호비 태중의 아이가 정말 위급한 상황에만 태자비를 청할 수 있네.”어의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물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지금 태자비께서 와서 보시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을지 모릅니다!”황귀비가 냉정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내 말 대로 하거라. 폐하께서 묻지 않는 이상 네 입으로 태자비를 입에 올려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다!”어의는 아직 대답 전이었지만 뒤에서 명원제가 광분한 소리가 들렸다. “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 황귀비처럼 욕심 없고 고요한 사람이 뒤에서 몰래 이토록 치밀하게 용종을 해치려는 음흉한 계책을 꾸미고 있었단 말이냐.”황귀비가 깜짝 놀라 퍼뜩 고개를 돌리자 명원제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복도에 서서 끝없는 실망과 불신의 눈빛으로 황귀비를 쳐다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 황귀비가 흠칫 놀랐다. “폐하!”명원제가 분노해서 황귀비의 손목을 낚아채는데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가 황귀비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호비가 자네를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걸 빌미로, 단순한 호비를 속이려 들
명원제는 황귀비의 난처해 하면서도 격앙된 얼굴을 바라봤다. 황귀비가 언제 지금처럼 미친듯이 예민한 적이 있었던가? 더듬어 보았지만 없었다. 명원제는 당황스러워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요 며칠동안 터진 일로 명원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버림받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잠시 후 명원제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짐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다. 짐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가 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짐을 가장 잘 헤아려야 하거늘.”“그럼 폐하께서도 신첩을 가장 잘 아셨어야 지요.” 황귀비가 살짝 턱을 들고 얼굴에 슬픔과 실망의 빛을 띠며 말을 이어나갔다. “용종을 해치려 했다는 한마디에 신첩은 가슴을 칼로 갈가리 도려내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전에 신첩에게 물으셨죠. 호비를 총애하는 게 신경 쓰이냐고. 아직도 신첩에게 이 말을 물으신다면 신첩은 기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첩이 생각하기로 폐하께서는 후궁의 다른 비빈들이나 막 입궁한 수녀들에게 물어보시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푸대접을 당해서 폐하의 용안 한 번 뵙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신첩은 감히 모험할 수 없으니까요. 고명한 의술을 가진 태자비가 와서 호비 뱃속에 용종을 지키고자 해도, 어의가 조금의 자신도 없다는데 태자비라고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겠습니까?”명원제가 말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호비가 그렇게 당신을 믿는데 당신도 호비 생각을 해야지. 호비가 낙태를 하더라도 어의에게 태자비를 청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 점에서 정말 짐을 실망시켰다.”황귀비는 더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의연하고 냉담한 눈빛이 산산이 부서지며 말했다. “폐하를 실망시켜드려 신첩 송구합니다. 신첩이 폐하께 대들고 폐하께 무례하게 굴어 덕을 잃었으니 후궁을 대표하는 것이나 다스리는 것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첩은 장문전으로 옮겨 이제부터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다. 폐하 용서하지 마세요!”명원제가 다시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이십 여년의 정
명원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정확히 황귀비는 어의가 태자비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저도 어의에게 태자비를 부르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호비가 명원제를 보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한달 전부터 좋지 않았지만 태자비에게 알리지도, 심지어는 입궁해서 진찰해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어요. 알리지 않은 이유를 아시나요?”명원제가 당황하며 물었다. “무엇이냐?”호비가 복통은 억지로 참았지만 두 다리가 떨리는 것은 아무리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듯 미쳐 말했다. “왜냐면, 폐하께서 정사를 팽개치시고 제 곁에 계실 까봐 였습니다. 온 궁에 좋은 약재란 약재는 전부 찾아 저에게 쓰시고, 내의원 사람을 밤새 재우지 않고 제 곁에서 처방을 내리게 할 것이며 처방이 맞지 않으면 바로 죄를 물을 것입니다. 저를 달래 주시려고 전 원하지 않는 보석 장신구를 한 무더기 하사하실 게 틀림없고 저에게 뭐라도 보상해 주시려고 하셨을 겁니다. 마치 열째에게 다섯 도시를 하사하셔서 저를 안심시켜 주시는 것처럼요. 제가 폐하의 마음 속에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실 겁니다. 폐하께서 열째를 지나치게 총애하셔서 열째는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아이로 변했습니다.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전 그저 여기서 조용히 살며 폐하께서 한가하실 때 가끔씩 저와 이런저런 말씀을 나눠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위한다고 하시는 것이 온 황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당신……” 명원제는 완전히 얼이 빠졌고, 호비의 격앙된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명원제가 호비를 위해 한 이런 일들을 뜻밖에도 호비는 한번도 감사히 받은 적이 없었다는 말인가?호비는 마음이 미어졌다. “전 8살때 폐하를 처음 뵙고 줄곧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 시간동안 저는 폐하를 떠나 먼 곳에 있으며 폐하의 업적을 듣고, 백성들이 폐하를 칭송하는 것을 들으며 존경하고 숭배하며 폐하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한 사람은 영명하시고
할머니의 말은 명원제가 편애를 했는지 여부에 대한 변명은 원천봉쇄하고 명원제가 잘못했다는 가정하에 잘못을 분석했다. 명원제가 어렵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옵니다!”할머니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나이만 많이 먹은 것을 핑계삼아 기탄없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무례한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자 전하는 다음 군주시요 폐하의 아들이십니다. 폐하께서 태자에게 고생도 좀 하고 억울한 일도 좀 겪게 하셨으나, 기껏해야 마음이 조금 아플 뿐으로 폐하께 감히 따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모두 폐하께서 임금이자 아버지임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반드시 태자 전하를 위해서 그러신 거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폐하께서 상처를 주신 분은 태상황과 주재상입니다. 두 분은 북당 강산을 위해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신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제일 잘못하신 건 폐하께서 호비 마마와 십황자를 끌어들이신 것으로, 다시 한 번 태상황 폐하 면전에서 폐하의 편애를 인증하셨습니다. 태상황 폐하께서 폐하께 다섯 도시 일을 언급하신 것은 국사를 논하신 것으로, 북당의 이십 년 삼십 년 미래에 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십황자를 섭섭하게 할 수 없다는 데 중점을 두셨죠, 폐하께서 언급하신 건 집안일이었습니다. 신분이 바뀌어서 폐하께서 태상황의 위치에 계시고, 태자 전하가 지금 폐하의 위치에 있을 때 집안일을 위해 국사를 잊는다면 태자가 영 그릇이 덜 됐다고 안타까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폐하는 호비 마마의 황제이실 뿐 아니라 천하 백성의 황제시라는 사실을요.”“계속 말해보게!”그러자 할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폐하께서는 태상황 폐하께서 편애하셔서 태자만 좋아하시고 십황자는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요. 그건 태상황 폐하를 이 집안의 늙은이로 밖에 안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태상황 폐하는 많은 시간을 북당의 태상황의 신분으로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폐하와 국사를 논하실 때 폐하께 한결같이 임금의 아비의
명원제는 핏줄을 타고 불꽃이 손끝과 발끝까지 쫙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명원제의 머릿속에 우문호의 결단력 있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과단성 있는 언행, 지혜로운 판단과 능력있는 사람이 바로 내 아들이다.’“폐하께서 직접 성지를 내려 정하신 태자 전하로, 태상황 폐하께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머니는 이 말을 마치고 일어나 예를 취하고 자리르 떠났다. 명원제는 눈을 감고 요 사흘 간의 일을 떠올리자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억울함, 내키지 않는 마음 그리고 반성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노부인의 말에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말을 한 건 노부인이지만 사실 노부인은 태상황을 대신한 것으로 태상황은 여전히 명원제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명원제의 눈시울이 뿌예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마를 대령해라, 건곤전으로 가겠다!”향이 하나 탈 정도로 짧은 시간이 흐른 뒤 명원제는 건곤전 앞에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 벌을 청하러 왔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았으니 아바마마 노여움을 푸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아바마마, 소신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잠시 후 건곤전에서 태상황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편전에서 과인을 기다리거라!”명원제가 일어나는데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한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성큼성큼 편전으로 가서 밖에서 기다리는데 궁인이 나와 안으로 드시라고 했다. 명원제는 문을 밀고 들어가 바로 태상황에게 달려가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울먹였다.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태상황은 자기 앞에 꿇어앉은 황제를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이 노부인을 보내 명원제에게 그런 얘기를 전하도록 한 것은 만약 명원제가 노부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책망한다면 부자의 관계를 더이상 유지할 필요 없다고 이미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명원제가 깨닫는다면 북당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명원제는 북당의 황제가 아닌가!명원제가 슬픔과 격앙된 감정으로 눈물을 떨구고 있을 때, 태상황이 황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