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전 그냥 지금 분봉하시는 게 조금 이른 게 아닌가 싶었던 거예요 .”태상황이 말했다. “지금 분봉하는 게 좀 이르다고 볼 수 있지만 과인은 단지 쟤들이 나중에 서로 싸울까 봐 그런 게 아니야. 다섯 아이는 분명 앞으로 크게 될 인물들이야. 다섯 도시를 쟤들에게 준 건 북당과 북막이 정전 협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아마 20년 못 가서 북막은 조약을 파기하려 들겠지. 그리고 이 다섯 도시는 우리 북당의 변경에 접해 있으니 우리에겐 가장 좋은 방어선인 셈이야. 쟤들이 다 자란 뒤에 저들의 능력이라면 다섯 도시를 전부 북당화시켜 놓을 뿐 아니라 북막을 방어하는 최고의 방패로 만들 수 있어. 이게 바로 과인이 세운 북당 20년 계획이네. 저 다섯 도시의 백성들은 지금부터 자신들의 왕이 누군지 알아야 해.”주재상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군사를 이끌고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호 대장군에게 명을 내려 준비해 두도록 했습니다. 강북부 수주부 일부 백성을 다섯 도시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해서요. 이주한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과 통혼하고, 내륙 사람들이 계속 그쪽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장려해 다섯 도시에서 우리 북당의 인구를 늘려가는 거죠. 하여 다섯 도시에 북당의 뿌리를 깊이 박아 꽉 쥐고 놓지 않도록.”원경릉은 이 얘기에 조금 감동해 버렸다. 삼대 거두가 이처럼 멀리 내다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20년 후 천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순간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알 수 있어 변수를 최대한 제어할 수 있다.삼대 거두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말에 원경릉도 왈가왈부하기 불편했다. 말이 분봉이지 아이들이 지금 갈 수 없으므로 사람을 보내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이 출궁해 우문호에게 이 일을 얘기했다.그런데 우문호가 벌써 알고 있었을 줄이야. 경축연 당일 태상황이 태자의 의사를 묻길래 괜찮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원경릉이 서운해했다. “미리 알았으면서도 나한테 얘기 안 했던 거네.”“잊어
명원제는 목여태감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문안드릴 때 짐이 말씀드리도록 하지!”목여태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명하십니다. 폐하!”명원제는 목여태감에게 준비시켜 호비 궁으로 향했다.호비는 며칠 계속 속이 좋지 못했다. 음식은 이미 상당히 조심했음에도 소화가 안 된 게 하루 이틀 만에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명원제는 최대한 직접 와서 호비가 수라를 드는 것을 지켜봤다.열째는 아바마마 곁에 착 붙어있는 걸 좋아해서 아바마마께서 오시면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명원제는 다른 자녀들은 전부 장성했지만 이렇게 찰싹 붙어있는 어린 자식이 있어 기쁘기가 한량없었다. 명원제도 열째에 대한 총애가 가끔 도에 지나친다는 걸 알지만 아비 된 자로 자기 아들을 총애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나?“최근 뭘 먹었지? 이렇게 살찌면 곧 둘째 형 따라잡겠는데!” 명원제가 웃으며 십황자의 엉덩이를 툭 쳤다. 탱글탱글 한 게 아주 손맛이 있었다.십황자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소자 둘째 형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둘째 형은 돼지 같아서 보기 싫어요.”호비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입 다물어. 누가 너더러 그렇게 둘째 형에 대해 함부로 말해도 된다고 했어?”십황자는 호비의 꾸지람에 아무 말도 못 했다.명원제는 아들이 안되서 품에 안고 호비에게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말할 것까지 있나? 애가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호비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폐하, 애들 말은 악의가 없지만 옳고 그름은 가릴 줄 알아야 지요. 열째가 방금 한 말은 둘째 형을 존중하지 않는 거였어요. 왕야가 들었으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어요?”명원제는 아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에 호비가 아들을 너무 엄격하게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거 아닌 일로 애를 몰아붙여서 생각을 펼치도록 북돋아 주지 않았다. “둘째는 열째한테 따질 리 없을뿐더러 둘째가 돼지처럼 살이 찐 것도 사실이잖아. 절제를 못해 그런 것을 옆에 사람이 말도 못
호비가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들었다. “폐하, 그건 마땅하지 않을까 걱정돼옵니다."명원제가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 “뭐가 걱정이야? 짐이 이미 결정을 내렸는데. 내일 일찍 태상황 폐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하오나,” 호비는 이 일이 아무래도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아 말을 이었다. “친왕 전하들도 분봉이 있으나 봉지가 크지 않고 공을 세웠기에 분봉을 받았습니다. 열째는 전장에 나간 적이 없어 아직 나라에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단번에 다섯 도시나 주시면 폐하께서 편애하신다는 뒷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명원제는 호비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흥을 다 깨 버릴 줄 생각도 못 했다. 자기도 모르게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감히 뒷말해? 이 다섯 도시는 황량한 사막으로 척박한 땅이거늘 분봉을 해도 매년 들어오는 은자가 얼마나 되겠어? 짐이 정말 열째를 편애하려 들면 다른 곳을 분봉하지 하필 새가 알도 안 낳을 거 같은 땅을 줄까?”호비는 명원제가 화가 난 것을 보고, 자기와 열째를 위해 기껏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인데 언짢게 할 필요가 뭐 있나 싶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정말 그리하신다면 신첩 열째를 대신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호비가 이렇게 말하며 감사의 예를 취하고 절을 올렸다!명원제가 손을 뻗어 호비의 손목을 잡고 일으킨 뒤 오동통한 뺨을 바라보며 정색하고 말했다. “짐이 열째를 다소 편애하는 건 인정해. 그건 열째가 당신 소생이기 때문이야. 짐은 열째에게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지만 태자의 지위는 이미 정해져서 짐은 열째를 위해 국본을 흔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다섯째는 아주 짐의 마음에 들어. 태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야. 그래서 짐은 열째에게 다른 것으로라도 보상해 주고 싶어. 평생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앞으로 태자와 관계가 껄끄러워져도 적어도 열째가 갈 곳이 있는 거야. 그리고 그곳은 태자도 손을 뻗기 쉬운 곳이 아니지.”호비는 알았다고 했고 이렇게 많은 건 모르지만, 그 도시가 명원제의 말처럼
호비는 가슴이 철렁해서 물었다. “왜 전에는 다섯째 형이 좋았는데 지금은 안 좋아? 다섯째 형이 너한테 잘 안 해줘?”십황자가 서러워서 울며 말했다. “다섯째 형은 앞으로 황제가 될 거기 때문이에요. 황제가 되면 형제를 싫어하게 된 대요. 왜냐면 형제는 다섯째 형이랑 황위를 다투니까요. 하지만 저도 다섯째 형이 두렵지 않아요. 전 아바마마께서 제일 총애하는 아들이니까, 다섯째 형이 절 못살게 굴면 아바마마께서 저 대신 화내셔서 다섯째 형에게 곤장을 때릴 거예요. 다섯째 형은 아바마마께 곤장을 맞을 거예요.”호비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며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십황자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말했다. “모두 그렇게 말했어요.”호비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모두라면 누구일까?”“밖에 있는 백성들이요.”호비는 크게 노하고 말았다. 십황자가 바깥의 백성을 언제 한 번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다고? 심지어 백성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호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고 계속 십황자를 얼렀다. “자, 어마마마께 알려 주렴. 바깥에 백성들이 전부 이렇게 말한다고 누가 얘기해 줬니?”“옥 상궁이 그랬어요. 옥 상궁이 화본에 전부 그렇게 쓰여 있다고. 제가 저 자신과 어마마마를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바마마께 잘해야 한다고. 아바마마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했어요.” 십황자가 말했다.호비는 아연실색해서 반듯하게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알았다, 가서 놀아.”십황자는 어마마마가 화내지 않자 기쁜 얼굴로 말했다. “네, 소자는 가보겠습니다.”십황자가 나간 뒤 호비가 밖에 분부했다. “옥 상궁은 들라 하라!”“예!” 하인이 대답했다.호비는 가슴 속에 분노가 끓어올라 꺼질 줄을 몰랐다. ‘옥 상궁은 할머니가 안배해서 궁으로 들여보낸 사람으로 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옥 상궁이었는데, 어떻게 옥 상궁이 십황자 앞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일 수가 있어?’잠시 후 옥 상궁이 들어와 예를
호비가 이 말을 듣고 옥 상궁의 얼굴에 따귀를 때리고 봉황 같은 눈매가 분노로 이글거리며 말했다.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그런 대역무도한 역심을 품다니, 결단코 너를 곁에 둬서는 안 되겠다. 당장 짐 싸서 궁에서 나가.”옥 상궁은 호비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순간 어리둥절했다가 억울한 심경으로 마지못해 말했다. “마마께서 오늘 쇤네를 오해하셨습니다. 내일 쇤네의 말이 참말이었음을 분명 아시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다섯 개 도시를 황자께 하사하신 것이야말로 최고의 증거로 마마께서는 이 좋은 기회를 꽉 잡으셔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폐하게 하시고 마마께서 등극하시……”호비는 옥 상궁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분기가 탱천해서 다시 옥 상궁의 얼굴에 따귀를 날리며 분노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대역무도한 주둥이 다물지 못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아주. 널 궁에 남겨두면 반드시 큰 우환이 될 것이니 조금도 지체할 수 없구나. 네가 안 가면 사람을 시켜 경성에서 쫓아낼 것이니 이생에 다시는 경성에 발붙일 생각은 하지도 마!”호비는 바로 명을 내렸다. “이리 오너라!”밖에서 두 명의 수행 태감과 궁녀가 들어와 예를 취하고 말했다. “마마 분부하십시오!”호비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시위는 옥 상궁이 짐을 꾸리는 것을 지켜보고 다시는 십황자를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짐을 꾸린 뒤 바로 경성에서 내보내도록. 지체해서는 아니 된다!”태감과 궁녀 모두 당황했다. “마마?”“어서 가서 하지 못해. 지체하지 말라고 했다!” 호비가 손을 내젓고, 옥 상궁이 멍하니 한쪽에 서있는 것을 노려봤다. 꼴도 보기 싫어 옥 상궁을 한시도 곁에 둬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이런 집념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예!” 궁인이 호비가 화난 것을 보고 더는 사정하지 못하고 얼른 나가서 시위를 불렀다.옥 상궁이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이렇게 하시는 건 십황자 전하를 해
황귀비가 이렇게 말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른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 옥 상궁은?”호비가 말했다. “어떻게 그냥 두겠습니까? 지난밤에 바로 경성에서 쫓아냈지요.”“그럼, 옥 상궁이 다른 누구와 많이 왕래했는지 물어봤어? 이런 말을 누가 옥 상궁에게 한 건 아니었을까? 옥 상궁이란 사람이 내 기억으론 자네 조모가 붙여서 들여보낸 사람인데, 자네 조모는 세상 이치에 훤한 분이시라 그분이 가르친 사람이 그럴 리 없어.”호비는 당황스러웠다. “물어본 적 없어요. 신첩은 옥 상궁 본인이 망령되게 생각했다고 믿어서 옥 상궁을 쫓아버렸네요.”호비는 배를 부여잡고 은근히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물었다. “마마 생각에 뭔가 미심쩍으십니까?”“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어. 지금 조정과 후궁이 다 안정된 것처럼 보이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거든. 누가 알아? 자네는 돌아가서 조신하게 있도록 해. 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전부 내보내고 한시도 곁에 둬서는 안 돼.” 황귀비가 타일렀다.“예, 알겠습니다. 신첩 지금 가서 바로 하겠습니다!” 호비는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배가 더욱 아파와서 배를 누르며 시녀에게 와서 부축하도록 했다.황귀비가 상황을 보고 물었다. “왜 그래? 불편해?”“복통이에요. 전에 약간 아파서 어의를 불렀는데 체했다고, 신첩이 식탐을 부렸다고 했어요.” 호비가 풀이 죽어 말했다.황귀비가 기가 차서 말했다. “입단속을 잘해야지. 찬 음식은 많이 먹지 말고, 지금 배가 아프니 급히 돌아가지 말고 일단 쉬었다가 가. 내가 어의에게 와서 자네 진맥해 주라고 할 테니.”호비는 심하게 통증이 느껴져서 경솔하게 간단하게 말을 끝마쳤다. “그럴까 봐요. 마마께 수고를 끼쳐 죄송해요!”한편 명원제는 오늘 일찍 태상황에게 문안하러 갔다.어제 정해진 일에 대해 확실히 태상황에게 한마디 보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문안하고 부자가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주재상과 소요공도 아직 건곤전에 같이 있어 다 같
태상황이 명원제의 말을 다 듣고 차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천천히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감도는 연기 틈으로 명원제를 보며 말했다. “황제가 이렇게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어 과인은 위로가 되고 또 황제의 생각이 맞아. 단지 두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황제가 그렇다니 더는 묻지 않겠네.”명원제가 말했다. “물어보세요!”명원제는 이것도 상당히 멀리 내다본 생각이라 여기고 태상황이 분명 동의할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건 고려해 보지도 않았다.태상황이 물었다. “십황자의 나이가 다섯째와 스무 살 정도 나서 형제의 감정이 깊지 않다고 했는데, 일단 황제의 말이 맞는다고 쳐도 황귀비도 아이를 뱄으니 만약 십일황자를 낳으면 그때는 또 어떤 준비할 거지? 호비의 복중에도 용종이 있는데 황자라고 한다면 그건 또 어떻게 대비할 건가?”“그건……” 명원제는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어 대답했다. “다섯째가 지금 황귀비 슬하로 적을 옮겼으니 황귀비가 황자를 낳으면 다섯째와 자연스럽게 가까울 것이고, 황자가 자라면 다섯째 형을 도와 정무를 볼 거라 그건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죠. 호비 복중의 아이는……짐도 당장 계획은 없지만 태어난 아이가 황자면 앞으로 다른 곳을 분봉하죠.”“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황귀비 마음에 황제가 편애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야 할 텐데!” 태상황의 이 말은 사실 기분이 나쁘다는 걸 내포하고 있었지만 명원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명원제가 덧붙여 말했다. “황귀비는 천성이 현숙한 여자로 품행이 고결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좋아, 첫 번째 문제는 이렇게 해결하면 아무 문제도 없구나. 태상황이 소요공에게 담뱃대에 담뱃잎을 채워 넣게 하고 계속 물었다. “두번 째 문제는 호후의 재능으로 그 다섯 도시 치리를 담당하는 게 가장 최적이야. 호후를 택한 점은 찬성하는 바야. 호후가 좀 시건방지고 전에는 무공이 뛰어나다고 설쳤지만 한번 경각심을 심어준 뒤로 조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신하
진북후는 나라에 공을 세워 북방 영토를 정돈했지만, 그 정도 꼬물거림으로 대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삼대 거두와 아예 비교되지 않았다. 이번 전장의 상황은 생사가 몇 번이나 오가며 전투마다 치열하기에 그지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명원제는 반쯤 농담, 반쯤 진심으로 말했다. “그럼, 어르신은 가실 의향이 있으신지요?”소요공이 흠칫 놀라 물었다. “폐하 진심이십니까?”명원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르신께서 가신다고 하시면 짐은 가능하다고 봅니다!”소요공은 웃으며 침묵하더니 같이 침묵을 고수하는 주재상을 힐끔 봤다.태상황이 웃음을 흘리며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소요공이 원하고 말고가 어딨어. 성지가 내리면 가는 거지. 가봐, 가서 짐 싸. 어차피 과인은 평생 고독하게 지내는 게 익숙하니까 어릴 때 친구가 곁에 있는 거 안 어울려. 황제의 막내를 위해 애쓰는 편이 중요하지. 평생 고생만 해왔는데 마지막 몇 년 더 고생하는 게 뭐라고. 북당을 위해 온몸 바치고 죽으면 그만이야. 말년치고는 충실한 셈 아닌가!”이 말에 명원제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얼른 사죄했다. “아바마마 오해하지 마세요. 짐은 그저 농담이었습니다. 어르신을 어찌 고향 땅을 등지고 그런 변방의 척박한 땅으로 가시라 하겠습니까? 짐도 모진 인간이 아닙니다. 어르신은 아바마마 곁에서 만년을 보내셔야지요!”태상황이 웃으며 담뱃대에 연이어 불을 붙이더니 이번엔 좀 오래 빨며 말했다. “황제가 농담하는지 과인도 알지. 소요공이 저 나이인데 변방 도시를 안정화시키러 보내는 건 각박하고 박정한 짓이지 암.”명원제는 태상황이 화가 난 걸 알았다. 웃고 있지만 미소가 냉담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잠시 소요공 얘기는 그만두고 말을 돌렸다. “아바마마께서는 다섯 도시를 하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짐이 이미 성지를 내려 호비도 감사 인사를 올렸사옵니다!”태상황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과인이 황제와 일일이 까발려서 분석해 보도록 하세.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