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왕 도둑 사건이때 미색이 입구에서, “사식아, 만아야, 너희들 이리 좀 와봐.”두 사람이 대답하고 정집사와 스쳐 밖으로 나갔다.정집사가 멈칫하고 뒤를 돌아 만아와 사식이의 뒷모습을 암담하게 쳐다봤다.정집사는 핑계를 대고 기라에게, “아가씨, 방금 그 두 아이는 어느 집 사람입니까?”“만아와 사식 아가씨 말씀인가요?” 기라가 허리를 펴고 물었다.“예, 만아……” 입으로 이름을 중얼거리는 눈빛이 슬프다.“만아는 남강 노비로 비천해서 이집 저 집에서 막일 해요, 아무도 다룰 수가 없거든요.” 기라가 비웃으며, “하지만 만아는 분명히 막일 말고는 아무것도 못해요, 늘 주인을 화나게 해서 걸핏하면 두들겨 맞죠.”“맞아요?” 정집사 얼굴 근육이 팽팽해졌다.“안 그러겠어요?” 기라가 사방을 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미소 띤 얼굴에 악의가 가득한 채로, “만아는요, 이름처럼 미련해서 맞아도 잘 참으니까 주인들이 기분이 나쁠 때 만아에게 화풀이를 하고 툭하면 때리는데, 그리고나서 상으로 고기를 먹여주면 좋다고 씰룩거려요. 어쨌든 만아한테 고기만 먹여주면 아무 때나 만아의 이목을 속일 수 있어요.”정집사는 눈이 커지며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더니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으나 눈에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그렇군요, 남강 노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죠.”정집사가 뒤를 도는데 살짝 떨고 있는 것이 보이고 어깨에 애써서 힘을 주고 있었다.이때 한 무더기 축하 선물 속에서 내탕고 인감이 찍힌 황금 2천냥 찾아냈고, 팔황자의 물건도 있었는데 순왕부가 기록한 선물 목록을 찾아보니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없다. 각 궁과 각 부에서 보낸 물건은 전부 기록해 두었는데 유독 그것만 기록이 없다.황후가 보낸 사람은 바로 궁으로 보고하려고 하는데 황귀비 사람이 이 일을 원경릉에게 보고 하자 원경릉이, “순왕부에는 보내온 곳에서 직접 보내준 선물 목록이 있을 테니, 다시 각 궁과 각 부에서 선물을 보낼 때 첨부하여 보낸 증정
누명을 벗기다“찾았네.” 원경릉이 선물 목록을 한 장 펼치며 사람들 앞에 내놓고, “흠, 황후 마마 궁에서 보내온 것인데 황금 2천냥, 전체 목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팔황자의 선물 목록에는 써 있군. 봐라, 선물 목록 위에 황후 마마의 인감이 있구나.”오상궁이 깜짝 놀라 달려와 자세히 보는데 그 선물 목록에 진짜 황금 2천냥이라고 써 있고 또 팔황자가 보낸 장난감 선물마다 명세서가 전부 붙어있고 바닥에는 황후의 인장이 찍혀 있다.내탕고에서 잃어버린 황금 3천냥을 여덟째 전하 쪽에서 천냥을 찾았고, 여기서 2천냥을 찾았으니 금액도 딱 맞아 떨어진다.오상궁이 하얗게 질려서 어떻게 이런 일이?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게 명확해졌구나. 내가 순왕 전하를 대신해 황후 마마의 크신 사랑에 감사드리네. 순왕 전하께서 출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모로 지출이 많은데 은자가 부족하지 않도록 챙기시는 마마의 인자함에 감동하고 말았네.”목록과 인장이 증거로 나오니 오상궁은 할 말을 잃고 변명도 하지 못했다.황귀비 사람이 목록을 받아들고 예를 취하며, “그럼 쇤네들은 이미 물러갑니다.”“천천히 가시게!” 원경릉이 미소를 머금고 전송한 뒤 눈을 치켜 뜨고 오상궁에게, “상궁은 아직 가지 않았느냐?”오상궁이 감히 다시 거들먹거리지 못하고 복잡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더니 예를 취하고 갔다.원경릉이 표정을 가다듬고 궁중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봤다.미색이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뭐 하는 짓이야? 아주 질리지도 않는구나.”“그만해, 못살게 굴지 마. 황후 마마도 얼마 못 가셔.” 원경릉이 담담하게 말했다.“히히, 이제 황금 3천냥의 소재가 황후한테로 넘어갔네.” 미색이 말했다.원경릉이 나가서 가을 태양 아래 서 있는 우문천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그건 저희가 걱정할 일 아니죠, 마마는 어쨌든 무료하고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전하께 재미를 찾으려는 걸지도요.”우문천이 예를 취하며, “두분 형수님께서 제 결백을 밝혀 주시니 감사합니다.”원경
만아를 챙기는 정집사만아는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좀 우울했다. 오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자기한테 안 좋게 대하고 사식 아가씨와 녹주는 자기를 무시하고 험하게 말하기까지 했다.이제 다들 밥을 먹으러 갔는데 자기만 혼자 여기 남겨졌다. 일을 더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혼자 남겨진 것에 상처받았다.정집사가 만아를 보고 특별한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가는데 원경릉이 문간에서 부르며, “정집사? 이리 좀 와봐요, 설명할 게 있으니까.”정집사는 살짝 주먹을 쥐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원경릉에게 한결같은 순종의 눈빛으로, “태자비 마마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이리 와봐요, 설명할 게 있어요.” 정집사가 참고 원경릉에게 갔으나 막상 가보니 원경릉이 분부한 건 전부 자질구레한 것들로 자신이 아니어도 아무 하인이 해도 될 일이다.왔다 갔다 심부름을 시키는 통에 점심시간이 지나고 정집사가 부랴부랴 주방에 갔을 때 남은 게 있어서 일일이 찬합에 싸서 들고 창고로 갔다.창고에는 만아 외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새집을 구경하고 주인과 계집종이 한데 뭉쳐 웃고 떠들고 있었다.정집사가 몰래 창고에 들어가니 만아가 여전히 물건을 정리하고 있고 누가 들어오자 만아가 고개를 들고 정집사에게 배시시 웃었다.정집사가, “자네가 만아인가?”“예, 정집사님, 제가 만아입니다!” 만아가 허리를 펴고 등을 쭉 뻗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만아는 챙피해서 고개를 숙였다.정집사가 한숨을 쉬더니 찬합을 탁자에 내려놓고, “음식이 조금 있으니 와서 먹어요.”만아가 얼른 손을 젓고, “안돼요, 제가 집사님 걸 먹으면 집사님은 뭐 드시게요? 전 배 안 고파요, 먼저 드세요.”“와서 먹어요!” 정집사가 복잡한 눈빛으로, “저 혼자 다 못 먹으니 낭비하지 않게.”만아가 배를 만지며 목을 길게 빼고 힐끔 보더니 음식 냄새만 맡고도 침이 꿀꺽 넘어가서 정집사가 나눠 주기를 기다렸다.정집사가 음식을 전부 꺼내고, “어서 먹어
구박받는 만아만아가, “계속은 아니고, 원래는 다른 주인을 섬겼죠.”만아가 천진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초왕부는 좋아요, 태자비 마마도 저에게 잘해 주시고, 사식 아가씨들도 전부 저를 좋아해요.”“사식 아가씨라면 오늘 당신을 혼내던 그 여자분?” 정집사 얼굴이 어두워졌다.만아가 변명하며, “사식 아가씨가 평소엔 이렇지 않은데 오늘…… 아마 기분이 안 좋은 가봐요.”“기분이 안 좋다고 함부로 당신에게 화풀이를 해도 되나요?” 정집사가 냉랭하게, “전부 뭐하는 분들입니까? 나중에 제대로 말씀을 드려야 겠어요.”만아가 기분이 상해서, “사식 아가씨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좋은 사람이예요, 평소 좋은 건 다 저한테 먹으라고 줘요.”정집사가 만아를 보고, “그래요 당신을 때리고 나중에 먹을 걸 주죠. 아닌가요?”“그건 때린 거 아니예요, 우린 무예를 연마하는 것으로 제 무공이 사식 아가씨만큼 안돼서 지는 거지만 이길 때마다 저에게 맛있는 걸 먹여주세요. 선물도 주시고.” 만아가 손을 뻗어 머리에서 비녀를 빼더니, “봐요, 이 비녀는 사식 아가씨가 저에게 준 거예요.”정집사가 만아 머리에 있던 구름무늬 비녀를 보고 품질은 좋지만 귀한 집안 아가씨 입장에선 이건 노리개수준이다. 마음대로 노비에게 상으로 줘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들 눈에 만아는 아무 때나 화풀이 해도 되는 노비에 불과한 것이다.정집사의 눈에 깊은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순왕부로 와요, 여기는 매일 배불리 먹고 당신을 서럽게 하는 사람도 없고 당신한테 화풀이 하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때리는 사람은 더더군다나 없어요.”“호의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정말 못 가요.” 만아가 이 사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밥 가져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일하러 가볼 게요. 얼른 끝내야 얼른 돌아가죠.”정집사가 만아의 세게 만아의 팔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반드시 순왕부로 와야 해요!”만아가 너무 놀라, “집사님……”원경릉이 문밖에서
정집사의 변명원경릉이 앉더니 뒤로 기대 편안한 자세로, “진상을 알고 싶어요, 당신과 만아 관계를.”“태자비 마마, 공연한 걱정을 하시는 군요.” 정집사도 변함없는 미소를 짓지만 눈은 더욱 차가워져서, “쇤네 원래 저 아이를 모릅니다. 그저 오늘 다들 밥을 먹으러 가는데 혼자만 못 가니 일인분을 가져다 줬을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좋아요, 오늘 당신은 자비로운 마음이 일어서 계집종 하나가 괴롭힘을 당하고 배를 곯는 걸 못 참았군요. 그럼 원래는 출궁하고 싶지 않았는데 왜 남강왕의 딸이 경성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죠? 출궁은 당신에게 굉장히 위험한 일로, 심지어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위험도 개의치 않고 황귀비 앞에 애원하기까지 했어요. 단순히 나귀빈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서? 하지만 알아보니 당신과 나귀빈 사이에 그렇게 깊은 주종 간의 정이 없었죠. 그 증거로 나귀빈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심복들처럼 연좌제로 벌을 받지 않고 당신은 살려뒀으니까요.”정집사가 웃으며, “태자비 마마 상상력이 굉장하군요, 남강왕의 딸이 뭐요? 쇤네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은 더욱 없습니다.”“남강사람이 남강왕에 관심이 없다고요?” 정집사가 차갑게 고개를 흔들며, “쇤네 비록 남강사람이나 태자비 마마는 분명 알고 계시겠지만 남강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쇤네는 북쪽사람으로 남강왕 어쩌고에 관심을 가질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태자비 마마 생각이 지나치시다는 겁니다. 마마께서 도대체 뭘 하시고 싶은 지 쇤네는 모르겠으나 이번 일은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한 남강 노비에게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못 됩니다.”원경릉이 당황해서, “남강 북쪽 사람이라고?” 원경릉은 정집사가 어쩌면 남강왕부 사람이나 남강왕의 후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남강 북쪽 사람이라니. 이건 성립하지 않는다.“쇤네 하늘에 맹세코 남강 북쪽 사람입니다. 그것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죽을 것입니다.” 원경릉은 살짝 의혹이 빛이 스치기는 했으나 정집
비밀 폭로원경릉은 정집사가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재주가 있다는 걸 알고 순왕부에 온 목적을 더 물어봤자 억지로 강압하는 꼴이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걸 느꼈다.정집사를 보면 외형적으로는 만아와 조금도 비슷한 구석이 없지만 얘기를 하면서 눈빛을 보니 일종의 낯익은 기분이 들고 뭔가 비슷한 것이 외부적인 게 아니라 기질이 닮았 달까 뼈 속 깊이 분위기가 닮았다. 그 생각이 또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원경릉은 배를 쓰다듬고 손가락으로 자수를 만지작거리며, 좌우간 오늘 다 질러보고 더이상 짐작하지 않기로 하고, “당신은 목청청이야, 강북에서 실종된 그 무녀.”정집사는 넓은 소맷자락을 잡고 천천히 두 손을 움츠리며 눈동자도 굴리지 않고 원경릉을 바라보며 약간 우습다는 듯, “태자비 마마 정말 넘겨 짚기도 잘 하십니다.”원경릉은 정집사의 미세한 표정과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계속, “목청청이 실종되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녀가 남강왕의 측실로 시집을 가서 딸까지 낳을 거라고 말이죠.”정집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더욱 과장되게 나타나며 결국 얼굴 근육을 살짝 떠는데, “남강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남강 북쪽 남자 무당 일문과 남강왕의 세력은 물과 불이라 암암리에 오랜 시간 싸워왔다는 걸요. 무녀는 천지신명이 뽑은 지도자로 어찌 하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죽어 마땅한 죄예요!”원경릉의 예상이 맞았다!정집사의 표정을 보며 확신에 차서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목청청, 측실, 정집사, 만아의 엄마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이것으로 당시 그녀가 남강왕을 떠난 이유를 해석하면 목청청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남강왕과 혼인했으나 누군가에게 들키고 말았다. 만아가 ‘누가 자기를 귀찮게 하니 잠시 피해 있겠다’고 어마가 말했다는 건 목청청이 남강 북쪽의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그리고 잠시 몸을 피할 요량으로 목청청이 남강왕 곁을 떠났으나, 나중에 남강왕 집안이 멸문을 당하고 목청청은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게다가 남강 북쪽 사람도 목청청을 가만 놔두지
딸의 이름은이런 결과는 원경릉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목청청이 남강왕의 측실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고 만아의 어머니라니, 이건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가. 목청청에게 그 순간 아마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남강 북쪽 남자 무당과 무녀에 대한 요구는 상당히 엄격해서,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이 명확한 살벌한 계율이 있다. 계율에 따라 신분이 정해진 그날부터 남강 남쪽 사람과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당시 통치자였던 남강의 왕은 말할 것도 없다. 무녀는 겉보기엔 존귀한 지위지만 사실 마음먹은 대로 살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청청이 도망쳤을 리도 없고, 고지도 경성으로 왔을 리 없다. 단지 고지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지 않은 게 계속 남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아마 고지가 경성에 온 건 안왕에게 이용당한 것으로 사실은 홍엽의 계획이었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홍엽 이 자는 정말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우문호에게 소식을 알리자 우문호가 깜짝 놀라며, “목청청도 진짜 대단한 용기를 지녔네. 일단 발각되는 날엔 남강으로 끌려가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은 날을 보낼 텐데.”“왜?” 원경릉은 비록 엄한 벌이 있을 것임은 알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니, 과장이 좀 심했다.우문호가, “남강 북쪽에 가혹한 형벌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녀가 배신하면 18종류의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에 피부를 벗겨 죽인데.”원경릉이 화들짝 놀라서, “세상에, 피부를 벗긴다고? 너무 공포스러운 거 아냐?”“어쨌든 남강 북쪽은 배신자에 대한 처벌이 잔혹해. 이렇게 고압적인 강제 수단은 사람들 마음을 한 곳에 모으게 하지. 솔직히 변절의 대가가 너무 커서 감당 불가능하니까.”“그래서 목청청이 그동안 계속 궁중에 숨어 있었던 거구나, 허드레 일을 하는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말이야.”우문호는 원경릉을 부축해 반쯤 뉘어 주더니, “좋았어, 지금부터 모든 일은 나한테 넘겨, 당신은 더이상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 할 일은 잘 쉬고, 배속에 아이 키워서 통통한
서일의 관직“그럼 자기를 우문호라고 하지 말고 복덩이라고 해, 앞으로 자기를 복덩이라고 부를 게.” 원경릉이 우문호를 째려보더니, “복덩이, 복덩이, 복덩이야!”우문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흔들며, “됐어, 알았다고, 복덩이라고 안 부를 게. 하지만 내 머리속에서는 다른 이름 안 생각나니까 당신이 생각해 보는 게 어때?”“열심히 생각할 게, 하지만 지난번처럼 실수하면 곤란해.” 원경릉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땐, 서일이 날로 먹어버렸지.” 우문호가 생각하니 또 화가 났다.서일 얘기를 하자, “서일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슬슬 혼담이 오가야 하는 거 아닌가?”“서일한테 아내는 언감생심, 너무 멍청해.” 우문호는 서일이 아내들 둘 자격이 없다는 듯 말하는데 이 남자 진짜 뭘 모른다.“서일 집에서는 얘기 나오는 거 없어?”“생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지금 집에 계신 건 새엄마인데 서일까지 신경 쓸 수 있겠어? 서일도 집에 자주 안 가, 당신도 봤잖아. 명절에도 초왕부에서 지내는 게 집이랑 가깝게 안 지내는 거 알겠지?”원경릉이 의외인 것이, “서일이 집 얘기를 할 때 집안 사람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 했어, 그리고 어머니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생모라고 생각했지.”“서일 본인은 잘 어울리고 싶어 하지, 줄곧 비위를 맞추면서. 하지만 그 사람들은 서일을 별로 존중해주지 않는 모양이야.” 우문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원경릉은 서일 집안 상황을 잘 모르고 그저 아버지가 관원이시라 집안사람을 얘기할 때 자랑스러워 하길래 집안을 중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잘 안가는 건 좀 앞 뒤가 안 맞긴 하다.“서일이 자기 하인인데 설마 집에서 무시당해?” 원경릉 생각에 태자 곁에서 심부름을 할 정도면 남보다 뛰어나다는 소리 아닌가.“서일은 관직이 없으니까. 그 집 사람들은 서일이 초왕부 하인인 줄 알 걸?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잘 몰라. 어쨌든 서일은 종일 히히거리며 바보같이 굴다가 한달에 한 번 집에 가도 은자를 주고 밥 한끼 먹고 돌아온다니까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