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가 알다태후는 눈가에 맥이 펄떡펄떡 뛰며 순간순간 눈앞이 아득해 지는데 간신히 떨리는 손으로 원경릉을 가리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너……당장 말해. 큰애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재산을 몰수 당하고 참수를 당한다는 말이냐? 내정 간섭이 어쩌고 하지 말고, 다섯째가 널 싸고도니 네가 물어보면 반드시 알려줬겠지. 감출 생각하지 말고 당장 말해!”원경릉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일은 자신의 입으로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입으로 뱉으면 본인이 뭐든지 안다는 말이 되고 그 때문에 우문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또 이 일을 태후가 있는 여기서 어떻게 정확히 말할 수 있을까?태후는 원경릉이 말하지 않자 진비에게 화를 내며, “넌 왜 울고 있어?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냐?”진비는 무릎걸음으로 태후 앞으로 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신첩도 무슨 일인지 잘 모르지만 기왕부가 재산 몰수를 당하고 기왕도 옥에 갇혔는데, 태자가 큰애에게 모반죄를 내려 일가를 참수한다고 했습니다!”“일가를 참수한다고?” 태후가 이 말을 듣고 부들부들 떨더니, “세상에, 맙소사,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돼. 누명일 게 분명해. 왕년에 휘종(暉宗)께서도 큰 실수를 범해 유친왕(裕親王) 일가를 멸문했어. 만약 12황자를 안고 나오지 않았으면 유친왕의 핏줄은 대가 끊어졌을 것이네. 다시는 이런 큰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돼. 이리 오너라, 가마를 대령해라 황제를 만나야 겠다.”명원제는 태후가 알면 이 일에 관여 할 것을 두려워 했는데, 멀리 태후가 성난 얼굴로 급히 오는 모습을 보니 명원제도 더이상은 감출 수가 없게 되었음을 직감했다.진비와 원경릉도 같이 오는데, 두 사람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지며 원경릉을 노려봤다.원경릉은 아무 잘못도 없지만 아바마마께서 자기에게 밖에 화풀이 할 데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넌 나가 있어!” 명원제가 담담하게 원경릉에게 말했다.원경릉도 이 자리에 남아서 시비에 얽힐 까봐 걱정이었는데 명원제의 말을 듣고 얼른 예를 취하고 나와서 감
보친왕과 진비“그 집? 12황자를 빼고 온 집안이 천상에 올랐지!” 태상황이 눈을 감고 말했다.황실의 참사였다고 해도 그때 태상황도 나이가 어렸고 유친왕이라는 황숙에 대해 별반 감정이 없는데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전부 아득한 옛일로 당연히 무슨 슬픔 같은 건 없었다.“그럼 그 12황자는요? 아직 안녕하신가요?” 태상황이 눈을 뜨고 원경릉을 흘겨 보며, “잘 있지!”“오, 그거 다행이네요.” 상선이 옆에서 웃으며, “태자비 마마, 그 12왕야님을 마마께서도 몇 번 보셨습니다.”원경릉이 놀라서, “제가 몇 번 뵈었다고요? 십……친왕으로 봉해지셨어요?”재산몰수와 멸문을 당한 남은 고아는 결국 친왕으로 봉해졌다. 태후가 말한 대로 정말 누명이었던 것이다.“그럼요, 바로 보친왕이십니다.”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이 상당히 의외라, “정말 그분 이세요?”보친왕, 지금 우문씨 집안의 가장 어른으로 지난번 족보를 고칠 때도 보친왕이 했으며 황실의 집례 친왕이다.원경릉은 깊이 생각했다.“뭘 생각해?” 태상황이 행동을 멈추고 원경릉을 보더니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원경릉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뇨, 그냥 좀 의외여서, 어르신을 뵙고……” 어르신이란 호칭이 사실 그다지 맞지 않는 게 이 보친왕은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태상황보다 10살에서 8살은 적고 관리를 잘 해서인지 아바마마와 형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활달하시고 지혜로우셔서 그렇게 큰 일을 겪으셨는지 몰랐어요.”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이 일이 있었을 때 보친왕은 강보에 쌓인 어린 애였고, 나중에 일문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지만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나?”“그렇네요!” 원경릉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서방에서는 명원제가 어떻게 태후를 설득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경릉이 용화전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 태후는 눈물은 흘리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원경릉이 아이들이 데리고 용화전을 떠날 때 진비가 막아 섰다.진비는 줄곧 원경릉과 개인
병여도를 봤다고?진비의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에 원경릉의 마음도 영 석연치가 않았다.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범인이 스스로 나타나 병여도는 자기가 훔쳐서 우문군 집에 가져다 두고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결백을 증명하기 어려워 보인다.원경릉은 진비의 손을 빼고 애원하는 눈빛을 피해, “진비 마마, 이 일은 다섯째도 마음은 돕고 싶으나 힘이 닿지 않을까 두렵습니다.”진비가 다급히 원경릉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아니야, 태자가 원하기만 하면 반드시 할 수 있어. 그 병여도는 누가 큰애를 모함하려고 한 거야. 자네가 태자에게 병여도는 누가 몰래 가져다 놓은 거라고 폐하께 말씀드리라고 해줘. 아니면…… 어쩌면 그 병여도는 가짜일 수도 있잖아. 병여도가 가짜면 이 일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니까. 태자가 이렇게 폐하께 말씀드려 주기만 하면 폐하께서는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거야. 제발 부탁이네. 내가 앞으로 반드시 보답할 걸 약속하네.”“병여도의 진위를 다섯째가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해, 가능하고 말고. 병여도는 아무도 본 적이 없잖아. 보내온 뒤로 병부에서도 감히 보지 못했고, 먼저 폐하께 올려야 하니 병부에서는 본 사람이 없지. 그럼 아무도 못 본 게 아닌가.”원경릉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게 병여도는 보면 안 되는 건가? 하지만 원경릉은 당시에 봤는 걸. 병여도가 초왕부에 도달했을 때 원경릉은 이미 봤다.탕양이 그때 얼른 병여도를 병부로 보내고 눈에 띄게 정중한 태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바마마께 먼저 올려드리고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같았다.그럼 만약 아무도 병여도를 본 적이 없다면 기왕부 밀실에서 찾아 낸 것이 진짜 병여도인지 누가 알지?우문군을 구하는데 이건 확실히 훌륭한 빠져나갈 구멍이자, 배후에 숨은 자를 끌어낼 기회기도 하다.원경릉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진비가 징징거리며 애원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유모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초왕부로 가게 하고 본인은 경
진짜 가짜다?하지만 정정대장군이 원본을 모사한 병여도 한 폭을 보낸 이상 반드시 우문호를 위해 마지막 수를 남겨두었을 것으로 진짜 주조할 때 이런 문자와 도안이 무슨 뜻인지 우문호에게 알려줄 전문 인력이 와야 한다.병기의 주조는 북당에 있어 선결 과제로 병여도에 접촉한 사람은 많을 수 있지만 핵심을 장악하고 있는 건 우문호 뿐으로 우문호의 절친은 진짜 주도 면밀하게 우문호를 위해 방법을 강구함과 동시에 최적의 도난방지 장치를 장착했다. 알아 볼 수 없다는 것 만큼 확실한 도난 방지장치도 없으니까.원경릉이 갑자기 뭔가 생각해 내서, “병여도를 훔쳐간 사람도 알아 보지 못한 게 아닐까?”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병여도는 내일 내가 궁중으로 가져가서 아바마마께 드릴 거야. 혼자 한참을 봐도 어떤 부분은 알고 어떤 부분은 모르겠어.”“모르는 부분 얘기해 줄게.” 원경릉이 말했다.“넌 알아?” 우문호가 놀라서 원경릉을 쳐다봤다.원경릉이 웃으며, “그 그림 분명 문이가 만들었을 거야. 난 이해할 수 있어.”우문호가 굉장히 기뻐하며 얼른 서재로 데려가 비밀 열쇠를 열고 병여도를 꺼내 바닥에 펼쳐 두고 둘이 쭈그리고 앉아 보는데 우문호가 모르겠는 부분을 짚자 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렸다.“모르겠어?”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이 고개를 흔들며,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이 그림은 좀 문제가 있어.”우문호가 놀라서, “무슨 문제?”원경릉이 자신의 분석을 얘기하는데, “문제점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종이질 문제야. 원래 보내온 병여도는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물이 마른 자국이 있고, 종이가 오랜 된 거였어. 그런데 이건 새것으로 물 얼룩도 없어. 게다가 원래 것보다 색이 좀 하얗고 종이질이 달라. 두번째로 이 화포 그림 위에 영문을 잘못 베꼈어. M자가 N자가 됐고, 이 부호도 그래. 더 중요한 건 화포의 제조 방식인데 순서가 잘못돼 있어. 하지만 내가 원래 봤던 거는 순서가 맞았어. 이건 누가 고의로 이렇게 한 거 같아.”우문호의
우문군을 살릴 길우문호가, “애초에 우문군의 역모죄는 병여도를 훔친 게 주요한 원인으로, 병여도는 대주에서 제공한 강력한 살상력을 지닌 무기와 전차를 제조하는 내용이라 전쟁용이야. 본인이 역모의 마음이 없으면 병여도를 훔칠 필요가 없지. 당연히 병여도를 훔치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은 없었던 일이 되니까 역모죄도 성립하지 않아.”원경릉의 얼굴에 긴장이 풀려 재촉하듯, “그럼 얼른 입궁해서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아? 비록 우문군은 동정 받을 자격이 없지만 기왕비와 두 군주를 봐서라도 우리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우문호가 쓴 웃음을 지으며, “하지만 내가 가짜라고 하면 가짜가 돼? 증거를 내 놔야 해. 아바마마께 다짜고짜 말씀드릴 수는 없어. 태자비가 가짜라고 했어요 하면 아바마마께서 그러냐 하고 믿으시겠어? 당신이 아바마마의 심중에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사안이 국가의 대사이니 만큼 아바마마는 아주 신중하실 거야. 인품이나 인격으로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그것도 그러네!” 원경릉이 순간 그 생각을 못하고 병여도를 본 사람이 없고 봤다고 쳐도 두 그림은 눈에 확 띄게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알아챘을 리 없을 수도 있다.어쨌든 원경릉이 가짜라는 걸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 아바마마는 믿을 게 분명하다.우문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있다가 주재상을 찾아가서 이 일을 좀 상의해봐야 겠어. 어떻게 생각하는 지.”“재상은 믿을 수 있어?” 원경릉이 물었다. 주재상은 사람이 미심쩍은 구석이 많고 병여도가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못 미더워도 잠시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하고 방법을 도출해 줄 수 있지. 주재상은 아바마마의 성격을 잘 알고 아바마마와 어떻게 애기를 풀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지 아니까.” 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 생각 났는지, “맞다, 휘종 할아버지 때 성지를 내려 유친왕 일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멸문을 명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이거 자기도 알아?”“들어봤어.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가짜라고 믿지 않다우문호가, “그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말 타고 가니 힘 안 들어요. 재상은 겨우 얻은 휴가니 집에서 반나절 푹 쉬세요.”주재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이렇게 하지요. 내일 제가 말을 타고 초왕부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우문호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야 집에 돌아온 맛이 나는데 왜 주재상은 굳이 초왕부로 오겠다는 거야?하지만 뭐 편할 대로, 누가 가든 먼 길도 아닌데.다음날 우문호는 원경릉을 데리고 병여도를 가지고 입궁했다. 원래 병여도는 더 일찍 올렸 어야 했지만 사건 증거물이라 경조부에 며칠 남겨둔 것이다.거기다 명원제가 시큰둥해 해서 재촉하지도 않았다.명원제가 병여도를 보고 그것이 가짜라는 우문호의 말에도 표정에 변화없이 고개를 들어 우문호에게, “태자비가 가짜라고 해서 너는 그냥 믿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태자비가 그렇다고 했습니다.”명원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별 말 묻지 않고 주재상의 예상대로 곧 원경릉에게 알현하러 오라고 성지를 내렸다.원경릉은 우문호와 같이 입궁해서 우선 건곤전에 가서 황제의 전언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서방으로 오자 우문호는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고 원경릉만 단독으로 안으로 불러들여 얘기를 나눴다.원경릉은 명원제의 안색이 초췌한 것을 보고 마음 저 밑바닥이 아렸다.원경릉이 무릎을 끓고 예를 취한 뒤, 명원제는 서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병여도를 봤다고?”원경릉이 고개를 떨구고 사실대로, “예, 당시 대주에서 사신이 병여도를 가져온 뒤 저는 기밀이란 사실을 모르고 검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열어본 것으로 일부러 훔쳐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럼 이것과 네가 전에 본 것이 다르다?”“며느리는 감히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그중 몇 군데 작은 변동이 있어 제가 봤던 것과 다릅니다.” 원경릉이 단호하게 말했다.명원제가 병여도를 보고 표식과 서술이 복잡한데, 제 아무리 한번 봤다고 해도 종일 자세히 들여다 본 것도 아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원경릉이 순간 명원제의 의도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건 저만 봤습니다.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초왕부에 계신 대주에서 온 그 노마님도 보신 적이 없나?” 명원제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원경릉은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짐작되지 않아 살짝 고개를 흔들고 답을 하지 않았다.“봤어? 그분도 가짜라고 했나?” 명원제는 다시 떠보듯 물어봤다.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원경릉도 명원제의 의도를 파악했다. 명원제는 원경릉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구실을 찾아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을 뿐이다.명원제가 어두운 눈빛으로 계속, “그 노부인은 대주의 용태후 측근 분이시니 이런 병기 연구에 참여하셨겠지?”원경릉은 이 얘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아들은 큰형이 죽는 걸 안타까워하는데, 아비라는 사람은 오히려 슬픔과 분노를 참는 게 먼저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만약 우문군이 이번에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정말 나가 죽어야 한다.“그런 가 아닌가?” 명원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원경릉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예!”명원제가 원경릉에게, “울긴 왜 울어?”원경릉이 눈물을 닦으며, “입궁할 때 눈에 먼지가 들어가 서요.”명원제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손을 내젓더니 피로한 목소리로, “가봐, 짐은…… 됐어.”원경릉은 눈물이 솟구쳐올라 얼른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밖에서 기다리던 우문호는 원경릉이 눈가가 빨개져서 나오는 걸 보고 아바마마께 책망을 들었다는 생각에, “아바마마께서 널 안 믿으신 거야?”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안 믿으셨어. 제대로 묻지 조차 않으시고, 오히려 나와 할머니가 전부 병여도가 가짜라고 했다고 만드시더라.”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원경릉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결국 사건을 다시 심리할 때 원경릉과 할머니는 모두 재판정에 나와 증언을 했는데, 기왕부에서 찾아낸 병여도는 가짜라고 했다.재
기왕과 기왕비의 마지막그래도 머리가 목 위에 붙어 있게 되었다.우문군은 자신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서 다시 경조부 감옥을 나갈 줄 몰랐다. 하지만 막상 감옥밖에 우문군을 맞으러 온 사람 하나 없고, 과거 죽을 각오로 충성을 맹세하던 식객과 신하들조차 코빼기 하나 뵈지 않았다.햇살이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데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래도 역시 우문호가 사람을 보내 우문군을 일단 기왕부로 돌려보내 자신의 물건을 챙겨가게 했다. 당연히 이름 있는 비단은 안 되고 일상복만 가능했지만 말이다.기왕부에도 죄가 없음을 통지해서 하인들이 각자 갈 길을 가게 했는데, 모두 크게 안도한 것이 더이상 사신이 나타날 까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문군이 돌아갔을 때 마침 하인이 기왕비와 작별하는 장면을 목도했다.무리가 꿇어 앉아 인사를 드리고 여전히 왕비 마마라고 부르는데, 기왕비가 처연하게 웃으며, “왕비 아닙니다, 다들 나를 요(瑤)부인이라고 부르세요.”요(瑤)는 기왕비 결혼 전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잊고 지낸 데다 죄인의 가족이라 친정의 성씨를 쓰고 싶지 않았다. 요 몇년간 친정을 너무 많이 연루 시키고 말았다. 불효녀다.미색 쪽에서 은자를 보내 마침 딱 하인들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돈을 나눠주니 각자 은자를 받고 한바탕 울더니 뿔뿔이 흩어졌다.머리는 산발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문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에 우문군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이별을 마치고 가는 사람은 당연히 전신에서 악취가 나는 이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거지가 문 앞에 구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완전히 영락해 버린 이 사람이 과거 위풍당당하던 기왕이란 걸 누가 알 수 있을까?하인들이 모두 가길 기다렸다가 우문군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저택은 거의 완벽하게 비어 있는 상태로 정원에는 막 싹이 돋아 올라오는 나뭇가지까지 시들시들해 보이는 게 온통 쇄락한 흔적으로 보였다.
세월이 흘러, 택란이 열한 살 되던 해에 드디어 만두가 돌아왔다.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그는 이제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해 돌아왔다. 그리고 떡들 세 명은 만으로 따지면 이미 열일곱 살이 되었다.만두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황제의 허락을 받고 군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비록 국경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국력이 항상 군사력의 안정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군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먼저 군심을 얻어야 한다.우문호는 그의 선택을 전폭 지지하며,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를 작은 병사로 임명하여 군에 들여보냈다. 약도성은 이미 재건이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다. 백성들도 마음을 다잡았고, 이제는 본격적인 발전만 남아 있었다. 이리 나리와 홍엽이 이곳에 왔을 때, 냉명여를 약도성에 남겨두었는데, 호명이 챙기려 했으나, 냉명여는 택란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꽤 고집이 센 아이기에 그는 그저 놔두기로 했다. 변경은 심지를 단련하기에 좋은 곳이었고, 호명이 보살펴 주며 저택 안에 거주했기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진국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황제가 본격적으로 조정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는 원래 약도성 접경 지역에 새롭게 지은 곳으로 옮겨졌고, 이름 또한 량주로 바뀌었다. 금나라는 이제 공식적으로 량주를 수도로 정했다.이 소식이 약도성에 전해지자, 택란은 무척 기뻐하며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이제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해도 될 것 같소. 금나라에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떻소?”그 해 택란은 훌쩍 성장해 주 아가씨보다 조금 더 커 있었다. 주 아가씨는 때때로 그녀를 보며, 대나무가 환생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며칠 사이에 또 훌쩍 자란 것이다.택란의 아이 같던 분위기는 사라졌고, 훨씬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약도성의 거센 바람과 강한 햇빛 때문에 원래 하얗던 피부는 건강한 빛을
우문호는 정정이 계란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보아하니 혼인 문제에 있어 두 사람은 합의를 봐 더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정정 대장군 부부는 경성에서 반 달 동안 머물렀고, 그동안 정정과 우문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말을 타거나, 군영과 산을 누비며 백성들을 살폈다.대두는 아이들과 즐겁게 지냈다. 비록 처음 이틀 동안은 계속 만두를 보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이제는 만두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그는 란이와도 갈등을 풀었고, 오히려 제일 친해져서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했다.그렇게 2주가 지나 정정이 작별을 고하기 전, 우문호에게 대두의 배필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하며, 대두는 그녀가 자랄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그의 말에 우문호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누구요?”정정이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말할 수 없소.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라, 나중에 잘못되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네.”“우리 사이에 말 못 할 게 어딨소?”우문호는 그의 말에 이미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그러자 정정이 더욱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들으면 자네가 조급해질까 봐 그러네!”우문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난 지금 이미 엄청 조급하네.”정정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철썩 때리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시게. 계란이는 아니네. 계란이는 내 딸이기도 하니, 절대 며느리가 될 수 없소.”다른 남자가 계란이를 자기 딸이라 부른 건 처음이었지만, 우문호는 반감 없이 오히려 매우 기뻐,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네, 자네 말이 맞아. 계란이는 자네 딸이기도 하네. 우리 모두의 착한 딸이지.”근영군주는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원경릉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우리가 여기서 제일 쓸모없는 존재 같습니다…”“맞는 말입니다!”원경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맞장구치자 근영군주가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자주 만나지 말고, 1년에 한 번만 봅시다! 시간이 어찌 이리 빨리 흐른다는 말입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눈
목장에서는 전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마들을 사육했기에, 우문호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정정과 함께 보러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근영군주가 웃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아직도 소년 같은 순수함을 지니시고 있다니, 참 보기 드물고 귀한 일이군요.”하지만 원경릉의 귀에는 이 말이 남편이 어린아이 같다는 말로만 들렸다.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 사내들이 가끔 저렇게 유치할 때가 있잖습니까.”근영군주도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예. 평소엔 유치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놀라운 배짱과 결단력을 보여주지요. 집안을 지탱하기도 하고, 나라를 떠받치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원경릉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남자들이 말을 타러 나가자, 원경릉과 근영군주는 궁전 안에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두가 몹시 심심해하자 원경릉은 친왕비들에게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아이들끼리 놀게 했다.대주의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친왕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왔다.사실 대두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는 많지 않았다. 미색의 두 아이와, 원용의의 아이 모두 대두보다 어렸지만, 놀 벗이 없는 상황에 나이가 어린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대두는 외동아들로 자라 성격이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미색의 딸인 란이 역시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웠다. 어머니인 미색을 닮아 태생이 강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었다.게다가 그녀에게 무술을 배워 한창 센 척을 할 시기라 대두와 몇 마디 말다툼 끝에 결국 몸싸움으로 번져 버렸다.란이가 대두를 때리자, 대두는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맞으면서도 전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참고만 있었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란이는 평소 늑대파에서 무술 대련을 했기에 상대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서 맞고만 있는 멍청한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부어오른 대두의 뺨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찌... 반격하지 않는 것입니까?”대두는 화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혼사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가 남녀인지도 모르면서 성급한 부모들이 충동적으로 혼사를 결정해 버리다니 말이다. “대두가 아직 이리도 어린데, 벌써 혼사를 이야기하다니요, 우리 만두는 아직 애 입니다.”우문호는 괜히 기분이 답답해졌다.현대로 다녀온 뒤, 사람들이 늦은 결혼과 출산을 선호하는 것을 본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열몇 살에 혼사를 하는 것은 성장의 억압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사 이야기를 한다고 당장 하는 건 아니오. 그저 약속만 하고, 몇 년 후에 하겠다는 거네.”“어찌 이리도 태연한 것이오?”우문호가 원경릉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그녀가 그들이 빚을 받으러 온 걸 모르는 건가 싶었다.“난 걱정 없소. 딸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당신처럼 쓸데없는 부담감 없이 그냥 바로 거절할 것이오. 형제간의 정이 거절로 인해 상할까 봐 고민한다니, 억지로 혼사를 성사하는 것이 더 정을 상하게 할 것이오.”그러자 우문호가 말했다.“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음이 편치가 않소.”후궁에서의 우문호는 조정에서의 단호하고 강력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조정에 나서기만 하면 단호하고 과감하며, 마치 번개 같은 결단력을 보여주는 반면, 후궁에서의 그는 망설임도 많고 잔소리도 많은 사람이었다. 원경릉이 다른 왕비들과 대화할 때, 그들도 가끔씩 이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다들 다섯째의 평소 잔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며 놀라했다. 하지만 다른 친왕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그가 예전보다 훨씬 결단력이 있어졌다고 말했다.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리 나리는 한숨을 쉬며, 결국 결단력 넘치는 황제도 결국 자식들 문제에서는 고민에 빠지는구나 싶었다.8월 14일, 정정 대장군 가족이 북당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초왕부에 머물렀다.그들은 초왕부에 머문 직후 탕양의 안내로 우문호를 만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아무리 큰 걱정도 오래된 벗 앞에서
예전에 원가에서 온 가문이 강북부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북쪽은 바람과 모래가 거셌지만 원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고향과 비슷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이리 나리는 원가의 사업을 줄이도록 도우며, 관리하기 쉬운 몇몇 가게만 남겼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에게 장사를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물은 적 있었는데, 그때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었다.“그런 말 마시오. 내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이제 만족스럽소. 열심히 해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평생 바삐 지낼 수도 없잖소.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하겠소? 다 잘 살기 위해 번 것이오. 가업을 나눠 받은 돈만 해도 평생 다 못 쓸 만큼 많소. 그리고 가게들도 계속 돈을 벌 텐데 뭐가 아쉽겠소?”탕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손에 익은 일이라, 혹시라도 아쉬워할까봐 걱정했소. 사실 나도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싫었소. 당신만 괜찮다면 다행이오.”일곱째 아가씨는 미소를 지었고, 그의 말에 모두가 기뻐했다.“한가해지는 것도 괜찮소. 1년에 두세 달은 약도성에 가서 지내면 얼마나 여유롭겠소.”하지만 탕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1년에 두세 달이면, 왕복하는 시간까지 더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고, 그 말은 반년 동안이나 그의 곁에 없다는 뜻이었다.게다가 그도 경성을 몇 달씩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황제 곁을 하루라도 떠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그는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부부였기에 항상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북당은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다. 원가가 일부 사업을 매각하면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가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웠고, 좋은 위치에 있는 가게들은 더더욱 귀한 존재가 되었다.원래 원가는 모든 가게를 이리 나리에게 넘기려 했지만, 이리 나리는 거절했다.그리고 안풍친왕이 먼저 나서서 이리 나리가 이미 너무 많은 가게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경성에서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독점 우
원경릉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일곱째요? 일곱째는 분명 원용의에게 말할 것이고, 원용의는 또 사식이에게 얘기할 것이고, 사식이도 분명 서일에게 전할 것일 텐데요. 만약 서일이 알게 되면, 이제 북당 전체가 다 알게 될 것이오.”우문호는 순간 당황해하며 말했다.“그건 내가 생각지도 못했네.”원경릉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마 지금쯤 황실 친왕들 사이에서 이미 탕양의 이야기가 뒷말로 오가고 있을 것이었다. 겨우 부인을 얻었는데, 밤에 함께 자지 못한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우문호는 탕 대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뒤에서 탕양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여인들이 수군거리니, 남자들은 그를 도우려 했다.물론 부부 사이의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 탕양을 술자리로 초대해 술로 고민을 푸는 방법을 제안했다.그렇게 며칠째 술을 마시던 탕양은 자신의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제 탓입니다. 폐하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제왕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이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여인은 때로 달래줄 필요가 있는 법이다.”그러자 탕양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제가 폐하께 이 이야기를 했을 땐, 혼례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알고 있다. 서두르지는 말거라.”모두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탕양을 바라보았지만, 탕양은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그들은 이미 혼인했지만, 오랜 부부 생활을 한 터라, 남녀 간의 정이 때로는 하루아침에 급격히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탕 대인은 돌아가자마자 일곱째 아가씨에게 이 일을 전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어찌 허구한 날 남의 부부 일에만 관심을 가지니, 할 일이 없나 보오.”“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가 잘 살면 그만이니.”탕양은 일곱째 아가씨를 안으며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경릉은 궁으로 돌아와 이 일을 다섯째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섯째가 말했다.“사실 한 번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그저 경성만 한 바퀴 둘러보면 되지 않소.”“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휘종제 어르신께서 슬퍼하셨소. 이번 생에 고향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돌멩이 하나를 건네주니, 그걸 안고 울었소.”“정말 안타깝소!”다섯째는 증조할아버지 생각에 마음 아파했지만,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큰할아버지께서 그를 데려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오. 휘종제 어르신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 않소? 몇 번 만나보니, 활달하고 산만한 성격에 무슨 사고를 일곱째인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맞소.”원경릉도 깊이 공감했다. 특히 그가 전화로 끈질기게 설득할 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다른 일은 없었소? 부모님 건강은 어땠소? 처남은 여자 친구가 생겼소? 만두는 공부를 잘하고 있소?”다섯째가 끊임없이 질문했다. “괜찮소. 부모님 건강도 괜찮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고혈압이 생겨서 약을 오래 드셔야 하오. 오빠는 여자 친구가 없네. 주진과 아직도 서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이오. 만두는 걱정 안 해도 되네. 내년에 돌아올 것이니.”“다행이오!”다섯째가 기뻐해 하며 말했다. 그는 늘 만두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에, 그가 돌아오면 나라의 일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많은 부담을 짊어지진 못하지만 그래도 괜히 기대가 되었다.“추 할머니 병은 어떠하신가?”다섯째가 또 물었다.“아직은 괜찮소. 아주 좋아졌네. 약에 내성이 생기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원경릉이 말하자 다섯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분들이 늘 건강해지시길 바랄 뿐이오.”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적성루 사람들에게 감동하기 쉬운데, 하물며 북당의 황제인 자신은 오죽하겠는가.“계란은 소식 왔소?”원경릉이 물었다.“왔네. 보시오!”다섯째는 소매 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꺼냈는데, 비둘기를 통해 받은 그 편지에는 몇 줄의 짧은
“별다른 뜻은 없소. 오늘 밤에 유난히 감성적이라 그저 한마디 해본 거네. 사실 너무 감동해서 그러네. 비록 항상 탕 대인에게 빨리 혼인하라고 재촉하긴 했지만, 그가 일곱째 아가씨와 혼인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괜찮소!”원경릉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어쨌든 탕양은 우리와 함께 걸어온 사람이오. 그러니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게 된 건 우리 모두에게 기쁜 일이오.”우문호는 벌써 술에 취한듯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술에 취하면 항상 눈앞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익숙한 천장, 익숙한 사람, 익숙한 탁자와 의자. 취기가 돌며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는 마치 다시 초왕 우문호로 돌아간 듯했고, 갓 원경릉과 마음이 통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 당시 외부 정세는 불안정했고, 태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형제끼리 반목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시절을 돌아보면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우문호가 원경릉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원 선생, 몇 년간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지만, 되돌아보니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지네. 사실 모든 행운과 행복은 원 선생의 잘못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오. 원 선생이 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땠었을까 싶네.”그러자 원경릉이 말했다.“누군가가 이 세상에 몇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소.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네. 아마도 어떤 공간에서는 내가 없는 대신 다른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소.”우문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 세상 속의 나는 정말 불쌍할 것이오.”“그건 모르오. 어쨌든 그곳의 당신은 나를 모르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도 모를 것이오. 각자가 행복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오. 어떤 사람들은 매 끼니 고기가 있는 게 최대의 행복일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봉급이 오르길 바랄 것이오. 또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우문호는 혼인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탕양의 혼사에 화룡점정을 더하는 일이었다.온 경성 사람들이 탕양이 황제를 모시는 신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혼사에 주목했다.탕양은 왕부에서부터 황제를 지지해 온 충신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은 형제의 관계에 못지않았다.거기에 황제가 직접 혼인을 하사했으니,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다들 두터운 예물을 준비해 축하하러 왔다.혼례는 초왕부에서 열렸다. 비록 초왕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이번 경사에 많은 지원이 몰렸다. 여러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미색은 돈에 힘까지 보태며 혼사 지출의 3할이나 부담했다.희상궁도 돌아와 모든 일을 총괄했다. 희상궁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여러 왕부에서 온 사람들을 지휘하며 완벽하게 일을 조율했다.혼례 당일, 황제와 황후도 참석했다.신부가 도착하여, 혼례를 올릴 때 우문호와 원경릉은 상석에 앉아 신랑 신부의 절을 받고는, 그 다음으로 기상궁도 절을 받았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이 드디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정말 기쁘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마음이 풀립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지요.”“잔소리는 계속할 것이다. 이젠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지.”우문호는 걱정이 끝이 없다는 듯 말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이 낳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하네.”“그래도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우문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이오?”원경릉이 그를 흘겨보았다.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첩을 두고도 황제만큼 자식을 많이 두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 연회에서 우문호는 과음했지만 원경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런 노부의 감격은 술로 달래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