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가짜다?하지만 정정대장군이 원본을 모사한 병여도 한 폭을 보낸 이상 반드시 우문호를 위해 마지막 수를 남겨두었을 것으로 진짜 주조할 때 이런 문자와 도안이 무슨 뜻인지 우문호에게 알려줄 전문 인력이 와야 한다.병기의 주조는 북당에 있어 선결 과제로 병여도에 접촉한 사람은 많을 수 있지만 핵심을 장악하고 있는 건 우문호 뿐으로 우문호의 절친은 진짜 주도 면밀하게 우문호를 위해 방법을 강구함과 동시에 최적의 도난방지 장치를 장착했다. 알아 볼 수 없다는 것 만큼 확실한 도난 방지장치도 없으니까.원경릉이 갑자기 뭔가 생각해 내서, “병여도를 훔쳐간 사람도 알아 보지 못한 게 아닐까?”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가능성도 있어, 병여도는 내일 내가 궁중으로 가져가서 아바마마께 드릴 거야. 혼자 한참을 봐도 어떤 부분은 알고 어떤 부분은 모르겠어.”“모르는 부분 얘기해 줄게.” 원경릉이 말했다.“넌 알아?” 우문호가 놀라서 원경릉을 쳐다봤다.원경릉이 웃으며, “그 그림 분명 문이가 만들었을 거야. 난 이해할 수 있어.”우문호가 굉장히 기뻐하며 얼른 서재로 데려가 비밀 열쇠를 열고 병여도를 꺼내 바닥에 펼쳐 두고 둘이 쭈그리고 앉아 보는데 우문호가 모르겠는 부분을 짚자 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렸다.“모르겠어?” 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이 고개를 흔들며,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이 그림은 좀 문제가 있어.”우문호가 놀라서, “무슨 문제?”원경릉이 자신의 분석을 얘기하는데, “문제점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종이질 문제야. 원래 보내온 병여도는 오른쪽 상단 모서리에 물이 마른 자국이 있고, 종이가 오랜 된 거였어. 그런데 이건 새것으로 물 얼룩도 없어. 게다가 원래 것보다 색이 좀 하얗고 종이질이 달라. 두번째로 이 화포 그림 위에 영문을 잘못 베꼈어. M자가 N자가 됐고, 이 부호도 그래. 더 중요한 건 화포의 제조 방식인데 순서가 잘못돼 있어. 하지만 내가 원래 봤던 거는 순서가 맞았어. 이건 누가 고의로 이렇게 한 거 같아.”우문호의
우문군을 살릴 길우문호가, “애초에 우문군의 역모죄는 병여도를 훔친 게 주요한 원인으로, 병여도는 대주에서 제공한 강력한 살상력을 지닌 무기와 전차를 제조하는 내용이라 전쟁용이야. 본인이 역모의 마음이 없으면 병여도를 훔칠 필요가 없지. 당연히 병여도를 훔치지 않았다면 이런 사실은 없었던 일이 되니까 역모죄도 성립하지 않아.”원경릉의 얼굴에 긴장이 풀려 재촉하듯, “그럼 얼른 입궁해서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아? 비록 우문군은 동정 받을 자격이 없지만 기왕비와 두 군주를 봐서라도 우리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지.”우문호가 쓴 웃음을 지으며, “하지만 내가 가짜라고 하면 가짜가 돼? 증거를 내 놔야 해. 아바마마께 다짜고짜 말씀드릴 수는 없어. 태자비가 가짜라고 했어요 하면 아바마마께서 그러냐 하고 믿으시겠어? 당신이 아바마마의 심중에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도 사안이 국가의 대사이니 만큼 아바마마는 아주 신중하실 거야. 인품이나 인격으로 보증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그것도 그러네!” 원경릉이 순간 그 생각을 못하고 병여도를 본 사람이 없고 봤다고 쳐도 두 그림은 눈에 확 띄게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알아챘을 리 없을 수도 있다.어쨌든 원경릉이 가짜라는 걸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 아바마마는 믿을 게 분명하다.우문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있다가 주재상을 찾아가서 이 일을 좀 상의해봐야 겠어. 어떻게 생각하는 지.”“재상은 믿을 수 있어?” 원경릉이 물었다. 주재상은 사람이 미심쩍은 구석이 많고 병여도가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못 미더워도 잠시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하고 방법을 도출해 줄 수 있지. 주재상은 아바마마의 성격을 잘 알고 아바마마와 어떻게 애기를 풀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지 아니까.” 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 생각 났는지, “맞다, 휘종 할아버지 때 성지를 내려 유친왕 일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멸문을 명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이거 자기도 알아?”“들어봤어.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
가짜라고 믿지 않다우문호가, “그건 괜찮습니다, 어차피 말 타고 가니 힘 안 들어요. 재상은 겨우 얻은 휴가니 집에서 반나절 푹 쉬세요.”주재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이렇게 하지요. 내일 제가 말을 타고 초왕부로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우문호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야 집에 돌아온 맛이 나는데 왜 주재상은 굳이 초왕부로 오겠다는 거야?하지만 뭐 편할 대로, 누가 가든 먼 길도 아닌데.다음날 우문호는 원경릉을 데리고 병여도를 가지고 입궁했다. 원래 병여도는 더 일찍 올렸 어야 했지만 사건 증거물이라 경조부에 며칠 남겨둔 것이다.거기다 명원제가 시큰둥해 해서 재촉하지도 않았다.명원제가 병여도를 보고 그것이 가짜라는 우문호의 말에도 표정에 변화없이 고개를 들어 우문호에게, “태자비가 가짜라고 해서 너는 그냥 믿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태자비가 그렇다고 했습니다.”명원제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별 말 묻지 않고 주재상의 예상대로 곧 원경릉에게 알현하러 오라고 성지를 내렸다.원경릉은 우문호와 같이 입궁해서 우선 건곤전에 가서 황제의 전언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서방으로 오자 우문호는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고 원경릉만 단독으로 안으로 불러들여 얘기를 나눴다.원경릉은 명원제의 안색이 초췌한 것을 보고 마음 저 밑바닥이 아렸다.원경릉이 무릎을 끓고 예를 취한 뒤, 명원제는 서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병여도를 봤다고?”원경릉이 고개를 떨구고 사실대로, “예, 당시 대주에서 사신이 병여도를 가져온 뒤 저는 기밀이란 사실을 모르고 검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열어본 것으로 일부러 훔쳐보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럼 이것과 네가 전에 본 것이 다르다?”“며느리는 감히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짜입니다. 그중 몇 군데 작은 변동이 있어 제가 봤던 것과 다릅니다.” 원경릉이 단호하게 말했다.명원제가 병여도를 보고 표식과 서술이 복잡한데, 제 아무리 한번 봤다고 해도 종일 자세히 들여다 본 것도 아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원경릉이 순간 명원제의 의도를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건 저만 봤습니다.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초왕부에 계신 대주에서 온 그 노마님도 보신 적이 없나?” 명원제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원경릉은 무슨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짐작되지 않아 살짝 고개를 흔들고 답을 하지 않았다.“봤어? 그분도 가짜라고 했나?” 명원제는 다시 떠보듯 물어봤다.이 말을 듣고 그제서야 원경릉도 명원제의 의도를 파악했다. 명원제는 원경릉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적당한 구실을 찾아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을 뿐이다.명원제가 어두운 눈빛으로 계속, “그 노부인은 대주의 용태후 측근 분이시니 이런 병기 연구에 참여하셨겠지?”원경릉은 이 얘기를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아들은 큰형이 죽는 걸 안타까워하는데, 아비라는 사람은 오히려 슬픔과 분노를 참는 게 먼저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살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만약 우문군이 이번에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정말 나가 죽어야 한다.“그런 가 아닌가?” 명원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원경릉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예!”명원제가 원경릉에게, “울긴 왜 울어?”원경릉이 눈물을 닦으며, “입궁할 때 눈에 먼지가 들어가 서요.”명원제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손을 내젓더니 피로한 목소리로, “가봐, 짐은…… 됐어.”원경릉은 눈물이 솟구쳐올라 얼른 인사를 드리고 물러났다.밖에서 기다리던 우문호는 원경릉이 눈가가 빨개져서 나오는 걸 보고 아바마마께 책망을 들었다는 생각에, “아바마마께서 널 안 믿으신 거야?”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안 믿으셨어. 제대로 묻지 조차 않으시고, 오히려 나와 할머니가 전부 병여도가 가짜라고 했다고 만드시더라.”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원경릉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결국 사건을 다시 심리할 때 원경릉과 할머니는 모두 재판정에 나와 증언을 했는데, 기왕부에서 찾아낸 병여도는 가짜라고 했다.재
기왕과 기왕비의 마지막그래도 머리가 목 위에 붙어 있게 되었다.우문군은 자신이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서 다시 경조부 감옥을 나갈 줄 몰랐다. 하지만 막상 감옥밖에 우문군을 맞으러 온 사람 하나 없고, 과거 죽을 각오로 충성을 맹세하던 식객과 신하들조차 코빼기 하나 뵈지 않았다.햇살이 정수리에 내리 꽂히는데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래도 역시 우문호가 사람을 보내 우문군을 일단 기왕부로 돌려보내 자신의 물건을 챙겨가게 했다. 당연히 이름 있는 비단은 안 되고 일상복만 가능했지만 말이다.기왕부에도 죄가 없음을 통지해서 하인들이 각자 갈 길을 가게 했는데, 모두 크게 안도한 것이 더이상 사신이 나타날 까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우문군이 돌아갔을 때 마침 하인이 기왕비와 작별하는 장면을 목도했다.무리가 꿇어 앉아 인사를 드리고 여전히 왕비 마마라고 부르는데, 기왕비가 처연하게 웃으며, “왕비 아닙니다, 다들 나를 요(瑤)부인이라고 부르세요.”요(瑤)는 기왕비 결혼 전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잊고 지낸 데다 죄인의 가족이라 친정의 성씨를 쓰고 싶지 않았다. 요 몇년간 친정을 너무 많이 연루 시키고 말았다. 불효녀다.미색 쪽에서 은자를 보내 마침 딱 하인들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돈을 나눠주니 각자 은자를 받고 한바탕 울더니 뿔뿔이 흩어졌다.머리는 산발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 자신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문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에 우문군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이별을 마치고 가는 사람은 당연히 전신에서 악취가 나는 이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거지가 문 앞에 구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완전히 영락해 버린 이 사람이 과거 위풍당당하던 기왕이란 걸 누가 알 수 있을까?하인들이 모두 가길 기다렸다가 우문군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저택은 거의 완벽하게 비어 있는 상태로 정원에는 막 싹이 돋아 올라오는 나뭇가지까지 시들시들해 보이는 게 온통 쇄락한 흔적으로 보였다.
작별과 새로운 시작요부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이혼장을 잘 접어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되는 듯 소매 속에 넣고 우문군에게 예를 취하며, “그동안 은혜를 입어 돌봄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렇게 헤어지면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옥체 보중하세요!”요부인은 보따리를 든 채 고개를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갔다.원경릉과 미색은 문밖에서 요부인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얼른 가서 한 사람이 한쪽 팔 씩 잡고 밖으로 갔다.마차가 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어 미색이 요부인을 부축해 태우고 가리개를 내리기 전, 원경릉은 요부인이 밖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내다볼 줄 알았는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감아버렸다.원경릉이 마부에게, “가자!”가리개를 내리고 말발굽소리가 ‘따가 닥’ 거리로 퍼져 나가고, 뒤쪽엔 요부인이 보낸 10여년의 청춘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렸다.“이혼하길 잘했어요!” 요부인이 괴로워할 까봐 미색이 서툰 위로로, “나중에 좋은 남자 몇 명 소개 시켜 드릴 게요. 남편 걱정은 마세요.”요부인은 고개를 들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됐어요, 이렇게 편한 적 없었으니까.” 미색이, “다시 남편감을 찾는 것도 좋아요. 시집 못 가는 고통이 얼마나 외로운지 제가 깊이 체험해 봤잖아요.”원경릉과 요부인은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미색은 시집가길 얼마나 애절하게 기다렸던가.요부인은 원경릉의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걱정 하지마요, 난 좋으니까. 가장 좋은 결말이 지금인 걸요.”원경릉은 요부인의 손등을 살포시 두드리며, “그럼 됐어요.”미색이 약간 이해가 안되는지, “지금 그 사람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혼을 했을까요? 형님께 묻어가면 적어도 처가에서 나오는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을 텐데.”요부인은 우문군을 알겠다며, “우문군은 오만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 제가 그 사람을 배반했는데 어떻게 절 용납할 수가 있겠어요? 평생 절 뼈 속까지 증오할 거예요.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자신이 마침내 태자가 될
병여도 사건 이후말을 마치고 요부인을 밀어냈다.요부인은 꾸역꾸역 원경릉에게 들러붙으며, “붙어 있을 거예요, 두 사람한테 안 붙어있으면 앞으로 난 먹고 살 것도 없는데 머리에서 쉰 내 좀 나는 게 대수예요? 머리가 목 위에 붙어 있는 게 중하지.”말하며 자기 머리를 원경릉의 머리에 들이대자 원경릉은 하하 웃음이 터졌고, 요부인의 머리를 미색에게 밀자 미색이 칠색팔색 구석으로 숨으며 외치는데, “이거 새 옷이예요, 머리장식도 새 거고, 얼굴에 화장한 분도 새 거란 말이예요……”마차 안은 웃음소리가 가득가득!2월에 벌어진 변고는 3월 초에 결론이 나며 막을 내렸다.박원은 박씨 집으로 돌아갔고 가끔 눈을 뜨지만 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다.박씨 집안에서는 원용의와의 혼인을 취소하겠다고 했는데 원용의가 따르지 않고 박원이 일어나길 기다리겠다고 했으나 박씨 집안이 강경하게 나가며, 입장을 바꿔 생각해 양가집 규수의 인생을 그르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씨 집안에서는 원용의가 그간 박원에게 한 모든 일에 감사하는 뜻으로 원용의를 수양딸로 삼고 싶다고 제안했다.원씨 집안에서 동의해서 특별히 성대한 연회를 열어 대대적으로 알렸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인지 박원에게 달려 있으므로 다들 그가 깨어나길 간절히 바랬다.주재상은 사람을 시켜 엄밀하게 주명양을 감시하는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이토록 치밀하니 괜히 경솔하게 주명양에게 물어봤다가 경계심을 가지게 할 수 있고, 분명 아무것도 나올 게 없으므로 여기서 실마리를 끊어버릴 필요가 뭐가 있겠냐 판단했다. 주명양은 상대방에게 순순히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므로 분명 의도하는 게 있을 것이고, 이 일이 잠잠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명양은 분명 그 사람과 연락을 취해 이득을 요구할 것이다.그리고 우문호도 생각이 있었다.병여도를 훔친 사람은 자기가 병기를 제작하고자 하던지, 아니면 적과 내통하려는 자다.병기를 제조하려면 병력이 있어야만 하는데 지금 병권은 집중되어 있어 지방 병력도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입궁하고 싶은 우문군우문군은 기왕부를 떠나자 태비가 친정 사람을 보내 작은 집을 사주고 노비 둘을 붙여 시중을 들게 했다.우문군은 주씨 집으로 주명양을 찾아갔지만 주명양은 피하고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숙모를 내보내 이혼장을 써 달라고 했는데, 우문군은 써주지 않않지만, 주씨 집에서 소란을 피울 엄두도 나지 않아 차갑게 홍색 대문을 한동안 보더니 고작 한마디 한다는 게, “이혼장은 주지 않을 것이다. 일생을 허비해 보라고, 누가 괴로운지 두고 보지.”우무군이 이런 처지에 놓이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은 그에게 눈을 흘기고 전에 그렇게 친하던 식객과 친구들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문군은 주씨 집에서 그렇게 푸대접을 받고도 주명양은 매정하지 않을 거라며 주명양이 자신을 그대로 둘 리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주명양은 매정하고 싸늘한 사람이다.우문군은 입궁하고 싶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일개 평민은 궁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회왕부를 찾아갔다.친왕을 하나씩 따져봤는데, 우문호에게는 절대 사정하지 않을 것이고, 안왕은 집에 박혀서 미소만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둘째 쪽은 더 가기 싫은 게 전에 둘째를 괴롭힌 적이 적지 않아 차마 갈 수 없고, 일곱째는 지금 경조부에 파견되어 우문호와 같이 밤이슬을 맞고 다닌 다니 분명 자신을 도와줄 리 없다.이리 저리 생각한 끝에 역시 시간을 만들어 줄 사람은 여섯째밖에 없다.회왕은 인간성이 관대하고 후덕해서 형제 간의 우애를 생각해 우문군의 지금 처지에 상당히 가슴 아파했다.그래서 우문군이 찾아 왔을 때 예를 다해 접대했다.하지만 우문군이 자신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 달라고 하자 회왕이 손을 내젓고, “안돼요, 아바마마께서 어명을 내리셔서 큰형은 입궁하실 수 없습니다. 저는 못해요.”우문군이 애원하며, “아바마마께 용서를 구하려는 게 아냐. 그저 어마마마를 한번만 뵙고 싶어서 그래. 나때문에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셨을 거야. 아들인 내 실패로 어마마마를 연루 시켰으니 부끄럽기가 그지 없네, 형을 좀 도와서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