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비의 발악현비의 두 손은 더이상 뒤로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두 손을 쓸 수 있도록 풀어주었으나 두 다리와 몸은 여전히 의자에 묶여 있다.현비는 온 사람이 원경릉인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서 차갑게, “폐하께서는 어찌 이리도 매정하십니까? 모자가 마지막으로 한 번 보겠다는 소원마저 저버리실 수가. 정말 너무 매정하시구나.”원경릉의 등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막상 현비를 보니 상처가 벌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며 천천히 걸어가 맞은 편에 앉았다. 이 의자는 방금 명원제가 앉았던 그 자리다.“아바마마께서,” 원경릉이 입을 열자 잔뜩 쉰 목소리가 갈라지며, “당신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저더러 듣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하세요.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태자에게 전하겠습니다. 절대로 감추지 않을 겁니다.”현비가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내리치며, “좋아, 그럼 가서 우문호에게 전해, 너 원경릉이 우리 모자를 갈라 놓고, 네가 날 죽였으니 우문호에게 너를 죽이라고 해.”원경릉은 현비의 증오에 가득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마세요. 이 말 그대로 전하겠습니다.”“네가 감히 올 생각을 해? 왜 좋아 죽겠어? 소씨 집안과 내 지금 처지를 보니 기분 좋아?” 현비가 퉤하고 침을 뱉았으나 원경릉 발 앞에 떨어졌다. 현비가 뱉은 침에 핏줄이 섞인 것이 보인다.원경릉이 무릎의 옷 매무새를 고친 뒤 고개를 들고, “제가 기분 좋을 게 뭐가 있죠? 당신에게 일이 생기면 상처받는 사람은 태자와 공주예요. 저는 두 사람이 당신 때문에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원경릉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목여태감의 냉정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보아하니 현비의 광란을 막을 방법이 없다.그래도 원경릉은 시도해 보는데, “전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기서 당신께 사죄 드려요. 절 용서해 주세요.”현비가 부득부득 이를 갈며, “웃기고 있네, 한 마디도 못 믿어. 위선 떨지 마. 내가 우문호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야, 가서 전해. 만약 여전히 낳고 키워준 정을
현비의 죽음원경릉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 여기 남겠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마마를 보내 드리겠어요.”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 그러시지요, 하지만 곁에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밖에서 어떤 궁인이 붉은 등을 떼 내자 흑암이 순식간에 좌중을 석권해 원경릉은 순간 기절할 것 같아 기둥에 기댔다.구사가 원경릉의 곁을 지나가는데 마치 우문령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고, 우문호의 침통한 눈빛을 본 것처럼 가슴이 저릿했다.전신에 힘이 풀려 궁인이 와서 부축해 주지 않았으면 원경릉은 바닥에 털썩 주저 앉을 뻔 했다.구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현비는 질겁해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태자를 만날 거야, 폐하를 만날 거야, 태후 마마를 만날 거야……”구사가, “마마, 하나를 고르시지요!”“싫어, 아직 15일이 안 됐어. 아직 공주 결혼식이 안 됐다고…… 공주는 모친상 기간에 시집을 갈 수 없어. 이 혼사는 저주받은 거야. 오지 마!” 현비의 목소리가 스산하고 처참한 것이 밤 하늘을 나는 부엉이처럼 절망의 빛을 띠었다.목여태감이, “현비 마마 걱정 마세요. 공주 마마는 이미 황귀비 마마를 모친으로 모셨습니다. 공주 마마께서 출가하실 때 당연히 모친의 축복을 받을 것이니 크게 복된 혼인입니다. 공주 마마는 행복하실 것이니 마마께서는 안심하시고 길을 떠나시지요.”원경릉이 천천히 안으로 돌아가 휘장 곁에 기대 현비가 미쳐 날뛰는 것을 봤다. 쟁반을 들어 엎고 독주를 쏟고 비수를 ‘챙강’ 바닥에 던졌는데, 유독 흰 비단만 바람에 날려 현비의 무릎에 말려 있었다. 미친 듯이 비단을 밀쳐내며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목여태감이 얼른, “마마께서 흰 비단을 고르셨으니 소인이 마마를 도와드리겠습니다!”목여태감이 흰 비단을 펼치자 비단은 백사처럼 하늘로 올라가더니 대들보에 걸려 아래로 늘어뜨려 졌다. 목여태감이 비단을 걸고 매듭을 지었다.현비는 흰 비단을 죽어라 잡아 뜯으며 소리치는데, “우문호, 빨리 와, 저들이 어마마마를 죽이려 해. 어서
현비를 보내고원경릉이 얼른 손을 내밀어 우문호를 잡고 우문호도 원경릉의 팔을 잡고, “원 선생, 어마마마가 돌아가셨어.”원경릉이 우문호를 안고 울기 시작했다.우문호는 멍청히 목여태감과 구사를 보더니 원경릉을 안아 일어나서 낮은 목소리로, “어마마마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싶어.”두 사람은 휘청거리며 들어갔다.바람이 경여궁 안으로 밀어닥쳐서 휘장이 하늘로 펄럭이고 얼굴과 몸을 때리며 ‘파바박’ 소리를 냈다.우문호가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데 호흡을 멈췄다가 다시 심호흡을 하는 것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 같다.현비의 죽은 모습은 흉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살아있을 때보다 한참 침착해 보였다. 시체의 얼굴은 목여태감이 수습했고 눈은 감겨 있지 않지만 옷과 머리는 잘 가다듬어져 있다.우문호는 눈가가 흐려지며 손을 뻗어 현비의 얼굴을 만지고 두 손으로 현비의 눈을 가리더니 눈물이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우문령이 울면서 뛰어들어와 현비의 몸에 달려들어 대성통곡했다.용화전.태후는 이미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휘장을 열어젖히고, “누가 우느냐?”상궁이 달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태후 마마 우는 사람 없습니다. 악몽을 꾸신 것은 아니신 지요?”“현비였다. 현비가 울고 있었어.” 태후가 얼른 내려오려 했다.상궁이 부축하며 작은 소리로,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현비 마마께서 목을 매셨다고 합니다.”태후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하며 한참을 있다가, 침통한 눈물을 흘리며, “죽었느냐?”“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상궁이 말했다.태후가 숨이 안 쉬어지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죽었……구나. 죽었어. 산 사람은 덜 고통받겠지.” 태후가 침대에 누워 중얼거리는데 백발이 된 머리를 베개에 늘어뜨리고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어서방.목여태감이 돌아와 명을 수행했음을 보고했다.명원제는 엄숙한 표정으로 용상에 앉아 있는데 피곤한 기색이다.조용히 목여태감의 말을 듣더니 종이로 상소를 눌러 놓고 황
태자를 폐위하라목여태감은 마음이 아팠다. 황제 곁에 이렇게 오래 있다 보니 황제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황제가 얘기한 그대로 황제는 자신조차 매정하게 대해서 궁에 있는 그 누구보다 허름한 것을 먹고 마셨다. 그게 바로 수라를 늘 혼자 하는 이유다.나라의 대사를 위해서는 본인의 희로애락은 많은 경우에 감추지 않을 수 없다. 황제의 어깨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바람이 불어 황제의 탁자에 있던 화선지가 날아가고 명원제는 뭔가를 쓰려고 했으나 붓을 들고 한참을 있어도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명원제는 경여궁 사람을 전부 바꿔서 현비가 죄를 짓고 죽었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황후와 황귀비는 짐작하고 있으나 감히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명원제는 비밀리에 장사를 지내고 대외적으로는 현비가 여전히 중병을 앓고 있으며 병세가 호전되지 않은 것으로 했다.정월 초여드레, 조정 아침회의가 열리고 아직 선포가 있기도 전에, 과연 어떤 사람이 앞장 서 상소를 올려 발의하길 태자의 생모가 불경하고 불효한 대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다.앞장 서 상소를 올린 사람은 바로 분수에 만족하며 한동안 자중하고 있던 기왕이다.기왕은 자신만만하게 경전을 인용하고 심지어 후궁과 외척의 난까지 언급하며 태자의 생모는 반드시 품행이 단정해야 하며, 명예를 실추시키는 요소가 혈통에 이어져 향후 황실의 계승자에게 영향을 주면 안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쌀쌀맞게, “소신은 북당 강산의 천만년 대계를 위해 아바마마께서 태자 우문호를 폐위 시키고, 다른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북당 황실의 혈통이 향후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울러 우문호가 경조사 부윤을 맡을 뒤로 범인을 오인한 사건이나 미결안이 많이 쌓인 것으로 볼 때, 중임을 담당할 역량이 부족함을 알 수 있으니 아바마마께서는 이점 숙고하여 주십시오.”기왕이 제기한 안건은 조정의 많은 대신들과 협의를 거쳤지만 동조하기 쉽지 않은 것이, 일단 혈통이
희비가 엇갈리는 여씨와 소씨덕비를 배출한 여씨 집안(汝家)사람들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성은에 감읍했다. 그들이 얼른 성은에 감사하기면 하면 누가 비난을 하던 황제의 결정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여씨 집안은 무장 출신의 무인들로 한동안 그래도 괜찮았던 것이 국경지대에 항상 작은 소요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난 2년간 물밑 충돌은 있었으나 표면적으론 평온해서 무장이 나설 일이 없는 지라 무능하게 이삼 년을 지내온 고로, 조정에서의 위치도 난감했는데 이제 덕비가 황귀비가 되었으니 태자도 자기 사람이 되었다. 기뻐서 웃다가 턱이 빠질 지경이다.기왕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바보취급을 당했는데 아바마마께서 우문호를 덕비의 자식으로 삼으실 거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 그야 말로 청천벽력이었다.이런 편법이 과거에도 있긴 있었지만 서열이 낮은 황자들에게나 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총애하는 비빈이 아이가 없을 때 상대적으로 품계가 낮은 빈첩의 아이 중에 황자를 데려와 족보에서 비의 이름 아래 써서 황자의 신분을 높이고 비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하지만 우문호는 일개 황자가 아닌 태자로 태자가 다른 비빈을 어머니로 삼다니 역시 역사상 유래가 없다.기왕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무의식적으로 안왕을 보니, 한가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고 있다. 어쩐지 안왕부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더라니. 그는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아바마마의 냉정한 눈빛을 마주하고 기왕은 여전히 최후의 발악을 하는데, “현비 마마께서 아직 살아 계신데 태자가 어찌 다른 사람을 어머니로 모실 수가 있습니까?”아무도 기왕의 말을 받아 이어가지 않는 게 족보와 성지에 이미 다 기록이 되어 이 일은 이미 사실이지 상의할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시화 된 것은 수정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떠들어봤 자 속마음만 들킬 뿐이다.기왕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특히 아바마마의 그 냉정한 눈빛을 대하니 자신의 미래가 캄캄하게 느껴졌다.제일 즐거운 건 덕비의 아버지와 오빠들로
우문령을 위로하라전에 두 소씨 집안이 경성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는데, 각각 절반 씩 차지하고 있었다.지금 다른 소씨는 은거하여 물러나 한적하고 유유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반면, 현비의 소씨 집안은 끊임없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분투했으나 쓸 만한 인재는 없고, 뒷문으로 들어가는 편법만 알아서 일순간은 부귀했으나 복이 재앙으로 바뀌고 말았다. 기초 없는 고대광실이 어찌 태풍과 비바람을 이길 수 있을까?우문호는 슬픔과 무력함으로 잠잠하기만 했다.소씨 집안은 어쨌든 우문호의 외가가 아닌가.그리고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어마마마는 그들을 위해 반평생을 수고 했건만 지금 그들은 자기 앞날에 급급해 누구 하나 어마마마를 위해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어마마마, 돌아가시기 전에 똑바로 보셨습니까?’우문호는 눈을 부릅뜨고 날이 밝기까지 잠이 들지 못했다.아침 일찍 원경릉이 일어나기 전에 우문호는 일어나서 옷을 입고 나갔다.우문호가 나간 뒤 원경릉은 바로 눈을 떴다.연기로 따지면 원경릉도 빠지는 능력은 아니라, 우문호가 한숨도 못 잘 때 자기는 깊이 잠든 척 했지만 우문호와 같이 아침이 오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거절한지 사흘째 되던 날 초왕부는 드디어 대문을 열었다. 왜냐면 공주의 혼사가 닥쳐서 기쁘지 않아도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궁에서도 사람이 와서 태자비가 공주와 함께 해달라고 했는데 초이레 저녁 그 일이 있은 뒤로 공주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통에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현비가 우문령에게 입힌 타격이 너무 컸다.16년간 자기를 지켜주던 보금자리가 붕괴되고 말았다. 우문령이 전에 비록 황궁이 새장 같아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자유를 원한 것이지 가족을 싫어 해서가 아니었다.현비는 우문령의 16년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우문령은 단지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었다. 현비가 죽기 전에 우문령을 다치게 한 건 죽었다가 깨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우문령은 어
우문령의 풍경“이 득도한 고승이 사부님은 아닐 거예요?” 원경릉이 물었다.이리 나리가 냉담한 얼굴로, “그런 내가 부끄럽냐?”말을 마치고 뒷짐을 지고 갔다.원경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망작’을 전달해 말아?하지만 이리 나리는 마음을 다해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으로, 우문령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의 성의니까 일단 가지고 가는 걸로 할까.원경릉은 사식이와 만아, 그리고 우리 떡들을 데리고 갔다.원경릉은 입궁해서 자연스럽게 황귀비와 황태후께 인사를 갔다.황태후는 마음이 힘들고 몸이 아파서 아예 일어나지 않으셨는데 원경릉이 아이들을 데리고 입궁한 것은 바로 그런 태후를 위로하기 위해서 였다.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우리 떡들이 침대에 올라가 황태조모에게 달라붙었다.태후는 세 아가를 보고 얼굴에 수심이 비로소 가시며 상궁의 말을 듣고 일어나 아이들과 얘기하며 놀아주었다.황귀비는 지금 봉기궁(鳳起宮)에 있는데 우문령도 여기 같이 있다가 시집을 간다.황귀비는 덕비에서 일약 품계가 올라서 후궁들은 떠들썩하기는 커녕 호시탐탐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요 며칠 각각 예물을 보내며 인사했다.귀비는 억울한 것이 원래 덕비 위인데 지금 덕비에게 눌리게 되어 사람을 시켜 아무거나 팔찌를 한 쌍 보내고 체면이 상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와서 인사하지 않았다.하지만 가장 분한 건 황후로 정말 놀랍고 당황한 것이, 덕비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황귀비의 꿈을 이뤘고, 게다가 내무부 장 태감이 황제에게 불려갔었다고 하니 황후 짐작에 현비가 죽기 전에 장 태감에 대한 얘기를 한 것 같다.그래서 며칠간 황후는 마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 풀만 움직여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에 땀을 쥐었다.원경릉이 뵙기를 청했으나 황후는 병이라고 핑계를 대자 원경릉은 봉기궁으로 갔다.황귀비가 원경릉을 보더니 손을 잡아 끌며 걱정스럽게, “어서 가서 좀 봐 줘, 며칠 동안 울기만 하고 계속 이렇게 울다 가는 눈이 다 문드
오누이우문령이 풍경을 보더니 일말의 의아함과 깊은 신뢰의 눈망울로, “정말요? 정말? 정말요?”우문령은 3번이나 물어보고 공손하고 두손으로 풍경을 받아 자신의 손바닥에 놓는데 태도가 경건하기 그지 없다.원경릉은 우문령의 공손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 풍경은 그녀에게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 한 줄기 빛인 듯 싶다.원경릉도 갑자기 이해가 되었다. 사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신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리 나리는 그 점을 알고 우문령에게 풍경을 보낸 것이다.우문령까지 갈 필요도 없이 원경릉 본인조차 자신이 과학을 연구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허망한 부처에게 구원을 바랬던 적이 있다.원경릉은 주지 후배가 생각났다. 주지 후배는 과학의 끝은 신학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건 어쩌면 진리일지도,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아마 후배 본인이 내심으로 바라는 것일 것이다.사람은 신앙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절망의 때엔.정신적으로 무장을 해제 시키다니 이리 나리는 우문령에게 이 점에 있어서는 지고지순의 최고봉이다.우문령은 풍경을 창가에 걸고 창문을 열자 북풍이 불며 풍경에서 ‘딸랑 딸랑’소리가 났다. 동에서 나는 소리는 영원과 맞닿은 듯, 심리적인 작용이 더해 정말 복음이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다.우문령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보고 여전히 빨갛게 부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한 줄기 감동을 드러냈다.원경릉도 웃는데 눈가가 흐려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궁인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원경릉이 권하는 가운데 우문령은 마침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비록 아직 슬픈 모습이지만, 다행히 다독여졌다.원경릉은 우문령이 죽을 먹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 우문령은 위로가 되었지만 우문호는 쉽지 않다.우문령이 죽을 다 먹자 원경릉은 우문령을 재웠다. 너무 피로가 쌓인 데다 풍경 소리가 위로를 주니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원경릉은 우문령 곁을 한동안 지키다가 나왔다.황귀비가 휘장 밖에서 우문령이 잠든 것을 보고 마음에 놓
목장에서는 전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마들을 사육했기에, 우문호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정정과 함께 보러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근영군주가 웃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아직도 소년 같은 순수함을 지니시고 있다니, 참 보기 드물고 귀한 일이군요.”하지만 원경릉의 귀에는 이 말이 남편이 어린아이 같다는 말로만 들렸다.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 사내들이 가끔 저렇게 유치할 때가 있잖습니까.”근영군주도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예. 평소엔 유치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놀라운 배짱과 결단력을 보여주지요. 집안을 지탱하기도 하고, 나라를 떠받치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원경릉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남자들이 말을 타러 나가자, 원경릉과 근영군주는 궁전 안에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두가 몹시 심심해하자 원경릉은 친왕비들에게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아이들끼리 놀게 했다.대주의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친왕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왔다.사실 대두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는 많지 않았다. 미색의 두 아이와, 원용의의 아이 모두 대두보다 어렸지만, 놀 벗이 없는 상황에 나이가 어린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대두는 외동아들로 자라 성격이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미색의 딸인 란이 역시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웠다. 어머니인 미색을 닮아 태생이 강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었다.게다가 그녀에게 무술을 배워 한창 센 척을 할 시기라 대두와 몇 마디 말다툼 끝에 결국 몸싸움으로 번져 버렸다.란이가 대두를 때리자, 대두는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맞으면서도 전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참고만 있었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란이는 평소 늑대파에서 무술 대련을 했기에 상대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서 맞고만 있는 멍청한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부어오른 대두의 뺨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찌... 반격하지 않는 것입니까?”대두는 화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혼사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가 남녀인지도 모르면서 성급한 부모들이 충동적으로 혼사를 결정해 버리다니 말이다. “대두가 아직 이리도 어린데, 벌써 혼사를 이야기하다니요, 우리 만두는 아직 애 입니다.”우문호는 괜히 기분이 답답해졌다.현대로 다녀온 뒤, 사람들이 늦은 결혼과 출산을 선호하는 것을 본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열몇 살에 혼사를 하는 것은 성장의 억압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사 이야기를 한다고 당장 하는 건 아니오. 그저 약속만 하고, 몇 년 후에 하겠다는 거네.”“어찌 이리도 태연한 것이오?”우문호가 원경릉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그녀가 그들이 빚을 받으러 온 걸 모르는 건가 싶었다.“난 걱정 없소. 딸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당신처럼 쓸데없는 부담감 없이 그냥 바로 거절할 것이오. 형제간의 정이 거절로 인해 상할까 봐 고민한다니, 억지로 혼사를 성사하는 것이 더 정을 상하게 할 것이오.”그러자 우문호가 말했다.“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음이 편치가 않소.”후궁에서의 우문호는 조정에서의 단호하고 강력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조정에 나서기만 하면 단호하고 과감하며, 마치 번개 같은 결단력을 보여주는 반면, 후궁에서의 그는 망설임도 많고 잔소리도 많은 사람이었다. 원경릉이 다른 왕비들과 대화할 때, 그들도 가끔씩 이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다들 다섯째의 평소 잔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며 놀라했다. 하지만 다른 친왕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그가 예전보다 훨씬 결단력이 있어졌다고 말했다.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리 나리는 한숨을 쉬며, 결국 결단력 넘치는 황제도 결국 자식들 문제에서는 고민에 빠지는구나 싶었다.8월 14일, 정정 대장군 가족이 북당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초왕부에 머물렀다.그들은 초왕부에 머문 직후 탕양의 안내로 우문호를 만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아무리 큰 걱정도 오래된 벗 앞에서
예전에 원가에서 온 가문이 강북부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북쪽은 바람과 모래가 거셌지만 원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고향과 비슷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이리 나리는 원가의 사업을 줄이도록 도우며, 관리하기 쉬운 몇몇 가게만 남겼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에게 장사를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물은 적 있었는데, 그때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었다.“그런 말 마시오. 내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이제 만족스럽소. 열심히 해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평생 바삐 지낼 수도 없잖소.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하겠소? 다 잘 살기 위해 번 것이오. 가업을 나눠 받은 돈만 해도 평생 다 못 쓸 만큼 많소. 그리고 가게들도 계속 돈을 벌 텐데 뭐가 아쉽겠소?”탕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손에 익은 일이라, 혹시라도 아쉬워할까봐 걱정했소. 사실 나도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싫었소. 당신만 괜찮다면 다행이오.”일곱째 아가씨는 미소를 지었고, 그의 말에 모두가 기뻐했다.“한가해지는 것도 괜찮소. 1년에 두세 달은 약도성에 가서 지내면 얼마나 여유롭겠소.”하지만 탕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1년에 두세 달이면, 왕복하는 시간까지 더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고, 그 말은 반년 동안이나 그의 곁에 없다는 뜻이었다.게다가 그도 경성을 몇 달씩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황제 곁을 하루라도 떠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그는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부부였기에 항상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북당은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다. 원가가 일부 사업을 매각하면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가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웠고, 좋은 위치에 있는 가게들은 더더욱 귀한 존재가 되었다.원래 원가는 모든 가게를 이리 나리에게 넘기려 했지만, 이리 나리는 거절했다.그리고 안풍친왕이 먼저 나서서 이리 나리가 이미 너무 많은 가게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경성에서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독점 우
원경릉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일곱째요? 일곱째는 분명 원용의에게 말할 것이고, 원용의는 또 사식이에게 얘기할 것이고, 사식이도 분명 서일에게 전할 것일 텐데요. 만약 서일이 알게 되면, 이제 북당 전체가 다 알게 될 것이오.”우문호는 순간 당황해하며 말했다.“그건 내가 생각지도 못했네.”원경릉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마 지금쯤 황실 친왕들 사이에서 이미 탕양의 이야기가 뒷말로 오가고 있을 것이었다. 겨우 부인을 얻었는데, 밤에 함께 자지 못한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우문호는 탕 대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뒤에서 탕양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여인들이 수군거리니, 남자들은 그를 도우려 했다.물론 부부 사이의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 탕양을 술자리로 초대해 술로 고민을 푸는 방법을 제안했다.그렇게 며칠째 술을 마시던 탕양은 자신의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제 탓입니다. 폐하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제왕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이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여인은 때로 달래줄 필요가 있는 법이다.”그러자 탕양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제가 폐하께 이 이야기를 했을 땐, 혼례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알고 있다. 서두르지는 말거라.”모두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탕양을 바라보았지만, 탕양은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그들은 이미 혼인했지만, 오랜 부부 생활을 한 터라, 남녀 간의 정이 때로는 하루아침에 급격히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탕 대인은 돌아가자마자 일곱째 아가씨에게 이 일을 전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어찌 허구한 날 남의 부부 일에만 관심을 가지니, 할 일이 없나 보오.”“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가 잘 살면 그만이니.”탕양은 일곱째 아가씨를 안으며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경릉은 궁으로 돌아와 이 일을 다섯째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섯째가 말했다.“사실 한 번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그저 경성만 한 바퀴 둘러보면 되지 않소.”“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휘종제 어르신께서 슬퍼하셨소. 이번 생에 고향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돌멩이 하나를 건네주니, 그걸 안고 울었소.”“정말 안타깝소!”다섯째는 증조할아버지 생각에 마음 아파했지만,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큰할아버지께서 그를 데려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오. 휘종제 어르신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 않소? 몇 번 만나보니, 활달하고 산만한 성격에 무슨 사고를 일곱째인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맞소.”원경릉도 깊이 공감했다. 특히 그가 전화로 끈질기게 설득할 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다른 일은 없었소? 부모님 건강은 어땠소? 처남은 여자 친구가 생겼소? 만두는 공부를 잘하고 있소?”다섯째가 끊임없이 질문했다. “괜찮소. 부모님 건강도 괜찮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고혈압이 생겨서 약을 오래 드셔야 하오. 오빠는 여자 친구가 없네. 주진과 아직도 서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이오. 만두는 걱정 안 해도 되네. 내년에 돌아올 것이니.”“다행이오!”다섯째가 기뻐해 하며 말했다. 그는 늘 만두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에, 그가 돌아오면 나라의 일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많은 부담을 짊어지진 못하지만 그래도 괜히 기대가 되었다.“추 할머니 병은 어떠하신가?”다섯째가 또 물었다.“아직은 괜찮소. 아주 좋아졌네. 약에 내성이 생기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원경릉이 말하자 다섯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분들이 늘 건강해지시길 바랄 뿐이오.”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적성루 사람들에게 감동하기 쉬운데, 하물며 북당의 황제인 자신은 오죽하겠는가.“계란은 소식 왔소?”원경릉이 물었다.“왔네. 보시오!”다섯째는 소매 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꺼냈는데, 비둘기를 통해 받은 그 편지에는 몇 줄의 짧은
“별다른 뜻은 없소. 오늘 밤에 유난히 감성적이라 그저 한마디 해본 거네. 사실 너무 감동해서 그러네. 비록 항상 탕 대인에게 빨리 혼인하라고 재촉하긴 했지만, 그가 일곱째 아가씨와 혼인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괜찮소!”원경릉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어쨌든 탕양은 우리와 함께 걸어온 사람이오. 그러니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게 된 건 우리 모두에게 기쁜 일이오.”우문호는 벌써 술에 취한듯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술에 취하면 항상 눈앞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익숙한 천장, 익숙한 사람, 익숙한 탁자와 의자. 취기가 돌며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는 마치 다시 초왕 우문호로 돌아간 듯했고, 갓 원경릉과 마음이 통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 당시 외부 정세는 불안정했고, 태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형제끼리 반목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시절을 돌아보면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우문호가 원경릉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원 선생, 몇 년간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지만, 되돌아보니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지네. 사실 모든 행운과 행복은 원 선생의 잘못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오. 원 선생이 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땠었을까 싶네.”그러자 원경릉이 말했다.“누군가가 이 세상에 몇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소.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네. 아마도 어떤 공간에서는 내가 없는 대신 다른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소.”우문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 세상 속의 나는 정말 불쌍할 것이오.”“그건 모르오. 어쨌든 그곳의 당신은 나를 모르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도 모를 것이오. 각자가 행복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오. 어떤 사람들은 매 끼니 고기가 있는 게 최대의 행복일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봉급이 오르길 바랄 것이오. 또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우문호는 혼인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탕양의 혼사에 화룡점정을 더하는 일이었다.온 경성 사람들이 탕양이 황제를 모시는 신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혼사에 주목했다.탕양은 왕부에서부터 황제를 지지해 온 충신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은 형제의 관계에 못지않았다.거기에 황제가 직접 혼인을 하사했으니,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다들 두터운 예물을 준비해 축하하러 왔다.혼례는 초왕부에서 열렸다. 비록 초왕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이번 경사에 많은 지원이 몰렸다. 여러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미색은 돈에 힘까지 보태며 혼사 지출의 3할이나 부담했다.희상궁도 돌아와 모든 일을 총괄했다. 희상궁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여러 왕부에서 온 사람들을 지휘하며 완벽하게 일을 조율했다.혼례 당일, 황제와 황후도 참석했다.신부가 도착하여, 혼례를 올릴 때 우문호와 원경릉은 상석에 앉아 신랑 신부의 절을 받고는, 그 다음으로 기상궁도 절을 받았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이 드디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정말 기쁘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마음이 풀립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지요.”“잔소리는 계속할 것이다. 이젠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지.”우문호는 걱정이 끝이 없다는 듯 말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이 낳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하네.”“그래도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우문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이오?”원경릉이 그를 흘겨보았다.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첩을 두고도 황제만큼 자식을 많이 두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 연회에서 우문호는 과음했지만 원경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런 노부의 감격은 술로 달래야 한
탕양이 뜨거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거짓말이라면 제 목숨을 앗아가도 됩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그의 시선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돌고 돌아 결국 대인과 함께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미리 말하자면 혼사가 너무 급작스럽게 성사되어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집간 후에도 그저 명목상 부부로만 살 뿐, 당분간은 벗으로 지낼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혼사를 승낙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없던 걸로 하시지요.”그러자 탕양이 거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받아들이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혼사만 승낙한다면 그저 명분이라도 상관없습니다!”이로써 드디어 그의 수년간의 바람이 이루어졌다.일곱째 아가씨가 담담히 말했다.“그렇다면 어디서 지낼지 생각해 보시지요. 하지만 대인 방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니, 그곳에 지낼 수는 없습니다.”탕양이 다급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마마와 상의를 해보았습니다. 지금 초왕부에 아무도 살지 않으니, 우선 그곳에서 지내시지요. 전에 그 방은 저도 쓰지 않고, 바로 서일에게 줬습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물었다.“저택을 따로 살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전에 혼자였을 땐 그런 생각까지 하지 못 했습니다. 초왕부도 누군가 관리해야 하는 터라... 하지만 아가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모아 작은 집이라도 살 수 있습니다.”일곱째 아가씨는 초왕부를 둘러보았는데, 그리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몹시 편안했다. 하지만 황제의 옛 저택이라, 평생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우선은 이곳에서 지내고, 나중에 땅을 사서 직접 집을 지으십시다.”땅을 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탕양은 순간 자기가 보잘 것 없게 느껴졌다.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꼭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일곱째 아가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땅도 제가 사고, 집도 제가 지을 것입니다. 나중에 대인이 잘못이라
노태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 된다. 혼인 전에는 신랑 신부가 만날 수 없어. 이건 풍습이고 규칙이니, 어길 수 없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이 혼사에 정해진 규칙이 있긴 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를 만나 오히려 싸움이 나서 혼사가 그릇될까 봐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께 약속했으니, 반드시 혼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노태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다. 너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신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할 수 없어. 목을 매겠다는 이 어미의 결심은 너가 반대하면 언제든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를 갈며 투덜댔다.“이렇게 얄미운 늙은이는 정말 처음입니다!”“나도 너처럼 고집 센 딸은 처음 본다.”노태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원가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일곱째 아가씨가 시집가는 것이 정말 꿈만 같게 느껴졌다.일곱째 아가씨의 혼사는 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에 그는 코끝이 다 시큰 거렸다.그날 밤, 일곱째 아가씨가 초왕부로 탕양을 찾아가자, 탕양은 그녀를 안으로 들인 후, 단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탕양은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붉은색 옷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올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돋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패기 넘치던 청춘 시절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나 많이 늙어 버렸다.탕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특히 약도성에서의 일을 겪고 난 뒤라,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