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망설이다가 육현경과 함께 차에 올랐다.“저기요!”그때 경찰이 다가와 닫으려는 차문을 잡았다.“같이 경찰서에 가셔서 진술하고 합의라도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장 비서. 네가 경찰서에 가. 승윤이 차가 여기서 기다릴 거야.”“알겠습니다. 회장님 먼저 병원으로 가세요.”소이연과 이명진이 양측에서 육현경을 부축하고 마이바흐 고급차에 올라탔다.정안시립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명진이 미리 육씨 개인 의사에게 연락했다.육현경은 뒷좌석에 기대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다.쇠막대기로 어디를 맞은 거야?소이연은 창백한 얼굴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뼈와 장기도 다쳤나?차마 아래까지는 보지 못하고 택시 네이비만 쏘아봤다.빨리 달리라고 재촉하듯이 말이다.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의사들이 입구에 줄을 서 있었다.차에서 내리자 간호자들이 부축했다.“으윽.”육현경의 신음 소리에 소이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많이 아픈 거야?소이연은 의사 뒤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갔다.“걱정 마.”오히려 육현경이 위로를 해왔다.소이연은 아랫입술을 물고 안쓰럽게 쳐다보았다.육현경이 출장을 갔다 온 후 한 달이나 싸늘하게 대했다.육민이 있는 접대 자리에만 나가서 육민하고 놀아주고 육현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래도 육현경은 늘 육민을 데리고 집에 왔었다.육민의 외로움을 달려주려고 데려오는 줄 알았는데.예상치도 못하게 오늘 육현경이 공장에 나타났다.걱정이 되어 수술실 앞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기다렸다.세 시간이 지나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간호사들이 육현경을 밀고 나왔다,이명진이 먼저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대표님 괜찮으십니까?”소이연은 어떤 답이 나올지 너무나 무척 긴장되었다.“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등이 심하게 다쳤는데 근육 대부분이 손상되고 오른쪽 갈비뼈에 금이 가고 허리 부분이 스쳐서 3-4주 동안 입원하셔야 합니다.”그제야 이명진이 안심하고 소이연도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병실로 옮기겠습니다.”“감
소이연의 가슴이 떨렸다.감동받지 않았다면 순 거짓말이다.하지만…애써 자신의 정서를 누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니?”다른 여자들한테도 목숨을 거냐고?“너.한.테.만.”육현경이 한 글자마다 강조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좀 특별하다는 건가?”육현경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왠지 질문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근데 공장에는 왜 왔어?”육현경이 대답하기 전에 소이연이 화제를 돌려버렸다.그의 개인적인 일을 물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승윤이 네가 공장에 갔다고 했어. 네가 당할까 걱정이 돼서 간 거야. 그 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이지.”아니면 이 침대에 누워 있을 사람은 소이연이다.만약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슬퍼할지 상상도 못하겠다.소이연의 눈동자가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아버지가 직원들을 매수해서 그렇게 시킨 거야.”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예전부터 내가 은하그룹을 인수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그런 꿍꿍이를 꾸민 거야.”“내가 도와줄까?”“네가 끼어드는 게 싫어.”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육현경이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그게 무슨 뜻인지 소이연은 알고 있다.“너까지 다치게 하다니 두고 봐. 내가 반드시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은 한 명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연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소씨 가문에 대한 참을성도 이젠 한계를 넘어섰다.전에 성한 곳이 없이 상처를 받았지만 복수란 건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어쨌든 소 씨 성을 가진 이상 서로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다 생각했었다.그런데 양보를 하면 할수록 이 인간들은 염치도 모르고 계속 괴롭혔다.이런 인간들에게 애초부터 선한 마음을 갖지 말았어야 했다.“알았어.”육현경이 대답했다.소이연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하고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서 눈 감아 주기로 했다.그때 소이연의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하니 베란다로 가서 받았다.“회장님. 진술은 끝났습니다. 회장님을 해쳤던 유걸
게다가 육현경은 너무 완벽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따뜻한 영양죽을 먹고 나니 속이 한결 좋아졌다.그동안 일만 하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다.배부르게 먹었더니 슬슬 피곤이 몰려와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다.눈을 떴을 때 이미 밤이 되었다. 누가 덮어줬는지 이불까지 덮고 있었다.“깼어?”그때 나지막한 굵은 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깜짝 놀랐다. 여기 어딘지 까먹을 뻔했다.육현경은 그 반응이 왠지 귀여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소이연은 어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애써 태연한 척하며 소파에서 일어섰다.벽에 걸린 시계를 봤더니 세 시간이나 잔 것이다.병간호를 한다면서 환자보다 더 자버렸다.“화장실 갈래?”소이연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어색한 분위기를 어찌 해보려고 했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더 어색해졌다.“내 말은…”“가고 싶어.”육현경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소이연이 물끄러미 쳐다봤다.“가면 안 돼?”육현경이 억울한 척 물었다.“아, 아니.”소이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물었다.“어떻게 할 거야? 뭐 세숫대야라도 갖고 올까?”“누워서 못해.”“그럼…”“일어날 수 있어.”“그럼 간호사 부를게.”“날 부축해주면 돼. 그리 무겁지 않아.”“…”무거운 문제가 아니잖아?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조심스럽게 부축했다.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의사가 누워있으라고 했는데 이래도 되겠어?”“괜찮아.”소이연은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화장실이 급한 마당에 따져도 소용없다.육현경을 부축해 일어 세우자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아파?”소이연이 긴장하며 물었다.“아니.”“…”안 아픈 척 허세 부리긴.속으로 그렇게 말해도 아주 조심스럽게 화장실까지 부축해줬다.화장실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였다.“나 못 버티겠어.”그 말은 혼자 설 수 없다는 말이다.“금방 끝나.”“…”지금 빠르고 늦은 문제 아니라고!순순히 돌아서 등을 내주며 육현경이 기대게 했다.‘안 무겁기는 개뿔
소이연은 안간힘을 쓰며 육현경을 침대에 눕혔다.VIP병실은 스위트룸이라 간호사와 간병인은 거실에 있고 침실에 소이연과 육현경 둘만 있었다.비서 이명진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한 방에 있으니 왠지 어색했다.“과일 먹을래?”소이연이 먼저 말을 걸었다.“응.”“사과 줄까?”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사과였다.“그래.”“알았어.”소이연이 먼저 사과를 씻고 과도로 깎기 시작했다.워낙 과일을 잘 안 먹어서 집에 과일이 거의 없기도 했고 출국을 하든 문씨 집에 있든 바쁘고 지금 은하그룹을 관리하면서 정신없다 보니 직접 사과를 깎아 먹는 일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사과 껍질을 되는 대로 깎아버린 결과는 참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이걸 줘도 되나?’슬며시 고개를 들어 육현경을 봤다. 그의 눈이 웃고 있다.“다 깎았어?”“웃지 말고 먹어.”뒤에 숨긴 사과를 앞으로 내밀었다.사과를 보던 육현경이 평가했다.“참 정교하게 생겼네.”칭찬이야? 아님 비꼬는 거야?“안 먹을 거야?”“먹여줘.”“손이 없어?”“힘 없어.”아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더라?어이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가에 가져갔다.육현경이 한입 베어 물 때 입술이 손가락에 살짝 닿았다.소이연은 입술에서 전해지는 온화한 촉감을 느끼고 살짝 떨었다.“엄청 달아. 너도 먹어볼래?”“난 괜찮아. 과일 잘 안 먹어.”소이연이 거절했다.그것도 다급하게 거절했다.육현경이 가볍게 웃으면서 사과를 한 입 한 입 천천히 먹었다.겨우 한 알을 다 먹었다.소이연은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기 바빴다.“위 안 좋아? 삼촌 말로는 네가 위출혈이 있다던데.”두 사람 분위기가 너무 어색한 건 싫어서 육현경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그날은 내가 너무 마셔서 그래.”소이연이 가볍게 받아쳤다.“그때 한 번만?”육현경이 다시 물었다.“아니…”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여자가 접대 자리에서 손해보지 않으려면 술을
겨우 저녁밥을 먹여주고 이명진은 도망치듯이 침실에서 나갔다.친절하게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소이연이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11시.집에 가려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내 몸 좀 닦아줘.”육현경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소이연은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의사가 당분간 샤워하지 말라고 해서.”“…”알고는 있지만 몸을 닦아줘도 되나?“남자가 내 몸을 건드리는 건 익숙하지 않아.”육현경이 설명했다.소이연의 머릿속에 이명진과 간병인이 스쳐 지나갔다. 둘 다 남자다.“닦지 않으면 오늘 저녁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아. 수고해줘.”소이연이 숨을 들이마셨다.옛사람들의 말로는 작은 은혜도 두 배로 갚으라 했거늘.하물며 육현경에게 받은 은혜는 작은 것이 아닌 이상 따뜻한 물을 받아 침대 옆에 놓았다. 그리고 수건을 꼭 짜서 육현경에게 다가갔다.“눈 감아. 먼저 얼굴부터 닦을게.”육현경이 눈을 감으며 협조했다.따뜻한 물수건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닦아내고 수건을 한 번 헹구고 이번엔 목을 닦아주었다.쇄골에 닿았을 때 소이연이 물었다.“몸도 닦아야 돼?”“응.”소이연은 수건을 놓고는 눈 딱 감고 환자복을 벗겼다.환자복 안에 감춰진 남자의 가슴이 눈에 띄었다.웃통을 벗은 남자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문씨네 연예인들이 모델 사진을 찍을 대도 웃통을 벗고 찍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하지만 이번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육현경의 상반신 근육선은 완벽하고 섹시했다.수건을 통해서도 가슴 근육과 복근의 탄력이 느껴질 정도였다.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열심히 닦았다.팔뚝과 허벅지도 꼼꼼하게 닦았다.닦고나서 왠지 숨이 차는 것 같았다.지쳐서 인지 아님…소이연이 세숫대야를 들고 떠나려고 할 때였다.“여기 안 닦았어.”육현경이 일깨워주었다.소이연은 대야를 꽉 쥐면서 몸을 떨었다.이 자식이 점점 더 들이대네?“내가 할게.”육현경이 덧붙였다.그 말에 소이연이 이를 악물었다.왠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물
“일 다 보고 올게.”소이연은 그래도 승낙했다.“알았어.”육현경은 전혀 사양하지도 않고 활짝 웃어 보였다.소이연이 병원을 떠나자 그제야 이명진이 병실로 들어갔다.“대표님.”“화장실 갈 테니까 부축해줘.”육현경이 분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에 왜 사모님한테 부탁하지 않았어요?”육현경이 흘겨보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대표님은 그런 남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요.”“…”육현경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그저 소이연에게 빈뇨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이명진이 부축해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육현경은 눈을 의심했다.“대표님 제가 바지를 벗겨 드릴까요?”이명진이 정성스럽게 시중을 들려 했다.대표님께서 사랑에 빠진 이후로 ‘총애’를 잃어서 아무리 아부해도 돌아온 건 싸늘한 태도였다.하지만 기회가 올 때마다 아첨하고 싶은 마음은 멈출 수 없었다.“나가!”육현경이 차갑게 말했다.뭐가 또 불만인데?이명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육현경은 쓰레기 통에 버려진 수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내가 얼마나 싫었으면……이튿날 아침 소이연이 출근을 했을 때 소나은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소나은이 소이연 뒤를 따라 사무실까지 들어왔다.“언니. 어제 아빠가 몇 번을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화난 말투였다.“병원에 있었어. 배터리가 다 나갔기도 했고.”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충전을 했으면 아빠한테 전화라도 했어야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정말 나를 걱정했을까?”소이연이 의자에 앉으며 차갑게 노려봤다.소나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역시 소이연을 속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나 할 일이 많아. 다른 일이 없으면 나가.”소나은은 반박도 못하고 나가버렸다.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소승영에게 연락했다.…한편, 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소승영을 하루 종일 무시했으니 이젠 받아줘야 할 때다.“소이연! 이젠 내 전화도 안 받는다 이거냐?”“하.”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빠 전화
소승영은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어떻게 하면 합의 볼 건데?”“아빠는 왜 자꾸 합의 보려 하세요? 현경이 저를 대신해 그 몽둥이를 맞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요!”소이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안다. 너도 많이 무서웠을 테지. 하지만 나도 은하그룹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이 일이 밝혀지면 은하그룹에 대한 타격이 얼마나 큰지 넌 알잖니. 어쨌거나 우린 가족이고 내가 은하그룹에 몸을 담은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어. 나도 우리 그룹에 감정이란 게 있고 사명감이 있단다. 나는 은하 그룹의 직원들한테까지 영향 가는 걸 원치 않아.”은하그룹에 대해 설명하는 소승영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소이연은 그의 모습에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소이연 때문에 자신이 피해 입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소이연은 체념한 듯 대답했다.“아빠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니 합의하는 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합의할 마음이 생긴 거니?”소승영은 입꼬리가 씰룩댔다.“하지만 조건이 있어요.”“말해보거라.”“첫째, 현경이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 맞아서 입원까지 했는데 입원 기간 모든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세요. 의료비, 입원 비용, 식비, 간호인 고용비용 그리고 위자료까지요. 하나도 빠짐없이 지불해야 합의 볼 거예요.”소승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육씨 도련님이 입원했다면 최고의 설비와 제일 유명한 의료진이 투입될 텐데 그 금액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가해자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라 결국 소승영이 대신 지불해야 될 것이다.“그래.”소승영은 간신히 대답했다.“둘째, 가해자더러 직접 와서 저와 현경이한테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은하그룹에서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고요.”“응.”소승영은 대충 듣고는 대답했다. 그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이기 때문이다.“셋째, 은하그룹 공장장 이창덕 그리고 생산부 부장 유봉보고 사퇴하라 하세요. 자발적으로요.”“그것만은 안 된다!”소승
소나은은 소이연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소승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육현경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전에는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기에 불쑥 나타나면 그의 반감을 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지금 그의 병문안을 가는 것만큼 좋은 핑계는 없었다.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홀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똑똑.그녀는 병실 문을 두드렸다.“아, 현경 씨. 안녕하세요.”소나은은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눈웃음을 지으며 들어갔다.누워있어도 조각낸 것처럼 잘생겼어!하지만 육현경의 표정은 어두웠다.“저는 소나은이라고 해요. 소이연 친 동생이에요.”소나은은 자기소개를 하기에 급급했다.“배가 다른 동생이겠죠.”육현경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소나은은 당황했으나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맞아요. 아, 오늘 언니가 바쁘다고 저더러 현경 씨한테 가보라고 했어요. 저희 은하공장 노동자가 현경 씨를 다치게 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합니다. 제가 은하그룹을 대표해서 이렇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육현경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이연이가 그쪽더러 와보라 했다고요?”“화나셨구나... 언니가 은하그룹을 맡은지 얼마 안 되다 보니까 업무가 좀 많아서 시간이 안된대요. 화내지 마요.”소나은은 소이연을 감싸고돌았다.내가 소이연한테서 문서인도 뺏어왔는데 육현경이라고 해서 어려울 건 없지. 남자들 다 똑같다고!“아, 그래요?”육현경은 그녀를 비웃듯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그쪽이 이연이 예비 신랑을 꼬셔서 뺏었다던데. 그런데도 이연이가 그쪽더러 저의 병문안을 오라고 시키던 가요?”그의 직설적인 발언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소나은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바빴다.“현경 씨,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저와 언니 그리고 문서인 씨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오해예요. 혹시 언니가...”“그쪽과 문서인 사이의 일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 않고요.”육현경은 소나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의사 선생님이 저더러 절대적인 안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말에 허영지는 대성통곡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던 송기명마저 아들 일에 눈물을 보였다.평소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친형이었기에 송문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고 하지수 역시 송승우가 다리를 잃는다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어릴 때부터 본인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되려 죽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아 하지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목숨이 다리 한쪽보다는 더 중요했기에 결국 사인을 한 송기명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기분 좋게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닥친 비극에 송문수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수술에 다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요한 복도에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 나왔다.가족들 못지않게 속을 태우던 장지석은 피곤한 듯 마스크를 벗는 의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물었다.“승우는 좀 어떻습니까?”그제야 가족들도 정신을 차리고 하지수와 송문수가 어머니 아버지를 부축한 채 의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다른 말보다 먼저 나온 게 의사의 한숨이라 허영지는 쓰러질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며 물었다.“왜 그래요 선생님, 우리 아들 잘못된 거 아니죠?!”“생명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그런 데라뇨!”“환자분이 다리를 잃었으니 깨어나시고 나서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할 겁니다. 가족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 다리 외에도 몸 각 부위가 다 강한 충격을 받아서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의식 돌아오고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일반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의 말에 허영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송기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들은 전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그들도 송승우가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