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은은 소이연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소승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육현경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전에는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기에 불쑥 나타나면 그의 반감을 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지금 그의 병문안을 가는 것만큼 좋은 핑계는 없었다.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홀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똑똑.그녀는 병실 문을 두드렸다.“아, 현경 씨. 안녕하세요.”소나은은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눈웃음을 지으며 들어갔다.누워있어도 조각낸 것처럼 잘생겼어!하지만 육현경의 표정은 어두웠다.“저는 소나은이라고 해요. 소이연 친 동생이에요.”소나은은 자기소개를 하기에 급급했다.“배가 다른 동생이겠죠.”육현경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소나은은 당황했으나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맞아요. 아, 오늘 언니가 바쁘다고 저더러 현경 씨한테 가보라고 했어요. 저희 은하공장 노동자가 현경 씨를 다치게 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합니다. 제가 은하그룹을 대표해서 이렇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육현경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이연이가 그쪽더러 와보라 했다고요?”“화나셨구나... 언니가 은하그룹을 맡은지 얼마 안 되다 보니까 업무가 좀 많아서 시간이 안된대요. 화내지 마요.”소나은은 소이연을 감싸고돌았다.내가 소이연한테서 문서인도 뺏어왔는데 육현경이라고 해서 어려울 건 없지. 남자들 다 똑같다고!“아, 그래요?”육현경은 그녀를 비웃듯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그쪽이 이연이 예비 신랑을 꼬셔서 뺏었다던데. 그런데도 이연이가 그쪽더러 저의 병문안을 오라고 시키던 가요?”그의 직설적인 발언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소나은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바빴다.“현경 씨,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저와 언니 그리고 문서인 씨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오해예요. 혹시 언니가...”“그쪽과 문서인 사이의 일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 않고요.”육현경은 소나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의사 선생님이 저더러 절대적인 안
그의 말에 소나은은 제자리에 굳었다.“죄송해요.”소나은은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시울이 빨개졌다.“현경 씨가 백합꽃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다음부터 주의할게요...”“백합 말고 그쪽한테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아요.”육현경은 또박또박 대답했는데 살기가 넘쳤다.“다음부터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소나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이 남자... 지금 뭐라 한 거야?어릴 적부터 쭉 남자들이 주는 사랑만 받고 자랐는데... 지금처럼 모욕적인 일은 없었어.나처럼 귀엽고 나약한 여자를 안 좋아하는 남자가 없었다고!소이연, 너 때문이야!네가 있으니까 현경 씨가 고의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그녀는 겨우 진정하고는 백합 꽃다발을 들고 병실에서 나갔다. 나가면서도 눈물을 훔치는 것이 배우 뺨치는 연기 실력이었다.소이연은 그런 소나은을 쳐다보았다.인정하긴 싫지만 복수의 쾌감은 아주 컸다.학창 시절부터 소나은에게 구애하는 남자가 줄을 섰다.왜 모든 남자들은 다 소나은, 이 여우 같은 여자한테 끌릴까?그런데 육현경만큼은 그러지 않았다.앞으로의 일은 짐작할 수 없지만 지금은 속이 통쾌했으니 그걸로 됐다.“이연아, 왔어?”육현경은 부드럽게 소이연을 불렀고 그제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육현경 침대 곁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얘기했다.“내가 말했지? 너 다친 거 그 사람들한테 100배 갚아줄 거라고.”“그랬지.”“은하그룹에는 온통 아빠의 사람들이 깔려있어. 그래서 아빠와 맞서려면 내 쪽에 서줄 사람들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 마땅한 증거도 없어서 그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어. 그리고 은하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을 만들어서 더 큰 타격을 입힐 생각도 없고. 그래서 너한테 물질적으로 보상해 줄 생각이야. 이게 내 최선인걸.”“물질적인 거라면 돈?”육현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네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돈인 걸 알아. 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아니, 넌 더 많은 걸 할 수 있어.”소이연은
소이연은 육현경의 병실에 남아있었다.그녀는 노트북을 켜고서는 업무를 처리하기에 바빴지만 육현경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녀는 행복했다.고도로 집중할 때에는 육현경이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그럴 때면 그는 눈치 있게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심지어 그는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그의 병실 앞을 지나던 이명진은 이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환자가 이래도 되는 거야?그는 그의 보스 육현경이 “현모양처”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빨리 지나가자.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것도 못 봤어. 두 사람 눈에 안 띄는 게 좋아.소이연은 회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려고 할 때 문뜩 노트북 옆에 놓여있는 접시를 발견했다. 이쑤시개와 함께 놓여있는 건 그가 직접 깎아준 사과였다.그녀는 냉큼 한 조각 집어먹었다.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사과가 유난히 맛있네.한 조각 또 한 조각.그녀는 먹으면서 노트북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이 병실 안에는 그녀와 그뿐인데 업무를 보던 그녀가 아니라면 이 사과를 깎을 사람은…그녀가 육현경을 쳐다보자 그는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웃고 있었다.“네가 깎은 거야?”소이연은 놀라워했다.“그럼 누가 했겠어?”육현경은 어깨를 으쓱했다.“넌 환자잖아.”“그래서 뭐? 팔다리가 멀쩡하기만 한데.”아니, 내 뜻은 내가 환자인 너를 돌봐야 한다는 건데.누가 너 팔다리 문제 있다 했어?그녀는 불현듯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육현경을 위해 과일을 깎았지만 그처럼 세심하게 먹기 좋은 크기로 깎지 않고 크게 썰어서 그에게 줬었다. 그녀는 육현경과 비하면 자신이 너무 대충 해준 것 같아 반성했다.“사실 난 평소에 과일을 자주 먹지 않아.”소이연은 그에게 사실을 알려줬다. 또한 과일을 자주 먹지 않아서 디테일에 신경을 못 쓴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그럴 것 같았어.”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 앞에 놓인 접시에 사과가 제일 작은 두 조각만 남은 것을 발견했다.“큼. 오늘 사과가 유난히 맛
“아니라고 하지 마.”육현경은 소이연이 답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너의 마음 다 느껴진 다고.”그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말란 뜻이었다.소이연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육현경을 쳐다보았다.“난 네가 다 아는 줄 알았어.”“네가 말하지 않는 이상 난 몰라.”육현경은 말을 에둘러 하지 않았다.“난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아. 현경 씨한테 얘기했듯이 난 당신의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소이연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그런데도 날 추구한 건 너야.”그녀는 인정하기 싫었다. 아니, 예수진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그와 만나려면 제3자는 가뿐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그니까 이연 씨는 내가 자꾸 들이대서 흔들렸고 그래서 일방적으로 나와 거리를 뒀다, 이거네?”육현경은 꼬치꼬치 물었다.소이연은 침묵으로 대답했다.누가 아니랬어? 육현경 이 남자, 어떻게 내 마음속을 꿰뚫고 있는 거지?거리를 둬야겠어.“내가 썩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행동했나 봐. 앞으로 자제할게.”“현경 씨, 때로는 포기도 일종 선택이야.”소이연도 진지하게 대답했다.“우리는 친구로 지낼 수도 있어. 민이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데… 나도 민이를 많이 아끼고 좋아해. 이 인연을 토대로 현경 씨만 동의한다면 민이를 내 양아들로 삼고 싶어. 친한 친구 사이에 서로의 자식을 양아들로 삼는 게 보편적이잖아.”“이연 씨, 이상한 생각은 집어치워.”소이연은 육현경이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그는 한치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다.“민이의 엄마가 되어주든지 아니면…”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니면 뭐?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거야 뭐야!“아니면 내 아내가 되어줘.”같은 말 아니야?“응. 네 선택이 맞아. 너에겐 선택지가 없어.”육현경은 소이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현경 씨. 후회하게 될 거야.”소이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후회했었어.”“어..?”“나 화장실 가
소나은은 소이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쳐다만 봤다.그녀는 소이연이 자신을 불러서 육현경의 병문안을 간 일에 대해 말할 줄 알았다. 소이연이 분명 자신의 속내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대범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지만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소이연은 어제의 일을 언급도 하지 않았으나 소나은은 그녀가 신경 쓰일 것이라고 짐작했다.소이연은 어릴 적부터 소나은의 곁에 남자들이 줄을 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소이연은 지금 그녀와 업무상의 일만 얘기했다. 더군다나 이창덕과 유봉을 사퇴시키는 건 소이연의 생산 프로젝트를 추진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아버지의 왼팔 오른팔이었으니 소이연을 위해 한 몸 바쳐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이연은 이제 와서 그 권력을 소나은에게 주었다. 하지만 소나은도 아버지 쪽 사람인데 소이연은 왜 헛수고를 하는 걸까?소이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하지만 소나은은 태연한 척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그녀는 소이연이 설계한 함정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소이연이 설마 나한테 어쩌지는 않겠지? 대체 무슨 생각인지…혹시 혼자서 너무 바빠서 나한테 권력을 주는 건가?필경 그녀는 육현경한테 신경이 쏠려 어제 병원에서 그와 함께 잤다. 아니나 다를까, 소이연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육현경을 보러 병원에 가려 했다.“네. 좋아요.”소나은은 시원하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우리는 가족이고 제가 은하그룹에서 일한 지도 시간이 좀 되었으니 언니를 위해서, 또한 은하그룹을 위해서 잘 해보도록 할게요.”소이연은 그저 웃어 보였다.“수고해.”“언니, 별말씀을요.”“좀 있다가 이사진 회의에 꼭 참석해. 나가봐.”“네, 언니.”소나은은 소이연의 사무실을 나갔다.고의적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는데도 소이연은 그녀에게 어제의 일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신경 안 쓰이나?아니면 날 건드리면 자신의 일을 돕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인가?아마도 후자겠지.……은하그룹 이사진 회의실.회의 때마
소이연과 지내본 사람들은 늘 그녀의 똑똑한 면에 탄복했었다.모두 소이연의 속내를 추측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른 화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제가 은하그룹에 온 지도 두 달쯤 되어가고 있는데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리고 저의 동생 소나은 씨의 도움 하에 회사에 잘 적응해하고 있어요. 회사 경영에 서투르지만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아무도 소이연의 말에 박수 쳐주지 않았다.소이연이 그녀에게 권력을 쥐여주었지만 소나은은 아무 반응 없었다.소이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저희 회사에는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점은 고쳐나가는 게 맞죠.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께 알릴 사항은 바로 인사 변동입니다. 은하그룹의 일부 직원들의 직무 변동이 있을 겁니다. 아, 물론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말이죠.”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회의실 안은 수군대는 소리로 가득 찼다.인사 변동은 직원들에게 있어서 아주 큰 사건인데 소이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소식을 선포했다.“인사 변동 인원 명단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저를 찾아오시거나 총괄 경영자를 찾아가도 되고요. 명단에서 제외된 이사진들은 해당 부문의 직원들에게 잘 설명해 주세요. 인사 인계 절차를 잘 밟으셔야만 회사 운영에 지장이 가지 않으니깐요.”소이연은 스크린에 명단을 띄워놓고 읽어내려 갔다.“인사팀 총감독 임현재는 경영지원부 차량 운용 부장, 인사팀 부감독으로 인명…”소이연의 말이 끊나기도 전에 임현재가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네? 저더러 차량을 관리하라고요?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아니요. 임현재 씨는 제가 말한 이 자리가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인사팀 총감독은 지금 인사팀 부감독을 맡고 있는 오흥민 씨가 적합하고요.”“제가 은하그룹에 몸을 담은지 10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다른 자리에 안배하시다니… 너무 하신 거 아…”“임현재 씨. 다른 의견이 있으시면 저를 직접 찾아오거나 총괄 경영자 소나은 씨를 찾아
소나은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직원들을 사무실에서 내보내고 퇴근하려는데 임현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그녀의 사무실 책상 위로 던졌다.“이봐요, 소나은 씨. 내가 당신 그리고 당신 아버지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나한테 이러는 거죠?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지금 저를 파면한다고요? 오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어디도 못 가요. 당장 설명해요!”소나은은 임현재의 기세에 사뭇 놀랐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구조 전화를 걸려 했지만 잠금을 해제하기도 전에 임현재한테 뺏겨버렸다.“임 감독님, 진정하세요!”소나은은 긴장해하면서 그의 정서를 진정시키려 했다.“감독님이 파면 당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언니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저도 잘 몰라요. 미리 저와 상의를 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알았다면 무조건 언니를 말…”“거짓말! 이제야 보이네요. 소씨 가문의 더러운 속내가 이제야 보인다고요!”임현재는 소나은의 말을 듣지는 않았다.“당신과 당신 아버지 그리고 소이연 씨 사이에 불화가 있어서 소이연 씨를 끌어내리려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멍청하네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피는 못 속이나 보죠? 당신들이 짜고 친 판이 아니라면 은하그룹에 이런 인사 변동은 없었을 거라고요!”“임 감독님, 오해예요! 언니가 은하그룹을 독차지하려 했지만 저와 아버지가 간신히 제지시켰고 언니를 회사에서 내보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언니가 독차지 한 것들을 다시…”“닥쳐!”임현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당신과 소이연 사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계속 지켜봤는데 여러 번 소이연 사무실로 가더군! 비밀을 지키라고까지 한 걸 보면 인사 변동에 관한 얘기겠지. 그리고 이창덕과 유봉도 자발적인 사직이 아니라 소승영이 쫓은 거잖아! 그 두 사람은 소승영의 왼팔 오른팔이었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내쫓다니… 당신네 집안사람들,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것들이야!”“임 감독님, 오해예요. 소이연이 설계한 판에서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요! 임 감독이 저와 아버지를 오해
이명진은 은하그룹의 최근 이슈를 회보했다. 그러고는 진심으로 탄복했다.“역시 사모님! 아주 완벽한 판을 짜셨어요. 홀로 은하그룹에 가셔서 늘 쫓겨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4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은하그룹의 절대적 지배권을 쟁취하셨어요.”그의 말을 듣던 육현경은 큰 반응은 없었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이건 내부 소식인데요. 임현재가 소승영의 만행을 도처에 퍼뜨리고 있대요. 배은망덕하다느니, 교활한 여우 같다느니… 거기에 이창덕과 유봉도 합세해서 소승영의 위신이 바닥까지 떨어졌어요. 심지어 소씨 그룹 주가도 영향받았대요. 또한 은하그룹에서 소승영을 믿는 사람이 없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사모님한테 충성해야 하는 상황이래요.”육현경은 따듯한 차를 여유롭게 마시면서 이명진이 소이연에 대한 숭배심이 담긴 말을 듣고 있었다.“은하그룹에서 사모님께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은 소나은 뿐입니다. 비록 사모님의 적수가 되지는 못하지만 둘이 정말로 충돌이 생기더라도 사모님께서 손해 볼 상황은 아니고요.”이명진은 소이연을 굳게 믿고 있었다.“아, 참. 그리고 사모님께서 은하그룹 하반기 시즌 복장 생산을 직접 관리하고 계신대요. 시간이 긴박하고 한치의 실수도 있으면 안 되어서 병문안을 매일 오지는 못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퇴원하시는 날에는 꼭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셨고요.”웃고 있던 육현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이명진은 몰래 웃었다.대표님은 사모님 바라기야.그리고 챙김 받는 걸 익숙해하신다니까.“나 언제 퇴원해?”육현경은 그에게 물었다.“별 이상 없으면 3일에서 5일 사이에요.”“3일.”육현경은 단호하게 말했다.“3일 후에 퇴원할 수 있게 해.”“네!”이명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이 세상에 대표님이 사모님을 만나는 것을 막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살고 싶지 않다면 모를까………소이연은 사무실 안에 놓여있는 시계를 보았다.벌써 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그녀가 소나은에게 생산 부문에 대한 관리를 맡긴 건 보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