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안간힘을 쓰며 육현경을 침대에 눕혔다.VIP병실은 스위트룸이라 간호사와 간병인은 거실에 있고 침실에 소이연과 육현경 둘만 있었다.비서 이명진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두 사람이 한 방에 있으니 왠지 어색했다.“과일 먹을래?”소이연이 먼저 말을 걸었다.“응.”“사과 줄까?”방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사과였다.“그래.”“알았어.”소이연이 먼저 사과를 씻고 과도로 깎기 시작했다.워낙 과일을 잘 안 먹어서 집에 과일이 거의 없기도 했고 출국을 하든 문씨 집에 있든 바쁘고 지금 은하그룹을 관리하면서 정신없다 보니 직접 사과를 깎아 먹는 일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사과 껍질을 되는 대로 깎아버린 결과는 참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이걸 줘도 되나?’슬며시 고개를 들어 육현경을 봤다. 그의 눈이 웃고 있다.“다 깎았어?”“웃지 말고 먹어.”뒤에 숨긴 사과를 앞으로 내밀었다.사과를 보던 육현경이 평가했다.“참 정교하게 생겼네.”칭찬이야? 아님 비꼬는 거야?“안 먹을 거야?”“먹여줘.”“손이 없어?”“힘 없어.”아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더라?어이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가에 가져갔다.육현경이 한입 베어 물 때 입술이 손가락에 살짝 닿았다.소이연은 입술에서 전해지는 온화한 촉감을 느끼고 살짝 떨었다.“엄청 달아. 너도 먹어볼래?”“난 괜찮아. 과일 잘 안 먹어.”소이연이 거절했다.그것도 다급하게 거절했다.육현경이 가볍게 웃으면서 사과를 한 입 한 입 천천히 먹었다.겨우 한 알을 다 먹었다.소이연은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서 손을 씻기 바빴다.“위 안 좋아? 삼촌 말로는 네가 위출혈이 있다던데.”두 사람 분위기가 너무 어색한 건 싫어서 육현경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그날은 내가 너무 마셔서 그래.”소이연이 가볍게 받아쳤다.“그때 한 번만?”육현경이 다시 물었다.“아니…”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여자가 접대 자리에서 손해보지 않으려면 술을
겨우 저녁밥을 먹여주고 이명진은 도망치듯이 침실에서 나갔다.친절하게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소이연이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11시.집에 가려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내 몸 좀 닦아줘.”육현경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소이연은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의사가 당분간 샤워하지 말라고 해서.”“…”알고는 있지만 몸을 닦아줘도 되나?“남자가 내 몸을 건드리는 건 익숙하지 않아.”육현경이 설명했다.소이연의 머릿속에 이명진과 간병인이 스쳐 지나갔다. 둘 다 남자다.“닦지 않으면 오늘 저녁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아. 수고해줘.”소이연이 숨을 들이마셨다.옛사람들의 말로는 작은 은혜도 두 배로 갚으라 했거늘.하물며 육현경에게 받은 은혜는 작은 것이 아닌 이상 따뜻한 물을 받아 침대 옆에 놓았다. 그리고 수건을 꼭 짜서 육현경에게 다가갔다.“눈 감아. 먼저 얼굴부터 닦을게.”육현경이 눈을 감으며 협조했다.따뜻한 물수건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닦아내고 수건을 한 번 헹구고 이번엔 목을 닦아주었다.쇄골에 닿았을 때 소이연이 물었다.“몸도 닦아야 돼?”“응.”소이연은 수건을 놓고는 눈 딱 감고 환자복을 벗겼다.환자복 안에 감춰진 남자의 가슴이 눈에 띄었다.웃통을 벗은 남자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문씨네 연예인들이 모델 사진을 찍을 대도 웃통을 벗고 찍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까.하지만 이번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육현경의 상반신 근육선은 완벽하고 섹시했다.수건을 통해서도 가슴 근육과 복근의 탄력이 느껴질 정도였다.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열심히 닦았다.팔뚝과 허벅지도 꼼꼼하게 닦았다.닦고나서 왠지 숨이 차는 것 같았다.지쳐서 인지 아님…소이연이 세숫대야를 들고 떠나려고 할 때였다.“여기 안 닦았어.”육현경이 일깨워주었다.소이연은 대야를 꽉 쥐면서 몸을 떨었다.이 자식이 점점 더 들이대네?“내가 할게.”육현경이 덧붙였다.그 말에 소이연이 이를 악물었다.왠지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물
“일 다 보고 올게.”소이연은 그래도 승낙했다.“알았어.”육현경은 전혀 사양하지도 않고 활짝 웃어 보였다.소이연이 병원을 떠나자 그제야 이명진이 병실로 들어갔다.“대표님.”“화장실 갈 테니까 부축해줘.”육현경이 분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에 왜 사모님한테 부탁하지 않았어요?”육현경이 흘겨보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대표님은 그런 남자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요.”“…”육현경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그저 소이연에게 빈뇨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이명진이 부축해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육현경은 눈을 의심했다.“대표님 제가 바지를 벗겨 드릴까요?”이명진이 정성스럽게 시중을 들려 했다.대표님께서 사랑에 빠진 이후로 ‘총애’를 잃어서 아무리 아부해도 돌아온 건 싸늘한 태도였다.하지만 기회가 올 때마다 아첨하고 싶은 마음은 멈출 수 없었다.“나가!”육현경이 차갑게 말했다.뭐가 또 불만인데?이명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육현경은 쓰레기 통에 버려진 수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내가 얼마나 싫었으면……이튿날 아침 소이연이 출근을 했을 때 소나은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소나은이 소이연 뒤를 따라 사무실까지 들어왔다.“언니. 어제 아빠가 몇 번을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어?”화난 말투였다.“병원에 있었어. 배터리가 다 나갔기도 했고.”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충전을 했으면 아빠한테 전화라도 했어야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정말 나를 걱정했을까?”소이연이 의자에 앉으며 차갑게 노려봤다.소나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역시 소이연을 속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나 할 일이 많아. 다른 일이 없으면 나가.”소나은은 반박도 못하고 나가버렸다.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소승영에게 연락했다.…한편, 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소승영을 하루 종일 무시했으니 이젠 받아줘야 할 때다.“소이연! 이젠 내 전화도 안 받는다 이거냐?”“하.”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아빠 전화
소승영은 가까스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어떻게 하면 합의 볼 건데?”“아빠는 왜 자꾸 합의 보려 하세요? 현경이 저를 대신해 그 몽둥이를 맞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라고요!”소이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안다. 너도 많이 무서웠을 테지. 하지만 나도 은하그룹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이 일이 밝혀지면 은하그룹에 대한 타격이 얼마나 큰지 넌 알잖니. 어쨌거나 우린 가족이고 내가 은하그룹에 몸을 담은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어. 나도 우리 그룹에 감정이란 게 있고 사명감이 있단다. 나는 은하 그룹의 직원들한테까지 영향 가는 걸 원치 않아.”은하그룹에 대해 설명하는 소승영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소이연은 그의 모습에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말은 그럴싸해 보여도 소이연 때문에 자신이 피해 입을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소이연은 체념한 듯 대답했다.“아빠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시니 합의하는 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합의할 마음이 생긴 거니?”소승영은 입꼬리가 씰룩댔다.“하지만 조건이 있어요.”“말해보거라.”“첫째, 현경이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 맞아서 입원까지 했는데 입원 기간 모든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세요. 의료비, 입원 비용, 식비, 간호인 고용비용 그리고 위자료까지요. 하나도 빠짐없이 지불해야 합의 볼 거예요.”소승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육씨 도련님이 입원했다면 최고의 설비와 제일 유명한 의료진이 투입될 텐데 그 금액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가해자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라 결국 소승영이 대신 지불해야 될 것이다.“그래.”소승영은 간신히 대답했다.“둘째, 가해자더러 직접 와서 저와 현경이한테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 은하그룹에서 일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고요.”“응.”소승영은 대충 듣고는 대답했다. 그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이기 때문이다.“셋째, 은하그룹 공장장 이창덕 그리고 생산부 부장 유봉보고 사퇴하라 하세요. 자발적으로요.”“그것만은 안 된다!”소승
소나은은 소이연의 사무실에서 나온 뒤 소승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육현경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그녀는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전에는 접근할 기회조차 없었기에 불쑥 나타나면 그의 반감을 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지금 그의 병문안을 가는 것만큼 좋은 핑계는 없었다.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홀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똑똑.그녀는 병실 문을 두드렸다.“아, 현경 씨. 안녕하세요.”소나은은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눈웃음을 지으며 들어갔다.누워있어도 조각낸 것처럼 잘생겼어!하지만 육현경의 표정은 어두웠다.“저는 소나은이라고 해요. 소이연 친 동생이에요.”소나은은 자기소개를 하기에 급급했다.“배가 다른 동생이겠죠.”육현경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소나은은 당황했으나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맞아요. 아, 오늘 언니가 바쁘다고 저더러 현경 씨한테 가보라고 했어요. 저희 은하공장 노동자가 현경 씨를 다치게 한 일에 대해 유감을 표시합니다. 제가 은하그룹을 대표해서 이렇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육현경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다.“이연이가 그쪽더러 와보라 했다고요?”“화나셨구나... 언니가 은하그룹을 맡은지 얼마 안 되다 보니까 업무가 좀 많아서 시간이 안된대요. 화내지 마요.”소나은은 소이연을 감싸고돌았다.내가 소이연한테서 문서인도 뺏어왔는데 육현경이라고 해서 어려울 건 없지. 남자들 다 똑같다고!“아, 그래요?”육현경은 그녀를 비웃듯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그쪽이 이연이 예비 신랑을 꼬셔서 뺏었다던데. 그런데도 이연이가 그쪽더러 저의 병문안을 오라고 시키던 가요?”그의 직설적인 발언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소나은은 구구절절 설명하느라 바빴다.“현경 씨,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저와 언니 그리고 문서인 씨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오해예요. 혹시 언니가...”“그쪽과 문서인 사이의 일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 않고요.”육현경은 소나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의사 선생님이 저더러 절대적인 안
그의 말에 소나은은 제자리에 굳었다.“죄송해요.”소나은은 불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시울이 빨개졌다.“현경 씨가 백합꽃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다음부터 주의할게요...”“백합 말고 그쪽한테 알레르기가 있는 것 같아요.”육현경은 또박또박 대답했는데 살기가 넘쳤다.“다음부터 제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소나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이 남자... 지금 뭐라 한 거야?어릴 적부터 쭉 남자들이 주는 사랑만 받고 자랐는데... 지금처럼 모욕적인 일은 없었어.나처럼 귀엽고 나약한 여자를 안 좋아하는 남자가 없었다고!소이연, 너 때문이야!네가 있으니까 현경 씨가 고의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그녀는 겨우 진정하고는 백합 꽃다발을 들고 병실에서 나갔다. 나가면서도 눈물을 훔치는 것이 배우 뺨치는 연기 실력이었다.소이연은 그런 소나은을 쳐다보았다.인정하긴 싫지만 복수의 쾌감은 아주 컸다.학창 시절부터 소나은에게 구애하는 남자가 줄을 섰다.왜 모든 남자들은 다 소나은, 이 여우 같은 여자한테 끌릴까?그런데 육현경만큼은 그러지 않았다.앞으로의 일은 짐작할 수 없지만 지금은 속이 통쾌했으니 그걸로 됐다.“이연아, 왔어?”육현경은 부드럽게 소이연을 불렀고 그제야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그녀는 육현경 침대 곁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얘기했다.“내가 말했지? 너 다친 거 그 사람들한테 100배 갚아줄 거라고.”“그랬지.”“은하그룹에는 온통 아빠의 사람들이 깔려있어. 그래서 아빠와 맞서려면 내 쪽에 서줄 사람들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 마땅한 증거도 없어서 그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수 없어. 그리고 은하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을 만들어서 더 큰 타격을 입힐 생각도 없고. 그래서 너한테 물질적으로 보상해 줄 생각이야. 이게 내 최선인걸.”“물질적인 거라면 돈?”육현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네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 돈인 걸 알아. 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아니, 넌 더 많은 걸 할 수 있어.”소이연은
소이연은 육현경의 병실에 남아있었다.그녀는 노트북을 켜고서는 업무를 처리하기에 바빴지만 육현경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녀는 행복했다.고도로 집중할 때에는 육현경이 뭐라 하는지 들리지도 않았다.그럴 때면 그는 눈치 있게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심지어 그는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그의 병실 앞을 지나던 이명진은 이 장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환자가 이래도 되는 거야?그는 그의 보스 육현경이 “현모양처”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빨리 지나가자.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아무것도 못 봤어. 두 사람 눈에 안 띄는 게 좋아.소이연은 회사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려고 할 때 문뜩 노트북 옆에 놓여있는 접시를 발견했다. 이쑤시개와 함께 놓여있는 건 그가 직접 깎아준 사과였다.그녀는 냉큼 한 조각 집어먹었다.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사과가 유난히 맛있네.한 조각 또 한 조각.그녀는 먹으면서 노트북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곧 이상함을 감지했다.이 병실 안에는 그녀와 그뿐인데 업무를 보던 그녀가 아니라면 이 사과를 깎을 사람은…그녀가 육현경을 쳐다보자 그는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웃고 있었다.“네가 깎은 거야?”소이연은 놀라워했다.“그럼 누가 했겠어?”육현경은 어깨를 으쓱했다.“넌 환자잖아.”“그래서 뭐? 팔다리가 멀쩡하기만 한데.”아니, 내 뜻은 내가 환자인 너를 돌봐야 한다는 건데.누가 너 팔다리 문제 있다 했어?그녀는 불현듯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그녀는 육현경을 위해 과일을 깎았지만 그처럼 세심하게 먹기 좋은 크기로 깎지 않고 크게 썰어서 그에게 줬었다. 그녀는 육현경과 비하면 자신이 너무 대충 해준 것 같아 반성했다.“사실 난 평소에 과일을 자주 먹지 않아.”소이연은 그에게 사실을 알려줬다. 또한 과일을 자주 먹지 않아서 디테일에 신경을 못 쓴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그럴 것 같았어.”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 앞에 놓인 접시에 사과가 제일 작은 두 조각만 남은 것을 발견했다.“큼. 오늘 사과가 유난히 맛
“아니라고 하지 마.”육현경은 소이연이 답하기도 전에 단호하게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너의 마음 다 느껴진 다고.”그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말란 뜻이었다.소이연은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육현경을 쳐다보았다.“난 네가 다 아는 줄 알았어.”“네가 말하지 않는 이상 난 몰라.”육현경은 말을 에둘러 하지 않았다.“난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아. 현경 씨한테 얘기했듯이 난 당신의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소이연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그런데도 날 추구한 건 너야.”그녀는 인정하기 싫었다. 아니, 예수진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그와 만나려면 제3자는 가뿐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그니까 이연 씨는 내가 자꾸 들이대서 흔들렸고 그래서 일방적으로 나와 거리를 뒀다, 이거네?”육현경은 꼬치꼬치 물었다.소이연은 침묵으로 대답했다.누가 아니랬어? 육현경 이 남자, 어떻게 내 마음속을 꿰뚫고 있는 거지?거리를 둬야겠어.“내가 썩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행동했나 봐. 앞으로 자제할게.”“현경 씨, 때로는 포기도 일종 선택이야.”소이연도 진지하게 대답했다.“우리는 친구로 지낼 수도 있어. 민이가 날 그렇게 좋아하는데… 나도 민이를 많이 아끼고 좋아해. 이 인연을 토대로 현경 씨만 동의한다면 민이를 내 양아들로 삼고 싶어. 친한 친구 사이에 서로의 자식을 양아들로 삼는 게 보편적이잖아.”“이연 씨, 이상한 생각은 집어치워.”소이연은 육현경이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다.그는 한치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다.“민이의 엄마가 되어주든지 아니면…”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니면 뭐? 아무 사이도 아니란 거야 뭐야!“아니면 내 아내가 되어줘.”같은 말 아니야?“응. 네 선택이 맞아. 너에겐 선택지가 없어.”육현경은 소이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현경 씨. 후회하게 될 거야.”소이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후회했었어.”“어..?”“나 화장실 가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
회의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그들은 혹시나 방금 들은 말이 착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송승우는 믿을 수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장난만 치고 아무것도 해낸 적 없었던 송문수가 기술 투자를 따냈다고?’“제가 기술 투자를 따냈다고요. 다음 주 수요일쯤, 크레지 씨가 직접 회사로 와서 계약서에 사인하실 거라고 하셨어요.”송문수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정말인가요?”오 이사님이 가장 먼저 물었다. 이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다른 이사님들도 모두 송문수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사실 이사님들뿐만 아니라 송기명까지도 이 프로젝트가 실패한 거라 생각했었다. 기술 투자를 성사하지 못한다면 즉시 프로젝트를 멈추고 더 이상의 손실을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었다.그동안 들인 노력과 돈이 헛된 것으로 된다고 해도, 아쉽고 화가 나도 어쩔 수 없다면서, 이게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라면서 이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기술 투자를 따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고 이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국제적인 협력 또한 쉽지 않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경쟁 관계도 존재했으니 말이다.그럼에도 송문수가 기술 투자를 성사한 것이었다.“금방 크레지 씨한테서 연락이 왔어요.”송문수도 감격스러운지 여러 번 반복했다.“정말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오 이사님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다른 이사님들도 다들 같은 말만 반복했다.“문수 씨, 정말 대단하세요!”“도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크레지 씨한테서 기술 투자를 따내다뇨... 크레지 씨는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문수 씨, 이번에 정말 큰 공을 세우셨어요. 만약 이번 기술 투자가 실패했다면 회사는 최소 3년에서 5년 동
그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송기명과 허영지도 아마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니 말이다.그러나 송문수가 어느 정도 성과를 냈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해줬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유독 송승우만은 계속해서 송문수의 능력을 부정했고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하지수는 송승우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러자 그때, 송문수의 전화가 울렸다.전화 화면을 확인한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송승우는 송문수의 행동을 지켜보며 마치 트집이라도 잡은 것처럼 말했다.“송문수, 회의 중에 개인 전화를 받으면 안 되는 거 몰라? 회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송문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회의실 구석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그러자 송승우는 더 화가 났다.그때, 오 이사님이 그를 꾸짖었다.“승우 씨, 지금 문수 씨는 이 회사의 회장입니다. 이 회사에 발을 들인 이상 문수 씨의 말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수 씨가 전화를 언제 받든 그건 문수 씨가 결정할 일입니다. 저희도 문수 씨랑 여러 번 회의를 해봤어요. 진짜 급하고 중요한 전화가 아닌 이상 회의 중에 절대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송승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송문수 이놈, 비밀리에 오 이사님이랑 뭔가 있는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왜 오 이사님께서 계속 송문수를 감싸주겠어?’이렇게 생각한 그는 다른 이사님들을 둘러보았다.다른 이사님들도 송문수가 회의 중에 전화를 받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송승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도대체 송문수가 이 사람들에게 뭘 해 줬길래 다들 이렇게 그를 감싸는 걸까?’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조용히 송문수가 전화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송승우는 점점 더 짜증이 났지만 다들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도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서야 송문수가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송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송승우가 바로 입을 열었다.
송문수가 말을 마치자 모든 이사들이 손을 들어 찬성했다.송승우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물었다.“그렇게 애쓰던 프로젝트가 물거품으로 된다니까요?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요? 프로젝트를 포기하면 무조건 손해를 볼 거예요.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송문수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찰나, 오 이사님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승우 씨, 정말 회사 상황을 제대로 알고 오신 거 맞으세요?”“당연히 알고 왔죠.”송승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아니요. 지금 승우 씨가 하는 말들을 보면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오 이사님은 원래 직설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도 상대가 송승우였기에 지금까지 나름대로 배려를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사실 저는 예전부터 문수 씨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어요. 문수 씨가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한 지는 좀 오래 되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일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문수 씨는 정말로 회사를 위해 애쓰고 있어요. 저도 회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문수 씨의 진심을 느꼈거든요.”“하지만 승우 씨는... 정말 실망입니다. 승우 씨는 지금 회사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어요.”“오 이사님!”송승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사님께서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절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건 제 인생 그 자체를 모독하는 겁니다.”“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사실 문수 씨가 대리 회장님을 맡게 되었을 때, 전 더 심하게 말했었거든요. 하지만 문수 씨가 회사를 관리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저는 그냥 아버지의 노력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왜 그렇게 저를 비난하시는 거죠?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그래서 물어봤잖아요. 정말 회사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냐고 말입니다. 만약 정말 회사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왜 회사가 자금 파산의 문턱에 있는지 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송승우는 송문수의 말투에서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형, 직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 차량을 사용하라고 하는 건 불법이야. 노동법을 위반하는 거라고.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구매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만약 형 말대로 강요하면 말이야.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신고해 버리면 우리는 법적 처벌을 받게 돼. 그러면 송씨 그룹도 끝장나는 거고. 원래부터 상태가 별로 안 좋은 데다가 평판까지 나빠지면 그때는 정말 파산이야.”“직원한테만 할인해 준다고 하면 되잖아. 할인까지 해주는데 직원들이 왜 반대하겠어?”송승우가 그의 말에 반박했다.“직원한테만 할인해 준다고? 그럼 얼마나 할인할 건데? 몇 퍼센트가 적당할까?”송문수가 따져 물었다.“형, 제대로 생각해 보긴 한 거야? 할인 때문에 회사가 손해를 보는 건 일단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직원마다 상황이 다르잖아. 가정 형편도 다 다르고... 게다가 만약 산 지 얼마 안 된 자동차가 있다고 생각해 봐. 할인을 해준다고 해도 나라면 안 살 것 같거든?”“그래도 필요한 직원들도 있을 거 아니야?”송승우의 얼굴이 확실히 어두워졌다.“송문수,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내 생각을 부정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날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거야?”“기술 투자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했을 때, 형도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서 낸 성과를 바로 부정해 버렸잖아.”송문수가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송문수의 말이 맞았기에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사회니까 우리가 의견을 낸다고 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 이사님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해. 제 생각에 동의하는 이사님들은 손을 들어줄 수 있으신가요?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할인을 해주고 직원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우리 신에너지 자동차를 사용하게 하자는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주세요.”모두가 침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