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법정은 조용해졌다. 법정 담당 직원들이 법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이연과 하지수는 법정으로 들어와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육현경이 소이연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심아윤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육현경이 소이연을 도와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육현경이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이연이 실형을 선고받으면, 육씨 가문이 죽어라 반대하지 않아도 육현경이 소이연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소이연이 형이 확정되고 감옥에 가면 ‘사고’로 그녀를 죽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심아윤은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서기가 법정에서 지켜야 할 규율과 질서를 낭독하고 판사가 법정에 들어왔다. “일동 기립. 앉아주십시오.”판사가 개정을 선포했다. 공소를 제기한 검사 하석진이 사건을 진술했다. "지난 3일 검찰에 접수된 익명의 제보자가 은하 그룹 소이연 씨의 뇌물 16억, 탈세 100억 등 뇌물 공여와 탈세를 제보하였습니다. 익명의 제보자는 뇌물 공여 내역, 뇌물 공여자와 뇌물 수여자의 식사 사진 그리고 은하 그룹의 세무신고 내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11월 4일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소이연 씨를 소환 조사했으며 범죄 사실이 명확해 같은 날 오후 행정 부서에 넘겨 구금했고, 이에 따라 검찰은 기소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소가 성립됩니다. 검찰 측은 피고인의 범죄 증명서를 재판석에 넘겨주십시오.” "네." 하석진이 담당 직원에게 공손히 건넸다. 직원이 서류를 재판석으로 건네주었다. 하석진은 판사를 향해 말했다."재판장님, 익명의 제보자 유상구 씨의 증인 출석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합니다.”유상구가 증인석에 섰다. 법정에 출두하기 전에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숨어서 소이연이 그를 조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어 소이연의 재무 담당자 장민혜를 증인석에 세웠다. "소이연 씨가 이 계좌에 10억을 계속 보내라고 했습니까?" 하석진이 물었다. "네." 장민혜는 소이연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무 신고서도 소이연이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네." "당신이 한 증언이 모두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장민혜이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하석진은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판장님, 검사 측 심문은 여기까지입니다.” "검사는 제자리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네." 재판관은 하지수에게 말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 공소에 대해 진술하세요.” 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판사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방금 검사가 심문할 때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고 있었다. 검사 측이 제시한 증거와 증인 진술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무관심한 듯하여 참석한 사람들이 보기에 이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판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료에서 눈을 떼었다. 안경을 쓰고 검은색 슬림한 정장을 입는 하지수는 지성 넘치는 변호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재판 석 앞으로 나가 말했다. "제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녀의 말에 장내가 시끌시끌해졌다. 맞아 죽어도 싼 일을 해 놓고도 뻔뻔스럽게 무죄를 주장하다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하지수를 다시 한번 보았다. 하지수는 사실 법정에서 변론하는 일을 많이 하지 않았고, 대부분이 송씨 가문의 분쟁을 해결해 왔기 때문에 변호사계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다. 변호사들은 소이연의 변호사가 하지수라는 말을 듣고 비웃으며 재판을 보러 오기도 했고, 변호사 사회 내부적으로 소이연의 사건을 이미 패소한 사건이라고 생각해다. 다른 변호사뿐 아니라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모두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소나은 역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법정에서는 녹화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정 모독 현행범으로 잡
“첫 번째, 유상구는 세무서의 직원이며, 그가 은하 그룹의 세무 신고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국장의 개인 계좌를 조사할 수 있었을까요?”“두 번째, 장민혜는 제 의뢰인이 그녀의 계좌를 통해 유혁에게 송금을 했고, 증거 중에 제 의뢰인의 은행 카드에서 10억이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은행에서 갑자기 CCTV가 고장 나, 이 카드를 만든 날의 영상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세 번째, 장민혜는 제 의뢰인이 은하 그룹의 재무 보고서를 보고하도록 시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은하 그룹의 전자 서명은 비서가 처리하고 있고, 종이로 보관하고 있는 서류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고, 서체를 모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제 의뢰인이 무죄인 것을 변호할 이유가 있습니다!”하지수는 또박또박 조리 있게 세 가지 의문을 제시했고,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송문수에게 귓속말을 했다. “네 와이프 진짜 안 울면 다행이다. 울면 폭발이야!”송문수는 대꾸도 하지 않았고,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법정에서 유상구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부국장님의 통장 내역을 알고 있는 건, 부국장님께서 전에 저한테 대신 입금을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마음이 생겨서 잔액 조회를 해봤더니 그렇게 큰돈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렸다.눈에 띄게 풍자하는 말이었다.그녀가 말했다. “유혁은 분명 자신이 몇 억의 뇌물을 받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이 통장을 가지고 가서 입금을 하라고 했다고요? 이건 당신한테 내 계좌 좀 보세요. 저 뇌물 10억 받았어요. 빨리 경찰에 신고하세요! 하는 거랑 똑같아요.”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하지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정숙하세요!” 재판장이 꾸짖었다.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당당한 부국장으로서, 이 자리에 올라 이렇게 높은 지위와 무거운 권력
갑자기 이 사건에 일말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나은의 낯빛도 뜻을 이룬 것 같던 얼굴에서 긴장한 얼굴로 바뀌었다.여전히 내색이 없던 심아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고 있었다.소이연은 역시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똑똑했다.그녀가 이 상황을 계획했을 때, 소이연이 현장에 없었다는 증거를 제출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재판장님, 제 의뢰인이 은행에 가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수가 요청했다.“허가합니다.”하지수는 USB를 꺼내, 화면에 연결해 동영상을 재생하며 말했다.“이 카드가 개설된 지점은 성서 은행 지점이고, 개설 일시는 9월 15일 오전 10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각, 제 의뢰인은 은하 그룹에서 오전에는 계속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의뢰인의 당일 영상 기록이며, 시간 단축을 위해 4배속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진지한 얼굴로 영상을 보았다.영상이 재생되자, 소이연은 은행 카드가 그녀의 것이라는 혐의를 거의 벗었다.“이상입니다.” 하지수는 영상을 끄고 재판장에게 말했다. “저는 제 의뢰인이 죄를 뒤집어썼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또 일어나 말했다.“은행 카드는 본인이 가지 않았어도, 은행원이 뇌물을 받고 뒷거래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이연은 유혁에게도 뇌물을 준 사람인데, 은행원이라고 뇌물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고로 이 영상은 이 카드가 소이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하석진의 해명으로 소이연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하지수는 당황하지 않고 부정할 것을 예상한 듯 재판장에게 말했다. “제가 장민혜 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허가합니다.”하지수는 장민혜를 마주 보며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세무 신고서와 개인적으로 유혁에게 뇌물을 준 것도 제 의뢰인의 지시했다고 하셨습니까?”“네.”“그녀가 당신에게 어떤 혜택을 주며 불법적인 일을 지시했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장민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당신 계좌로 입금된 돈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겁니까?” 하지수가 압박했다.“저, 저...” 장민혜는 설명하지 못했다.하지수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재판장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제 증인 1명을 더 출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허가합니다.”60살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법정에 올랐다. 눈앞의 법정의 위엄에 놀라 불안해 보였다.더욱 불안해 보이는 건 장민혜였다. 남자를 본 그 순간,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지수는 남자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여긴 법정이에요. 무서워하지 마시고, 진실한 대답만 하시면 돼요.”“네.” 남자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름이 뭡니까?”“정의민입니다.”“무슨 일을 하십니까?”“모사가입니다.”“주로 어떤 걸 모사하십니까?”“오래된 그림, 명화 등입니다.” 정의민은 이어서 대답했다. “가끔 서체도 모사합니다.”“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정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재판장님, 저는 피고 측 변호사가 계속 시간을 끄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또 일어섰다.“시간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 중요한 단서입니다.” 하지수가 확신했다.재판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피고 측 변호사는 효율을 생각해 주십시오.”“네.”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을 통해 소이연에게 종이와 펜을 주며 말했다. “서명해 주세요.”소이연은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서명한 뒤, 하지수는 정의민에게 주며 말했다. “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네.”정의민은 펜을 들고 소이연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두 개의 이름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모든 사람들이 놀랐다.장혜민은 옆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여기 계신 모두에게 정의민의 모사 능력을 보여드린 것으로 하겠습니다.”“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말했다. “정의민은 피고 측에서 고의로 가짜 증명을 하게끔, 사전에 연습하여 나온
“소이연 씨의 서명을 모사해 서류 한 무더기에 서명을 해달라고요.”“언제 일입니까?”“한 달 전쯤입니다.”“증거가 있습니까?”“네.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정의민은 휴대폰을 꺼냈다.하지수가 법정의 화면을 통해 정의민과 장혜민의 대화 내용을 띄웠다.대화 내용에는 정의민에게 서류에 대신 서명을 하고, 서명을 마친 서류의 사진과 송금 기록까지 아주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이건 의심의 여지도 없는 중대한 증거자료였다.현장은 뒤집어졌다.소나은은 얼굴이 새파래졌다.그녀는 장민혜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고 올만큼 멍청한 줄 몰랐다.게다가 카톡 대화로 송금 기록과 서명한 서류의 사진까지 있다니!그녀가 모든 일은 증거를 남기지 않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귓등으로 들었단 말인가?!심아윤은 몸이 더욱 굳었다.이 지경까지 왔으니, 소이연의 죄는 현실적으로 없는 셈이었다.그녀는 몰래 숨을 깊게 들이쉬고, 침착함을 유지했다.이때.법정의 하지수가 장민혜를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으로 당신이 말한 지류 세무 신고서는 애초에 소이연 씨의 서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회사의 결재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제 의뢰인의 비서는 지류 서명으로만 시스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니, 당신은 이 구멍을 통해 제 의뢰인을 모함했습니다!”“저, 저 아니에요...” 장민혜는 놀라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니라면, 당신과 정의민의 대화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또 왜 당신의 계좌에 있는 돈들이 그렇게 많아졌는지 설명하지 못하십니까!” 하지수는 강한 기세로 몰아붙였다.장민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소나은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이 소송에서는 죽어도 소이연이 지시했다고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소나은이 돈을 준다고 했었다.“재판장님.” 하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이상 피고 측에서 제공한 심증과 물증을 통해, 제 의뢰인은 함정에 빠져 모함을 당
엄숙한 법정.재판장이 선고했다. “법정의 판결로는 본 사건에 대해 법정 조사와 법정 변론을 거쳐, 소이연이 16억 원의 뇌물과 100억의 탈세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법정에서 석방합니다!”말이 끝나자 현장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모든 사람들이 소이연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정의 공평한 재판을 원했고, 게다가 이번 소송은 감동적인 반전으로 선고 후에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다.소나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소이연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갑자기... 또 박살 났다.소이연은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대단한 능력이 나오는 걸까?!도대체 왜 계속 위험에서 잘도 빠져나오는 걸까.심지어 심아윤까지, 심씨 가문 사람들은 다 상대도 안 되는 걸까?소나은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심아윤도 당연히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현경이 그녀의 옆에 있으니, 기분을 드러낼 수 없었고, 기쁜 것처럼 연기까지 해야 했다. 이런 심리적인 뒤틀림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이 지경까지 왔는데,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빗나가다니!소나은이 안심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도 방심했을 줄이야.소나은도 잔꾀가 많지만, 소이연에게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만약 소나은이 이긴다면 소이연은 지금 여기에도 없었을 것이다.심아윤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느라 애썼다.시선은 옆의 육현경을 향했다.처음부터 끝까지, 소이연이 법정에 서는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움직인 적이 없었다.“석방”을 선고한 이 순간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소이연의 앞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앞이라도 표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재판이 끝난 뒤.모든 사람들이 법정에서 나왔다.하도경은 송문수를 놀리고 있었다. “네 와이프가 얼굴이 두 개인 줄 몰랐네, 예전에는 몇 번 못 봐서 둘이 잘 못 지내는 줄 알았는데, 법정
이때 계지원은 이미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다.육현경도 뒤를 돌아 그들을 흘끗 보고는 자리를 떴다.심아윤도 당연히 그와 함께였다.송문수는 눈썹을 찡그리며 하도경에게 말했다. “오늘 지원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걷는 폼도 좀 이상해.”하도경의 낯빛이 조금 변하는가 싶더니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나 갈게. 나랑 내 여자친구 일에는 신경 끄고 네 와이프나 신경 써.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는 유명한 사람인데, 잃어버리면 후회가 뭔 지 알게 될 거다!”하도경은 이 말만 남기고 큰 보폭으로 사라졌다.송문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다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그는 하지수를 향해 걸어갔다.입꼬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차가운 비웃음이 걸려있었다.유명한 사람?아직 아니야.소이연과 하지수는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한 뒤 겨우 차에 올랐다.하지수가 운전을 했다.아주 느린 속도였다.“운전 잘 안 해요?” 소이연이 물었다.그녀가 아주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하지수는 잠시 놀라더니 급히 말했다. “아니요, 운전은 오래 했는데 잘 못해요. 그래서 천천히 가고 있는데, 괜찮으시죠?”“전 안 급해요.” 소이연이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엔 운전이 익숙지 않으면 기사님을 고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목숨 가지고 장난 치는 거 아니에요.”하지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머릿속에 갑자기 그날 송문수가 송씨 집안에 기사 한 명 붙여달라고 하라며 성급하게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올랐다.진작에 송씨 가문에 얘기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먼저 얘기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송씨 가문에서 기사를 고용해 주었다.게다가 그녀는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으로, 혼자 있을 수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그래서 바로 거절했다.하지만 소이연이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받고 싶었다.정말, 사람의 차이인가?“지수 씨 조심해요!” 소이연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하지수는 정신을 차리고 급 브레이크를 밟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