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소나은이 계속 이렇게 우쭐거리게 할 수 있겠는가!이렇게 오래됐는데, 소나은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을뿐더러,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다.이제는 또 심아윤한테 붙다니...소이연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누군가는 굳이 자멸하고자 한다.소나은이 법정에서 나왔다.굉장히 성질이 나 있는 상태였다.방금 법정에서 소이연이 석방된 것을 다시 돌이켜보니 정말 칼로 찔러버리고 싶었다.그 천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번 운이 좋은 거야!맞다.다 운이다.소이연은 모든 게 다 운이었다.기사가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소나은의 섬뜩함이 느껴져, 불똥이 튈까 두려웠다.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소나은은 거칠게 휴대폰을 들어 흘끗 보았다. 심아윤의 전화였다. 겨우 진정했지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결국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그녀였고, 장민혜를 단속하지 못해서 소이연이 증거를 찾아 추궁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소나은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녀가 겨우 얻어낸 소 씨 그룹 지분을 심아윤이 다시 빼앗아 가는 건 아닐까?그녀느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 “아윤 씨.”“거기서 기다릴게요.”전화가 매섭게 끊겼다.소나은은 심아윤의 분노가 느껴졌다.하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심아윤은 의자에 앉아 우아하고 지적이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생각만큼 그렇게 화나 있지 않았다.소나은은 멍청하지 않아서, 심아윤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윤 씨.” 소나은이 급히 해명했다.“이번엔 제가 잘 못했어요. 장민혜가 오랫동안 재무 관련 일을 해서 이런 사소한 실수를 할 줄은 몰랐어요...”“과거 일은 다 지나간 일이니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심아윤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나은은 그녀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심아윤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저는 여태까지 한 번도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한 적이 없어요. 앞으로 잘 하면 되죠.”“그럼 아윤 씨가
“아윤 씨,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소나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심아윤은 싱긋 웃고는 말했다. “비록 이번엔 나은 씨 때문에 우리 계획이 실패했지만, 나은 씨, 당신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저는 계속 같이하고 싶은데요. 제가 드린 지분은 받으시고,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시 말씀드릴게요.”“만약 저한테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라고 하면요?” 소나은이 되물었다.“그래서 나은 씨 생각에 우리가 했던 짓들이 사람 죽이고 불지르는 일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심아윤이 콕 집어 얘기했다.결국 모두 불법이었다.소나은은 아직도 모르는 걸까?!소나은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 지분을 받으면 심아윤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눈앞의 지분을 보니, 그녀가 이걸 받기만 하면 소씨 그룹은 그녀 손 안에 있는 셈이다.겉으로는 그녀에게 잘 해주는 할머니와 엄마도 사실 그녀를 이용하기 위한 것뿐이고, 그녀 마음속의 진정한 적은 소준환 뿐이었다. 소준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소씨 그룹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그녀는 달갑지 않았다.소나은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심아윤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애초에 소나은이 거절할 거라고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지금 저는 소이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생각보다 똑똑하기도 하고, 육현경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너무 과소평가했고요.”이번에 소이연이 무사히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육현경의 도움 때문이었다.“확실히 소이연이 쉽진 않죠.” 소나은이 거들었다.“제가 좀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알려줄게요.” 심아윤이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돌아가라는 눈치를 줬다.“좋아요.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저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소나은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소나은이 심아윤의 룸에서 나왔다.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흥분되는 게 더 컸다.그녀는 지금 소씨 그룹 최대 주주가 되었다.
소이연은 의심할 만했다.첫째로는 새로운 희망이 생길 수도 있지 않냐는 예수진의 말투에 분명히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예수진은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여자아이였고,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기지 못했다.아마 그녀의 인생에 정말 또 다른 한 줄기 빛이 생겼다는 뜻이었을 것이다.둘째로는 육현경이 계지원이 예수진을 챙길 거라고 했다. 만약 그들이 솔직한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머지않아 사귈 거라고 생각했다.“왜 그렇게 생각해요?” 예수진이 되물었다.여전히 그녀의 성격 대로였고, 과장된 목소리였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저랑 계지원 사이에 가능성이 더 있겠어요?! 그 사람은 본인이나 잘 돌보면 다행이에요. 어디 감히 저한테 접근해요? 저랑 계지원은...” 예수진이 잠시 침묵하고 말했다.“저도 달갑지 않은 건 인정해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던 것도 계지원을 기다린 거였어요.저를 안 좋아하더라도, 밖에서 다른 여자들이랑 많은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어쩌면 충분히 즐기고 나면 저한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질 정도로 미련했어요.”소이연은 휴대폰을 꽉 쥐고 이 말들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예수진이 말했다. “예전에는 제가 계지원한테 아직도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누굴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인 거였고, 계지원은 저한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근데 사실 전 진짜 잘 못 지냈어요. 죽을 것처럼 일하고, 죽을 것처럼 술 마신 것도 다 잊어버리려고, 저 혼자 아프지 않으려고...”“수진 씨, 사실...”“이제 괜찮아요. 진짜 포기했어요.” 예수진은 소이연의 말을 끊고 말했다. “저 다른 사람 좋아해요.”“네?” 소이연이 놀라서 물었다.“저도 믿기지 않아요. 사랑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더라고요.”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처음에 제가 계지원한테 고백했던 날 밤에는 둘이 아주 잘 지냈어요. 근데 다음날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딱
소이연은 꾹 참고,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누군가 어떤 감정들을 놓아주었다면, 당사자가 다시 미련을 남기게 해서는 안 된다.“이연 언니도 지수도 걱정 마요. 저 잘 지낼게요. 어느 날 진짜 갈 곳 없으면, 그땐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예수진은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소이연이 대답했다.“이제 끊을게요. 요리 배우러 가야 해요.”“네?”“지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제일 기초적인 것들부터 배우기로 했어요.” 예수진이 진지하게 얘기했다.마치 정말 노력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만약 하도경이 정말 예수진에게 빛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녀는 축복을 택할 것이다.“그럼 공부 방해 안 할게요.” 소이연이 놀리며 웃었다.“다음에 이연 언니랑 지수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대접할게요.”“뱉은 말은 지켜야 해요.”전화가 끊기고.소이연도 한숨 돌렸다.그녀는 확실히 피곤했다.소송에 휘말린 뒤부터 예수진 사건까지, 마음 놓고 편히 잔 적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하품을 몇 번 하더니,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잤다.소이연이 기지개를 켜며 배달 음식을 시키려던 그때, 갑자기 예수진이 요리를 배운다는 것이 생각났다...그녀는 요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육민이 자주 올 것을 생각하니, 항상 배달 음식만 먹일 수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옷을 갈아입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려고 방에서 나왔다.문을 열자, 키가 큰 사람 한 명, 작은 사람 한 명이 서있었다.소이연은 눈썹을 찡그렸다.주말도 아닌데 육현경이 육민을 데리고 왔다.한 마디 말도 없이.“나 외국에 다녀와야 해. 내일 바로 가.” 육현경이 설명했다. “민이 데려다주러 왔어. 일주일만, 마침 문씨 아저씨도 일주일 동안 고향에 다녀오신대.”소이연은 갑자기 그녀에게 사건이 발생하기 전 육현경이 해외에 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도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가는 것이다.그녀는 속으로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담담히 말했다. “알겠어.”“엄마, 나가려
”엄마가 민이한테 밥해줄 거예요?”육민은 너무 설렜다.“나 엄마랑 같이 장보러 갈래요. 나도 같이 갈래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민을 혼자 집에 두고 나오는 건 그녀도 원하지 않았다.소이연은 육민의 손을 잡고 육현경에게 말했다.“바쁘면 먼저 돌아가. 내가 민이를 돌볼게.”육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이연은 더 말하지 않고 육민의 손을 잡고 근처 마트로 향했다.육현경이 묵묵히 뒤를 따랐다.소이연이 그에게 몇 번이나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침묵하기로 했다.세 사람이 그렇게 마트에서 장을 보았다.“엄마, 우리 뭘 살까요?”육민은 이런 마트에 처음 오는 거라 흥분을 주체 못했다.마트 안에는 별의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문씨 아저씨는 번마다 만단의 준비를 해서 같이 마트를 돌아다닐 기회가 없었다.“먹고 싶은 거 말해 봐. 엄마가 사 줄게.”“그럼 물고기요. 랍스타 그리고 대게…”육민은 다양한 해산물을 먹고 싶다고 했다.소이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육민의 입맛은 그녀와 많이 비슷했다.해산물 코너에 가서 한가득 사고, 생각해 보니 해산물만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야채, 스테이크 그리고 간식거리도 샀다.장보기를 끝내고 소이연이 육현경에게 말했다.“민이를 좀 봐줘. 나 좀 개인용품 사야겠어. 계산대에서 기다려.”“알았어.”소이연이 돌아올 때 생리대 몇 봉지를 안고 왔다.육현경과 육민은 한창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중이다.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육현경은 생각없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이리 줘, 같이 계산할게.”소이연이 망설이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얼른 계산하라고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소이연은 눈을 딱 감고 손에 든 생리대 몇 봉지를 그에게 넘겼다.육현경이 받아 들고 보았다.소이연은 조금 어색해서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렸다.“손님, 지금 저희 마트에서 행사를 진행해서 생리대를 사면 콘돔 하나 드리거든요. 세 가지 사이즈가 있으니 골라 주세요.”계단원이 콘
확실한 건 또 무엇이냐며 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육현경은 거절하지 않고 바로 두 봉투를 소이연에게 건넸다.그녀가 받은 순간 바로 바닥에 내려놓았다.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마음의 준비가 없이는 감히 들 수 없는 무게였다.방금 육현경은 홀가분하게 들었는데 말이다.“그래도 억지 부릴 거야?”육현경이 묻자 그녀가 입술을 오므렸다.별로 많이 산 것 같지 않은데 언제 이렇게 많이 주워 담았대?육현경은 그녀가 난처하지 않게 하려고 다시 봉투를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소이연은 망설이다가 육민의 손을 잡고 뒤를 따랐다.집에 돌아오자마자 방금 장본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러다 무료로 받은 콘돔을 발견했다.그녀는 육민과 같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육현경을 보며 어떻게 줄지 고민했다.“도와줘?”육현경이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언제 어디서든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았다.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육현경이 일어서서 다가왔다.바로 육현경에게 콘돔을 건넸다.육현경이 힐끗 쳐다보았다.“네가 좋아하는 거잖아.”“…”소이연은 시선을 회피했다.“필요 없어.”“나도 필요 없어.”육현경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이연이 그를 쳐다보았다.육현경과 심아윤도 이걸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두 사람 모두 나이가 적지 않아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런 결혼을 선택했으니까.“그럼 버릴게.”소이연이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버리지 마. 혹시 쓸지 어떻게 알아?”육현경이 갑자기 가서 꺼내 왔다.그러자 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가져가든 던지든 더는 말하지 않았다.어쨌든 돈을 내지 않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정리를 마치고 소이연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방금 무슨 반찬을 하려고 생각했을 때 육현경이 또 부엌으로 들어왔다.“나 혼자 할 수 있어.”“저녁 8시야. 민이 배고프대.”그 말에 소이연이 시간을 확인했다.“내가 밥하는 게 빨라.”육현경이 제안했다.“옆에서 배워도 돼. 그러면 너도 빨리 배울 거야.
”엄마, 이런 우리 집 너무 좋아요.”육민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소이연은 의아했다.“이런 건 어떤 건데?”“세 식구가 같이 밥 먹고 같이 마트 가고 같이 밥도 만들어 먹는 거요.”육민이 당연하듯 말했다.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엄마는 싫어요?”육민이 토끼 같은 두 눈을 깜박거리며 불쌍한 척 말했다.“싫지 않아.”소이연이 웃으면서 덧붙였다.“민이 좋아하는 건 엄마도 좋아해.”“세상에서 민이를 잘해주는 건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많이 많이 사랑해요.”육민은 작은 입으로 온갖 애교를 다 부렸다.소이연은 참 궁금했다.츤데레 같은 육현경의 성격에 어떻게 애교 발린 말만 하는 육민을 키워냈는지 말이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이연이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육현경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녀한테 쫓겨났다.엄격하게 말해서 접근하지 못하게 거리를 두었다.부자가 소파에 앉아 있더니 갑자기 육민이 엄숙하게 말했다.“아빠, 언제면 엄마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요?”육현경의 눈길이 줄곧 주방 안에 있다가 아들의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돌렸다.“나 이제 연기하지 못하겠어요.”육현경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육민은 소이연의 앞에서 하는 행동과 집에서 하는 행동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성공하지 못하면 더는 도와주지 않겠어요.”육민이 원망했다.“노력하고 있잖아.”아들에게 꾸중을 들으니 육현경은 정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여자 마음을 얻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왜 우리 학교 여자애들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나만 좋아하던데?”육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줄곧 아버지인 육현경을 숭배했었다.하지만 유독 연애에 대해서만 바보 된 것처럼 버벅거렸다.“나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네 엄마를 만난 이후로 완전히 역전됐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을 알아?”“몰라요.”“나중에 너도 저런 여자 나타나면 알게 될 거야.”“만나기 싫어요.”육민이 단호하게 말했다.“나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거든요
”이번 소송에서 도와줘서 고맙다고.”소이연이 솔직하게 말했다.결정적인 단서는 대부분 육현경이 조사해 주었다.특히 재무 부서에서 사람을 찾아 그녀의 필체를 모방하여 서명하고 도장을 찍은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나 때문에 발생한 일이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소이연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진심으로 육현경과 심아윤이 빨리 결혼해서 그녀와 관계를 끝내길 바랐다.하지만 그의 덕분에 지금 무사하게 풀려나서 당장 결혼하라고 강요할 자격이 없었다.“참, 수진과 도경 씨가 같이 있어. 알아?”소이연이 화제를 돌렸다.“알아.”그녀는 육현경의 대답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육현경의 정보력과 능력에 의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수진의 말투를 들어보면 두 사람 감정이 꽤 좋은 거 같았어. 난 두 사람의 사이가 우정인지 아님 사랑인지 평가하고 싶지 않아. 수진이가 행복해하는 거 보니까 더는 수진의 감정에 끼어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툭 털어놓고 말해서 수진 앞에서 지원 씨가 계속 참고 있었다는 걸 말하지 마. 그리고 지원 씨도 더는 수진의 행복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육현경은 확신했다.“비록 지원은 내 작은 삼촌이지만 친구로서 다 평등하게 대했어. 만약 도경이 진심으로 수진을 좋아하고 수진도 도경을 받아준다면 두 사람 행복하길 바라야지. 나뿐만 아니라 지원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소이연이 그를 쳐다봤다.육현경은 정말 무조건적으로 계지원을 신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도경과 수진이 관계를 확실히 할 때 나와 지원이도 다 봤어. 지원이가 그걸 보고 바로 가버리더라.”육현경은 그녀가 믿지 않자 더 명확하게 말했다.“만약 두 사람 관계를 방해하거나 수진을 빼앗으려 했다면 그렇게 가지 않았어. 지원은 마음씨가 착한 애야.”그 부분은 소이연도 인정했다.그녀와 육현경이 전에 썸을 타다 사이가 멀어졌을 때 일이다.소이연이 술에 취했을 때 계지원은 솔직히 상관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다.심지어 그녀의 안전을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