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아니에요...” 장민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당신 계좌로 입금된 돈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겁니까?” 하지수가 압박했다.“저, 저...” 장민혜는 설명하지 못했다.하지수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재판장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제 증인 1명을 더 출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허가합니다.”60살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법정에 올랐다. 눈앞의 법정의 위엄에 놀라 불안해 보였다.더욱 불안해 보이는 건 장민혜였다. 남자를 본 그 순간,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지수는 남자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여긴 법정이에요. 무서워하지 마시고, 진실한 대답만 하시면 돼요.”“네.” 남자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름이 뭡니까?”“정의민입니다.”“무슨 일을 하십니까?”“모사가입니다.”“주로 어떤 걸 모사하십니까?”“오래된 그림, 명화 등입니다.” 정의민은 이어서 대답했다. “가끔 서체도 모사합니다.”“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정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재판장님, 저는 피고 측 변호사가 계속 시간을 끄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또 일어섰다.“시간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 중요한 단서입니다.” 하지수가 확신했다.재판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피고 측 변호사는 효율을 생각해 주십시오.”“네.”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을 통해 소이연에게 종이와 펜을 주며 말했다. “서명해 주세요.”소이연은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서명한 뒤, 하지수는 정의민에게 주며 말했다. “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네.”정의민은 펜을 들고 소이연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두 개의 이름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모든 사람들이 놀랐다.장혜민은 옆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여기 계신 모두에게 정의민의 모사 능력을 보여드린 것으로 하겠습니다.”“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말했다. “정의민은 피고 측에서 고의로 가짜 증명을 하게끔, 사전에 연습하여 나온
“소이연 씨의 서명을 모사해 서류 한 무더기에 서명을 해달라고요.”“언제 일입니까?”“한 달 전쯤입니다.”“증거가 있습니까?”“네.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정의민은 휴대폰을 꺼냈다.하지수가 법정의 화면을 통해 정의민과 장혜민의 대화 내용을 띄웠다.대화 내용에는 정의민에게 서류에 대신 서명을 하고, 서명을 마친 서류의 사진과 송금 기록까지 아주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이건 의심의 여지도 없는 중대한 증거자료였다.현장은 뒤집어졌다.소나은은 얼굴이 새파래졌다.그녀는 장민혜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고 올만큼 멍청한 줄 몰랐다.게다가 카톡 대화로 송금 기록과 서명한 서류의 사진까지 있다니!그녀가 모든 일은 증거를 남기지 않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귓등으로 들었단 말인가?!심아윤은 몸이 더욱 굳었다.이 지경까지 왔으니, 소이연의 죄는 현실적으로 없는 셈이었다.그녀는 몰래 숨을 깊게 들이쉬고, 침착함을 유지했다.이때.법정의 하지수가 장민혜를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으로 당신이 말한 지류 세무 신고서는 애초에 소이연 씨의 서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회사의 결재 프로세스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제 의뢰인의 비서는 지류 서명으로만 시스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니, 당신은 이 구멍을 통해 제 의뢰인을 모함했습니다!”“저, 저 아니에요...” 장민혜는 놀라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니라면, 당신과 정의민의 대화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또 왜 당신의 계좌에 있는 돈들이 그렇게 많아졌는지 설명하지 못하십니까!” 하지수는 강한 기세로 몰아붙였다.장민혜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소나은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이 소송에서는 죽어도 소이연이 지시했다고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소나은이 돈을 준다고 했었다.“재판장님.” 하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이상 피고 측에서 제공한 심증과 물증을 통해, 제 의뢰인은 함정에 빠져 모함을 당
엄숙한 법정.재판장이 선고했다. “법정의 판결로는 본 사건에 대해 법정 조사와 법정 변론을 거쳐, 소이연이 16억 원의 뇌물과 100억의 탈세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법정에서 석방합니다!”말이 끝나자 현장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모든 사람들이 소이연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법정의 공평한 재판을 원했고, 게다가 이번 소송은 감동적인 반전으로 선고 후에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다.소나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그녀는 주위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소이연이 감옥에 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갑자기... 또 박살 났다.소이연은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대단한 능력이 나오는 걸까?!도대체 왜 계속 위험에서 잘도 빠져나오는 걸까.심지어 심아윤까지, 심씨 가문 사람들은 다 상대도 안 되는 걸까?소나은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심아윤도 당연히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현경이 그녀의 옆에 있으니, 기분을 드러낼 수 없었고, 기쁜 것처럼 연기까지 해야 했다. 이런 심리적인 뒤틀림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이 지경까지 왔는데,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빗나가다니!소나은이 안심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도 방심했을 줄이야.소나은도 잔꾀가 많지만, 소이연에게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만약 소나은이 이긴다면 소이연은 지금 여기에도 없었을 것이다.심아윤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느라 애썼다.시선은 옆의 육현경을 향했다.처음부터 끝까지, 소이연이 법정에 서는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움직인 적이 없었다.“석방”을 선고한 이 순간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소이연의 앞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앞이라도 표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재판이 끝난 뒤.모든 사람들이 법정에서 나왔다.하도경은 송문수를 놀리고 있었다. “네 와이프가 얼굴이 두 개인 줄 몰랐네, 예전에는 몇 번 못 봐서 둘이 잘 못 지내는 줄 알았는데, 법정
이때 계지원은 이미 멀찍이 걸어가고 있었다.육현경도 뒤를 돌아 그들을 흘끗 보고는 자리를 떴다.심아윤도 당연히 그와 함께였다.송문수는 눈썹을 찡그리며 하도경에게 말했다. “오늘 지원이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걷는 폼도 좀 이상해.”하도경의 낯빛이 조금 변하는가 싶더니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나 갈게. 나랑 내 여자친구 일에는 신경 끄고 네 와이프나 신경 써. 이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이는 유명한 사람인데, 잃어버리면 후회가 뭔 지 알게 될 거다!”하도경은 이 말만 남기고 큰 보폭으로 사라졌다.송문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다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그는 하지수를 향해 걸어갔다.입꼬리에는 자신도 모르게 차가운 비웃음이 걸려있었다.유명한 사람?아직 아니야.소이연과 하지수는 기자들의 물음에 대답한 뒤 겨우 차에 올랐다.하지수가 운전을 했다.아주 느린 속도였다.“운전 잘 안 해요?” 소이연이 물었다.그녀가 아주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하지수는 잠시 놀라더니 급히 말했다. “아니요, 운전은 오래 했는데 잘 못해요. 그래서 천천히 가고 있는데, 괜찮으시죠?”“전 안 급해요.” 소이연이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엔 운전이 익숙지 않으면 기사님을 고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목숨 가지고 장난 치는 거 아니에요.”하지수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머릿속에 갑자기 그날 송문수가 송씨 집안에 기사 한 명 붙여달라고 하라며 성급하게 화를 내던 장면이 떠올랐다.진작에 송씨 가문에 얘기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먼저 얘기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송씨 가문에서 기사를 고용해 주었다.게다가 그녀는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으로, 혼자 있을 수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그래서 바로 거절했다.하지만 소이연이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받고 싶었다.정말, 사람의 차이인가?“지수 씨 조심해요!” 소이연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하지수는 정신을 차리고 급 브레이크를 밟았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소나은이 계속 이렇게 우쭐거리게 할 수 있겠는가!이렇게 오래됐는데, 소나은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을뿐더러,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다.이제는 또 심아윤한테 붙다니...소이연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누군가는 굳이 자멸하고자 한다.소나은이 법정에서 나왔다.굉장히 성질이 나 있는 상태였다.방금 법정에서 소이연이 석방된 것을 다시 돌이켜보니 정말 칼로 찔러버리고 싶었다.그 천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번 운이 좋은 거야!맞다.다 운이다.소이연은 모든 게 다 운이었다.기사가 앞에서 운전을 하고 있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소나은의 섬뜩함이 느껴져, 불똥이 튈까 두려웠다.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소나은은 거칠게 휴대폰을 들어 흘끗 보았다. 심아윤의 전화였다. 겨우 진정했지만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결국 이번 일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그녀였고, 장민혜를 단속하지 못해서 소이연이 증거를 찾아 추궁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소나은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그녀가 겨우 얻어낸 소 씨 그룹 지분을 심아윤이 다시 빼앗아 가는 건 아닐까?그녀느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 “아윤 씨.”“거기서 기다릴게요.”전화가 매섭게 끊겼다.소나은은 심아윤의 분노가 느껴졌다.하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 심아윤은 의자에 앉아 우아하고 지적이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생각만큼 그렇게 화나 있지 않았다.소나은은 멍청하지 않아서, 심아윤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아윤 씨.” 소나은이 급히 해명했다.“이번엔 제가 잘 못했어요. 장민혜가 오랫동안 재무 관련 일을 해서 이런 사소한 실수를 할 줄은 몰랐어요...”“과거 일은 다 지나간 일이니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심아윤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소나은은 그녀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심아윤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저는 여태까지 한 번도 지난 일 때문에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한 적이 없어요. 앞으로 잘 하면 되죠.”“그럼 아윤 씨가
“아윤 씨,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소나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심아윤은 싱긋 웃고는 말했다. “비록 이번엔 나은 씨 때문에 우리 계획이 실패했지만, 나은 씨, 당신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저는 계속 같이하고 싶은데요. 제가 드린 지분은 받으시고,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시 말씀드릴게요.”“만약 저한테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라고 하면요?” 소나은이 되물었다.“그래서 나은 씨 생각에 우리가 했던 짓들이 사람 죽이고 불지르는 일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심아윤이 콕 집어 얘기했다.결국 모두 불법이었다.소나은은 아직도 모르는 걸까?!소나은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 지분을 받으면 심아윤이 시키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눈앞의 지분을 보니, 그녀가 이걸 받기만 하면 소씨 그룹은 그녀 손 안에 있는 셈이다.겉으로는 그녀에게 잘 해주는 할머니와 엄마도 사실 그녀를 이용하기 위한 것뿐이고, 그녀 마음속의 진정한 적은 소준환 뿐이었다. 소준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단지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소씨 그룹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그녀는 달갑지 않았다.소나은이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심아윤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애초에 소나은이 거절할 거라고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지금 저는 소이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 생각보다 똑똑하기도 하고, 육현경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너무 과소평가했고요.”이번에 소이연이 무사히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확실히 육현경의 도움 때문이었다.“확실히 소이연이 쉽진 않죠.” 소나은이 거들었다.“제가 좀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알려줄게요.” 심아윤이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돌아가라는 눈치를 줬다.“좋아요.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저도 최선을 다할 거예요.” 소나은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소나은이 심아윤의 룸에서 나왔다.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흥분되는 게 더 컸다.그녀는 지금 소씨 그룹 최대 주주가 되었다.
소이연은 의심할 만했다.첫째로는 새로운 희망이 생길 수도 있지 않냐는 예수진의 말투에 분명히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예수진은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여자아이였고,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기지 못했다.아마 그녀의 인생에 정말 또 다른 한 줄기 빛이 생겼다는 뜻이었을 것이다.둘째로는 육현경이 계지원이 예수진을 챙길 거라고 했다. 만약 그들이 솔직한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머지않아 사귈 거라고 생각했다.“왜 그렇게 생각해요?” 예수진이 되물었다.여전히 그녀의 성격 대로였고, 과장된 목소리였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저랑 계지원 사이에 가능성이 더 있겠어요?! 그 사람은 본인이나 잘 돌보면 다행이에요. 어디 감히 저한테 접근해요? 저랑 계지원은...” 예수진이 잠시 침묵하고 말했다.“저도 달갑지 않은 건 인정해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던 것도 계지원을 기다린 거였어요.저를 안 좋아하더라도, 밖에서 다른 여자들이랑 많은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어쩌면 충분히 즐기고 나면 저한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질 정도로 미련했어요.”소이연은 휴대폰을 꽉 쥐고 이 말들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예수진이 말했다. “예전에는 제가 계지원한테 아직도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누굴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속인 거였고, 계지원은 저한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랬던 거였어요. 근데 사실 전 진짜 잘 못 지냈어요. 죽을 것처럼 일하고, 죽을 것처럼 술 마신 것도 다 잊어버리려고, 저 혼자 아프지 않으려고...”“수진 씨, 사실...”“이제 괜찮아요. 진짜 포기했어요.” 예수진은 소이연의 말을 끊고 말했다. “저 다른 사람 좋아해요.”“네?” 소이연이 놀라서 물었다.“저도 믿기지 않아요. 사랑이 이렇게 빨리 변할 수도 있더라고요.”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처음에 제가 계지원한테 고백했던 날 밤에는 둘이 아주 잘 지냈어요. 근데 다음날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딱
소이연은 꾹 참고,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누군가 어떤 감정들을 놓아주었다면, 당사자가 다시 미련을 남기게 해서는 안 된다.“이연 언니도 지수도 걱정 마요. 저 잘 지낼게요. 어느 날 진짜 갈 곳 없으면, 그땐 사양하지 않을 거예요.” 예수진은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소이연이 대답했다.“이제 끊을게요. 요리 배우러 가야 해요.”“네?”“지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제일 기초적인 것들부터 배우기로 했어요.” 예수진이 진지하게 얘기했다.마치 정말 노력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만약 하도경이 정말 예수진에게 빛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녀는 축복을 택할 것이다.“그럼 공부 방해 안 할게요.” 소이연이 놀리며 웃었다.“다음에 이연 언니랑 지수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대접할게요.”“뱉은 말은 지켜야 해요.”전화가 끊기고.소이연도 한숨 돌렸다.그녀는 확실히 피곤했다.소송에 휘말린 뒤부터 예수진 사건까지, 마음 놓고 편히 잔 적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하품을 몇 번 하더니,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잤다.소이연이 기지개를 켜며 배달 음식을 시키려던 그때, 갑자기 예수진이 요리를 배운다는 것이 생각났다...그녀는 요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육민이 자주 올 것을 생각하니, 항상 배달 음식만 먹일 수도 없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옷을 갈아입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려고 방에서 나왔다.문을 열자, 키가 큰 사람 한 명, 작은 사람 한 명이 서있었다.소이연은 눈썹을 찡그렸다.주말도 아닌데 육현경이 육민을 데리고 왔다.한 마디 말도 없이.“나 외국에 다녀와야 해. 내일 바로 가.” 육현경이 설명했다. “민이 데려다주러 왔어. 일주일만, 마침 문씨 아저씨도 일주일 동안 고향에 다녀오신대.”소이연은 갑자기 그녀에게 사건이 발생하기 전 육현경이 해외에 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도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가는 것이다.그녀는 속으로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담담히 말했다. “알겠어.”“엄마, 나가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