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한시름을 놓았다.하지만 그녀는 이내 또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외 할아버지는 왜 자꾸 오빠한테 그러시는 거래요? 오빠는 이 결혼을 동의한 적 없어요!”“오늘 너한테 경고하려고 전화한 거야. 너, 네 오빠와 심아윤의 혼약에 끼어들지 마! 네가 소이연인지 뭐인지 하는 애랑 친한 건 알겠어. 엄마는 그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가 끼어들 자격이 없는 일에 억지로 끼어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엄마…”“오늘 너의 외할아버지께서 너더러 집에 와서 밥 먹으라고 하셨어.”육은숙은 예수진에게 거절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왜요?”외할아버지는 요 근래 시끌벅적한 걸 딱 질색해하셨는데.꼭 나가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업무상의 술자리도 안 가시고 가족모임은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 였는데? 너무 적어서 기억도 안날 정도야.심지어는 추석이나 설날 같은 큰 명절이 아니면 모임에도 참가하시지 않았어.오늘은 아무 명절도 아닌데 갑자기 날 부르신다고?“심아윤의 할아버지가 집에 와서 식사하면서 네 오빠와 심아윤의 혼약에 대해 말씀 나누기로 했어.”“그런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데요?”“오라면 그냥 와! 뭔 쓸데없는 말이 이렇게 많아!”육은숙은 날카롭게 받아쳤다.예수진은 그녀의 기세에 눌렸다.“네…”예수진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엄마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내 연예계 생활도 끝이야!“아, 참. 오빠도 오는 거죠?”예수진은 갑자기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럼 주인공이 안 오겠니?”그녀는 전화를 하면서도 자기를 마치 바보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아니, 그러니까 제 뜻은… 어젯밤부터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외할아버지가 오빠를 감금시킨 거 아니에요? 외할아버지께서 오빠가 사고 칠까 봐…”“걱정 마. 네 외할아버지는 다 생각이 있으신 거야.”육은숙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예수진은 더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제때에 집으로 들어와. 지각하면, 몽둥이로 네 다리를 다 끊어버릴
예수진은 멈칫했다.‘나는 계지원과 문서아 사이를 의심하지는 않아. 문서아 말은 다 맞거든.’그날 문서아가 소이연을 해치려는 것이 까발려지면서 부정적인 기사가 빗발쳤지만, 계지원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데려갔지. 그러니 두 사람이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건 이미 알아차렸지만… 이렇게 빨리 부모님한테 문서아를 소개시켜 준다고? 계지원은 외할아버지의 친 아들은 아니지만, 늘 외할아버지 곁에 있었고 외할아버지는 그한테 엄청 엄격했어. 그리고 문서아는 이미 부정적인 타이틀을 달았고 단기간 내에 연예계에서 큰 발전도 없을 텐데... 문 씨 그룹은 안 좋은 기사가 나서 육씨 그룹 창립 60주년 자리에 초대받지도 못했어. 계지원은 문서아를 외할아버지한테 소개해 주었다가 쫓겨날까 봐 겁나지도 않나?’예수진은 생각이 많아졌다.문서아는 예수진이 질투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줄 알았다.문서아는 계지원이 함께 육씨 저택에 저녁 먹으러 가자는 말에 무척 놀랐다.계지원이 그녀한테 하는 행동을 봐서는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상상 밖으로 계지원은 그녀한테 육씨 저택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계지원은 그녀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자진해서 그녀를 도와주었다.그는 그에 관한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녀를 이용해 위기를 넘긴 것에 대한 보답으로 도아준 것이라고 그날 밤에 명확히 말했었다.문서아가 아무리 연약한척 하면서 그더러 저녁에 함께 있어달라고 했어도 그는 그녀를 문씨 별장으로 데려다준 뒤 곧바로 떠났다.그가 그녀와 연인 관계임을 공개할 때 사진을 찍기 위한 몇 초간의 스킨십 뒤로 오랫 동안 그녀는 그를 만져보지도 못했다.아니, 손도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하지만 오늘 갑자기 전화 와서는 그녀더러 함께 육씨 저택으로 가자고 했다.솔직히 말하면 부모님 앞에서 말을 맞추자는 뜻이었지만, 그녀는 날듯이 기뻤다.그래서 그녀는 여자친구 신분으로서 직접 간식을 가지고 촬영장에 왔던 것이다.그리고 일부러 예수진한테는 알려주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예수
예수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승합차에 앉아 있었다.그녀와 달리 매니저는 아주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고 끊임없이 욕해댔다.“이 개 같은 새끼들! 문서아가 그깟 디저트 좀 사줬다고 바로 편드는 것 좀 봐요! 우리 수진 언니가 사준 커피값만 해도 문서아가 사준 디저트의 몇 배인데… 수진 언니, 왜 말렸어요? 감히 우리 뒷담을 까다니. 제가 가서 혼쭐을 내줄 걸 그랬어요! 너무 하잖아요!”“떠들라고 그래. 괜찮아. 달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걸 어쩌겠어.”“하지만 걔네들이 뭣도 모르면서 언니가 계 감독님에 대한 감정을 마음대로 얘기하잖아요…”“사실인데 뭐.”예수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확실히 계지원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건 맞아.’실장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나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하니까 이 길에서 내려서 택시 타고 가. 다인 언니한테 말해 둘 테니까 택시 값 알려주고.”“알겠어요.”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수진 언니는 너무 착해. 어느 스타가 실장을 집까지 데려다줘? 급한 일이 없으면, 수진 언니는 늘 나를 집까지 데려다줬어. 오늘처럼 특별히 다른 일이 있을 때는 택시 값까지 다 지불해 줬지.이렇게 좋은 사람을 뭐? 재수 없고 오만하다고?……육씨 저택.예수진은 약속시간 전에 미리 왔기에 집에 왔을 때는 객실에 외할아버지와 그녀의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예수진은 오늘 저녁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번 물으려 했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눈빛으로 경고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이렇게 계속 앉아있기만 하는 건 지루하고도 어색했다.예수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제가 대문 앞에서 오빠를 마중할까요? 그러면 더 성대해 보이잖아요, 이 모임이.”육은숙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육청수가 동의했다.“가보거라.”예수진은 기쁜 마음으로 객실을 나섰다.사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휴대폰을 보기 위해서였다.육씨 가문의 가훈 중 하나는 웃어른 앞에서 혼자 휴대폰
예수진은 뺨이 얼얼한 것을 느꼈다.문서아가 오늘 나를 보면 놀라거나 받아들일 수 없을 것까지는 예상했다.‘그 년은 우월감에 취해서 사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잘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깐.’ 그런데 문서아가 자기 뺨을 때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예수진은 뺨을 맞고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그녀뿐만 아니라 대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보안 요원들도 깜짝 놀라 미처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예수진 씨, 더 파렴치하게 굴지 그래요?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내가 계지원 씨 부모님을 만나는 걸 막으려고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오후에 내가 경고했던 말들,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문서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화를 냈다. 예수진은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는지 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매만졌다.‘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솔직히 손해 본 일은 거의 없었어. 계지원은 예외이고 그한테는 나도 방법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감히..’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문서아의 뺨을 때리려고 막 손을 든 찰나 누군가 그녀의 팔목을 거칠게 잡았다.예수진은 갑자기 나타난 계지원을 쳐다보았다.문서아도 자연스럽게 그를 바라보더니 곧바로 계지원의 뒤로 숨었고 두려움에 떠는 표정을 지었다.“지원 씨, 예수진 씨가 절 때리려고 해요…”“이거 놔요!”예수진은 차가운 눈길로 계지원을 쳐다보았는데 무서울 만큼 정색했다.예수진이 얼마나 화났는지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여기 육씨 저택이야. 일을 크게 만들지 마.”계지원은 그녀한테 말했다.“그래서 내가 내 집에서 당신들한테 괴롭힘당하고 있는 거네요?”예수진은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계지원은 입술을 깨물었다.“그쪽 집이라고요? 이봐요, 예수진 씨. 그쪽이 지원 씨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고요. 혼담까지 오가는 사이인데 자꾸 지원 씨한테 들러붙지 말아요. 일을 크게 만들면, 우리한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예수진 씨가 연예계에서 겨우 따낸 성과도
계지원은 문서아가 흥분해서 실수할까 봐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그만해요!”문서아는 참을 성격이 아니었다.그녀는 계지원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예수진이 무슨 자격으로 지원 씨한테 매달리는 거죠? 파렴치한 년이 감히 육씨 저택 안으로 들어오다니, 네까짓 게 뭐라도 돼?”“내 까짓 게 뭐 되냐고? 내가 육청수의 외손녀인데. 계속 씨불여봐.”예수진은 문서아의 말을 받아쳤고 문서아는 멈칫하더니 반응하지 못했다.“육청수도 몰라? 아, 이 이름이 장안시에서 유명한 건 아니지. 그런데 장안시 육씨 그룹 회장 육청수 어르신은? 이 이름은 들어봤을 거 아니야.”예수진은 문서아한테 물었다.문서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더니 그제야 머리가 돌아갔다.하지만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그럴 리 없어. 예수진이 어떻게 육청수 어르신의 외손녀야!그렇다면, 예수진이 연예계에서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연예계 절반이 육씨 그룹 손에 있으니 예수진은 날고뛸 수 있었잖아!그런데 예수진이 데뷔 초기에 연기 때문에 계속 NG를 내서 감독한테 심한 욕을 듣는 걸 난 분명히 봤어.육청수 어르신한테 외손녀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소문으로는 외손녀를 지극히 아껴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고 여론에 알려지면 불편한 생활을 할까 봐 꽁꽁 숨겼다지.육청수가 어릴 적부터 사랑으로 키운 외손녀라서 엄청 아낀다 했는데…’문서아는 고개를 돌려 계지원을 쳐다보면서 이 모든 것이 진짜인지 눈빛으로 물었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문서아는 머릿속이 하얘졌다.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내가 그동안 괴롭히던 사람이 육씨 그룹의 손녀라니…그래서 계지원과 예수진은 내가 생각했던 사이가 아니었던 거야!계지원이 예수진을 유난히 챙겼던 것도 예수진이 그의 조카라서 그랬던 거야.그리고 오늘 예수진이 육씨 저택에 나타난 건 그저 집으로 돌아온 것이지, 계지원한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건데…앞뒤 상황을 알게 된 문서아는 낯빛이 어두워
육씨 저택 대문.3대의 벤틀리가 저택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문 앞을 지키던 경비 요원들은 재 빨리 달려가서 차 문을 열어주었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육현경 이었다.그는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훤칠한 키와 카리스마가 유난히 돋보였다.그는 차에서 내린 뒤 예의 있게 허리를 숙이고는 심아윤이 앉은 쪽의 문을 열어주었다.심아윤은 육현경을 보면서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고마워.”“뭘 이런 거로.”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지나치게 예의가 발라서 거리감 있어 보였다.하지만 심아윤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그의 태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두 사람이 모두 차에서 내린 뒤, 함께 곁에 있던 차량 쪽으로 갔다.심태섭 할아버지는 비서의 부축을 받으면서 차에서 내렸다.70세가 넘고 하얀 머리였지만, 심태섭의 정신은 여전히 맑아 보였다.마지막 한 대의 벤틀리에서는 심아윤의 아버지 심준석, 어머니 안세영 그리고 오빠 심진우가 내렸다.심태섭은 심씨 가문의 사람들을 데리고 앞으로 걸었다.육청수도 마중을 나와 심태섭 앞으로 다가갔다.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는데 여태껏 몸이 불편하고 자주 앓는 바람에 만나는 기회도 점점 적어졌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만큼 두 사람은 모두 한 없이 기뻤다. 심태섭은 허리를 숙여 육청수를 꽉 안아주었다.“청수야, 오랜만이다...”“그래. 잘 왔어.”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안부를 물었다.다른 사람들은 곁에서 조용히 서있었고 두 사람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않았다.문서아는 이 상황에 기가 눌렸는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내가 육현경과 심아윤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는 것을 터뜨렸을 때 속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알아? 둘이 무조건 결혼한다니까? 소이연 너는 육현경의 숨겨둔 애인일 뿐이야. 다시 돌이켜보면, 둘은 대외적으로 공개하지도 않았는데.그렇다면, 육현경은 소이연과 사귄다는 것을 알리기 싫어했다는 뜻이잖아?소이연, 너 이제 어쩌냐? 한낱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년이 이젠 까불거리지도
또한 그녀는 오늘 밤의 주인공은 그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상대 부모님을 뵈러 온 것인데 육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다른 사람한테 중시 받지 못한 기분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를 낼 수도 없었다.그들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육청수와 심태섭은 간단한 문안 인사를 마친 뒤, 육씨 저택 로비로 들어갔다.그러고는 호화로운 식당 안으로 걸어갔다.그들은 커다란 식탁 앞으로 나이 순서에 따라 하나 둘 자리에 앉았다.저택의 고용인들은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식탁에서는 육청수와 심태섭 사이에서만 대화가 오갔다.두 사람은 지난 추억을 떠올리면서 즐거워 보였다.“어제는 육씨 설립 60주년 연회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서울로 파견되는 바람에 못 갔어. 청수야, 정말 미안해.”심태섭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우리 사이에 이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네가 없는 자리에서 내가 현경이와 아윤이 혼약을 공개해서 오히려 미안한걸.”“미안하긴. 이 혼약은 우리가 미리 정해놓은 거잖아. 육씨 그룹의 중요한 날에 이 소식을 공개한 건 우리 아윤이한테는 영광이지.”심태섭은 괜찮다는듯 바로 대답했다.“영광이라니. 우리 현경이가 아윤이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서 영광이지. 그리고 육씨 가문의 영광이고!”육청수는 손사래를 쳤다.두 사람은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예수진은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어르신들이 계셔서 오빠와 단둘이 얘기할 수도 없고…오빠는 왜 저렇게 태연한 표정을 짓는 거야?심씨 가문과의 혼약을 받아들인 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도 모르겠고.정말 급해 죽겠네!“아, 참. 이번에 어렵게 장안시까지 왔으니 좀 오래 묵다가 가. 내가 현경이더러 너의 가족들을 데리고 여기를 구경시켜줘라고 했어. 장안시는 요 근래 많이 발전했고 변화도 커.”육청수는 먼저 제안했다.“다음 주에 서울로 가야 하고 이번 주는 한가하니까 괜찮긴 한데.”심태섭은 그의 말에 대답했다.“내가 몸이 안 좋
육현경과 심아윤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두 가문의 어르신들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오직 예수진만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이연 언니를 생각하면…안 돼. 침착하자, 예수진. 침착해.“수진이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심태섭은 갑자기 예수진에게 말을 걸었다.예수진은 깜짝 놀랐다.이런 모임에서 그녀가 원하지 않던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하지만 예수진은 예의 있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웃었다.“태섭 할아버지, 저 곧 25살이에요.”“못 본 사이에 너무 예뻐졌구나. 그래, 네가 연예계에서 활동한다고 들었다.”“공부를 못해서 연예계 쪽으로 온 거죠.”예수진은 스스로를 낮췄다.심태섭은 예수진의 말에 껄껄 웃었다.“공부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쳤지만, 진정한 배우는 몇 없단다.”“그럼 저희 할아버지 좀 설득해 주세요. 자꾸 저더러 연예계 생활을 그만두래요.”예수진은 이때다 싶어 말했다.“그래. 내가 너의 유교적인 사상을 가진 외할아버지를 잘 설득해 보마!”심태섭은 농담을 했고 분위기도 좋았다.문서아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난 예수진이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어.스폰서를 잘 물어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라 여겼는데…지금 낙성시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의 심태섭 할아버지와 여유롭게 대화를 이어가고 이 할아버지를 웃게 만들다니.질투나! 이건 불공평하다고!’“만나는 사람은 있고?”심태섭은 예수진에게 물었다.“제가요?”예수진은 웃어 보였다.“어느 남자가 절 원하겠어요.”젓가락을 쥐고 있던 계지원의 손이 움찔했다.“하하, 또 이 할아버지와 장난치는 거지?”심태섭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정말이에요. 절 따라다니는 남자가 하나도 없어요.”예수진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이 할아버지가 남자 좀 소개시켜 줄까?”예수진은 깜짝 놀랐다.“내 손자 심진우 말이다.”심태섭은 말을 이었다.“올해 30살이라 너보다 나이가 있긴 하지만, 애가 믿음직스럽고 성격도 좋단다. 이런 남자는 어떠냐?”그러면서 심진우를 향해 눈짓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