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송문수도 많이 변했어...”하지수가 말했다.“출소 후에는 여자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더라고...”“그래서 이제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야?”예수진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그건 아니야. 다만...”“뭐가 다만이야?”예수진이 물었다.하지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와 송문수 사이에는 지난 몇 년간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송문수을 감옥에 보낸 건 그녀 자신이었다...“시간이 다 됐습니다. 신부님 준비되셨나요?”직원이 문밖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예수진은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일행은 밖으로 나갔다.한국식 결혼식은 전에 했던 서양식 결혼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소이연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육현경이 보였다. 두 사람은 호텔의 하얀 카펫 앞에 서 있었고 주위에는 하객들이 앉아 있었다. 호텔은 고풍스러운 한국식 건축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곳곳에 이쁜 장식들이 가득했다.시각이 되자 조명이 소이연과 육현경을 비췄다.소이연은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었는데 서양식 웨딩드레스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장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했다.옆에 있던 예수진이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이연 언니는 정말 아름다워. 정말 아름다워.” 하지수가 옆에서 맞장구쳤다.“맞아. 그냥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행복해 보여.”행복이 부러울 만큼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노력해야 이런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송문수과 하도경도 옆에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들러리 역할을 맡았다.하도경이 옆에서 불평했다.“이러다 아내는커녕 혼자 늙어 죽겠어. 내 인생을 현경한테 다 바쳤다니까.”송문수가 옆에서 웃었다.“넌 이미 아내가 있는 사람이라 몇 번이고 들러리를 설 수 있지. 난 아직 혼자라서...”“육가희가 너를 계속 기다리고 있잖아?”송문수가 말했다. “너무 집착하지 마. 이
그분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리가 없다.그의 신분 지위 나이를 생각해보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순간 소이연을 향한 그의 애정 어린 눈빛은 전혀 숨김이 없었다. 이제 천제진이 소이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오히려 관심을 끌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두 분 맞절 올리시겠습니다.” 사회자가 크게 외쳤다. 소이연과 육현경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감동, 행복, 기쁨, 만족... 소이연은 이 순간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앞으로의 여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서로의 머리가 맞닿았다. 현장에는 뜨거운 박수가 울려 퍼졌다. 감동적인 장면이 전혀 연출되지 않았음에도 단순히 서로를 향해 90도로 인사하는 순간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심지어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이 사람들 두 번째 결혼식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지?” 예수진은 코를 훌쩍였다. 하지수의 눈가도 붉어졌다. 아름다운 사랑은 단순히 동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이 두 사람이 나중에라도 이혼하면 난 더는 사랑을 믿지 않을 거야.” 예수진이 목이 메어 말했다.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너와 계지원이 믿음직하지 않니?” “비교하자면 나는 소이연과 육현경을 더 믿어.” “계 감독이 들으면 마음이 아플 거야.” “어차피 지금 없잖아.” 예수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하지만 다시 비교해 보면 너와 송문수는 더 못 믿겠어. ” 예수진은 하지수를 향해 말했다.하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좋은 분위기가 예수진 때문에 망가졌다. 송문수가 이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거리는 가깝지 않았지만 예수진의 목소리가 꽤 컸다. “너와 송문수는 빨리 깨끗이 정리하는 게 좋겠다.” 예수진은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수는 대
예수진은 스태프의 말을 들으며 황당했다.뭐라고 했더라? 신랑과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이렇게 많은 하객들을 남겨두고 말이야? 그리고 자기들에게 대신 손님들을 대접하라고?이 상황은 정말 역대급이다.“고생 많으십니다.”“네 분 이쪽으로 오세요. 이미 준비해 둔 술잔과 차가 있습니다.”스태프가 말했다.“...”...소이연과 육현경은 예식이 끝난 후 호텔을 바로 떠났다.소이연은 좀 당황했다. 그녀는 계속 육현경에게 이끌려 호텔 정문을 나왔다.문 앞에는 차가 대기 중이었다.육현경이 그녀의 차 문을 열어주며 복잡한 결혼 예복을 정리해 준 후 그녀를 차에 태웠다. 자신도 옆에 타더니 차는 그대로 출발했다.소이연은 차가 호텔을 멀어지는 걸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지금 어디 가는 거야?”한참 후에야 소이연이 상황을 파악하고 물었다. 식사는 하지 않는 건가?이렇게 떠나버리면 저 많은 하객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신혼여행 가는 거야.”“뭐라고?”소이연이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신혼여행.” “지금? 이런 차림으로? 결혼식도 안 끝났는데 우리가 가버리겠다고?.”소이연은 믿기지 않았다. 육현경이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은 아닌데. 이런 일을 하면 생길 후폭풍을 생각이나 해봤을까?그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 이미 너희 외할아버지께 미리 말씀드렸어.”“외할아버지께서 동의하셨어?”소이연은 놀랐다. 예절을 중시하는 천제진이 이렇게 비정상적인 일을 허락하다니.“동의하셨어.”육현경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도대체 뭐라고 말씀드린 거야?”“우리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아직 신혼을 제대로 못 즐겼다고 말씀드렸어.”“...”“너희 외할아버지께서도 남자라 이해하시더라고.”“...”“그리고 네 오빠한테도 얘기했어.”육현경이 말했다."천씨 가문 쪽 친척들은 네 오빠가 알아서 돌봐줄 테니 걱정 말고 신혼여행 다녀오라고 하셨어.”“혹시 오빠의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소이연은 의심스러웠다.“아니야
육현경이 말했다.“지금은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 너와 단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야.”“민이도 두고 가겠다는 거야?”“부정하지 않겠어. 이제 민이는 매우 밝은 큰 방해물이 되어버렸어.”“너를 그렇게 우러러보는 아들인데.”그런데 이 사람 아들을 완전히 속여넘겼다.“나중에 크면 이해할 거야.”변명은 이미 다 준비된 것 같았다.“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편안히 우리 둘만의 세상을 즐기자.”소이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여기까지 준비한 육현경을 보며 소이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즐겨보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돌아가면 예수진에게 죽이려 들지도 몰라 걱정이 됐다....예수진은 진짜로 소이연과 육현경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손님이 80여 테이블이나 있었다.한 테이블씩 돌아다니며 술을 권하고 있었다. 술을 권하는 것뿐 아니라 신랑과 신부가 중간에 사라진 이유를 변명해 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한 바퀴 돌며 술을 다 마시고 나니 예수진은 온몸이 완전히 지친 것 같았다.마침내 네 사람은 힘겹게 식탁에 앉았다. 계지원, 천우진과 심문헌은 이미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이연에 있어 이들은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었다. 천우진이 주최자로서 직접 이들을 대접하고 있었다.“진짜 죽을 것 같아. 몸이 거의 부서질 지경이야.” 예수진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말했다. “육현경과 소이연 그 둘 다신 돌아오지 않는 게 좋겠어. 정말로 이렇게 맘대로 떠나다니.”“둘이 겨우 다시 만났으니 결혼 후에 서로 일이 많아도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할 만해.” 하지수가 위로하며 말했다. “알아. 하지만...”예수진는 말하다가 멈추었다. “그만 얘기하고 밥이나 먹자. 진짜 배고프고 힘들어 죽겠어. 술이나 좀 마셔야겠어.” “배고프고 피곤한데 술을 마신다고?” “술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스트레스도 해소되잖아. 몰랐어?”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천우진을
예수진은 아침의 느낌을 떠올리며 여전히 약간 불편했다. 다행히 이때 맥주가 도착했다. 그녀는 맥주를 보고 아침의 불쾌함을 잊고 바로 일어나 맥주를 한 잔 마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잔을 들자마자 계지원이 갑자기 그녀의 잔을 가져갔다.“수진아, 너 이제 술 마시면 안 돼.”예수진은 멍하니 잠시 멈췄다가 곧바로 불만스럽게 물었다. “왜? 나 오늘 정말 힘들었는데 좀 쉬게 해주면 안 돼?” “네 몸 상태에 술이 맞지 않아.”“내 몸 상태가 왜? 걱정하지 마. 감기 안 걸렸어...” “너 임신한 것 같아.”계지원이 단호하게 말했다.예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그럴 리가? 우리... 그렇게 쉽게 되진 않잖아?”예수진은 흥분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지난달 생리는 며칠날에 시작했어?”계지원이 물었다.“지난달 10일쯤?”그녀는 가물가물했다.원래 생리 날짜를 잘 기억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차피 매달 오니까 구체적인 날짜는 신경 쓰지 않았다.“12일이었어.”계지원는 정확히 말했다.“그런 것 같아.”예수진은 살짝 당황했다. 계지원이 날짜를 이렇게 잘 기억하는 줄은 몰랐다.“그리고 오늘은 며칠이지?”“28일?”예수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맙소사!생리가 10일 이상 늦었는데 자신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늘 예수진의 이상한 행동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설마?”예수진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이번 달부터 피임을 안 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이렇게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계지원이 그렇게 대단한가?사실 수진이가 하연을 가졌을 때는 더 놀라웠다.단 한 번에 성공했으니까.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계지원를 바라보았다. “식사 후,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자.”계지원이 말했다.“만약 정말 임신이면 어쩌지?”예수진이 물었다.계지원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당연히 낳아야지.”“...” 그
올해 이미 서른을 넘었다. 서른이라니. 정말 청춘은 다 간 것 같다. “우리가 같아? 난 곧 애 둘 엄마가 되는데, 넌 아직 애가 어느 별에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예수진은 정말 하지수가 우울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이연을 봐봐. 우리랑 동갑인데 몇 년 지나면 시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지?”“그건 너무 과장 아니야.”하지수는 어이없어하며 반박했다. 육민이 겨우 십몇 살인데.“너 고령 임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예수진이 말했다. “나 아직 고령 임신은 아니잖아?” “계속 애 안 낳다 보면 결국 고령 임신 되는 거야.”“근데 애 낳고 싶다고 해서 바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설마 송문수가 문제있는 거야?”예수진은 크게 말하며 송문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송문수는 옆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먹고 하도경, 천우진, 심문헌과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냥 혼자서 편안하게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예수진과 하지수의 대화에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들과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송문수과 하도경이 연인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이 아주 가까이 앉아 있었다. 송문수는 일부러 하지수와 거리를 두려는 건가? 그때 예수진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떤지 수진 씨가 더 잘 알지 않아?”“내가 뭘 안다고 그래? 내 명예 더럽히지 마.”예수진은 서둘러 말을 피했다. “내 말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왔고 연예계의 스타들이랑도 많이 일해봤잖아. 그녀들이 내 실력에 대해 말해준 적 없어?” “다 네가 그렇게 뻔뻔한 건 아니거든.”예수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동안 송문수가 바람을 피운 것을 생각하면 하지수가 정말 안타깝다고 느꼈다. 자신이었으면 벌써 송문수와 여덟 번은 이혼했을
오찬 후, 예수진은 계지원에게 이끌려 병원에 갔다. 하지수는 연회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사실 술을 꽤 많이 마셔 얼굴이 붉어졌고 조금 취했지만, 정신이 완전히 흐려진 건 아니었다.게다가 이연이 맡긴 일이니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송문수를 보지 못했다. 그가 이런 모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모임일수록 그는 더 꺼렸다.그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도경은 여전히 대기실에 남아 손님을 돕다가, 얼마 안 있어 자리를 떴다.천씨 가문 사람들이 힘을 많이 실어주고 있는 걸 보고, 그도 어느새 사라졌다.“지수야, 피곤하면 가서 좀 쉬어도 돼. 여기는 내가 맡을게.” 천우진이 손님들을 맞이하다 하지수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일하느라 많이 피곤할 텐데.”“괜찮아요.” 하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는 이연의 장안시 친구나 친척들이 많아서 내가 잘 알고 있어요. 내가 접대할게요.”천우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피곤하면 언제든 쉬어.”“알겠어요.” 하지수는 환하게 웃었다. 천우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쪽으로 갔다.사실 하지수가 쉬고 싶지 않은 것도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난번 송문수과 같은 방을 사용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방일 것이다. 그녀는 송문수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정말 예수진이 말한 것처럼 일찍 포기해야 할까...그녀는 손님들 사이로 걸어갔다.하도경과 송문수는 호텔 방에서 샤워를 마치고 내려와 다시 손님을 맞이하러 나왔다. 육현경이 책임을 회피했지만 친구로서 맡은 일은 무조건 끝내야 했다. 그 순간 하지수와 천우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하지수는 천우진에게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송문수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하도경은
다만 너무 무뚝뚝한 점이 문제였다. 웃지 않을 때는 정말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주었다. 하지수는 옆에 있는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시간이 애매해서 호텔로 돌아가 잠을 잘 수 없었다. 혹시나 푹 잠들어버릴까 봐 염려되었다. 저녁에는 만찬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수는 휴게실 소파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지만 보다 보니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한 시간 넘게 지나버린 것이었다.하지수는 놀라 황급히 일어났고, 그 순간 자신의 몸 위에 담요가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핸드폰도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신기했다.누가 들어왔던 걸까? 소파에서 일어나 휴게실 문을 열자마자 천우진을 발견했다.“만찬이 시작돼서 너를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어.” 천우진이 말했다.“아, 네.”하지수가 급히 대답했다.“오늘 만찬이 끝나면 시간 보고 퇴장해도 돼. 다른 손님들은 내가 알아서 배려할게. 하루 종일 고생했으니 오늘 밤은 일찍 쉬어.” 천우진이 덧붙였다.“네.”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진짜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런 만찬 자리에서는 놀고 싶은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계속 놀기도 했다.“선배 고마워요.”하지수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더 고맙지. 이연에게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진아, 이리 와보게.” 천제진이 그를 불렀다.천우진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하지수에게 자유롭게 하라고 말한 후 떠났다.“네, 가서 바쁘세요.” 하지수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사실 방금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천우진이 해준 것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여기서 쉬고 있는 것을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