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무서워요.”이도현이 팔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두렵긴 개뿔! 솔직히 말해. 너 지금 어디까지 올라갔어?”신윤주가 눈을 희번덕이며 물었다.그녀는 심히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 후배 한 명쯤 지켜주는 건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광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선배, 그건… 저도 몰라요. 산을 내려온 뒤에 만난 최강자가 천급이었고 더 대단한 상대는 만나지 못했어요.”이도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너 신급이야?”솔직히 말하면 신연주는 이 녀석의 귀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천급을 아주 쓰레기 취급하다니!언제부터 천급이 이런 폐급 취급을 당하게 된 건지.“아까 그 영감들 너도 봤지? 네가 상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신연주가 이를 갈며 물었다.“죽여버릴 수도 있겠죠?”이도현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건 나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 크게 싸운다면 나도 중상을 입게 되겠지.”신연주가 말했다.종급의 최절정까지 도달한 그녀가 두 명의 종급 무인을 상대하려면 중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그러니까 놈들을 죽이는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하냐고?”이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별로 안 세보이던데요? 만약에 저라면….”신연주의 분노한 표정을 보자 이도현은 곧장 말을 바꾸었다.“그들도 강한 편이죠. 4할 정도의 힘을 써야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 것 같네요.”“짐승 같은 자식!”신연주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선배!”이도현은 다급히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어디 다치셨어요? 갑자기 왜 그래요?”그 말을 들은 신연주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젠장! 이건 너무하잖아!’4할의 공력으로 한방에 두 명의 종급 무인을 보내버린다니! 그녀가 온힘을 쏟아 부어도 한방에 그들 중 한 명을 보내버리기도 힘들었다.건방진 후배 녀석 같으니라고!“그래… 얘는 내 후배야. 같은 스승님 밑에서 배웠고… 부모도 없고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참아야지….”그녀는 한참 중얼거린 뒤에야 겨
“왜 그래요, 선배?”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이도현이 물었다.신연주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야. 나 황성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나랑 같이 황성에 가보지 않을래? 미래의 장인어른 만나서 미리 점수를 따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도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됐어요. 저는 그냥 완성에 남을게요. 부모님 위패를 모신지 얼마나 됐다고 집을 비워요. 별일 아니면 여기 있을게요.”“알았어. 그럼 여기서 얌전히 선배 기다리고 있어. 이 기회에 약혼녀랑 데이트도 좀 하고. 2세까지 미리 만들면 아주 완벽하겠군!”‘무슨 여자가 입만 열면….’“선배,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죠.”이도현이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양심도 없는 녀석! 한지음이 샤워하고 나왔을 때 뚫어지게 쳐다본 놈이 누구였더라?”신연주는 이도현을 내성적인 변태로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그런 거 아니거든요?”이도현이 황당한 얼굴로 반박했다.대충 식사를 마친 뒤, 이도현은 신연주를 배웅하고 돌아와서 한지음에게 먹일 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한지음과 이설희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한 중년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여자는 한지음과 외모가 많이 닮아 있었다. 겉보기에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는 우아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외모만 봐도 분명히 한지음과 밀접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현 씨, 소개할게요. 이분은 저희 엄마세요. 미리 말도 없이 모셔와서 죄송해요.”한지음이 미안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괜찮아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도현이라고 합니다.”“엄마, 이분은 비행기에서 날 구해주신 도현 씨야. 의술도 뛰어나고 연주 언니 후배래! 아주 착한 분이야.”한지음은 엄마에게 이도현을 소개했다.“반가워요. 우리 딸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말은 그렇게 해도 여자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이도현도 그녀가 자신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딸이 외간남
이도현은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비록 외모는 출중하지 않지만 악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출중한 능력을 가졌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를 나쁜 남자 취급하니 어이가 없었다.소창열의 병을 치료해 줬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노인의 손녀를 탐내서 허세를 부린다고 말했다.좋은 마음에 한지음의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했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그를 굶주린 변태 취급을 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호의를 의심하는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라고!“엄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나를 구해주신 은인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조급해진 한지음이 엄마를 나무랐다.“넌 눈치도 없니? 남자들은 원래 예쁜 여자만 보면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달려드는 법이야.”“백마 탄 왕자님 같은 건 현실에 없어. 우연? 그런 게 어디 있어? 여자를 꼬시기 위해 부리는 술수에 불과해. 요즘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데? 넌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그 말씀은 제가 여자나 홀려서 사기나 치는 변태 새끼라는 말입니까?”듣다못한 이도현이 불만을 표출했다.“엄마? 말이 이상하잖아!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비행기에서 도현 씨 아니면 난 진작에 저세상 갔을 거라고!”“엄마가 도현 씨를 못 믿어도 난 믿어! 난 도현 씨한테 치료 받을 거야. 여기 있기 싫으면 엄마 혼자 돌아가!”한지음은 예의 없는 엄마의 행동에 진심으로 화가 났다.“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남자한테 홀려서 사리분별도 못하는 거니?”한지음의 모친은 딸이 이렇게 된데는 분명 이도현의 입김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전에는 부모님 말이라면 절대 어기는 일이 없던 착한 딸이 남자 때문에 자신에게 말대꾸를 하다니! 배신감이 들었다.“엄마,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돌아가. 도현 씨한테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지음은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어쨌든 저 사람 도움은 필요 없어. 엄마가 이미 유능한 의사를 찾았다잖아. 당장 엄마랑 가
이도현은 굳은 표정으로 나가는 한지음 모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의 바르게 인사도 나눴고 좋은 마음에 있을 곳도 마련해 주었고 무료로 딸의 병까지 고쳐준다는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걸까?하늘에 맹세코 한지음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적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단순이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치지 못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뿐인데 왜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된 걸까?한지음 모친의 태도는 상당히 불쾌했다. 병을 꼭 치료해 주겠다고 쫓아다닌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짐승 취급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뭐 귀한 딸을 건드렸냐고? 어이가 없어서! 부자면 다야? 이렇게 사람 무시해도 되는 거냐고?’이도현은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산을 내려온 뒤로 느낀 점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첫째, 세상 사람들은 약해 빠졌다는 것. 그래서 그의 한 주먹을 당해낼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둘째, 이 세상에는 허세가 심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셋째, 착한 사람도 의심받는 세상이라는 것.넷째, 조신한 여자들보다 광녀가 더 많다는 것. 신연주 선배가 대표적인 예시였다.그리고 지금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남자는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도현 씨, 미안해요. 우리 엄마가 좀….”한지음은 눈시울을 붉히며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사과했다.이도현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눈물을 흘리는 여자 앞에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 없었다.그렇다고 당장 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그건 사내로서 도리가 아니었다.“괜찮아요. 어머님께서 나한테 뭔가 오해가 많으신 것 같은데 난 신경 안 써요. 지음 씨도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요.”말을 마친 이도현은 다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이 비서, 도현 씨 많이 화난 것 같지?”한지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사모님께서 좀 너무하셨어요.”이설희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그 말을 들은 한지음은
“뭐야 진짜 나한테 들러붙겠다는 거야? 이걸 어쩐담?”이도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도화살이 붙은 걸까? 왜 가는 곳마다 여자가 꼬이는 건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선배가 갑자기 약혼녀를 점 찍어 주지를 않나, 좋은 마음에 병을 치료해 줬더니 손녀 연락처를 건네지 않나.정말 내가 너무 잘난 탓일까?만약 그런 거라면 차라리 덜 잘난 게 낫다고 생각했다.자기도취에 빠져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도현은 약재들을 정리했다.오랜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의 신조에 어긋나는 결정을 했다. 주동적으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는 것.한지음이 원하면 치료해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지 않기로 했다.그의 의술은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좋은 일 하고 욕먹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드라마에 나오는 신의처럼 나를 믿는 자에게는 무료로 치료를 해주지만 날 믿지 않는 자는 만금을 줘도 절대 치료해 주지 않을 것이다.‘그래. 이게 맞지!’그는 앞으로 산에서 굴러떨어지는 사람을 봐도 당사자가 구해달라고 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지나쳐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독한 결심을 한 뒤, 그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이도현이 한창 단꿈을 꾸고 있는데 바깥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음아, 빨리 오빠한테 인사해. 네 사촌오빠 지금 영강국에서 귀국했어. 그곳의 최첨단 의학기술을 습득하고 교수 과정까지 클리어한 대단한 분이야. 게다가 전문적으로 심장에 관해 연구했으니 네 병을 치료하는 건 일도 아닐 거야.”목소리를 들어보니 한지음의 모친이었다. 영강국에서 귀국한 조카를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이도현은 그제야 한지음 모친이 어제 왜 자신에게 안하무인으로 대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한 조카가 있다 그거지?’그는 나가기도 귀찮아서 다시 눈을 감았다.사촌오빠가 동생을 치료한다는데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 그냥 모른 척하자.’“
“엄마, 내가 도현 씨한테 치료받겠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왜 굳이 오빠까지 불러와서 상황 이상하게 만들어?”한지음이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영호는 귀국하자마자 너 아프다는 얘기 듣고 바로 달려왔구만. 너한테 서프라이즈 해준다고 나한테 미리 말하지 말라고 해서 말을 안 한 거야. 오빠한테 감사는 못 할망정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한지음 모친은 이도현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오빠,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너무 민폐를 끼쳤네.”한지음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영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가족끼리 감사는 무슨. 내가 널 치료할 날이 다 오다니. 민폐라고 생각한 적 없어. 오히려 공부한 보람이 느껴지는걸.”‘더 이상 못 참아!’방에 있던 이도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세 가득한 이영호의 목소리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저게 다 무슨 말이야? 말을 왜 저렇게 느끼하게 하지? 한지음한테 다른 마음이라도 있나?’‘아니! 고작 여자나 꼬시려고 의술을 배운다니! 이건 의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물론 이도현 역시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의술을 연마한 건 맞지만 이거랑은 다른 얘기였다. 현생을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대놓고 난 여자 꼬시려고 의술을 배웠다고 얘기하는 녀석은 두고 볼 수 없었다.‘역시 스승님 말이 맞았어. 요즘 시대에는 사촌도 믿을 게 못 돼.’“오빠의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난 이미….”한지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친 이경숙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만해! 젊은이들끼리 할 말이 많은 건 알겠지만 나중에 천천히 하는 걸로 하고 영호 너는 빨리 지음이 상태부터 확인해 봐.”“네, 고모. 지금 진맥을 시작할게요.”이영호가 기대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지음아, 손 내밀어 봐. 내가 한번 봐볼게. 걱정하지 마. 네 증상에 대해서 고모한테 이미 들었어.
“지음아, 걱정 마. 지금 당장 치료를 시작하자.”“참, 난 한의학과 서의학을 결합한 방식을 쓸 거야. 치료 진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일단 침술 치료를 먼저하고 탕약과 항생제를 동시에 복용하게 될 거야.”이영호는 당장이라도 한지음의 병을 완치할 것처럼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그 말을 들은 이도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이렇게 호언장담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도현 씨….”이도현을 본 한지음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 선생, 우리 애가 치료를 해야 해서 거실을 좀 빌리고 싶은데 괜찮죠?”이경숙이 딸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당연히 괜찮죠. 편하게 치료하세요. 안 그래도 이영호 선생의 의술이 궁금해서 내려온 참이었습니다.”이도현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도현 씨? 고모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도현 씨도 대단한 의사라고 하시더라고요.”이영호가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저 표정과 입꼬리를 보라. 딱 봐도 속이 음침한 인간이었다. 비록 웃고는 있지만 눈빛에는 멸시와 경멸이 가득했다.“반갑습니다. 아까 방에서 잠깐 얘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침술로 한지음 씨의 병증을 치료하신다고요? 그 대단한 기술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설마 몰래 기술을 터득하려는 건 아니죠? 농담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침술은 그 깊이가 한없이 깊은 학문이지요. 한번 본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이영호는 장난인 것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당연하죠. 침술은 심오한 학문인 걸 인정합니다. 단기간에 배워낼 수 있는 학문이 아니지요. 침술을 시전할 때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혈자리를 잘못 건드리면 복구할 수 없는 비극을 빚기도 하지요.”이도현도 싸늘한 말투로 응대했다.“그럼 눈 크게 뜨고 잘 지켜보세요.”말을 마친 이영호는 뒤돌아서 한지음에게 말했다.“지음아,
이도현의 거친 숨소리를 들은 이영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이도현이 자신의 신묘한 침술에 충격을 받았다고 확신했다.“이도현 씨도 이 침술에 대해 알고 있다니, 좀 뜻밖이네요.”이영호가 비웃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들어본 적 있기는 합니다만 정말 구명 침술을 한지음 씨에게 시전하실 겁니까?”이도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그건 이영호 씨가 가장 잘 알 텐데요. 의사로서 본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입니다.”“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있으니까 시전하는 거지요.”이영호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영호야, 신경 쓰지 말고 시작해.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의원 주제에 왜 참견이야? 저 사람 말은 그냥 무시해.”이경숙이 가소롭다는 듯이 이도현을 흘겨보며 말했다.태허산 도사의 의술을 전수 받은 제자가 시골 의원 취급을 받다니.사부가 들었으면 기함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사람을 저렇게 무시하는 건지.이도현은 더 이상 신경 끄기로 하고 입을 다물었다.아무 이유도 없이 무시당하는 느낌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이도현이 말이 없자 이영호는 자랑스럽게 은침을 꺼내 현란한 손동작으로 주의를 분산시킨 뒤, 침을 하나씩 한지음의 혈자리에 꽂기 시작했다.이도현은 혈자리 위치는 정확하나 힘조절과 각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물론 그걸 입 밖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30분 정도 지나서 이영호는 또 쓸데없이 현란한 손동작을 취한 뒤, 천천히 침을 제거하기 시작했다.모든 일을 마친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이도현을 힐끗 째려보고는 말했다.“지음아, 이제 일어나 봐. 좀 어때? 몸이 많이 가벼워진 것 같지 않아?”“지음아, 일어나서 걸어봐. 훨씬 편해졌지?”이경숙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재촉했다.자식의 건강을 걱정하는 건 엄마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막무가내이고 이기적인 엄마도 엄마였다.한지음은 몇 걸음 걸어보고 인상을
성지의 전송진은 천지구슬이 있어야만 제단을 열 수 있는 복잡한 구조였는데 천사국의 제단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천사국은 나가기 쉽지만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이유가 무엇인지 이도현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역마다 규칙이 다르니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가자, 후배.”윤선아가 말했다.“출발합시다.”“네, 둘째 선배. 소 아가씨, 한 아가씨, 지 아가씨는 모두 둘째 선배의 손을 꼭 잡으세요. 이번엔 절대 흩어지지 말고 함께 나갑시다.”이도현이 당부했다.“알겠어요. 도현 오빠. 조심할게요.”소유정이 마치 혼이 빠진 듯한 눈빛으로 이도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녀의 말 속에 담긴 애틋한 감정은 이도현조차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한소희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나마 지성윤만 비교적 절제된 태도를 보였으며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예나 지금이나 미인들은 영웅을 동경하는 법이었다. 특히 장군 가문의 규수들은 호걸 같은 기상을 가진 남자를 더욱 흠모하곤 했다. 하물며 가족과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도현 같은 강자라면 충분히 그녀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할 뿐만 아니라 풍류 넘치는 그의 모습은 그녀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쉽게 잊히지 않았다.‘은인에게 은혜를 몸으로 갚는다'라는 옛말이 현대 여성들에게는 천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니만큼 본디 인격이 크게 나쁠 리가 없다.옛사람들은 사랑에서 인품과 덕행을 최우선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은 돈과 조건을 계산하고 부모의 신분까지 따지는 풍조가 있다.돈만 있으면 열여덟과 여든이 사랑을 논하는 것도 있고, 돈이 없으면 품행과 재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 맞는다는 사람도 있다.그러고 보면 어느 쪽의 애정관이 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지 훤히 보였다.고대의 여인들은 한 남자만 바라보며 평생 지내지만, 오늘날의 일부 여인들은 돈만 보면서 까칠하게 굴기도 했다
“좋아. 일곱째야. 우리 이제 돌아가야 해. 너도 몸조심하고 내가 한 말들을 꼭 명심해.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절대 그 향로를 드러내지 마. 하지만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땐 반드시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 그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절대 다치지 마.”윤선아가 이도현의 말을 단호히 끊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 서명월에게 또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알았어요, 둘째 선배. 선배랑 도현 후배도 조심하고. 곧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요.”서명월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일곱째 선배, 꼭 몸조심하세요. 여기서 버티기 힘들면 돌아오세요.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선배들과 함께 있으면서 천천히 생각해도 되니까 절대 혼자 모든 걸 떠맡지 마세요... 그리고 꼭 자신을 잘 지키세요.”이도현이 걱정스레 말했다.“히히. 걱정하지 마, 이 애송아. 나는 멀쩡해. 네 물건을 그렇게 많이 가져갔는데, 약속한 아이도 아직 못 낳아줬는데 어떻게 일이 생기겠어? 안심해... 나중에 꼭 아이를 낳아줄게.”원래 숙연하던 분위기는 서명월의 한 마디에 또 와르르 무너졌다.이도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가 너무 진지하고 순결한 탓인지 모르지만 말을 가리지 않는 선배들 옆에서는 늘 어긋나 보였다.‘내가 변태스러운 면이 부족해 선배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까? 참 비참하구나. 남자인 내가 왜 이런 놀림의 대상이 된 거지?’이도현은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세 사람은 잠시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떠날 채비를 했다.서명월이 미리 소유정, 한소희, 지성윤 세 여인에게 연락해 두었기에 그녀들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다섯 사람은 함께 출발했다. 여전히 성지의 전송진을 통해 이동할 계획이었다.이도현은 돌아가는 길에 천사국의 천왕들이 추격해올 줄 알았다.그러나 이상하게도 태허궁에서 성지 전송진까지 가는 길 내내 단 한 명의 방해자도 나타나지 않았다.천왕들이 보낸 고수는커녕
장내는 순식간에 쥐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둘째 선배의 호통에 이도현과 서명월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둘째 선배. 화내지 마세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이런 보물도 처음 보는 거라 너무 신기해서 살짝 만져봤어요. 지금 바로 도현 후배에게 돌려줄 거예요. 화 푸세요.”서명월이 서둘러 말했다."일곱째 선배, 괜찮아요. 일단 갖고 계세요. 정말 필요 없을 때쯤 되면 다시 돌려줘도 돼요.”이도현이 재빨리 말렸다.“받아둬. 내가 말한 건 너무 과시하지 말라는 거지, 신물을 받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신물을 너무 과시했다가 후배에게 뜻밖의 위험을 가져다줄까 봐 걱정되어서 그랬어. 내가 네 목숨을 외면할 정도로 무심한 사람으로 보여?”윤선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히히. 그럴 리가요. 전 항상 둘째 선배가 저를 제일 아낀다고 생각해요.”서명월이 윤선아에게 덥석 안기며 볼에 쪽 뽀뽀를 했다.순간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이 계집애야. 내 볼에 침을 묻히지 말고.”윤선아가 핀잔을 주는 척했지만, 눈가엔 온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이걸 갖고 있을 수는 있지만 명심해. 절대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면 드러내서는 안 돼. 이 신물이 소문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도 알지? 그땐 네 몸은커녕 도현 후배까지 위험에 빠뜨릴 거야. 너한테 겁을 주는 게 아니야. 이 신물이 도현 후배한테서 나왔단 사실을 천하의 무사들이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그들은 무조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 거야. 그때가 되면 온 세상이 도현 후배를 노릴 거라고. 너도 그 꼴을 보고 싶지는 않잖아.”윤선아가 엄숙하게 말했다.“알겠어요, 둘째 선배. 걱정하지 마세요. 신중히 행동할게요.”서명월이 진지하게 답했다.두 선배가 무척이나 신중하게 대화하는 것을 본 이도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선배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 아니에요. 저에게 이런 물건이 이거 말고도 또 있으니까요.”“뭐라고...”서명월과 윤선아가 이구동성으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저랑 신기로 간단히 교감할 수는 있어요. 의식이 막 깨어난 정도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대화만 가능해요.”이도현이 담담히 설명했다.“세상에. 이건 전설의 신물과 똑같잖아. 정말 믿기지 않아.”윤선아와 서명월이 또다시 놀라며 탄성을 자아냈다.작은 향로 하나가 단 몇 분 만에 그녀들을 수차례나 경악시켰다. 이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은 그동안의 모든 경험을 무색하게 할 만큼 경이로웠다.“내가 직접 시도해봐야겠어. 향로를 크게 만들어볼 거야.”서명월이 즉시 눈을 감고 신기를 펼쳐 향로와 교감하기 시작했다.“정말 반응하고 있어. 내 말에 응답하고 있어. 마치 나를 ‘선배’라고 부르는 것 같아. 너무 귀여워. 너무 신기해.”서명월은 향로에서 전해지는 의식의 파동을 느끼며 흥분해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그녀는 한 번도 이런 기이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이 상황은 그녀의 상식을 깨뜨렸고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이제 키워볼 거야.”서명월의 교감에 따라 향로 표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향로는 그녀의 손을 떠나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공중에서 서서히 커졌다.“커졌어. 정말 커졌어. 세상에, 이건 진짜 신기한 일이야. 신물이라니까. 확실히 신기야.”서명월이 흥분에 겨워 펄쩍 뛰며 소리쳤다.“둘째 선배. 보셨어요? 제가 직접 조종했어요. 제가 향로를 키웠어요.”“봤어. 어서 잘 간직해둬. 이런 걸 드러내면 안 돼.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위험해져...”흥분하던 윤선아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런 신물이 밖으로 알려지면 천하가 피바다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땐 이 신물을 빼앗으려는 자들로 인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도현이 가장 먼저 타깃이 될 것이 뻔했다.“제 능력을 보세요.”서명월이 우쭐대며 신기를 펼쳐 향로와 교감했다.그녀의 조종하에 향로는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어 그녀의 손에 떨어졌다. 표면의 붉은 빛도 사라지면서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윤선아와 서명월은 많은 걸 겪어본 사람이라 신기한 것들을 잘 아는 편이었다.그러나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들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다.크기를 자유자재로 변환하고 불꽃을 뿜어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붉은 향로는 전설 속의 신물과 다름없었다.신기한 병기들도 보았고 결계, 비경도 겪어봤던 그녀들은 이렇게 신기한 보물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전설로만 듣던 신물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신물은 신선 빼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후배야... 빨리 작게 해봐. 이럴 수가... 너무 신기해. 이 세상에 이런 보물이 있다니... 정말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명월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반짝였다.“신화는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었어... 그 말이 맞았어. 신화는 허구가 아니라,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는 열쇠일지도... 신이 실제로 존재했을지도 몰라.”윤선아가 붉은 향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녀는 고금의 비경 속에 감춰진 고서들이 떠올랐다. 그 고서들에는 신선에 관한 기이한 기록이 담겨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서들은 대부분 봉건 왕조 시대 황실의 금고에 간직된 것이라,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었다.심지어 일부는 지금도 국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만약 정말로 쓸모없는 미신이라면 백성들에게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보통 사람이 미신이라 여기는 것들을 은밀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들이 겉면에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윤선아는 고전 서적들에서 봤던 ‘신화는 진실을 가리키는 나침판’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지금 이 문장을 되새기니, 그 말의 무게가 확 와닿았다. 마치 말속에 엄청난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모종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이도현은 윤선아의 혼잣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하하하. 장난이야.”서명월이 가볍게 웃어넘겼다.이도현은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일곱째 선배. 저한테 방어용 보물이 한 개 더 있는데 이것도 가지고 계세요. 위급할 때 목숨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또 보물을 주다니... 후배한테서 이미 많은 걸 받아서 더는 부담스러워. 이건 네가 잘 간직해라.”서명월이 단칼에 거절했다.“선배. 이 보물은 지금 당장 저한테 필요 없어요. 위험한 상황이 지나면 다시 찾으러 올게요. 선배도 태허산 의술과 담약 제조에 능통하시잖아요. 그러니 이 향로는 선배께 딱 맞는 물건이에요.”이도현이 음양탑에서 붉은빛의 향로를 꺼내며 말했다.“후배... 이 조그만 물건이 바로 네가 말한 그 보물이야?”서명월은 이도현의 손바닥에 있는 자그마한 향로를 유심히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었다.“선배, 보기엔 작아도 정말 특별한 보물이에요. 한때 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어요.”이도현이 향로를 어루만지면서 신기로 향로와 교감했다.‘잠시만 선배에게 빌려드리는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나 대신 선배를 잘 지켜줘.’하지만 향로는 싫다는 듯 빙글빙글 돌며 반기를 들었다. 이도현은 간절히 향로를 달래며 설득해야 했다.‘부탁이야...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꼭 도와줘. 선배가 위험에 처할 때만이라도... 제발.’결국 이도현의 애원에 향로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이 작은 향로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장난치는 거지?”서명월이 안 믿는다는 말투로 되물었다.서명월뿐만 아니라 윤선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이도현의 손에 든 향로를 보면서 일반 향로랑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선배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지금 보여드릴게요.”이도현이 원력을 주입하자 향로에서 붉은 불꽃이 치솟았다. 순식간에 향로가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책상만 한 크기로 변했다.향로는 붉은빛을 번쩍이면서 하늘로 끊임없이 불꽃을 뿜어댔고 강렬한 기운이 사방을 에워쌌
“일곱째 선배. 곧 떠나야 하는데 이렇게 가면 둘째 선배와 제가 너무 불안할 것 같아요. 제가 없는 사이에 적들이 찾아와 선배한테 시비를 걸 수 있어요. 이걸로 몸을 보호하는데 보탬이 되세요.”이도현이 진지하게 말하며 품에서 담약들을 꺼냈다.“이 바보 같은 녀석아.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준 공간 반지와 담약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이렇게 귀한 걸 또 어떻게 받아.”서명월이 토라진 척했지만, 속은 뭉클했다. 두 번 만난 후배가 자신을 이토록 챙기니 마음이 따뜻했다.‘좋은 물건이 생기면 내 몫도 챙겨주고 위험한 길 떠나기 전에는 목숨을 지킬 물건까지 주다니.’“선배. 저를 남으로 생각하면 섭섭해요. 선배는 저에게 친누나처럼 소중한 분이에요.”이도현은 음양탑에서 구현단과 영모단 열 알씩을 꺼내 일곱째 선배에게 건넸다.“선배, 이건 구현단과 영모단이에요. 충성스러운 고수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 복용 후 수행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할 거예요.”이도현이 또 다른 병을 꺼내며 말을 덧붙였다.“이 담약들은 제가 직접 제련한 거예요. 구현단보다는 약하지만, 경지 돌파에 충분히 도움이 될 거예요. 재능 있는 이들은 한 경지쯤은 거뜬히 뛰어넘을 테니, 백 알을 전부 드릴게요.”이 담약들은 이도현이 직접 제련해낸 거라 얼마든지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있는 만큼 먼저 일곱째 선배에게 모두 드렸다.“아니... 후배야...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마음은 고맙지만 받기도 거절하기도 어렵구나.”서명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쯧쯧, 이 녀석아. 이렇게까지 할 거면 내가 네 아이를 낳아야 마음이 편해지겠는데? 그래. 담약은 받겠다. 하지만... 너무 많이는 바라지 마. 많아봤자 아이 둘만 낳아줄 거야.”선배의 돌직구에 이도현은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일곱... 일곱째 선배. 그건 좀... 그게...”“호호호. 얼굴이 빨개졌네. 왜? 설마 내가 너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야?”서명월이 장난치자, 이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아니
“그래. 모두 네 뜻대로 하자.”윤선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장 돌아간다고? 안 돼. 둘째 선배와 도현 후배가 이렇게 먼 길을 왔는데 며칠 더 놀다 가야지. 벌써 가지 마.”서명월이 아쉬움을 드러내며 손사래를 쳤다.“명월 후배. 우리가 천사국에서 이토록 난동을 부렸는데 더 이상 이곳에서 지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차라리 우리와 함께 동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네가 혼자 이 먼 곳에 있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어. 우리랑 같이 돌아가자. 그래야 우리도 마음이 놓여.”윤선아가 설득에 나섰다.“맞아요, 일곱째 선배. 이런 외딴곳에 계실 게 뭐가 있어요? 같이 돌아가요.”이도현도 거들었다.“안 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태허산을 위한 거점을 세우기 위해서야. 이제 막 기반을 닦았는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서명월이 단호하게 말했다.“둘째 선배도 알잖아요. 동방과 서방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에요. 그저 천하의 한구석일 뿐이죠. 도현 후배가 강해질수록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될 거고... 이곳에 거점을 두는 것은 앞으로 우리 태허산에 이득이 될 거예요.”서명월의 눈빛이 갑자기 깊어졌다.“일곱째 선배...”이도현이 더 말하려 하자 서명월이 단호히 그의 말을 막았다.“됐어, 이놈아. 너는 네 길을 가고, 나는 내 사명을 지킬 거야. 사명을 다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떠날 거야. 둘째 선배랑 돌아가야 한다면 조금 있다가 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나도 이곳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어.”서명월이 평소답지 않게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네...”이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이도현은 선배가 얘기한 사명이 뭔지는 모르지만 평소 장난기 가득한 일곱째 선배의 얼굴에서 진지하고 확고한 다짐을 보았다.“됐어, 도현 후배. 더 이상 명월 후배를 난감하게 하지 마.”윤선아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사명'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잠깐의 그림자가 스치더니 더는 서명월을 설득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도현
이도현은 선배들을 제외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자였다.그러니 마룡 천왕이나 광명왕 같은 자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천사국 땅에서 그들이 감히 덤빈다면 그는 단칼에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싸움을 건다면 맞서 싸우면 그만이지,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이도현이 자신의 물건을 되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누구에게도 미안할 필요가 없었다.상대를 죽이는 것은 그들이 제 발로 죽음을 자초했기 때문이다.이도현은 이런 일들을 전혀 마음에 담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서양인들이 득실대는 이 땅에 더 머무를 마음이 없었기에 이미 돌아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이도현은 광명왕의 성을 나와 황량하게 펼쳐진 산과 들판에 이르자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둘째 선배, 일곱째 선배. 인제 그만 나타나시죠. 제가 성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두 분이 뒤따라오셨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더 숨을 필요가 있나요?”사실 광명왕의 성채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이도현은 이미 두 선배가 자신의 뒤를 따랐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선배의 체면을 생각해 모르는 척 연기했던 것이었다.이도현이 광명왕의 성채에서 행동을 자제한 것도 선배들 때문이었다. 일을 크게 만들었다가 선배들까지 나서면 그녀들이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되었다.그래서 광명왕의 성채에 있을 때, 이도현은 마구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참았다.그렇지 않고 그의 성격대로 했으면 광명왕은 아마 이렇게 가벼운 상처만 입는 것이 아니라 마룡 천왕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히히히... 결국 네놈한테 들통났구나. 이 못된 놈아, 조금만 더 모르는 척해주지. 굳이 나와 선배를 드러내 체면을 구겨야만 했어?”서명월과 윤선아가 먼 산봉우리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날아내려 왔다. 서명월이 이도현을 바라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선배들도 참. 제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행히 위험한 상황은 없었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제가 선배들을 위험에 빠뜨린 셈이 되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