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일곱째야. 우리 이제 돌아가야 해. 너도 몸조심하고 내가 한 말들을 꼭 명심해.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절대 그 향로를 드러내지 마. 하지만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땐 반드시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 그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절대 다치지 마.”윤선아가 이도현의 말을 단호히 끊으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어 서명월에게 또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알았어요, 둘째 선배. 선배랑 도현 후배도 조심하고. 곧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요.”서명월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일곱째 선배, 꼭 몸조심하세요. 여기서 버티기 힘들면 돌아오세요.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선배들과 함께 있으면서 천천히 생각해도 되니까 절대 혼자 모든 걸 떠맡지 마세요... 그리고 꼭 자신을 잘 지키세요.”이도현이 걱정스레 말했다.“히히. 걱정하지 마, 이 애송아. 나는 멀쩡해. 네 물건을 그렇게 많이 가져갔는데, 약속한 아이도 아직 못 낳아줬는데 어떻게 일이 생기겠어? 안심해... 나중에 꼭 아이를 낳아줄게.”원래 숙연하던 분위기는 서명월의 한 마디에 또 와르르 무너졌다.이도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그가 너무 진지하고 순결한 탓인지 모르지만 말을 가리지 않는 선배들 옆에서는 늘 어긋나 보였다.‘내가 변태스러운 면이 부족해 선배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까? 참 비참하구나. 남자인 내가 왜 이런 놀림의 대상이 된 거지?’이도현은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세 사람은 잠시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떠날 채비를 했다.서명월이 미리 소유정, 한소희, 지성윤 세 여인에게 연락해 두었기에 그녀들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다섯 사람은 함께 출발했다. 여전히 성지의 전송진을 통해 이동할 계획이었다.이도현은 돌아가는 길에 천사국의 천왕들이 추격해올 줄 알았다.그러나 이상하게도 태허궁에서 성지 전송진까지 가는 길 내내 단 한 명의 방해자도 나타나지 않았다.천왕들이 보낸 고수는커녕
성지의 전송진은 천지구슬이 있어야만 제단을 열 수 있는 복잡한 구조였는데 천사국의 제단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천사국은 나가기 쉽지만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이유가 무엇인지 이도현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역마다 규칙이 다르니 깊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가자, 후배.”윤선아가 말했다.“출발합시다.”“네, 둘째 선배. 소 아가씨, 한 아가씨, 지 아가씨는 모두 둘째 선배의 손을 꼭 잡으세요. 이번엔 절대 흩어지지 말고 함께 나갑시다.”이도현이 당부했다.“알겠어요. 도현 오빠. 조심할게요.”소유정이 마치 혼이 빠진 듯한 눈빛으로 이도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녀의 말 속에 담긴 애틋한 감정은 이도현조차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한소희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그나마 지성윤만 비교적 절제된 태도를 보였으며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예나 지금이나 미인들은 영웅을 동경하는 법이었다. 특히 장군 가문의 규수들은 호걸 같은 기상을 가진 남자를 더욱 흠모하곤 했다. 하물며 가족과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도현 같은 강자라면 충분히 그녀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할 뿐만 아니라 풍류 넘치는 그의 모습은 그녀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쉽게 잊히지 않았다.‘은인에게 은혜를 몸으로 갚는다'라는 옛말이 현대 여성들에게는 천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니만큼 본디 인격이 크게 나쁠 리가 없다.옛사람들은 사랑에서 인품과 덕행을 최우선으로 삼았지만, 오늘날은 돈과 조건을 계산하고 부모의 신분까지 따지는 풍조가 있다.돈만 있으면 열여덟과 여든이 사랑을 논하는 것도 있고, 돈이 없으면 품행과 재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 맞는다는 사람도 있다.그러고 보면 어느 쪽의 애정관이 더 천박하고 보잘것없는지 훤히 보였다.고대의 여인들은 한 남자만 바라보며 평생 지내지만, 오늘날의 일부 여인들은 돈만 보면서 까칠하게 굴기도 했다
다만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런 쓰레기 같은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며 오직 아름다운 것만 기록으로 남겨졌을 뿐이다.예를 들어 반금련처럼 이름만 들어도 욕이 되는 여인들이 역사에 가득하다면, 역사 자체가 더럽혀지게 된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미녀가 영웅을 사랑하는 것은 남자가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소유정과 한소희가 이도현을 좋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다만 현재 이도현의 마음에는 그녀들이 발을 디딜 자리가 없었다.“선배, 출발합시다. 선배도 저들의 손을 꼭 잡으세요.”이도현이 선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윤선아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소유정의 손을 잡았다. 일행이 손을 맞잡은 채로 전송진에 들어선 순간, 마치 시간 터널에 휘말려 들어간 듯 시야가 캄캄해졌고 허공을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움직임이 멈춘 느낌을 받았을 때, 다시 눈을 떠보니 이미 낯선 장소에 서 있었다.이도현이 신기를 펼쳐 확인해보니 확실히 성지의 외곽 지대에 도착해 있었다. 각자의 전송 위치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천사국 입성 때처럼 수천 리 밖으로 랜덤으로 흩어지는 것보다 이번 이동이 훨씬 안정적이었다.비록 십 리 정도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접한 거리였다.“소 아가씨, 지 아가씨, 한 아가씨. 저랑 선배는 동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에요. 여러분들은 무슨 계획이 있어요?”이도현이 뒤돌아 묻자 소유정이 지성윤에게 의견을 구했다.“선배. 우린 어디로 가요?”“우리도 나온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사문의 성물을 찾지 못했고, 성지와 천사국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으니 스승님께 돌아가서 보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사문의 성물은 왕급 경지의 내공을 지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골똘히 생각한 뒤 지성윤은 결론을 내렸다.지난번에 그녀는 이도현의 권유로 일단은 남았지만, 이제 그가 떠나는 마당에 계속 남아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함께 돌아갑시다.”윤선아가 웃으며 말했다
윤선아의 주선으로 이도현 일행은 전용기를 타고 곧바로 동방으로 돌아갔다.이도현은 완성으로 향하는 대신 황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성에 도착하자 소유정과 한소희는 아쉬운 표정으로 이도현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미련이 남은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성윤 선배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한편, 이도현은 둘째 선배와 함께 용팀 기지로 향했다.그는 떠나기 전, 한지음과 열 번째 선배 연진이, 그리고 세 번째 선배 인무쌍을 그곳에 남겨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오민아와 조혜영까지 데려왔기에 지금 그가 가장 먼저 향할 곳이 가족들이 있는 용팀 기지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멈춰! 여긴 군사 기지다. 정체를 밝혀라. 허가 없이 침입은 금지다. 당장 나가!”이도현과 둘째 선배가 기지 구역에 들어서자 누군가 그들을 막아서며 외쳤다. “나는 다섯 번째 선배이자 용팀 팀장인 기화영을 만나러 왔어. 내 이름은 이도현이야.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닐 텐데?”이도현은 이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사였고 예전엔 용팀의 동해용왕이기도 했으니 용팀 소속이라면 자신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기화영이 에드워드 가문에게 위협받던 시절, 그가 직접 용팀을 이끌기도 했던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런 이름 몰라. 당장 나가.”“여긴 군사 시설이야. 이도현이든 이도룡이든 이도 뭐든 간에 접근 금지다. 나가라!”병사는 얼굴을 굳힌 채 엄숙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도현의 얼굴엔 썩은 걸 억지로 삼킨 듯한 역겨움과 분노가 뒤섞였다.그는 원래 권력을 앞세워 일하는 걸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둘째 선배가 함께 있었고 이곳은 다섯 번째 선배 기화영의 구역이었기에 괜히 말썽을 일으켜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딱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융통성 있게 넘어가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자신을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이름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조롱까지 섞은 태도. 이름을 밝혔음에
“아니... 네 윗선한테 물어보기라도 해 봐. 분명 날 들여보내라고 할 거니까.”이도현은 터질 듯한 화를 간신히 눌러 담았다.“안 돼. 여긴 상급 명령만 있는 곳이지 내가 먼저 물어보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나가.”병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딱 잘라 말했다.이도현은 체념한 듯했다.다섯 번째 선배의 구역이 아니었다면 그냥 몰래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얘기가 다르다.이도현이 체면을 좀 내려놓고 다섯 번째 선배에게 전화를 하려던 찰나 병사들이 서 있던 통제 구역 안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무슨 일이야?”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출입을 시도한 인원에게 퇴거를 명령했으나 불응하고 있어 보고 드립니다.”“장군님, 바로 저놈들입니다.”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장군이라 불린 여자는 병사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이도현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동해용왕께 인사 올리옵니다.”여장군이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도현에게 큰소리치던 병사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그가 진짜 동해용왕이었다니. 병사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눈앞에서 마주한 채 스스로의 무지를 실감하고 있었다.한편 이도현 역시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는 다름 아닌 과거에 몇 차례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자연이었다.“자연이 오랜만이네. 그리고 나 이제 동해용왕 아니니까 그렇게 안 불러도 돼.”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팀장님께서 아직 당신의 권한을 폐지하지 않으셨으니 당신은 여전히 동해용왕이십니다.”자연이가 이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설 같은 이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했다. 소년에서 남자로,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존재로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자연이의 말에 이도현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물었다.“다섯 번째 선배를 만나러 왔는데 혹시 말 좀 전해줄 수 있을까? 부탁 좀 할게.”“용왕님 그런
병사는 한동안 넋 놓고 두 사람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 가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이도현, 동해용왕? 설마... 그분?”“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치자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떠 올린건 다름 아닌 무사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되던 전설 같은 존재였다.그는 윗선에서도 철저히 숨기려 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들끓었고 그의 업적은 무사로 갓 입문한 자신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미치지 않고서야 평생 한 번이라도 만나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는데 내가 이런 멍청한 짓을 했다고? 한심한 놈, 니 그릇이 딱 거기까지인 거야. 너는 맞아도 싸.”병사는 자기 뺨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처음엔 씹어 삼킬 듯이 욕을 퍼부었지만 나중엔 말도 안 나왔다. 그저 입만 달싹이는데 그 속에서 뱉고 있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자연이가 길을 트자 그 누구도 감히 이도현을 막지 못했다. 덕분에 기화영의 거처까지 단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팀장님, 동해용왕님과 대인 한 분이 오셨습니다.”“뭐? 누가 왔다고?”안쪽에서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장치 특유의 찌직거리는 기계음이 울렸다. 곧이어 누군가 문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세차게 열렸다. 곧바로 세 명의 여성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둘째 선배! 이도현 이 바보야!”“도현 후배...”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달려와 윤선아와 이도현을 와락 안았다. 그렇게 다섯 명은 하나로 포개져 서로를 꼭 껴안았다.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이도현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이 감각이 결코 낯설진 않았다. 어딘가 오래된 기억처럼 익숙했다.간신히 고개를 빼낸 이도현은 자신을 꽉 껴안고 있던 사람이 셋째 선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세 번째 선배는 예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잖아요!”“울긴 왜 울어 남들이 보면 웃겠다. 얼른 들어가자.”윤선아는 귀엽다는 듯 후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들 중 셋째 인무쌍을 제외한 나머지 후배들은 모두 윤선아가 어릴 때부터 함께하며 키우다시피 한 사이니 그 정이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알겠어요. 선배,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이도현은 겉으로 보기엔 말 잘 듣는 후배처럼 보였지만 막상 일을 처리할 땐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순한 척 웃고 있지만 속은 반항심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선배가 기뻐하는 일이었다.“자연아, 간단한 안주 몇 가지랑 도수 낮은 술 한 병만 준비 해달라고 전해줘. 오랜만에 우리끼리 조용히 한잔하려고.”기화영이 자연이에게 조용히 일렀다. “네. 팀장님.”자연이는 짧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사실 자연이는 이도현과 선배들 사이의 관계가 부러웠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진짜 가족처럼 서로를 아끼고 어떤 사심도 없이 늘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괜히 뭉클하게 느껴졌다. “갑시다. 안으로 들어가요, 우리.”“참, 도현아. 지음 씨랑 다른 친구들도 좀 보고 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꼭 데리고 와. 우리 다 같이 모여야지. 앞으로는 진짜 한 가족이잖아.”기화영은 다정하게 당부했다. “알겠어요. 선배.”이도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난꾸러기, 또 무슨 짓 하려는 거야? 밤엔 시간 많으니까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만들지 말고.”막 자리를 뜨려던 이도현에게 열 번째 선배 연진이가 짓궂게 웃으며 한마디 던지자 이도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하, 이 녀석. 나쁜 짓 할 땐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제 와서 부끄럽대?”가화영도 한마디 보태며 웃었다.“둘이 또 도현이 갖고 장난치지 마. 얼굴 새빨개졌잖아. 이제 그만해.”인무쌍은 이도현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조용히 분위기를 정리했다. “세 번
이도현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와 용팀소속 여성 구성원의 안내를 받아 한지음 일행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용왕님, 들어가시죠. 세 사모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방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저희는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물러났다.문 앞에 다다르자 이도현은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 여인들이 한 방에 있다니, 지금처럼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사회에서 그의 행동은 그가 봐도 양심 없어 보였다.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만난 적도 있었지만 셋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 방에 자기가 직접 찾아 들어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뻘쭘했다.이도현도 미인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선을 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렇게 눈치 볼 일도 없었다.한 번 숨을 고른 이도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도현 오라버니...”문을 연 여자는 이도현을 보자 놀란 듯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겼다.“혜영아.”이도현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도현 오빠!”“오빠...”조혜영의 목소리를 들은 한지음과 오민아도 방 안에서 뛰쳐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도현을 보는 순간 말도 없이 달려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순식간에 이도현은 세 여인을 품에 안았다. 앞뒤좌우로 거대한 압박에 짓눌린 그는 그 사이에서 반항할 용기조차 없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오빠,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겠어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한지음은 이도현의 가장 오래된 아내로 가장 먼저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사실상 언니 같은 존재로 모두가 그녀를 중심으로 따르고 있었다.오민아와 조혜영 같은 당찬 여인들조차 한지음 앞에선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불렀다.“그날 이 선생님이 데리러 오셨을 때 오라버니가 우리더러 다섯 번째 선배님이 계신곳에 있으라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는 말씀 안 하셨지만 또 무슨
“다섯째 선배, 또 저를 놀리는 거죠. 초면도 아닌데 그만 좀 놀리세요.”한지음이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혔지만, 여전히 대범하게 모두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민아 씨, 혜영 씨, 다섯째 선배가 입을 열었으니, 우리 셋이 선배들에게 술을 올리죠. 우리가 모두 도현 오빠의 여자인 만큼 마땅히 선배들께 술을 따라드려야 해요.”“알겠어요. 지음 언니.”한지음, 오민아 그리고 조혜영은 세상 물정을 많이 겪어본 사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소녀들처럼 쑥스러워하지는 않았다.그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고 윤선아 앞으로 다가갔다.“둘째 선배, 저희가 술을 올리겠습니다. 한 잔 받으세요.”“호호. 어서 앉아요. 다섯째 후배가 장난친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다 한 식구인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나요.”윤선아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결국 술잔을 받았다.“물론입니다. 둘째 선배.”그 후, 세 여자는 홍조가 띤 얼굴로 다른 세 명의 선배들에게도 차례대로 술을 올렸다. 그렇게 술을 올린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이도현은 전반 과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감회를 느꼈다.‘이게 진정으로 가정을 이룬 기분일까?’하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이도현은 조금 전 윤선아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이도현은 이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몇몇 선배들의 눈빛에서 걱정스러운 기색을 읽었지만, 선배들 역시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냈다.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이도현은 세 여자를 방으로 데려다주었고, 자신이 곧 나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니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르라고 했다.몇 가지 일을 더 당부한 후, 이도현은 세 여자와 각각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세 여자의 걱정 어린 눈빛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다시 선배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선배 네 명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차 있
방으로 들어간 후, 세 여자는 이도현에게 차를 따라주는가 하면 과일을 깎아주고 간식을 가져오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했다.그리고 이도현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세 여자가 이도현 앞에서 대놓고 옷을 갈아입으며 성숙한 몸매를 드러내자, 이도현은 열째 선배 연진이의 말이 떠올랐다.여기가 다섯째 선배의 거처여서 다행이지, 만약 이도현의 집이었다면 벌써 세 사람을 덮쳤을지도 모른다.이도현은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욕망이 들끓었다.만약 그가 아직 순진한 소년이었고 여자와 놀아보지 못한 상태였다면, 그나마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맛을 이미 체험해 본 이상 이도현은 참기 너무 힘들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세 여자를 끌어안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정말이지 그의 뛰어난 자제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선배들에게 놀림당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면 이도현은 이미 덮쳤을 것이다.게다가 세 사람 모두 이도현의 아내이니 문제 될 것도 전혀 없었다. 다만 선배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러지 않은 것뿐이다.세 여자는 이도현이 보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관계도 맺었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보여줬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이도현의 욕망이 이성을 제패하기 일보 직전, 세 여자가 옷을 다 갈아입었고 이도현도 드디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그 후 네 사람은 기화영의 방으로 갔다.기화영의 방에는 이미 술과 음식이 준비된 채 이도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선배,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하하하.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 괜찮아. 반나절 기다려야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이 녀석이 나쁜 짓을 안 했나 봐. 잘했어...”“자, 동생들, 제가 소개해 줄게요. 이분은 우리의 둘째 선배예요. 다들 본 적 있죠?”연진이는 웃으며 윤선아를 가리켰다.“둘째 선배, 안녕하세요.”세 여자가 공손히 인사했다.그녀들은 이미 이도현과
이도현은 지금 딱 여자들한테 빌붙어 사는 남자 같았다. 하지만 웃긴 건, 그는 전혀 여자한테 도움받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만약 과거에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이도현은 이렇게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와...”이도현은 속으로 깊은 감회를 느꼈다.‘내가 보잘것없던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은 다 나쁜 놈들이었어. 심지어 목숨을 구해준 사람마저 나에게 뒤통수를 쳤지. 하지만 성공해서 정상에 오르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이지 뭐야.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도 하나같이 좋은 사람인 데다가 돈도 많고,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려고 해.’그렇다. 사람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이도현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우여곡절 하던 운명을 한탄한 후,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좋아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우리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은퇴해 살아요. 세 사람이 저를 먹여 살리고, 저는 맘 편히 얹혀살 거예요.”“우리가 남편을 돌보는 건데 그게 왜 얹혀사는 거예요? 우리는 도현 씨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얹혀산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되죠.”“맞아요. 우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아마 지음 언니 빼고 저와 혜영 씨 두 사람은 벌써 가문의 요구에 따라 정략결혼을 했을 거예요.”“그럼요. 오라버니가 없었다면 우리 가문은 이미 몰락하거나 망했을 거예요. 저 역시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조혜영과 오민아는 감개무량하게 말하며 이도현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이게 곧 운명이죠. 자, 이제 들어가서 얘기해요. 잠시 후 다섯째 선배가 오기로 했으니까 다들 준비하고 같이 가요.”세 여자는 마지못해 손을 놓고 이도현을 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세 여성 중 조혜영만 무공을 조금 할 줄 알았고 이도현이 준 단약 덕분에 현재 내공이 많이 제고되었다.오민아와 한지음은 원래 평범한 여자들이었지만 이도현이 준 주안단을 복용한 후 얼굴이 열입곱살 소녀처럼 생기 넘치고 어여쁘게 변했다.
이도현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와 용팀소속 여성 구성원의 안내를 받아 한지음 일행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용왕님, 들어가시죠. 세 사모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방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저희는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그녀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물러났다.문 앞에 다다르자 이도현은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한 명도 아니고 셋이나 되는 여인들이 한 방에 있다니, 지금처럼 일부일처제가 당연한 사회에서 그의 행동은 그가 봐도 양심 없어 보였다.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만난 적도 있었지만 셋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이 방에 자기가 직접 찾아 들어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뻘쭘했다.이도현도 미인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선을 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렇게 눈치 볼 일도 없었다.한 번 숨을 고른 이도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도현 오라버니...”문을 연 여자는 이도현을 보자 놀란 듯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겼다.“혜영아.”이도현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도현 오빠!”“오빠...”조혜영의 목소리를 들은 한지음과 오민아도 방 안에서 뛰쳐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도현을 보는 순간 말도 없이 달려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순식간에 이도현은 세 여인을 품에 안았다. 앞뒤좌우로 거대한 압박에 짓눌린 그는 그 사이에서 반항할 용기조차 없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오빠,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겠어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한지음은 이도현의 가장 오래된 아내로 가장 먼저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사실상 언니 같은 존재로 모두가 그녀를 중심으로 따르고 있었다.오민아와 조혜영 같은 당찬 여인들조차 한지음 앞에선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불렀다.“그날 이 선생님이 데리러 오셨을 때 오라버니가 우리더러 다섯 번째 선배님이 계신곳에 있으라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는 말씀 안 하셨지만 또 무슨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잖아요!”“울긴 왜 울어 남들이 보면 웃겠다. 얼른 들어가자.”윤선아는 귀엽다는 듯 후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들 중 셋째 인무쌍을 제외한 나머지 후배들은 모두 윤선아가 어릴 때부터 함께하며 키우다시피 한 사이니 그 정이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알겠어요. 선배,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이도현은 겉으로 보기엔 말 잘 듣는 후배처럼 보였지만 막상 일을 처리할 땐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순한 척 웃고 있지만 속은 반항심으로 가득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선배가 기뻐하는 일이었다.“자연아, 간단한 안주 몇 가지랑 도수 낮은 술 한 병만 준비 해달라고 전해줘. 오랜만에 우리끼리 조용히 한잔하려고.”기화영이 자연이에게 조용히 일렀다. “네. 팀장님.”자연이는 짧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사실 자연이는 이도현과 선배들 사이의 관계가 부러웠다.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진짜 가족처럼 서로를 아끼고 어떤 사심도 없이 늘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그 마음이 괜히 뭉클하게 느껴졌다. “갑시다. 안으로 들어가요, 우리.”“참, 도현아. 지음 씨랑 다른 친구들도 좀 보고 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꼭 데리고 와. 우리 다 같이 모여야지. 앞으로는 진짜 한 가족이잖아.”기화영은 다정하게 당부했다. “알겠어요. 선배.”이도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난꾸러기, 또 무슨 짓 하려는 거야? 밤엔 시간 많으니까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만들지 말고.”막 자리를 뜨려던 이도현에게 열 번째 선배 연진이가 짓궂게 웃으며 한마디 던지자 이도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하, 이 녀석. 나쁜 짓 할 땐 그렇게 당당하더니 이제 와서 부끄럽대?”가화영도 한마디 보태며 웃었다.“둘이 또 도현이 갖고 장난치지 마. 얼굴 새빨개졌잖아. 이제 그만해.”인무쌍은 이도현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조용히 분위기를 정리했다. “세 번
병사는 한동안 넋 놓고 두 사람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 가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이도현, 동해용왕? 설마... 그분?”“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그의 뇌리를 스치자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가 떠 올린건 다름 아닌 무사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되던 전설 같은 존재였다.그는 윗선에서도 철저히 숨기려 했던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들끓었고 그의 업적은 무사로 갓 입문한 자신에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미치지 않고서야 평생 한 번이라도 만나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는데 내가 이런 멍청한 짓을 했다고? 한심한 놈, 니 그릇이 딱 거기까지인 거야. 너는 맞아도 싸.”병사는 자기 뺨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처음엔 씹어 삼킬 듯이 욕을 퍼부었지만 나중엔 말도 안 나왔다. 그저 입만 달싹이는데 그 속에서 뱉고 있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자연이가 길을 트자 그 누구도 감히 이도현을 막지 못했다. 덕분에 기화영의 거처까지 단번에 도착할 수 있었다.“팀장님, 동해용왕님과 대인 한 분이 오셨습니다.”“뭐? 누가 왔다고?”안쪽에서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장치 특유의 찌직거리는 기계음이 울렸다. 곧이어 누군가 문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세차게 열렸다. 곧바로 세 명의 여성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둘째 선배! 이도현 이 바보야!”“도현 후배...”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달려와 윤선아와 이도현을 와락 안았다. 그렇게 다섯 명은 하나로 포개져 서로를 꼭 껴안았다.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이도현은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이 감각이 결코 낯설진 않았다. 어딘가 오래된 기억처럼 익숙했다.간신히 고개를 빼낸 이도현은 자신을 꽉 껴안고 있던 사람이 셋째 선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세 번째 선배는 예전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아니... 네 윗선한테 물어보기라도 해 봐. 분명 날 들여보내라고 할 거니까.”이도현은 터질 듯한 화를 간신히 눌러 담았다.“안 돼. 여긴 상급 명령만 있는 곳이지 내가 먼저 물어보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나가.”병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딱 잘라 말했다.이도현은 체념한 듯했다.다섯 번째 선배의 구역이 아니었다면 그냥 몰래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얘기가 다르다.이도현이 체면을 좀 내려놓고 다섯 번째 선배에게 전화를 하려던 찰나 병사들이 서 있던 통제 구역 안쪽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무슨 일이야?”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출입을 시도한 인원에게 퇴거를 명령했으나 불응하고 있어 보고 드립니다.”“장군님, 바로 저놈들입니다.”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장군이라 불린 여자는 병사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이도현을 보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동해용왕께 인사 올리옵니다.”여장군이 갑작스럽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도현에게 큰소리치던 병사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그가 진짜 동해용왕이었다니. 병사는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눈앞에서 마주한 채 스스로의 무지를 실감하고 있었다.한편 이도현 역시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는 다름 아닌 과거에 몇 차례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자연이었다.“자연이 오랜만이네. 그리고 나 이제 동해용왕 아니니까 그렇게 안 불러도 돼.”이도현이 웃으며 말했다.“팀장님께서 아직 당신의 권한을 폐지하지 않으셨으니 당신은 여전히 동해용왕이십니다.”자연이가 이도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설 같은 이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했다. 소년에서 남자로,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존재로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자연이의 말에 이도현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물었다.“다섯 번째 선배를 만나러 왔는데 혹시 말 좀 전해줄 수 있을까? 부탁 좀 할게.”“용왕님 그런
윤선아의 주선으로 이도현 일행은 전용기를 타고 곧바로 동방으로 돌아갔다.이도현은 완성으로 향하는 대신 황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성에 도착하자 소유정과 한소희는 아쉬운 표정으로 이도현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미련이 남은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지성윤 선배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한편, 이도현은 둘째 선배와 함께 용팀 기지로 향했다.그는 떠나기 전, 한지음과 열 번째 선배 연진이, 그리고 세 번째 선배 인무쌍을 그곳에 남겨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오민아와 조혜영까지 데려왔기에 지금 그가 가장 먼저 향할 곳이 가족들이 있는 용팀 기지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멈춰! 여긴 군사 기지다. 정체를 밝혀라. 허가 없이 침입은 금지다. 당장 나가!”이도현과 둘째 선배가 기지 구역에 들어서자 누군가 그들을 막아서며 외쳤다. “나는 다섯 번째 선배이자 용팀 팀장인 기화영을 만나러 왔어. 내 이름은 이도현이야.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닐 텐데?”이도현은 이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사였고 예전엔 용팀의 동해용왕이기도 했으니 용팀 소속이라면 자신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기화영이 에드워드 가문에게 위협받던 시절, 그가 직접 용팀을 이끌기도 했던 터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런 이름 몰라. 당장 나가.”“여긴 군사 시설이야. 이도현이든 이도룡이든 이도 뭐든 간에 접근 금지다. 나가라!”병사는 얼굴을 굳힌 채 엄숙하게 말했다.그 말에 이도현의 얼굴엔 썩은 걸 억지로 삼킨 듯한 역겨움과 분노가 뒤섞였다.그는 원래 권력을 앞세워 일하는 걸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둘째 선배가 함께 있었고 이곳은 다섯 번째 선배 기화영의 구역이었기에 괜히 말썽을 일으켜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딱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융통성 있게 넘어가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자신을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이름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조롱까지 섞은 태도. 이름을 밝혔음에
다만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런 쓰레기 같은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며 오직 아름다운 것만 기록으로 남겨졌을 뿐이다.예를 들어 반금련처럼 이름만 들어도 욕이 되는 여인들이 역사에 가득하다면, 역사 자체가 더럽혀지게 된다.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미녀가 영웅을 사랑하는 것은 남자가 미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소유정과 한소희가 이도현을 좋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다만 현재 이도현의 마음에는 그녀들이 발을 디딜 자리가 없었다.“선배, 출발합시다. 선배도 저들의 손을 꼭 잡으세요.”이도현이 선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윤선아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소유정의 손을 잡았다. 일행이 손을 맞잡은 채로 전송진에 들어선 순간, 마치 시간 터널에 휘말려 들어간 듯 시야가 캄캄해졌고 허공을 떠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움직임이 멈춘 느낌을 받았을 때, 다시 눈을 떠보니 이미 낯선 장소에 서 있었다.이도현이 신기를 펼쳐 확인해보니 확실히 성지의 외곽 지대에 도착해 있었다. 각자의 전송 위치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천사국 입성 때처럼 수천 리 밖으로 랜덤으로 흩어지는 것보다 이번 이동이 훨씬 안정적이었다.비록 십 리 정도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접한 거리였다.“소 아가씨, 지 아가씨, 한 아가씨. 저랑 선배는 동방으로 돌아갈 계획이에요. 여러분들은 무슨 계획이 있어요?”이도현이 뒤돌아 묻자 소유정이 지성윤에게 의견을 구했다.“선배. 우린 어디로 가요?”“우리도 나온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사문의 성물을 찾지 못했고, 성지와 천사국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으니 스승님께 돌아가서 보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아.”‘사문의 성물은 왕급 경지의 내공을 지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골똘히 생각한 뒤 지성윤은 결론을 내렸다.지난번에 그녀는 이도현의 권유로 일단은 남았지만, 이제 그가 떠나는 마당에 계속 남아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함께 돌아갑시다.”윤선아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