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한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네요.”육하경은 술잔을 들며 쓴웃음을 지었다.“대신 앞으로 꽃길만 걷기를 바랄게요.”진경수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일북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전 아가씨께서 평안하고 순조롭기를 바랍니다.”일남이 일북에게 물었다.“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우리 둘 다 아가씨가 평안하고 순조롭기를 바랍니다.”일북이 다시 말했다.“고마워.”마지막으로 도아린도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잔을 부딪치려는 순간, 갑자기 룸 문이 열리며 성대호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그는 도아린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말해 봐요. 어떻게 해야 아린 씨 화가 풀리겠어요?”도아린은 입가에 번졌던 미소가 이내 사라져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성수진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성대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죄송해요. 제 동생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성대호는 문 앞까지 끌려갔지만 이내 성수진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도아린을 노려보며 말했다.“방우진한테 해결책을 제안한 건 저예요. 다시는 지유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감옥에서 나올 모든 가능성을 끊으려 했어요. 아린 씨, 다 저 때문이에요. 배씨 가문과는 일도 상관없어요.”말을 마치고 그는 손을 뻗어 술병을 집으려 했다.일북과 일남은 재빨리 도아린의 앞을 막아섰다.쾅!성수진은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술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성대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술이 상처로 흘러 들어가면서 고통스럽다 못해 얼굴도 잔뜩 일그러졌다.그는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고 도아린을 쏘아보며 소리 질렀다. “아린 씨 동생이 칼에 찔린 걸 지금 보상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술병을 집으려 했으나 육하경이 재빠르게 말렸다.“그만해. 오늘은 아린 씨의 자리야.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하자.”피가 성대호의 눈에 흘러 들어가자 그는 마구잡이로 닦았다. 어느새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고 그 모습은 더
“수진 씨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렸다.“수진 씨가 성씨 가문 전체를 저한테 준다고 해도 전 건후 씨와 재혼하지 않을 거예요.”“그럴 리가!”성대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당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야 겨우 건후와 결혼했는데, 말도 안 되잖아.”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그때 누군가와 등을 부딪쳤다. 그는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문 앞에 나타났는지 모를 배건후와 손보미가 서 있었다.“대표님, 제 사촌 동생이 많이 취했어요. 당장 데리고 나가겠습니다...”성수진은 성대호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러나 그는 배건후를 똑바로 쳐다보며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둘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배건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협력을 취소하는 것만으론 부족한가 봐.”성대호는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떠지더니 성수진을 뿌리치고 배건후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너 정말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할 셈이야?”“성 팀장님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니 건후 씨가 이런 태도를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요.”손보미는 도아린을 흘겨보며 비아냥거렸다.방 안에는 남자 네 명과 도아린 혼자 유일하게 여자였다.하지만 손보미는 이혼 숙려 기간에 절대 둘에게 재결합의 기회를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성대호는 평소에도 손보미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배건후만을 바라보며 따졌다.“내가 아린 씨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난 너희 배씨 가문을 위해서잖아. 네 여동생 때문에!”그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내가 왜 배씨 가문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을까? 예전에 누가 그랬지? 지유를 친동생처럼 대해라고. 내가 그 말을 듣고 뭐가 남았는데? 차라리 아린 씨랑 정면으로 붙게 내버려둬야 했어. 누가 누구를 끝장내나 보게 말이야.”성대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룸을 나갔다.그는 성수진의 팔을 뿌리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성수진은 황급히 배건후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 뒤 서둘러
손보미는 율이를 데리고 배건후를 따라갔다.율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안 놀아줘요? 언니 때문이에요?”손보미는 몰래 율이의 가느다란 손목을 꽉 쥐었다. 그녀는 얼굴이 굳어지다 못해 일그러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율이는 이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도아린의 곁으로 달려갔다.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병실 문을 열었다.침대 위에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다.“지희야.”손보미는 조심스레 불렀다.지희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몇 걸음 더 다가갔다.“지희야, 보미 언니야. 기억나?”지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머리카락 사이로 손보미를 탁한 눈동자로 바라봤지만 알아보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지희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손보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내가 떠날 때 너도 율이만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못 알아봤을 거야.”손보미는 다정하게 지희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지희는 등을 곧게 펴더니 이내 온몸이 굳어갔다.약 5~6초간 경직되어 있더니 갑자기 손보미의 손을 뿌리치고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린 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지희는 몸을 둥글게 말고 침대까지 흔들릴 정도로 덜덜 떨었다. “지희야, 무슨 일이야?”손보미는 일부러 당황한 척하며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지?”순간 율이는 병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지희 언니! 나 율이야!”그러나 율이가 부를수록 지희는 더욱 심하게 떨었고 머리를 더 깊숙이 파묻었다.“우리가 지희를 찾았을 때 지희는 쇠사슬에 묶인 채 채소 저장고에 갇혀 있었어요.”육하경은 천천히 도아린에게 설명했다.“의사의 초기 소견으로는 심각한 공포를 겪은 상태라고 하더군요.”도아린은 병실로 들어가며 손보미에게 손짓했다.“
손보미는 병실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질렀다.“건후야, 지희 안전 갖고 장난치지 마! 너 줄곧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려고 했잖아!”“5분 줄게. 내가 나가면 시작해.”배건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율이야, 너도 나가.”“율이는 남겨요.”도아린은 병실 문을 닫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는 율이를 달래며 다정하게 말했다.“이제 율이랑 둘만 있어.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야.”지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지희 언니, 아린 언니는 착한 사람이야. 나 아플 때 도와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줬어. 겁내지 마.”율이는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도아린은 이불을 사이에 두고 지희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말했다.“천사 보육원이 폐쇄됐어. 대머리랑 빡빡이도 구속됐고.”“산중 농가에서 지희를 괴롭혔던 사람 중 한 명은 회사 자금을 유용해서 잡혔고 또 다른 한 명은 불법 도박장을 열어서 잡혔어. 보육원에 있던 유 선생님도 불법 모금으로 체포됐어.”지희의 떨림은 점점 줄어들었다.도아린은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배건후가 신뢰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뒤로 그녀는 줄곧 일북에게 시켜 지희를 해친 자들을 조사했고 절대 가만두지 않기로 다짐했다.도아린은 몸을 숙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지희에게 속삭였다.“비록 체포되긴 했지만 지희랑 관련된 죄목은 없어. 만약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살고 싶다면 언니가 도와줄게. 아니면 지희가 복수를 원한대도 언니가 도와줄 수 있어. 다만 과거의 트라우마와 마주해야 할 거야. 지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율이는 도아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아린이 지희를 위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율이는 이불 틈으로 손을 넣어 지희의 손을 잡았다.지희의 손바닥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며 지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손보미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초조한 기색으로 병실 밖에서 서성였다.병실은 매우 조용했고 그녀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이 가장 두
도아린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가서 지희가 괜찮아졌다고 말해줘. 근데 아무도 들어오게 하면 안 돼.”율이는 달려가 문을 열고 도아린의 말을 배건후에게 전했다.손보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병실로 뛰어들려 했으나 육하경에게 금세 잡혔다.“아린 씨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손 놔요. 지희가 괜찮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배건후는 문 앞에 서서 도아린과 눈을 마주쳤다.지희는 고개를 숙인 채 도아린의 손을 잡고 조용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일 있으면 먼저 가. 가기 싫으면 방 잡고 기다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도아린은 손보미를 의식하며 일부러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손보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육하경의 손을 세게 뿌리쳤으나 병실로 뛰어들기도 전에 다시 배건후에게 어깨를 붙잡혔다.“건후 씨, 아린 씨 말을 믿지 마! 만약 아린 씨가 지희에게 진정제를 먹였으면? 직접 확인해야겠어. 지희가 정말로 괜찮은지.”배건후는 힘을 주어 그녀의 어깨를 더 세게 붙잡았다.“아래 회의실로 갈게.”그는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한 번 보고는 병실 문을 닫았다.문 앞에는 일북과 일남이 남아 지키고 나머지는 아래 회의실로 내려갔다.도아린은 배건후의 암시를 눈치채고 시선을 돌려 꽃다발 속에 숨긴 감시 카메라를 발견했다.병실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이 간 회의실에 모니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도아린은 지희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제 다 갔어. 물 좀 마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언니는 지희를 존중할 거고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야.”아래 회의실에서 배건후는 모니터를 켜게 했다.그는 육하경과 함께 손보미의 옆에 앉아 같이 모니터에 집중했다.지희는 도아린의 손에서 물잔을 받아 들었다.병실은 너무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그해 제가 13살이었을 때 원장님이 우리를 입양하겠다
“제가 말을 못 하니 아마 신고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지희는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다.“유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불러서 용감하다고 칭찬까지 했어요. 제가 번 돈으로 장애가 있는 동생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요...”배건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는 도아린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보았고 그녀가 결코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아차렸다.육하경은 고개를 돌려 손보미를 보며 말했다.“미안해요. 많이 놀라셨겠어요.”“...”손보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하마터면 입술을 깨물 뻔했다.그녀는 도아린에 대한 증오를 다른 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이 짐승 같은 놈들!”육하경은 다시 도아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비쳤다.도아린은 지희를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배건후는 영상을 복사하러 갔고 손보미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지희를 남겨둬서도 영상을 남겨둬서도 안 되지만 육하경이 계속 지켜보고 있어 삭제할 기회조차 없었다.결국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지희의 위치와 사태의 심각성을 외부에 알렸다.다들 지희의 안전을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다.도아린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배건후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나 도아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육하경에게 물었다.“신고했어요?”“네, 했어요. 지희 병실에 전담 경호원도 배치했어요. 율이가 남아서 지희와 함께 있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거예요.”도아린은 뭔가 말하려다 손보미를 흘겨보고는 되레 삼켜버린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주차장으로 가던 길에 도아린은 갑자기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손보미는 갑자기 배건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얼른 가자.”“아는 사람이에요?”육하경은 도아린에게 물었다.그녀는 위아래 훑어보더니 일남에게 눈짓했다.“아가씨를 납치했던 사람입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그녀를 쫓아
도아린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자 눈을 떠보니 배건후가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다.그는 쇠 파이프에 어깨를 맞았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통증에 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손강해는 잠시 멈칫하더니 발을 들어 배건후를 걷어차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배건후는 번쩍 몸을 돌려 그의 발목을 힘껏 비틀었다.아무래도 손강해는 나이가 있는지라 배건후에 의해 몸이 공중에서 꺾였다. 아마 손강해는 사무실에만 앉아 있던 대표가 이렇게 힘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손강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배건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우두둑!배건후는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지더니 단숨에 손강해의 발목을 꺾어버렸다.“아악!”손강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뒤늦게 달려온 손보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손강해는 그녀를 보고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그제야 반응하고 급히 바닥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쇠파이프를 든 순간 바로 후회했다.배건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만약 배건후에게 쇠 파이프를 넘기면 손강해는 더 크게 다칠 것이고 반면 손강해에게 주면 그녀의 정체를 들키게 된다.손강호와 배건후의 압박에 손보미는 쇠 파이프를 꽉 쥔 채 손강해를 향해 몸을 돌렸다.“아악! 아악! 아악!”그녀는 미친 듯이 손강해를 향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아무래도 배우 출신이라 각도를 교묘하게 잡았기에 겉보기에는 힘껏 내려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쇠 파이프를 바닥에 내리쳤다.손강해는 딸이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힘껏 손보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경찰이 도착했을 때 일북은 한 명을 밟고 있었고 손에는 또 다른 한 명을 붙잡고 있었다.일남도 하춘녀를 잡아서 경찰차에 모두 태웠다.“피! 건후 씨,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손보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배건후 쪽으로 달려갔다.도아린은 배건후를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배건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아린은 가슴이 조여 들었다.‘설마 또 일부러 다치고 불쌍한 척하는 건가?’그가 진실을 알고 난 뒤 얼음장마냥 차가운 눈빛은 연기 같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를 납치했던 여자가 나타난 건 너무 우연스러웠다.일부러 다친 게 아니면 혹시...도아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녀는 배건후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곧 병원에 도착해요. 조금만 참아요.”배건후는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엉뚱한 말을 던졌다.“너 나 좋아한 적 있어?”“...”‘좋아한 적... 있을까?’도아린은 대학 시절 배건후에게 첫눈에 반했다.비록 손보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우연히 육민재 할머니를 도왔고 마침 육민재와 배건후가 절친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배건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육민재를 자주 찾아가곤 했다.배건후는 겉보기에 냉담하고 고고했지만 친구들과 있을 땐 가끔 농담도 던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별로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육민재에게도 그녀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다.그 뒤로 도아린은 곤경에 처하며 더는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해 겨울에 배건후를 만났다.배건후는 그녀의 히어로였다.도아린은 심지어 자신이 겪은 고난이 모두 배건후를 만나기 위한 시험이라고 여겼다.만약 손보미가 귀국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배건후가 그녀를 대놓고 편애하지 않았다면 도아린은 그를 향한 마음을 숨긴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실망이 너무 쌓이다 보면 감정이 소모되기 마련이었다.“3년 전 그날, 누가 도와줬든 간에 전 그 사람과 결혼했을 거예요.”도아린은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배건후의 창백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손등에는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날 밤 방을 들어간 사람이 누구든 건후 씨는 보미 씨를 자극하려고 결혼했겠죠.”도아린이 한마디 덧붙였다.“아니야.” 배건후는 눈을 떴다.고통스러운 그의 눈빛은 몸에 난 상처 때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
“뭐 하는 짓이에요?”배건후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석준을 쏘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배석준은 해명하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네가 제정신이냐? 여자 하나 때문에 대표 이사를 그만둬? 회사가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그건 제 일입니다.”“넌 내 아들이야. 너한테 뭐라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배석준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차올라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이 충혈되었다.그러나 배건후는 그를 무시한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다친 데 없어?”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해요.”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배석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너 사인 하기만 해. 그럼 진짜 우리 부자지간도 이젠 끝이야.”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배석준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배건후와 도아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다 컸다 이거지? 내가 외국에서 힘들게 회사를 키우는 동안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그러나 배건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데려다줄게.”거절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배석준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고마워요.”차에 탄 후,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뒤따라오던 차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그가 근처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기 살아?”“친구 집이에요. 잠깐 머물고 있어요.”그와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해남으로 돌아갈 거예요. 잘 지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율이 사건에 진전이 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하경 씨한테서 들었어요.”...그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주주들이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을 절대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딸의 다리를 반쯤 부러뜨리고 그와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도 모라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게 만든 도아린이 주주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 같은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태도는 서먹서먹하였다. 이것이 이혼에 필요한 절차라면 그녀는 양보할 수 있었다.“10분 드릴게요.”도아린은 옆 벤치로 가서 앉았다. 심호흡하던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 3년 동안, 우리 집안에서도 할 만큼 했다. 도정국 가게의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네 남동생의 병원비도 건후가 다 책임졌었지. 그동안 네가 입고 먹고 쓰고 한 것도 다 우리 가문의 돈이야.”“건후가 널 소홀히 한 건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막 회사를 인수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지. 손보미와의 스캔들은 손보미가 귀국한 후, 언론에서 마구 퍼뜨린 것이야.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3분 남았습니다.”배석준은 마음이 불편했다. 윗사람이 체면을 구기고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쌀쌀맞기만 하는 건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네가 눈감아 주거라. 어차피 너한테서 건후의 아내 자리를 빼앗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건후의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너한테도 좋을 것이 없어.”배석준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건후와 닮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한껏 묻어났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열 테니 최근의 일은 모두 네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하거라. 너희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자들한테 말해. 이혼 얘기는 네가 먼저 꺼낸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건후는 널 쫓아낼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피식
도아린은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안민아가 계속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할 때부터 그녀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보니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안민아는 손보미를 싫어했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엄마, 내일 연성에 좀 다녀올게요.”“뭐 하러?”“내일이 이혼 숙려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건후 씨와 깨끗이 정리하려고요.”또한 도지현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정국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윤명희는 그녀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시집가기 싫으면 평생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너 평생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요.”“또 한 번 고맙다고 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야.”도아린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피식 웃었다.“둘째 오빠랑 같이 갔다 와. 배건후가 후회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럴 리 없어요.”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날 저녁, 욕조에 누워 마사지를 즐기고 있는데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건후였다.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전화가 한번 끊기더니 다시 또 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리던 벨 소리가 잠잠해지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잠시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강재민: 강홍련이 도유준이 성을 바꾸는 걸 동의했어요. 내일 예단을 준비해서 찾아갈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서대은: 안준휘와 계약을 취소한 두 회사는 모두 손보미가 강재희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회사들이야. 나중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소유정: 며칠 쉬러 갔다 올게. 전화기는 꺼둘 거야. 그러니
억울했던 안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도아린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봐 일부러 물을 틀어놓았는데 어떻게 이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아직도 도유준 편을 들고 싶어?”도아린은 그녀의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도유준한테 전화한 거 맞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도유준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안민아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통화기록을 절대 도아린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핸드폰 뺏지 말아요.”“도유준 그 자식이 또 널 속인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단단히 혼내줄게.”겉으로는 안민아를 걱정하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도아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안민아가 한사코 그녀를 막았다.당황스러운 얼굴의 안민아는 안준휘에게 몇 번이나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이때, 안준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끊고는 언짢은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강요하지 말거라. 말하기 싫다는 애를 왜 그리...”“왜요?”손을 놓던 도아린은 시선을 안민아에게 돌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설마 강재민 씨야?”“아니에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었어요.”“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거잖아.”이때, 윤명희가 갑자기 현관에 나타났다. 마트를 다녀온 윤명희는 식재료를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안민아를 향해 걸어왔다. “민아야, 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기록이야. 나중에 도유준이 기록이라도 내세워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면 그땐 어떡할 거니?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거라. 그래야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안 그래?”안민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만약 손보미와 손을 잡고 도아린을 음해한 사실을 진씨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물론 사업도 물 건너가고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고민 끝에 안민아는 결국 자신이 도유준에게 전화를 걸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깜짝 놀란 강홍련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 하였다.오늘의 일은 네 몫도 있는데 여기서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고.그러나 문 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니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듯했다. “배 대표님이 여긴 어떻게...”그녀는 재빨리 도정국의 뒤에 몸을 숨기며 극구 변명했다.“오해하지 말아요. 난 그런 적 없으니까. 손보미 씨가 한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안민아가 그런 거예요. 내 아들과 결혼하고 싶어서 꾸민 짓이고 그걸 도아린한테 뒤집어씌운 거라고요.”옆에 있던 손보미가 그녀를 노려보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걸 배건후는 눈치채지 못하였지만 도정국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들이 합심하여 도아린을 모해하려고 일을 꾸몄다가 오히려 도아린에게 당한 것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금속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배건후가 차가운 눈빛으로 도정국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이 도유준의 성을 내일 당장 바꾸겠다고 했어요.”거절하려는 도정국을 보며 손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도유준까지 시궁창에 끌어들이지 말아요. 강씨 가문의 사람이 되면 그래도 명문 가문의 도련님으로 인정받는 거니까. 다른 사람은 꿈도 못 꾸는 일이죠.”그녀는 필사적으로 강홍련에게 눈짓을 했고 강홍련도 따라서 도정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화가 치밀어 입술이 파랗게 질렸지만 도정국은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잠시 후, 손보미와 배건후가 자리를 뜬 뒤, 그가 강홍련을 발로 차서 바닥에 넘어뜨렸다.“이게 다 당신 탓이야. 이 여편네가 생각이 있는 건지.”문득 도아린의 말이 생각났다. 그동안 도정국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걸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 내가 강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정은채 그 여자의 모든 것을 다 빼앗고도 한편으로 달콤한 말로 날 속이고 훗날 날 이용해 강씨 가문의 덕을 보려고 한 거 아니에요?”“그게 무슨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불안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차가운 남자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또 도아린 괴롭히러 간 거야?”“아니. 그런 거 아니야.”손보미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우리도 강씨 가문에 가서야 아린 씨가 있는 걸 알게 되었어. 그리고 지유가 아린 씨한테 사과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잊기로 했어. 안 그래? 지유야.”“맞아요. 도아린 씨가 나한테 꽃까지 줬어요. 휠체어에 있는 꽃잎이 바로 그 꽃이에요. 우리 화해했어요.”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꾹 누르며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원한을 다 풀었다면 도아린이 준 꽃을 이리 으스러뜨렸을까?그의 어두운 눈빛이 쇠 방망이처럼 배지유의 가슴을 두드렸고 그녀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오빠, 보미 언니. 나 다리가 너무 아파요...”그 말에 손보미는 급히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가 병실을 나간 뒤, 배지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배건후를 쳐다보았다. “오빠, 이제 곧 보미 언니랑 결혼할 거잖아요.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언니가 많이 상처받을 거예요. 내 기분 풀어주려고 언니가 날 강씨 가문에 데리고 간 거예요. 재민 씨가 도아린 씨를 초대할 줄은 우리도 정말 몰랐어요.”“도아린 씨가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버린 남자를 언니가 주워가는 거라고. 그래도 보미 언니는 화 한번 내지 않았어요. 정말 도아린 씨 괴롭히려고 간 거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지금 이런 꼴인데 누구를 괴롭혀요?”잠시 후, 손보미는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고 의사가 배지유 다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연성에서 오느라고 수고했어. 얼른 가서 쉬어. 지유도 푹 쉬라고 해야지.”손보미가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얌전히 병원에 있어. 합병증이라도 생기면 그땐 정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테니까.”그가 차갑게 배지유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이불을 움켜쥐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배지유의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부어 있었지만 눈빛은 매우 날카로웠다.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는 그녀의 얼굴에 조롱이 깃들여 있었다. “여동생의 일은 양가 어르신들께서 결정할 문제예요. ‘봉황의 시대’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관리할 생각입니다.”그 말에 강태식의 안색이 굳어졌다. 나한테는 덕이 없다는 뜻인가?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를 가진 그는 얼마 전에 일흔여덟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아직까지 혈기 왕성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검버섯과 주름살이 가득했다. 늘어진 눈꺼풀이 날카로운 시선을 감추었고 그가 도아린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린 계집애가 복수를 위해 강씨 가문까지 이용하려 들다니...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계집애군. 그러나 이런 사람은 양날의 검이었다.“배건후와 이혼했다는 소문은 들었네. 괜찮은 젊은 친구들을 내가 좀 알고 있는데 소개해 줄까? 우리 재민이는 외국에서 자라서 성격이 방탕하고 좋은 남자가 아닐세.”“아버지. 어떻게 아들을 그리 비하할 수 있어요?”“널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도아린 양한테는 네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그의 태도는 명확했다. 도아린을 강씨 가문의 며느리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도아린도 피식 웃었다. “어르신, 제 결혼은 저희 부모님께서 신경 써주실 거예요. 그리고 여자가 꼭 시집을 잘 가야 잘 살 수 있다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안 그래요? 강재희 씨.”차를 마시던 강재희는 흠칫했다. 짙은 속눈썹을 드리운 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태식은 단목구슬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빈틈이 없구나. 네가 강씨 가문의 주가를 통제할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해남병원. 병실 문을 들어오던 배지유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오빠? 오후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 손보미를 쳐다보았다. 서둘러 돌아온다고 했는데 결국 한발 늦은 것이다. 그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창문이 반쯤 열려있었고 창턱의 재떨이
“그건 안돼.”강홍련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민아 씨, 전에도 하마터면 우리 아들의 명예를 망가뜨릴 뻔했었죠. 그런데 오늘 또 똑같은 수법을 쓰는 거예요? 손보미와 배지유는 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린 거예요. 원하지 않았다면 왜 처음부터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가요?”“숨어 있으면서 도아린이 찾는 데도 잠자코 있었죠. 그런데 뭐예요? 우리 아들한테 책임질 일까지 해놓고 모른 척하는 거예요? 사람들한테 들켰다고 지금 우리 아들한테 다 뒤집어씌우냐 말이에요?”강홍련의 말솜씨에 안민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편, 안준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손에 든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양측이 심하게 다툴 때, 강재희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정국의 빚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예요?”거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날뛰던 강홍련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진 채 눈빛이 흔들리면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던 안준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당신들 지금 내 딸한테 그 빚을 갚으라고 할 생각인 거야? 이러고도 우리 안씨 가문을 모해하지 않았다니...”강홍련이 뭐라 변명하려 할 때 강재희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 “도유준이 성을 바꾼다면 도정국의 채무는 그와 무관해요. 그리고 언니가 이리 결혼도 안 한 신분으로 성이 다른 아들을 데리고 있는 건 보기에도 안 좋아요.”현재 강씨 가문은 강태식과 그의 자식들이 절대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강재희가 딸이긴 해도 맏이로서 이미 회사 일을 많이 인계받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강재희의 뜻이 곧 강태식의 뜻이기도 했다. 강홍련은 내키지 않았지만 도유준은 내심 기뻤다.도정국의 빚을 갚을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한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되었으니 남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강씨 가문에서 준비한 예단도 받을 수 있고 안민아를 괴롭히고 도아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난 좋아요.”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