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가서 지희가 괜찮아졌다고 말해줘. 근데 아무도 들어오게 하면 안 돼.”율이는 달려가 문을 열고 도아린의 말을 배건후에게 전했다.손보미의 얼굴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병실로 뛰어들려 했으나 육하경에게 금세 잡혔다.“아린 씨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손 놔요. 지희가 괜찮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배건후는 문 앞에 서서 도아린과 눈을 마주쳤다.지희는 고개를 숙인 채 도아린의 손을 잡고 조용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일 있으면 먼저 가. 가기 싫으면 방 잡고 기다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도아린은 손보미를 의식하며 일부러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손보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육하경의 손을 세게 뿌리쳤으나 병실로 뛰어들기도 전에 다시 배건후에게 어깨를 붙잡혔다.“건후 씨, 아린 씨 말을 믿지 마! 만약 아린 씨가 지희에게 진정제를 먹였으면? 직접 확인해야겠어. 지희가 정말로 괜찮은지.”배건후는 힘을 주어 그녀의 어깨를 더 세게 붙잡았다.“아래 회의실로 갈게.”그는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한 번 보고는 병실 문을 닫았다.문 앞에는 일북과 일남이 남아 지키고 나머지는 아래 회의실로 내려갔다.도아린은 배건후의 암시를 눈치채고 시선을 돌려 꽃다발 속에 숨긴 감시 카메라를 발견했다.병실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이 간 회의실에 모니터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도아린은 지희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제 다 갔어. 물 좀 마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언니는 지희를 존중할 거고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야.”아래 회의실에서 배건후는 모니터를 켜게 했다.그는 육하경과 함께 손보미의 옆에 앉아 같이 모니터에 집중했다.지희는 도아린의 손에서 물잔을 받아 들었다.병실은 너무 조용해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그해 제가 13살이었을 때 원장님이 우리를 입양하겠다
“제가 말을 못 하니 아마 신고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지희는 도아린의 손을 꼭 잡고 흐느끼며 말을 이어갔다.“유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불러서 용감하다고 칭찬까지 했어요. 제가 번 돈으로 장애가 있는 동생들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요...”배건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그는 도아린의 눈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보았고 그녀가 결코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아차렸다.육하경은 고개를 돌려 손보미를 보며 말했다.“미안해요. 많이 놀라셨겠어요.”“...”손보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하마터면 입술을 깨물 뻔했다.그녀는 도아린에 대한 증오를 다른 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이 짐승 같은 놈들!”육하경은 다시 도아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비쳤다.도아린은 지희를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배건후는 영상을 복사하러 갔고 손보미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지희를 남겨둬서도 영상을 남겨둬서도 안 되지만 육하경이 계속 지켜보고 있어 삭제할 기회조차 없었다.결국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지희의 위치와 사태의 심각성을 외부에 알렸다.다들 지희의 안전을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다.도아린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배건후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나 도아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육하경에게 물었다.“신고했어요?”“네, 했어요. 지희 병실에 전담 경호원도 배치했어요. 율이가 남아서 지희와 함께 있으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거예요.”도아린은 뭔가 말하려다 손보미를 흘겨보고는 되레 삼켜버린 채 엘리베이터에 탔다.주차장으로 가던 길에 도아린은 갑자기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손보미는 갑자기 배건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얼른 가자.”“아는 사람이에요?”육하경은 도아린에게 물었다.그녀는 위아래 훑어보더니 일남에게 눈짓했다.“아가씨를 납치했던 사람입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그녀를 쫓아
도아린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자 눈을 떠보니 배건후가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다.그는 쇠 파이프에 어깨를 맞았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통증에 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손강해는 잠시 멈칫하더니 발을 들어 배건후를 걷어차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배건후는 번쩍 몸을 돌려 그의 발목을 힘껏 비틀었다.아무래도 손강해는 나이가 있는지라 배건후에 의해 몸이 공중에서 꺾였다. 아마 손강해는 사무실에만 앉아 있던 대표가 이렇게 힘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손강해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배건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우두둑!배건후는 눈빛이 금세 날카로워지더니 단숨에 손강해의 발목을 꺾어버렸다.“아악!”손강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뒤늦게 달려온 손보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손강해는 그녀를 보고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그녀는 그제야 반응하고 급히 바닥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쇠파이프를 든 순간 바로 후회했다.배건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만약 배건후에게 쇠 파이프를 넘기면 손강해는 더 크게 다칠 것이고 반면 손강해에게 주면 그녀의 정체를 들키게 된다.손강호와 배건후의 압박에 손보미는 쇠 파이프를 꽉 쥔 채 손강해를 향해 몸을 돌렸다.“아악! 아악! 아악!”그녀는 미친 듯이 손강해를 향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아무래도 배우 출신이라 각도를 교묘하게 잡았기에 겉보기에는 힘껏 내려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쇠 파이프를 바닥에 내리쳤다.손강해는 딸이 자신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힘껏 손보미를 밀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경찰이 도착했을 때 일북은 한 명을 밟고 있었고 손에는 또 다른 한 명을 붙잡고 있었다.일남도 하춘녀를 잡아서 경찰차에 모두 태웠다.“피! 건후 씨,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손보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배건후 쪽으로 달려갔다.도아린은 배건후를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배건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아린은 가슴이 조여 들었다.‘설마 또 일부러 다치고 불쌍한 척하는 건가?’그가 진실을 알고 난 뒤 얼음장마냥 차가운 눈빛은 연기 같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를 납치했던 여자가 나타난 건 너무 우연스러웠다.일부러 다친 게 아니면 혹시...도아린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녀는 배건후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곧 병원에 도착해요. 조금만 참아요.”배건후는 그녀의 손을 밀쳐내며 엉뚱한 말을 던졌다.“너 나 좋아한 적 있어?”“...”‘좋아한 적... 있을까?’도아린은 대학 시절 배건후에게 첫눈에 반했다.비록 손보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우연히 육민재 할머니를 도왔고 마침 육민재와 배건후가 절친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배건후를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육민재를 자주 찾아가곤 했다.배건후는 겉보기에 냉담하고 고고했지만 친구들과 있을 땐 가끔 농담도 던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별로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육민재에게도 그녀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다.그 뒤로 도아린은 곤경에 처하며 더는 살길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해 겨울에 배건후를 만났다.배건후는 그녀의 히어로였다.도아린은 심지어 자신이 겪은 고난이 모두 배건후를 만나기 위한 시험이라고 여겼다.만약 손보미가 귀국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배건후가 그녀를 대놓고 편애하지 않았다면 도아린은 그를 향한 마음을 숨긴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실망이 너무 쌓이다 보면 감정이 소모되기 마련이었다.“3년 전 그날, 누가 도와줬든 간에 전 그 사람과 결혼했을 거예요.”도아린은 오랜 침묵 끝에 대답했다.배건후의 창백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다.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손등에는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날 밤 방을 들어간 사람이 누구든 건후 씨는 보미 씨를 자극하려고 결혼했겠죠.”도아린이 한마디 덧붙였다.“아니야.” 배건후는 눈을 떴다.고통스러운 그의 눈빛은 몸에 난 상처 때
육하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 맨 위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전남시의 오래된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었다.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를 펼치자 도아린의 손수건에 있던 문양이 나타났다. 거의 90%나 흡사했다.이 책에는 고대 토템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복을 기원하는 것, 제사를 지내는 것, 그리고 저주를 위한 토템까지 있었다.육하경은 주머니에서 도아린이 준 향낭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복을 기원하는 토템과 매우 비슷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향낭을 잃어버린 뒤로 전봇대에 부딪히고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 나며 식사 중 식중독에 걸리는 등 여러 불행한 일을 겪었다.그는 다시 향낭을 찾아내 꿰매어 복구했더니 아버지가 퇴원한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늘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보니 도아린은 뭔가 알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모두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만약 도아린이 화가 나서 내린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치면 법이 과연 왜 필요할까?배건후가 병원에 입원한 지 3일째 되던 날, 그는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이미 병원을 예약하고 주현정을 데려와 치료받게 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지금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황이라 도아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도아린이 주현정의 병실에 도착하자 배지유는 생활용품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눈에 띄는 혐오감을 드러냈다.“날 비웃으러 온 거야?”“그럴 생각 없어.”도아린은 주현정의 병상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어머니,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드릴게요.”주현정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의 말을 듣지도, 그녀가 찾아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어머니? 어떻게 된 거야?”도아린이 떠날 때만 해도 주현정은 정신이 말짱했고 JS 픽처스의 업무까지 완벽하게 처리했었다.하지만 며칠 사이에 병이 심해진 모습에 그녀
“아직 서류도 처리되지 않았는데 벌써 말을 바꿨다고?”배건후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비웃듯 말했다.“지금 관심 포인트가 틀린 거 아니에요?”“물이 식었네요. 이제 마셔도 돼요...”손보미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배건후는 다친 손으로 통화하고 있었고 오른손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손보미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도아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모님을 만나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도아린...”뚜뚜뚜.손보미는 배건후의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아린 씨가 아주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거 아니야?”배건후는 그녀에게 컵을 한쪽으로 치우라고 한 뒤 우정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손보미는 요즘 눈치가 빨라졌다. 배건후가 업무를 처리할 때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그래서 그녀가 가만히 나가 배지유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해남 병원.도아린은 주현정의 핸드폰을 열어보려고 시도했다.주현정의 병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되면서 마침 병상 아래에 숨겨진 핸드폰도 뭔가 수상하게 느껴졌다.하지만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고 도아린은 그 기종의 충전기가 없었다.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보조 배터리를 빌려왔다.전원을 연결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밀치며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쾅!배지유는 하이힐로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밟았다.“새언니, 오빠랑 이혼하고서도 왜 자꾸 내 흉을 보는 거야?”도아린은 깨진 핸드폰을 흘겨보더니 말했다.배지유는 주현정의 핸드폰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힐로 몇 번 더 강하게 밟은 뒤 차버렸다.“주워.”도아린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싫어. 네가 오빠한테 이른 벌이야! 우리 배씨 가문을 떠나면 네 까짓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배지유는 콧대를 높이며 당당하게 말했다.도아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같은 말 두 번 하고 싶지 않아.”“네가 200번을 말해도 싫어.”배지유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아가씨가 잘못했네. 아가씨 오빠가 결혼했으니 그 집은 이제 아가씨 오빠랑 올케의 집이지.”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서기 시작했다.“선 좀 지켜야죠.”“갖고 싶으면 올케랑 상의해야지, 어찌 허락도 없이 막 가져가? 올케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아가씨가 얼마나 망신스러울지 생각해 봐.”배지유는 화가 치밀어오른 채 주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꺼져! 아무것도 모르면서 훈수질하지 마! 내가 뭘 가져가든 우리 오빠도 뭐라 안 했는데 너희가 뭔데 참견이야!”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중에는 도아린을 동정하는 이도 배지유를 철부지로 여기는 이도 있었다.사람들이 흩어진 뒤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드레스는 절대 못 벗어. 대신 조건을 제기해.”“핸드폰 주워. 그리고 나한테 사과해.”“...”배지유는 이를 악물었다.도아린은 그녀의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네가 신은 신발도 내 거고, 네 가방도 내 거야. 다 벗고 가든지 아니면 내가 말한 대로 하든지.”배지유는 아무리 옷장에 옷이 넘쳐나도 도아린의 것을 입고 싶었다.배건후가 준 옷들은 모두 한정판이었기 때문이다.옷장과 액세서리 선반은 한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도아린이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제대로 걸려버렸다.배지유는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결국 쓰레기통 아래로 밀려들어 간 핸드폰을 주우려고 무릎을 꿇었다.어렵사리 핸드폰을 꺼내고 난 뒤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됐어?”망가진 핸드폰을 도아린에게 건네면서도 배지유는 여전히 주현정의 핸드폰이라는 사실을 몰랐다.“어머니 잘 챙겨. 안 그러면 가만 안 둬.”“내 엄마야!”배지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집안에서 엄마만 네 편을 들어줬는데, 이제 엄마의 병세가 심해졌으니 네가 우리 오빠와 겨룰 힘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쓸데없이 밀당 같은 거 하지 마. 이미 이혼했으니 우리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생각 하지 말고.”그녀는 독설을 퍼붓고 뒤돌아 떠났다.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드레스 주문을 받았을 때부터 강재민에게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노래를 잘하고 창의적이며 신체 사이즈까지... 왠지 익숙하다고 느꼈다.그리고 그녀가 뮤직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이 드레스를 입고 나가길 바란다고 했을 때 도아린은 그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임을 확신했다.강재민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뒤로 그녀는 모습을 감췄다.“저 결혼했어요.”도아린은 사실대로 말했다.“지금 이혼했잖아요.”강재민은 아주 가볍게 말했다.“하늘도 내게 기회를 줬는데 아린 씨는 안 줄 거에요?”“당분간 연애할 생각 없어요.”도아린은 솔직히 대답했다.그녀는 겨우 호랑이 굴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늑대 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사랑은 인생에서 필수품이 아니었다.“아린 씨를 4년이나 기다렸어요. 또 4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문제없죠.”강재민은 두 손을 펼쳤다.기다란 손가락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이었다.“주말 전에 아린 씨 핸드폰을 고쳐준다면 우리 집 연회에 올 거예요?”도아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그 노인네가 아린 씨한테 미안해서 보상하려는 거니까 거절해도 돼요. 어차피 저한테도 늘 퇴짜 맞다 보니 익숙할 거예요.”강재민은 도아린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왜 저를 적대시하는 거죠?”도아린은 늘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스타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들이었다.대부분 추천을 받은 선수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도아린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했지만 스승이 없었기에 다른 선수나 심사위원들에게 있어 낙하산 같은 존재였다.심사위원회가 그녀를 우승자로 선정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고의로 최저 점수를 준 건 너무했다.강재민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지더니 입가에 번져있던 미소가 사라졌다.“배씨 가문 사람들에게 큰 신세를 졌어요.”도아린은 배씨 가문이 뒤에서 손을 썼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다.“누나가 납치된 적이 있었어요.”강재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