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하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 맨 위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전남시의 오래된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었다.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를 펼치자 도아린의 손수건에 있던 문양이 나타났다. 거의 90%나 흡사했다.이 책에는 고대 토템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복을 기원하는 것, 제사를 지내는 것, 그리고 저주를 위한 토템까지 있었다.육하경은 주머니에서 도아린이 준 향낭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복을 기원하는 토템과 매우 비슷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향낭을 잃어버린 뒤로 전봇대에 부딪히고 자동차 브레이크가 고장 나며 식사 중 식중독에 걸리는 등 여러 불행한 일을 겪었다.그는 다시 향낭을 찾아내 꿰매어 복구했더니 아버지가 퇴원한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늘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보니 도아린은 뭔가 알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는 듯했다.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모두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그가 너무 예민했던 걸까?만약 도아린이 화가 나서 내린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치면 법이 과연 왜 필요할까?배건후가 병원에 입원한 지 3일째 되던 날, 그는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이미 병원을 예약하고 주현정을 데려와 치료받게 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지금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황이라 도아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도아린이 주현정의 병실에 도착하자 배지유는 생활용품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눈에 띄는 혐오감을 드러냈다.“날 비웃으러 온 거야?”“그럴 생각 없어.”도아린은 주현정의 병상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어머니, 제가 공항까지 모셔다드릴게요.”주현정은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의 말을 듣지도, 그녀가 찾아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어머니? 어떻게 된 거야?”도아린이 떠날 때만 해도 주현정은 정신이 말짱했고 JS 픽처스의 업무까지 완벽하게 처리했었다.하지만 며칠 사이에 병이 심해진 모습에 그녀
“아직 서류도 처리되지 않았는데 벌써 말을 바꿨다고?”배건후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비웃듯 말했다.“지금 관심 포인트가 틀린 거 아니에요?”“물이 식었네요. 이제 마셔도 돼요...”손보미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배건후는 다친 손으로 통화하고 있었고 오른손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손보미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도아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모님을 만나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도아린...”뚜뚜뚜.손보미는 배건후의 찌푸린 미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아린 씨가 아주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거 아니야?”배건후는 그녀에게 컵을 한쪽으로 치우라고 한 뒤 우정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손보미는 요즘 눈치가 빨라졌다. 배건후가 업무를 처리할 때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줬다.그래서 그녀가 가만히 나가 배지유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해남 병원.도아린은 주현정의 핸드폰을 열어보려고 시도했다.주현정의 병세가 갑작스럽게 악화되면서 마침 병상 아래에 숨겨진 핸드폰도 뭔가 수상하게 느껴졌다.하지만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고 도아린은 그 기종의 충전기가 없었다.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보조 배터리를 빌려왔다.전원을 연결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를 밀치며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쾅!배지유는 하이힐로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밟았다.“새언니, 오빠랑 이혼하고서도 왜 자꾸 내 흉을 보는 거야?”도아린은 깨진 핸드폰을 흘겨보더니 말했다.배지유는 주현정의 핸드폰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힐로 몇 번 더 강하게 밟은 뒤 차버렸다.“주워.”도아린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싫어. 네가 오빠한테 이른 벌이야! 우리 배씨 가문을 떠나면 네 까짓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배지유는 콧대를 높이며 당당하게 말했다.도아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같은 말 두 번 하고 싶지 않아.”“네가 200번을 말해도 싫어.”배지유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아가씨가 잘못했네. 아가씨 오빠가 결혼했으니 그 집은 이제 아가씨 오빠랑 올케의 집이지.”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서기 시작했다.“선 좀 지켜야죠.”“갖고 싶으면 올케랑 상의해야지, 어찌 허락도 없이 막 가져가? 올케가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아가씨가 얼마나 망신스러울지 생각해 봐.”배지유는 화가 치밀어오른 채 주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다들 꺼져! 아무것도 모르면서 훈수질하지 마! 내가 뭘 가져가든 우리 오빠도 뭐라 안 했는데 너희가 뭔데 참견이야!”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중에는 도아린을 동정하는 이도 배지유를 철부지로 여기는 이도 있었다.사람들이 흩어진 뒤 배지유는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드레스는 절대 못 벗어. 대신 조건을 제기해.”“핸드폰 주워. 그리고 나한테 사과해.”“...”배지유는 이를 악물었다.도아린은 그녀의 신발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네가 신은 신발도 내 거고, 네 가방도 내 거야. 다 벗고 가든지 아니면 내가 말한 대로 하든지.”배지유는 아무리 옷장에 옷이 넘쳐나도 도아린의 것을 입고 싶었다.배건후가 준 옷들은 모두 한정판이었기 때문이다.옷장과 액세서리 선반은 한가득 채워져 있었기에 도아린이 알아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제대로 걸려버렸다.배지유는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결국 쓰레기통 아래로 밀려들어 간 핸드폰을 주우려고 무릎을 꿇었다.어렵사리 핸드폰을 꺼내고 난 뒤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미안해. 됐어?”망가진 핸드폰을 도아린에게 건네면서도 배지유는 여전히 주현정의 핸드폰이라는 사실을 몰랐다.“어머니 잘 챙겨. 안 그러면 가만 안 둬.”“내 엄마야!”배지유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집안에서 엄마만 네 편을 들어줬는데, 이제 엄마의 병세가 심해졌으니 네가 우리 오빠와 겨룰 힘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쓸데없이 밀당 같은 거 하지 마. 이미 이혼했으니 우리 집에 다시는 발 들일 생각 하지 말고.”그녀는 독설을 퍼붓고 뒤돌아 떠났다.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드레스 주문을 받았을 때부터 강재민에게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노래를 잘하고 창의적이며 신체 사이즈까지... 왠지 익숙하다고 느꼈다.그리고 그녀가 뮤직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이 드레스를 입고 나가길 바란다고 했을 때 도아린은 그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임을 확신했다.강재민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뒤로 그녀는 모습을 감췄다.“저 결혼했어요.”도아린은 사실대로 말했다.“지금 이혼했잖아요.”강재민은 아주 가볍게 말했다.“하늘도 내게 기회를 줬는데 아린 씨는 안 줄 거에요?”“당분간 연애할 생각 없어요.”도아린은 솔직히 대답했다.그녀는 겨우 호랑이 굴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늑대 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사랑은 인생에서 필수품이 아니었다.“아린 씨를 4년이나 기다렸어요. 또 4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문제없죠.”강재민은 두 손을 펼쳤다.기다란 손가락과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이었다.“주말 전에 아린 씨 핸드폰을 고쳐준다면 우리 집 연회에 올 거예요?”도아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그 노인네가 아린 씨한테 미안해서 보상하려는 거니까 거절해도 돼요. 어차피 저한테도 늘 퇴짜 맞다 보니 익숙할 거예요.”강재민은 도아린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왜 저를 적대시하는 거죠?”도아린은 늘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스타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들이었다.대부분 추천을 받은 선수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도아린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했지만 스승이 없었기에 다른 선수나 심사위원들에게 있어 낙하산 같은 존재였다.심사위원회가 그녀를 우승자로 선정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고의로 최저 점수를 준 건 너무했다.강재민의 눈빛은 조금 어두워지더니 입가에 번져있던 미소가 사라졌다.“배씨 가문 사람들에게 큰 신세를 졌어요.”도아린은 배씨 가문이 뒤에서 손을 썼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다.“누나가 납치된 적이 있었어요.”강재
“지유는 최선을 다했어. 내가 증명할 수 있어.”배석준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를 일으켜서 물을 먹였다.“물을 좀 마셔.”주현정은 어리숙한 아이처럼 입을 벌리라면 벌리고 물을 마시라면 마셨다.그러나 그녀가 물을 마시는 속도가 배석준이 주는 속도보다 더뎌서 물을 채 삼키지 못하고 입가에서 흘러나왔다.배지유는 빠르게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아빠, 천천히 해요.”배건후는 도아린의 말이 생각나 자신의 병실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아린은 강재민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만났어?”도아린은 담담하게 말했다.“너는 어떻게 생각해?”“내가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요.”“도아린.”배건후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엄마는 네 일 때문에 아버지랑 사이가 틀어졌어. 근데 엄마한테 왜 이렇게 차가운 거야?”“당신 동생이 나더러 배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도아린은 손에 바둑알을 들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하경 씨한테 에이트 멘션을 팔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얼른 당신 물건들을 가져가세요. 안 가져가면 함께 팔아버릴 거예요.”“우리 신혼집을 판다고?”전화에서도 도아린은 배건후의 타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진경수에게 자기 대신에 바둑을 두라고 손짓했지만, 안민아가 먼저 다가갔다.도아린은 웃으며 바둑알을 그녀에게 건네고는 일어나서 전화를 받으러 갔다.“에이트 멘션을 나한테 주었으니 내가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빨았지만 답답한 마음을 다 해소할 수 없었다.“도씨 가문의 집은 도지현의 명의로 변경했어. 이사하고 싶으면 해도 돼. 멘션의 집은 아직 값이 오를 거야. 서둘러 팔지 않아도 돼.”도아린이 말했다.“도씨 가문의 집은 제 양어머니의 것이니 당연히 지현이한테 줘야죠. 해남에 재활센터를 찾아놨어요. 절차가 끝나면 지현이를 데리고 올 거고 특별한 일이 없이는 연성에 가지 않을 거예요.”전화에서는 침묵이 흘렀고 담배를 내뿜는 소리
“강 회장님의 생신 축하연에 갈 거예요?”도아린은 안민아의 기대 가득한 얼굴을 보고 되물었다.“가고 싶어?”“저는 스타를 보러 가는 거예요.”안민아는 귀가 빨개져서는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둘째 오빠는 돈 많은 예쁜 언니들한테 둘러싸여 있을 거니까 저 혼자 심심해요. 언니가 간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요.”강태식은 주얼리의 왕이라고 불리며 연예인들은 강태식의 주얼리를 착용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하여 그의 생일잔치에는 탑 연예인들이 많이 올 것이다.도아린은 확실한 답을 하지 않았다.“다음에 다시 얘기하자.”저녁 식사 때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다 모였다.진범준과 윤명희는 센터에 앉았고 양쪽에는 두 아들이 앉았다. 도아린은 진경수의 곁에 앉았고 강재민은 진수혁의 곁에 앉았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안민아가 앉았다.“경수야,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게 예약해줘.”진범준은 아내의 의견을 묻고 나서 이렇게 얘기했다.“좋아요!”윤명희는 가정부한테 와인을 개봉하라고 했다.“세은이를 찾았으니 너희 둘은 결혼에 대해 고민해도 될 것 같아. 수혁이 네가 오빠니까 먼저 생각해봐.”“...”진수혁이 아무 말이 없자 식탁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강재민은 술잔을 들고 일어서서 진지하게 진범준 부부를 바라보았다.“두 분께 동의를 구할 일이 있습니다.”도아린은 그가 미친 소리를 할까 봐 테이블 아래서 그의 다리를 찼다.진수혁의 포커페이스에도 미세한 변화가 생겼고 손을 뻗어 강재민을 잡아당겼다.“...”강재민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그녀의 눈에 자신을 경고하는 뜻이 다분한 것을 보고 강재민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그는 혀로 입술을 핥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주말에 저희 아버지의 생신 축하연이 진행될 예정인데 동생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두 분께서 저을 도와 설득해주세요.”진범준은 윤명희와 눈이 마주쳤고 강재민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진수혁은 성격이 무뚝뚝해서 친구를 잘 사귀지 않았지만, 강재민과는 십여 년의 우정을 이어오고 있었
디자인 가격은 ‘봉황의 시대’보다 적지만 그건 티파니 주얼리를 홍보하기 위한 미끼일 뿐이었다. 도아린이 왜 팔지 않고 있겠는가,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전미나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디자인 한 겁니다.”도아린은 그녀의 손목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미나 씨가 선택한 공작석은 1그램에 40만 원 정도 하는 최고급 재료입니다. 이 팔찌는 단품이 아니라 한 세트니까 전체 가격이 2억 정도 되죠. 국내의 주얼리 전문가들한테 공작석은 값이 가지 않은 상품입니다. 그러니 큰돈을 들여서 소장하지 않고 거의 다른 사람한테 선물을 주고는 하죠. 미나 씨의 디자인은 20대부터 30대까지 즐겨 찾는 디자인이에요. 이 나이대의 여성들이 그 팔찌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재벌 2세가 아니면 연예인인데 그들은 다이아몬드를 더 선호하죠. 만약 제가 대학을 곧 졸업하는 딸이 있다면 저는 딸애가 앞으로 사회로 나아가서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원하며 이것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전미나의 표정은 자랑스러워하던 데로부터 경악으로 바뀌었다. 방금 제일 대단한 고객과 연락을 했었는데 그는 도아린의 말처럼 딸에게 졸업선물로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당신... 당신은...”“미나 씨한테 제가 건의를 좀 해도 될까요?”도아린은 그녀의 팔찌를 가리키며 몇 가지를 얘기했다.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수정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디자이너는 없다.전미나는 거절하고 싶지만, 진경수가 자신을 건방지다고 생각할까 봐 돌려서 말했다.“죄송하지만 이미 이 제품을 예약한 고객이 있어서요.”“그럼 아쉽게 됐네요. 분명 2배가 되는 디자인 가격을 받을 기회였는데 말이죠.”도아린의 태도는 아주 부드러웠고 말을 마친 뒤 진경수와 함께 창고에 있는 보석을 보러 갔다.그들이 떠난 후 전미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2배가 되는 디자인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만약 도아린의 말대로 수정했는데 상대가 디자인 가격을 더 높이는 게 아니라
“언니, 팔찌를 만드는 방법을 저한테 가르쳐주면 안 돼요? 친구한테 선물 주고 싶어요.”안민아는 긴장한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도아린보다 두 살이 어렸고 한창 타오를 나이였다.도아린은 들어와서 앉으라고 했다.“남자친구한테 선물하려고?”“아니에요!”안민아는 쑥스럽게 고개를 저었다.도아린은 안민아가 준비한 짙은 녹색 끈으로 매듭을 맺고는 간단하고 빠르게 만드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보기만 하는 건 쉬워 보였으나 정작 하려고 하면 어려웠다. 안민아는 계속 물어보면서 팔찌를 만들다가 도아린의 손을 갑자기 쳐다보았다.“언니, 꽃도 수놓을 줄 알아요? 이건 무슨 그림이에요?”“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만든 거야.”도아린은 웃음을 지었지만, 눈빛에서는 차가운 빛이 맴돌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진경수가 새로 나온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보내주었다. 연회에 참가하러 가는데 새로운 것들을 장만해야 했다.도아린이 연성에 돌아갔던 며칠 사이에 그녀의 안방도 새롭게 꾸며졌다. 서랍에 있던 공주 치마들은 모두 창고로 보내졌으니 새로운 옷들을 장만할 필요가 있었다.“언니, 먼저 골라요.”안민아는 계속해서 팔찌를 만들었다.아무래도 진경수의 마음이니 도아린은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상복을 두벌 고르고 검은색 벨벳 긴 치마와 하얀색 숄을 골랐다.해남은 연성보다 기온이 낮아 요즘에는 트렌치코트를 입기 시작했다.안민아는 빨간색과 블랙으로 된 머메이드 스커트를 골랐다. 그녀의 나이에 비해서는 성숙한 스타일이었지만 그녀는 아주 마음에 들어 해서 도아린도 반대하지 않았다.“아, 매듭이 잘못됐어요!”안민아는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언니, 이것 좀 풀어주세요. 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당황한 모습 좀 봐. 이제 시집가면 어쩌려고 그러니!”진경수는 안민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도아린을 바라보았다.“나머지 옷들은 다 마음에 안 들어?”“마음에 든다고 해도 다 가질 수는 없잖아요. 이미 세 벌을 골랐어요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
“뭐 하는 짓이에요?”배건후가 품 안에 그녀를 감싸고 차가운 눈빛으로 배석준을 쏘아보았다. 살짝 당황한 배석준은 해명하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치켜들었다.“네가 제정신이냐? 여자 하나 때문에 대표 이사를 그만둬? 회사가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그건 제 일입니다.”“넌 내 아들이야. 너한테 뭐라 할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배석준은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분노가 차올라 이마에 핏줄이 불거지고 눈이 충혈되었다.그러나 배건후는 그를 무시한 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다친 데 없어?”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손목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얼른 가서 이혼 신고 마무리해요.”뭔가 말을 하려던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배석준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배건후, 너 사인 하기만 해. 그럼 진짜 우리 부자지간도 이젠 끝이야.”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구청 안으로 들어갔다.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 배석준은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배건후와 도아린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젠 다 컸다 이거지? 내가 외국에서 힘들게 회사를 키우는 동안 네 엄마가 널 이렇게 가르쳤어?”그러나 배건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데려다줄게.”거절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배석준의 사람들 때문에 그녀는 그냥 차에 올라탔다.“고마워요.”차에 탄 후, 그녀는 그에게 주소를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뒤따라오던 차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차에서 내린 그가 근처의 건물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여기 살아?”“친구 집이에요. 잠깐 머물고 있어요.”그와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해남으로 돌아갈 거예요. 잘 지내요.”그녀가 돌아서려는 그때,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율이 사건에 진전이 있어.”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하경 씨한테서 들었어요.”...그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주주들이 다그치지 않았더라면 도아린을 절대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딸의 다리를 반쯤 부러뜨리고 그와 아내의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도 모라자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게 만든 도아린이 주주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지푸라기 같은 존재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고 태도는 서먹서먹하였다. 이것이 이혼에 필요한 절차라면 그녀는 양보할 수 있었다.“10분 드릴게요.”도아린은 옆 벤치로 가서 앉았다. 심호흡하던 그도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온 3년 동안, 우리 집안에서도 할 만큼 했다. 도정국 가게의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네 남동생의 병원비도 건후가 다 책임졌었지. 그동안 네가 입고 먹고 쓰고 한 것도 다 우리 가문의 돈이야.”“건후가 널 소홀히 한 건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막 회사를 인수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지. 손보미와의 스캔들은 손보미가 귀국한 후, 언론에서 마구 퍼뜨린 것이야.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어.”...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가 한마디 내뱉었다.“3분 남았습니다.”배석준은 마음이 불편했다. 윗사람이 체면을 구기고 호의를 베풀고 있는데 어찌 이리 쌀쌀맞기만 하는 건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전혀 굽힐 생각이 없는 그녀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다. 네가 눈감아 주거라. 어차피 너한테서 건후의 아내 자리를 빼앗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건후의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너한테도 좋을 것이 없어.”배석준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건후와 닮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한껏 묻어났다. “이렇게 하자. 기자회견을 열 테니 최근의 일은 모두 네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하거라. 너희 두 사람 사이에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자들한테 말해. 이혼 얘기는 네가 먼저 꺼낸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건후는 널 쫓아낼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어.”그녀는 피식
도아린은 일의 자초지종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고 벌인 짓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안민아가 계속해서 강씨 가문으로 가자고 할 때부터 그녀는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보니 안민아와 손보미가 손을 잡았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 지난번 백화점에서 안민아는 손보미를 싫어했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번에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엄마, 내일 연성에 좀 다녀올게요.”“뭐 하러?”“내일이 이혼 숙려기간의 마지막 날이에요. 건후 씨와 깨끗이 정리하려고요.”또한 도지현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도정국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윤명희는 그녀를 껴안으며 입을 열었다.“시집가기 싫으면 평생 엄마랑 같이 살아. 엄마가 너 평생 보살펴줄 테니까.”“고마워요.”“또 한 번 고맙다고 하면 엄마 진짜 화낼 거야.”도아린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면서 피식 웃었다.“둘째 오빠랑 같이 갔다 와. 배건후가 후회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그럴 리 없어요.”그녀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그날 저녁, 욕조에 누워 마사지를 즐기고 있는데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배건후였다.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전화가 한번 끊기더니 다시 또 울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리던 벨 소리가 잠잠해지고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잠시 후,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그제야 핸드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강재민: 강홍련이 도유준이 성을 바꾸는 걸 동의했어요. 내일 예단을 준비해서 찾아갈 생각인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서대은: 안준휘와 계약을 취소한 두 회사는 모두 손보미가 강재희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회사들이야. 나중에 계약을 이행하라고 했을 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어.][소유정: 며칠 쉬러 갔다 올게. 전화기는 꺼둘 거야. 그러니
억울했던 안민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떨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도아린이 통화 내용을 들을까 봐 일부러 물을 틀어놓았는데 어떻게 이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아직도 도유준 편을 들고 싶어?”도아린은 그녀의 주머니에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았다. “도유준한테 전화한 거 맞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도유준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안민아는 괴성을 지르며 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통화기록을 절대 도아린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에요. 핸드폰 뺏지 말아요.”“도유준 그 자식이 또 널 속인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단단히 혼내줄게.”겉으로는 안민아를 걱정하고 있는 척했지만 사실 도아린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그러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안민아가 한사코 그녀를 막았다.당황스러운 얼굴의 안민아는 안준휘에게 몇 번이나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이때, 안준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끊고는 언짢은 얼굴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강요하지 말거라. 말하기 싫다는 애를 왜 그리...”“왜요?”손을 놓던 도아린은 시선을 안민아에게 돌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했다.“설마 강재민 씨야?”“아니에요. 누구와도 약속한 적 없었어요.”“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거잖아.”이때, 윤명희가 갑자기 현관에 나타났다. 마트를 다녀온 윤명희는 식재료를 하인에게 건네주고는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며 안민아를 향해 걸어왔다. “민아야, 통화 기록은 양측한테 다 있는 기록이야. 나중에 도유준이 기록이라도 내세워 네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면 그땐 어떡할 거니? 차라리 지금 사실대로 털어놓거라. 그래야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안 그래?”안민아는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만약 손보미와 손을 잡고 도아린을 음해한 사실을 진씨 가문에서 알게 된다면 결혼을 물론 사업도 물 건너가고 원수가 되고 말 것이다. 고민 끝에 안민아는 결국 자신이 도유준에게 전화를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