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령이라는 세글자에 온다연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유강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며칠, 그는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한꺼번에 알게 됐고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분노케 했다.그가 없는 몇 년간, 아니, 그가 경원시에 있었던 그 시간에도 온다연은 유 씨네 집에서 영상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다. 그녀를 괴롭힌 주모자가 누군지 온갖 방법을 써 알아봤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누군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 꼭꼭 숨은 인물이었다.물론 의심 가는 사람은 있었다. 심지어 그 의심의 화살이 친형에게까지 갔지만 그렇다 할 증거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그리고 만약 이 모든 게 정말 유씨 집안 사람 중 누군가의 짓이라면 분명히 이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이 있을 테고 그건 생각보다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또한 중요한 점은 아직 대놓고 배후를 찾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유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가루가 되어 흩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그 누구에게도 득은 아닐 것이다. 가문은 물론이고 미래 그룹 또한 불안정해지고 나아가서는 무너지고야 말 테니까.그런 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유강후 본인도 말이다.그러니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주모자가 누구든 놓아줄 생각은 없다. 반드시 찾아내 이런 짓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다만 온다연은 그때를 기다리는 게 조금 힘든 듯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줘. 고씨 가문은 그저 시작일 뿐이야.”온다연은 그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비스듬히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날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탓에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은 유하령이 좋아요?”유강후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네가 볼 때는 어떤데?”온다연의 얼굴색은 여전히 혈색 하나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나
길게 뻗은 팔에 안 어울리는 밴드 두 개가 떡하니 붙어져 있어 보기 거슬렸다.온다연은 귀가 빨갛게 물든 채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미안해요.”그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자기 어깨를 가리켰다.“어깨에도 있어. 여기도 발라줘.”온다연은 그 말에 이틀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나 얼굴 전체가 빨개져 버렸다.당시 그녀는 확실히 세게 깨물었고 피까지 났었다.어깨에 남겨진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이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유강후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미세하게 웃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옷 벗겨서 봐.”온다연은 잠깐 망설이다 손을 들어 그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이미 몇 번 풀어봤기에 빨리 벗길 수 있었다.절반 정도 푼 다음 그녀는 옷을 조금 벗겨 상처를 확인했다. 오늘 물린 곳처럼 아파 보이지는 않았지만 껍질이 살짝 벗겨져 있었고 이빨 자국은 어느새 푸르게 멍이 들어있었다.이걸 보면 당시 그녀가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온다연은 손을 들어 멍이 든 곳을 살살 매만지며 물었다.“아파요?”유강후는 까만 눈을 그녀의 두 눈에 고정한 채 말했다.“깨무는 게 좋으면 몇 번 더 물어도 돼.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안 닿는 곳을 물어.”그 말에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이 남자는 꼭 이런 부끄러운 말을 입에 내야 속이 시원한 걸까?그녀는 그를 째려보았다.“삼촌 진짜!”유강후는 그녀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살짝 삐진 듯 구는 모습 또한 사랑스러웠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른 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이쪽도 물어봐.”온다연은 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마조히스트인가? 지금도 이렇게나 아파 보이는데 또다시 물라고?유강후는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얼마 안 가 유강후는 옷을 전부 다 벗어버리고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침실은 바로 옆방이었다.이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면 오늘 저녁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그 생각으로 몸을 천천히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유강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이내 물소리가 멎더니 그가 물기 가득한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온다연은 그를 힐끔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유강후는 지금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두르고 있어 잔 근육들로 뒤덮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물기를 닦지 않은 탓에 작은 물방울들이 그의 목을 따라 가슴으로 내려가 이내 복근까지 흘러내렸다.그는 이쪽으로 걸어오며 손에 든 마른 타올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 움직임으로 근육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언뜻언뜻 핏줄도 튀어나왔다.게다가 그가 허리춤에 있는 타올을 세게 밑으로 내린 바람에 지방 하나 없는 듯한 치골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정말 섹시함을 그대로 두르고 나온 듯했다.온다연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머릿속으로는 그가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밀어붙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녀의 심장은 멋대로 뛰었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져 버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버리고 싶지만 생각을 그만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개는 자꾸 위로 들리고 시선은 자꾸 그를 찾았다.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유강후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마치 블랙홀처럼 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끌어당겨 버렸다.온다연은 화들짝 놀라 고작 1초 정도 보고는 금세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무언가 얘기하더니 곧바로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강후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그저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은 심장이 고장 날 듯한 떨림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가오면 올수록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유강후에 몸을 완전히 맡기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온다연은 조금 반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혀로 그의 입술을 조금씩 두드렸다.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유강후는 대단한 자극이라도 받은 듯 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깨물었다.이에 온다연은 아프다며 소리 냈다.“아파...”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온다연,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옷 안을 휘저었다.온다연은 지금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유강후는 아주 손쉽게 그녀의 속살을 움켜쥐었다.말랑한 감촉에 이성을 잃은 뻔하면서도 다른 한 손은 허리에서 천천히 내려오더니 그녀의 다리를 서서히 벌려갔다.온다연은 그의 손길에 머리가 아득해져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 행동은 그에게 있어 응하겠다는 사인과 다름없었다.얼마 안 가 온다연은 자신의 허리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가운이 전부 다 젖혀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너무 놀랐던 것인지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그걸 눈치챈 유강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쉬, 착하지. 무서워하지 마. 아프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이다음으로 그가 무엇을 할 건지 알고 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발버둥 쳤다.하지만 유강후가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 또다시 거칠게 위로 올렸다.온다연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끼며 흐느꼈다.“아파요, 삼촌. 아프다고.”유강후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조금만 있으면 아프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이제 곧 울 것 같았다.“상처가 아프다고. 너무 아파. 상처 벌어진 것 같아요.”그 말에 유강후의 몸이 뚝 하고 굳었다. 그는
어둠 속 유강후은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입술을 매만지다가 마지막에는 입꼬리 근처를 배회했다.그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너한테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럴 만한 담은 없었다.“조금, 아주 조금요.”그 대답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그걸 눈치챈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정말 조금이요...”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덥석 잡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그런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하루빨리 날 받아들일 생각이나 해. 내가 오늘은 넘어간다고 해도 내일도 너를 가만히 놔둘까?”그는 갑자기 그녀의 귓불을 입에 물었다.“마음 같아서는 널 지금 당장 씹어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세게 깨무는 바람에 온다연은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아파요.”유강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제야 아파? 아까 발이 그렇게 됐을 때는 왜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주위가 어두웠기에 지금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호흡과 심장 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시각이 기능을 못 하는 탓인지 나머지 감각들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방안 곳곳에 온통 유강후의 냄새로 꽉 찬 것 같았다. 시원한 우디향과 그의 숨결이 어우러져 공기 중에 떠돌아 그녀의 귀와 코 그리고 눈과 피부 등 공기와 맞닿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혈관 깊숙이 들어와 이윽고 심장에 뿌리를 내려 그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온다연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화들짝 놀라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정말 유강후의 숨결이 심장에 자리 잡은 것 같아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그때 유강후가 갑자기 그녀를 감싸던 이불을 끌어 내리고 그녀에게 몸을 겹쳐왔다.그
유씨 집안 사람들이 없으니 이 호텔도 나름 편하게 느껴졌다. 정원도 예쁘고 온천도 좋았고 휴식 코너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신선한 과일들과 맛있는 디저트가 놓여있었다.온다연은 디저트를 하나 들고 휴식 코너의 의자에 누워 느긋하게 뉴스를 시청했다. 그러다 며칠 전 밥 먹을 때 만났던 안경 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양복 차림에 머리를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뒤로 올렸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온다연은 어딘가 모르게 이 남자가 불편했다. 웃을 때면 소름이 돋았고 시선이 마주칠 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이에 그녀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남자가 한발 빠르게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아버렸다.“나 그쪽 누군지 알아요. 유씨 집안 막내 도련님이 데려온 파트너, 맞죠?”온다연은 이대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남자는 온다연을 아래위로 몇 번 훑더니 안경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유강후 씨 안목이야 뭐 예전부터 좋았죠. 매번 유강후에게 지목당한 여자는 몸값이 몇 배로 뛰었고요. 나한테로 올래요? 이전 몸값의 3배를 줄게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두어 걸음 떼기도 전에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아 왔다.“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남자는 양아치 기질이 다분했고 온다연을 하찮은 여자 보듯 바라보았다.온다연은 침착하게 대꾸했다.“저기요. 저는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지난번에 얼굴 한 번 본 게 다예요. 그리고 당신과 얘기 나눌 생각 없으니까 당장 이손 풀어요.”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날 모른다고? 경원시에서 어떻게 날 모를 수가 있지? 혹시 뭐 괜히 튕기는 거야? 몸이나 파는 년 주제에 유강후한테 대주면서 나한테는 못 대줘?”온다연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 언성을 높였다.“지금 당장 이거 놓으세요!”임도현은 혀를 찼다.“유강후랑 침대에서 좀 뒹굴었다고 몸값이 하늘로 치솟은 것 같아? 막 부잣집 아가씨라도 된 것 같고 그래? 이
아직 이른 시간이라 라운지 바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고 모든 룸의 문이 닫혀 있는 가운에 제일 안쪽에 있는 큰 룸 앞에만 두 명의 웨이터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룸을 지키고 있었다.온다연은 자기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가려는데 방금 봤던 그 룸 문이 거칠게 열렸다.“꺼져. 앞으로 이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마. 내 말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지?”천 쪼가리 하나만 입은 젊은 여자 한 명이 거칠게 땅바닥에 내쳐졌다. 문을 열어젖힌 남자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어딜 감히 도련님 물건을 건드려? 죽으려고. 당장 꺼져. 앞으로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너는 앞으로 이 바닥에서 끝이야.”내쳐진 여자는 그 말에 사색이 되어서는 바닥을 기며 싹싹 빌었다.“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저한테 딸린 식구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불쌍한 사람 하나 구제하신다 생각하고 한 번만 봐주세요.”“안 꺼져?!”여자는 남자의 발에 의해 멀리 날아갔고 맞은편 벽에 허리를 세게 부딪혔다.룸 문이 매정하게 닫히고 여자는 이렇게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문을 두드리며 울며불며 빌었다.그러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웨이터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온다연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어떤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룸 쪽으로 끌고 갔다.“뭘 멀뚱멀뚱 보고 있어. 빨리 들어가지 않고.”그리고 어느새 뒤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더 서 있었다. 그들 뒤에는 젊은 여자들 여러 명이 예쁘게 단장한 채 서 있었다.남자는 거칠게 온다연의 손목을 잡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온다연은 지금 스포티한 옷을 입고 있었고 속살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 배를 까고 얇은 천 하나만 입은 여자들 사이에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다.뒤에 있던 남자가 온다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옷이 이게 뭐야? 왜 안 갈아입었어?
온다연은 다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그들을 앞으로 끌고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너희들한테 기회야. 지금 제일 중앙에 앉아 있는 남자는 경원시 제일 유명한 유씨 가문의 막내 도련님, 유강후고 그 왼쪽에 있는 남자는 한씨 가문의 후계자 한이준이야. 그 옆의 두 명은 옆 나라의 재벌가 도련님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두 명의 중동 남자는 석유 왕국의 왕자님들이지. 내가 이런 정보를 주는 이유가 뭔지 알지? 오늘 너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야.”남자가 말을 마치자 어느새 온다연을 포함한 여자들이 남자들 가까이에 도착했다.뒤에 있던 남자는 어느새 앞으로 나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대표님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신입들을 데리고 왔습니다.”남자가 여자들을 소개할 때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물러서 여자들 뒤에 숨더니 조용히 룸을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인사를 마친 남자가 도망가는 온다연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기더니 제일 앞에 세워놓았다.“누구 손 한번 탄 적 없이 모두 깨끗합니다. 보다시피 이제 막 성인이 됐고요.”남자가 힘을 가한 탓에 온다연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 넘어진 곳에서 고개만 들면 유강후가 보였다.순간,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온다연에게로 쏟아졌다.온다연은 고개를 한껏 숙인 채 눈앞에 있는 남자의 구두만 바라보았다. 그건 유강후의 신발이었다.순간 비참하고 모욕적인 감정이 마음속에서 끓어올랐고 이대로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말아쥐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때 남자가 아부하기 위해 유강후를 콕 집어 말했다.“도련님, 어떠십...”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남자의 무릎을 세게 걷어차 버렸다.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곧바로 유강후의 구두가
“신경 꺼요.”임혜린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내가 낳은 아들이고 한이준이랑 전혀 상관없는 아이예요. 그래서 도와줄 거예요? 말 거예요?”유강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혜린은 코웃음을 쳤다.“싫다는 뜻이죠?”곧이어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다연아, 실은 너한테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있어. 이름은 주...”“임혜린!”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다연이 친구인 걸 봐서 이번 한 번은 도와줄게. 하지만 다연을 속이려고 없는 얘기를 만들어낸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임혜린은 비웃었다.“그쪽이랑 실랑이할 시간 없으니까 얼른 이쪽으로 사람 보내요. 그리고 집은 인적 드문 곳으로 알아봐 줘요. 아들이랑 한동안 조용히 살고 싶어요. 지금 당장 알아봐 줘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조금 있으면 데리러 갈 거야. 성당 근처에 별장 한 채가 있는데 당분간은 거기서 지내.”“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어요. 그 별장 근처에 한이준이 살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다연아...”임혜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전화를 끊었다.그러자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친구? 저한테도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유강후는 마음속으로 임혜린을 수백 번 욕했지만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딱 봐도 도와주길 바라서 지어낸 얘기잖아요.”온다연은 임혜린이 걱정되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혜린한테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가봐야겠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너무 늦었어요. 오 집사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요. 어차피 내일 성당 근처 별장으로 이사 올 텐테 뭘 걱정해요. 내일 일찍 만나러 가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요. 지금 마음이 심란할 거예요. 친구도 별로 없을 텐데 저라도 가봐야죠.”유강후는 온다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이권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임혜린 모자를 데리러 갈 사람을 준비하라고 명
유강후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더니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용서하기 어려운 일은 어떤 거죠?”온다연은 단호하게 말했다.“나은별 씨와 정말 그런 사이였다면...”온다연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더니 질투 나는 듯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괴로워요. 만약 두 사람이 예전에 사랑하던 사이라면 다시는 강후 씨를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온다연의 모습에 가슴이 간지러워져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게 다예요?”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둘 사이의 오해였다면 며칠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은별 씨와 사랑하던 사이라면...”“쳇.”온다연은 대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고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기색이 엿보였다.“일단 그 여자를 때려눕힌 다음 강후 씨를 던져버릴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격렬하게 키스했다.차 안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자 운전 기사는 조용히 칸막이를 내렸다.그렇게 두 사람 모두 감정이 북받쳤고 한참 후에야 흥분을 가라앉혔다.온다연은 유강후의 가슴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심장 박동을 듣고 있었다.그녀의 가는 허리를 잡고 있던 유강후는 마치 온 세상을 움켜쥔 듯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조용히 느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만 남은 것처럼 말이다.한참 후 온다연이 속삭였다.“정말 신경 안 쓸 거예요?”“그래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잖아요. 같이 지낸 정이 있을텐데...”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온다연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그 사람 얘기는 앞으로 꺼내지 마요. 재수 없으니까.”강씨 가문 저택에 다다를 무렵 온다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이사 갈 거야. 강후 씨한테 이사를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물어봐 줘.”“지금 살고 있는 곳이 좋다며? 이웃들도 친절하고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온다연은 걱정스러운 듯 창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경호원을 많이 데려왔던데 혜린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겠죠?”유강후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더니 얼굴에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아닐 거예요. 이준이가 혜린 씨를 엄청 오랫동안 찾았거든요.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혜린 씨도 손이 매워 보이던데 아마 이준이가 많이 맞을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감싸더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불만스럽게 말했다.“나은별이라는 사람 너무 짜증 나요. 윤희 언니보다 훨씬 더요. 강후 씨의 친구만 아니었다면...”온다연은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목을 쿡쿡 찔렀다.“기회를 줄 테니까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지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해봐요. 풀 수 있는 오해라면 저도 따지지 않을게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요. 언젠가 강후 씨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엄청 화가 날 것 같아요.”개의치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3년 전에 나은별과 자신을 바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매우 힘들었다.물론 그사이에 오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떤 오해가 있더라도 이러한 행동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3년 전에 정말 나은별 씨와 나를 맞바꿨어요?”유강후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온다연의 작은 손을 잡더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나은별이 하는 말을 다 믿어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이며 기분 언짢은 티를 냈다.“만약 제가 지훈 씨와 강후 씨를 맞바꾼다면 어때요?”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건 맞지만, 결코 나은별이랑 바꾼 적은 없어요.”온다연은 마음이 괴로운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런데 혜린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해줬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어요. 분명 진짜일 거예요.”유강후는 심호흡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듣고 싶어요? 그럼 절대 화
한이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임혜린의 다리까지 묶었다.화가 나서 정신을 잃을뻔한 임혜린은 입을 벌려 한이준의 어깨를 세게 깨물었다.곧 피가 스며 나왔지만 한이준은 통증을 못 느끼는 것처럼 임혜린이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두었다.곧이어 그는 차에 도착했다.한이준은 막무가내로 임혜린을 차에 밀어 넣고 옆에 앉았다.임혜린은 넥타이로 묶인 채 몸부림쳤고 어느새 손목이 빨갛게 부어올랐다.빨개진 손목을 본 한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임혜린, 성깔은 아직도 여전하구나? 조금만 물러서는 것도 안 돼?”이때 차에 시동이 걸렸고 한이준은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뻗었다.손이 자유로워진 임혜린은 가장 먼저 그의 뺨을 때렸다.“이준 씨는 처음부터 끝까진 나쁜 사람이었어요. 평생 외롭게 살길 바라요.”그러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한이준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차 멈춰.”다행히 방금 출발한 덕분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임혜린은 관성에 이끌려 몇 걸음 달리며 안정을 되찾은 후 빠르게 육교로 올라갔다.한이준이 달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리 위에 있었다.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임혜린,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와.”‘차에서 뛰어내리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외진 곳이라 차가 많지 않아서 망정이지 임혜린의 행동은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임혜린은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반대편으로 달려가 곧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경호원이 뒤따라오며 물었다.“대표님, 쫓아갈까요?”한이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임혜린이 사라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집 주소는 아직이야?”“알아낸 바로는 한인타운의 재송 아파트에 거주 중인 것 같습니다. 나름 고급 단지입니다.”“그리고?”경호원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현재 도우미 두 명과 함께 단독 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동생인 임동규 씨와 시간을 보내고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남자 친구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다만 경제적 조건과 사회적 지위가 좋은 남자들에게 끝없이 구애를
툭하는 소리와 함께 임혜린의 핸드폰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내 사랑’이라는 사람의 전화는 여전히 수신으로 표시되었다.한이준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발로 찼고 핸드폰은 벽에 부딪히며 화면이 깨졌다.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임혜린은 한이준을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왜 남의 핸드폰을 발로 차요? 미쳤어요?”한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임혜린, 그동안 남자를 얼마나 만났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혜린은 그의 뺨을 내리쳤다.“내가 남자를 만나든 말든 그쪽이랑 뭔 상관이냐고요. 미친 X. 꼴도 복 싫으니까 얼른 나가요.”이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화면이 깨져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위에는 ‘내 사랑’이라는 세글자가 떠올랐다.임혜린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고 더 이상 한이준과 이곳에서 실랑이를 벌이며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한이준을 밀치고 밖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문에 다다르자 임혜린은 캐비닛에 있는 도자기를 쥐더니 벽을 향해 세게 던졌다. 그러자 도자기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고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파편이 들려있었다.임혜린은 그 손을 흔들며 경호원들을 위협했다.“경고하는데 막지 마요.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져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한이준을 바라봤다.“대표님...”한이준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내가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 계속 이러면 나도 세게 나올 수밖에 없어.”임혜린은 싸늘하게 말했다.“할 말 없어요.”그러고선 한이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경호원들은 임혜린이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이 두려운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마음이 조급해진 임혜린은 재빨리 앞으로 걸어가며 소리쳤다.“길 막지 말고 비켜요.”이때 경호원이 나타나 임혜린의 손에서 도자기 조각을 낚아채더니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임혜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한이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혜린아,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그때 화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내 마음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어. 이제는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 그러니까 제발 기회를 줘.”임혜린의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말했다.“무슨 기회요? 우리 엄마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날 믿지 않는 이준 씨 때문에 약을 못 챙겨서 우리 엄마가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때 기회를 줄 순 없었어요?”임혜린은 그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한씨 가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월급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10년 동안 이준 씨를 챙겨줬죠. 잘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우리 엄마가 엄청 고생한 건 제가 알아요. 더 이상 과거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준 씨는 그럴 자격 없잖아요?”“이준 씨가 준 케이크는 정말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어요. 저한테 남겨준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이 먹지 않아서 버리려고 했다는 걸 몰랐어요.”“만약 그게 이준 씨가 버리려던 케이크인 걸 알았다면 절대 먹지 않았을 거예요.”“우리 이제 성인이잖아요. 서로에 대한 체면 정도는 지켜주자고요.”모든 단어와 문장이 한이준에 대한 원망이었다.한이준은 손을 떨며 임혜린을 잡았다.“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나 때려. 혜린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임혜린은 흠잡을데 없이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정말요?”그녀는 손을 들어 한이준의 뺨을 내리쳤고 잘생긴 얼굴에는 곧바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그는 얼굴을 만지며 나지막이 물었다.“이제 화가 풀렸어?”임혜린은 차갑게 웃었다.“뭘 풀어요?”“아직도 화가 안 풀린다면 다시 사과할게.”“좋아요. 그럼 사과하세요. 바라던 참이니까.”그러자 한이준은 눈을 반짝였다.“사과를 받아주는 거야? 이제 날 용서했다는 뜻이지?”임혜린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사과를 받으면 꼭 용서해야 하나
임혜린이 문어귀에 도착하니 한이준의 경호원이 막아섰다.“임혜린 씨, 여기서 나가면 안 됩니다.”임혜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소리쳤다.“당신들이 뭔데 사람을 못 가게 해?”경호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저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임혜린이 이를 악물고 한이준을 돌아보았다.“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이 개자식이 국내에서 하던 짓을 여기서도 하다니? 진짜 미쳤구나!’한이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냥 널 보내기 싫을 뿐이야. 좀 순순히 말을 들으면 안 돼? 그러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잖아.”이 말에 임혜린은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그녀는 분노를 삼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이준 씨, 여기서도 국내에 있을 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는 3년 전의 임혜린이 아니에요. 당신의 그 수작들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고요.”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경고했다.“지금 보내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한이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경호원이 재빨리 임혜린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임혜린은 버럭 화를 내더니 몸을 돌려 경호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감히 내 휴대폰을 빼앗아?”경호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나 문설주를 잡았다.임혜린이 다시 달려들자, 경호원은 다른 동료 뒤로 숨었다.다른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녀는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휴대폰을 빼앗은 경호원을 노려보았다.“이름이 정진호 맞죠? 오늘 나를 잘못 건드렸어요. 내가 한이준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요. 아니면 계속 못살게 굴 거니까. 나는 뒤끝이 장난이 아니에요.”깜짝 놀란 정진호가 황급히 사과했다.“임혜린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 이해해 주십시오.”임혜린이 차갑게 웃었다.“그럼 이제 끝장났네요. 계속 고통받을 준비 해요.”정진호는 속으로 탄식했다.그는 한이준의 측근으로, 임혜린에게 여러 번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 지금의 임혜린은 네가 가진 돈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을 거니까.”말을 마친 유강후는 더 이상 한이준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문을 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온다연이 보였다.유강후를 본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회의 중이지 않았어요? 왜 왔어요?”유강후가 그녀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어보며 물었다.“몸이 안 좋아?”임혜린이 옆에서 빈정댔다.“모른 척하긴. 강후 씨 죽마고우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나은별이 여기 왔던 걸 모른다고 하지 마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무시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전화했을 때야 나은별과 만난 걸 알았어. 왜 말하지 않았어?”온다연은 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나지막이 말했다.“중요한 회의를 방해할 만큼 큰일도 아니었어요.”유강후의 걱정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나은별이 무슨 말을 했어?”“집에 가서 얘기해요. 피곤해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임혜린에게 말했다.“오래된 지인이 널 찾고 있어.”임혜린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군데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이준이 들어왔다.임혜린은 벼락 맞은 듯 멍하니 서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이준 역시 그녀를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그녀의 살점을 도려낼 듯 날카로웠다.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임혜린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가까운 거리임에도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결국 그녀 앞에 다가선 한이준이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임혜린.”그제야 정신을 차린 임혜린의 입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한 대표님이셨군요. 오래된 지인이라 해서 누군가 했더니.”한이준이 안으려고 뻗어오는 팔을 임혜린은 피했다.“한 대표님, 자중하세요.”한이준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혜린아, 나는 줄곧 널 찾고 있었어. 너도 알고 있었지?”임혜린이 그의 팔을 뿌리
한이준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쪽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한씨 가문에서 그동안 충분히 도와줬으니 이제 더 이상 형을 괴롭히지 말아요.”나은별은 성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이준 씨, 나는 예전에 재민 씨 여자친구였어요. 재민 씨가 돌아왔으면 최소한 나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녀에게 한 톨의 호감도 없는 한이준이 차갑게 말했다.“안 좋은 소리 듣기 전에 얼른 사라질 생각은 없는 건가요?”나은별이 맞받아쳤다.“내가 틀린 말을 했어요? 이준 씨, 당신들 행동이 너무 못됐잖아요. 재민 씨를 찾았다면 최소한 나에게 알려주긴 했어야지. 내가 그 사람 소식을 알 자격도 없어요?”한이준은 문득 그동안 이 여자를 지켜주고 도와준 것이 바보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뻔뻔한 여자를 이전에 형수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니.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형을 2~3년만 기다렸어도 나는 그쪽을 형수라고 존대했을 거예요. 하지만 소이섭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지 오래잖아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그쪽을 도왔어요. 이제 우리 한씨 가문은 빚진 게 없어요!”“형이 돌아왔지만, 그쪽은 이미 소이섭과 사귀는 사이 아닌가요?”“사람은 너무 욕심부리면 안 돼요. 모든 걸 다 가지려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나은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이섭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오해예요.”한이준은 코웃음을 쳤다.“그쪽이 소이섭과 무슨 사이인지는 알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쪽이 강후에게 치근대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나은별 씨,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요. 나씨 가문이 몰락했어도 마지막 체면은 지켜야죠.”나은별이 또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한이준이 유강후를 잡아끌고 가버렸다.그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유강후, 다 네가 자초한 거야! 한이준, 너도 제명에 못 죽을 거야!’유강후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임혜린도 여기 있는데, 정말 지금 들어갈 거야?”한이준이 초조해하며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