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날은 춥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추위를 자주 탔던 온다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면서 또 움켜쥐기를 반복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더는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또 얼마나 지났을까, 유리방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체향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곧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유강후의 손길을 피해버렸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이 차가워지고 팔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확 끌어안으면서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다.예상대로 온다연은 그의 팔을 잡더니 힘껏 자기 몸에서 떼어냈고 이내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방 안은 조금 어두웠고 침대도 크지 않았다. 온다연이 꿈틀대며 뒤로 물러서자 순간 침대에서 떨어졌다.유강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졌다.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울지도 않고 아프다고 소리를 내지 않아 꼭 숨소리마저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유강후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침대를 지나쳐 그녀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도망갔다.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유강후의 두 팔보다 빠르지 못했다. 벌떡 일어난 순간 바로 그에게 붙잡혀 버렸다.방은 어두웠기에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온다연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고 울고 있는 듯했다.유강후는 미간을 확 구겼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또 피해버렸다.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다연아?”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도망치려는 자세를 보였다.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커튼을 열었다.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 그리고 세게 깨물었다.온 힘을 다해 깨물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빠르게 그의 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유강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가 깨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느새 그녀가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피해버렸다. 그녀는 하악질을 해대는 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손대지 말아요!”유강후의 눈빛이 더 차갑게 식어갔다. 얇은 입술도 일자가 되었고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정원의 불빛에 그의 그림자는 문에 비쳤다. 온다연의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에 삼켜졌다.원래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였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더 심하게 느껴졌다.그의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갇힌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화가 났고 숨 막혔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느껴지는 위압감에 그녀는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문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바닥은 아주 차가웠다. 전부 조약돌이었던지라 엉덩이가 너무 아플 것 같았지만 그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리곤 거실로 들어갔다.소파 위에 그녀를 내려놓더니 티브이를 켰다.온다연이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채널을 돌렸다.“무한테크의 주가는 또다시 바닥을 쳤습니다. 무한테크의 고승철 회장은 떨어지는 회사 주가를 결국 붙잡지 못했습니다.”“무한테크는 한때 국내에서 AI 기술을 만들어 유명세를 떨친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파산의 길을 걷고 있어 많은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저희가 취재한 바로는 다른 자본이 무한테크에 개입해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현재 고승철 회장은 최선을 다해 내려가는 주가를 붙잡고 있다고 합니다...”...경제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온다연은 티브이에 집중했다. 한참 티브이를 보고 있으니 그녀도 점차 진정되었다.유강후는 약상자를 가져왔다.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힌 후 돌에 까진 발을 치료해 주었다.이번엔 반항하지 않았다.방금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고 정원에 깔린 돌을 밟았다. 부드러웠던
유하령이라는 세글자에 온다연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유강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며칠, 그는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한꺼번에 알게 됐고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분노케 했다.그가 없는 몇 년간, 아니, 그가 경원시에 있었던 그 시간에도 온다연은 유 씨네 집에서 영상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다. 그녀를 괴롭힌 주모자가 누군지 온갖 방법을 써 알아봤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누군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 꼭꼭 숨은 인물이었다.물론 의심 가는 사람은 있었다. 심지어 그 의심의 화살이 친형에게까지 갔지만 그렇다 할 증거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그리고 만약 이 모든 게 정말 유씨 집안 사람 중 누군가의 짓이라면 분명히 이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이 있을 테고 그건 생각보다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또한 중요한 점은 아직 대놓고 배후를 찾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유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가루가 되어 흩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그 누구에게도 득은 아닐 것이다. 가문은 물론이고 미래 그룹 또한 불안정해지고 나아가서는 무너지고야 말 테니까.그런 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유강후 본인도 말이다.그러니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주모자가 누구든 놓아줄 생각은 없다. 반드시 찾아내 이런 짓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다만 온다연은 그때를 기다리는 게 조금 힘든 듯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줘. 고씨 가문은 그저 시작일 뿐이야.”온다연은 그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비스듬히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날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탓에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은 유하령이 좋아요?”유강후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네가 볼 때는 어떤데?”온다연의 얼굴색은 여전히 혈색 하나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나
길게 뻗은 팔에 안 어울리는 밴드 두 개가 떡하니 붙어져 있어 보기 거슬렸다.온다연은 귀가 빨갛게 물든 채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미안해요.”그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자기 어깨를 가리켰다.“어깨에도 있어. 여기도 발라줘.”온다연은 그 말에 이틀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나 얼굴 전체가 빨개져 버렸다.당시 그녀는 확실히 세게 깨물었고 피까지 났었다.어깨에 남겨진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이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유강후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미세하게 웃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옷 벗겨서 봐.”온다연은 잠깐 망설이다 손을 들어 그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이미 몇 번 풀어봤기에 빨리 벗길 수 있었다.절반 정도 푼 다음 그녀는 옷을 조금 벗겨 상처를 확인했다. 오늘 물린 곳처럼 아파 보이지는 않았지만 껍질이 살짝 벗겨져 있었고 이빨 자국은 어느새 푸르게 멍이 들어있었다.이걸 보면 당시 그녀가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온다연은 손을 들어 멍이 든 곳을 살살 매만지며 물었다.“아파요?”유강후는 까만 눈을 그녀의 두 눈에 고정한 채 말했다.“깨무는 게 좋으면 몇 번 더 물어도 돼.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안 닿는 곳을 물어.”그 말에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이 남자는 꼭 이런 부끄러운 말을 입에 내야 속이 시원한 걸까?그녀는 그를 째려보았다.“삼촌 진짜!”유강후는 그녀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살짝 삐진 듯 구는 모습 또한 사랑스러웠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른 쪽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이쪽도 물어봐.”온다연은 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마조히스트인가? 지금도 이렇게나 아파 보이는데 또다시 물라고?유강후는 웃는 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얼마 안 가 유강후는 옷을 전부 다 벗어버리고 가운 하나만 걸친 채 욕실로 들어갔다.물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침실은 바로 옆방이었다.이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면 오늘 저녁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그 생각으로 몸을 천천히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유강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리고 이내 물소리가 멎더니 그가 물기 가득한 채로 욕실에서 나왔다.온다연은 그를 힐끔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유강후는 지금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두르고 있어 잔 근육들로 뒤덮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물기를 닦지 않은 탓에 작은 물방울들이 그의 목을 따라 가슴으로 내려가 이내 복근까지 흘러내렸다.그는 이쪽으로 걸어오며 손에 든 마른 타올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 움직임으로 근육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언뜻언뜻 핏줄도 튀어나왔다.게다가 그가 허리춤에 있는 타올을 세게 밑으로 내린 바람에 지방 하나 없는 듯한 치골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정말 섹시함을 그대로 두르고 나온 듯했다.온다연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머릿속으로는 그가 자신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밀어붙이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녀의 심장은 멋대로 뛰었고 이제는 목까지 빨개져 버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버리고 싶지만 생각을 그만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개는 자꾸 위로 들리고 시선은 자꾸 그를 찾았다.고개를 들어 그를 본 순간, 유강후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마치 블랙홀처럼 그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끌어당겨 버렸다.온다연은 화들짝 놀라 고작 1초 정도 보고는 금세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무언가 얘기하더니 곧바로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강후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 그저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은 심장이 고장 날 듯한 떨림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가오면 올수록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유강후에 몸을 완전히 맡기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온다연은 조금 반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감고 혀로 그의 입술을 조금씩 두드렸다.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유강후는 대단한 자극이라도 받은 듯 몸이 굳어지더니 이내 그녀의 입술을 피가 날 듯이 깨물었다.이에 온다연은 아프다며 소리 냈다.“아파...”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온다연,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옷 안을 휘저었다.온다연은 지금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유강후는 아주 손쉽게 그녀의 속살을 움켜쥐었다.말랑한 감촉에 이성을 잃은 뻔하면서도 다른 한 손은 허리에서 천천히 내려오더니 그녀의 다리를 서서히 벌려갔다.온다연은 그의 손길에 머리가 아득해져 저도 모르게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이 행동은 그에게 있어 응하겠다는 사인과 다름없었다.얼마 안 가 온다연은 자신의 허리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가운이 전부 다 젖혀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순간 너무 놀랐던 것인지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그걸 눈치챈 유강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쉬, 착하지. 무서워하지 마. 아프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이다음으로 그가 무엇을 할 건지 알고 있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발버둥 쳤다.하지만 유강후가 그걸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고 그녀의 손을 잡아 또다시 거칠게 위로 올렸다.온다연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끼며 흐느꼈다.“아파요, 삼촌. 아프다고.”유강후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조금만 있으면 아프지 않을 거야.”온다연은 이제 곧 울 것 같았다.“상처가 아프다고. 너무 아파. 상처 벌어진 것 같아요.”그 말에 유강후의 몸이 뚝 하고 굳었다. 그는
어둠 속 유강후은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입술을 매만지다가 마지막에는 입꼬리 근처를 배회했다.그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너한테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럴 만한 담은 없었다.“조금, 아주 조금요.”그 대답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그걸 눈치챈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정말 조금이요...”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덥석 잡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그런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하루빨리 날 받아들일 생각이나 해. 내가 오늘은 넘어간다고 해도 내일도 너를 가만히 놔둘까?”그는 갑자기 그녀의 귓불을 입에 물었다.“마음 같아서는 널 지금 당장 씹어먹고 싶어.”그 말과 함께 세게 깨무는 바람에 온다연은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아파요.”유강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이제야 아파? 아까 발이 그렇게 됐을 때는 왜 아프다는 소리를 안 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주위가 어두웠기에 지금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호흡과 심장 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시각이 기능을 못 하는 탓인지 나머지 감각들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방안 곳곳에 온통 유강후의 냄새로 꽉 찬 것 같았다. 시원한 우디향과 그의 숨결이 어우러져 공기 중에 떠돌아 그녀의 귀와 코 그리고 눈과 피부 등 공기와 맞닿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혈관 깊숙이 들어와 이윽고 심장에 뿌리를 내려 그녀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행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온다연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화들짝 놀라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정말 유강후의 숨결이 심장에 자리 잡은 것 같아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그때 유강후가 갑자기 그녀를 감싸던 이불을 끌어 내리고 그녀에게 몸을 겹쳐왔다.그
유씨 집안 사람들이 없으니 이 호텔도 나름 편하게 느껴졌다. 정원도 예쁘고 온천도 좋았고 휴식 코너에는 무료로 제공되는 신선한 과일들과 맛있는 디저트가 놓여있었다.온다연은 디저트를 하나 들고 휴식 코너의 의자에 누워 느긋하게 뉴스를 시청했다. 그러다 며칠 전 밥 먹을 때 만났던 안경 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그는 양복 차림에 머리를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뒤로 올렸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온다연은 어딘가 모르게 이 남자가 불편했다. 웃을 때면 소름이 돋았고 시선이 마주칠 때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이에 그녀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남자가 한발 빠르게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아버렸다.“나 그쪽 누군지 알아요. 유씨 집안 막내 도련님이 데려온 파트너, 맞죠?”온다연은 이대로 가버리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남자는 온다연을 아래위로 몇 번 훑더니 안경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유강후 씨 안목이야 뭐 예전부터 좋았죠. 매번 유강후에게 지목당한 여자는 몸값이 몇 배로 뛰었고요. 나한테로 올래요? 이전 몸값의 3배를 줄게요.”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두어 걸음 떼기도 전에 그가 손목을 덥석 잡아 왔다.“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남자는 양아치 기질이 다분했고 온다연을 하찮은 여자 보듯 바라보았다.온다연은 침착하게 대꾸했다.“저기요. 저는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지난번에 얼굴 한 번 본 게 다예요. 그리고 당신과 얘기 나눌 생각 없으니까 당장 이손 풀어요.”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날 모른다고? 경원시에서 어떻게 날 모를 수가 있지? 혹시 뭐 괜히 튕기는 거야? 몸이나 파는 년 주제에 유강후한테 대주면서 나한테는 못 대줘?”온다연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 언성을 높였다.“지금 당장 이거 놓으세요!”임도현은 혀를 찼다.“유강후랑 침대에서 좀 뒹굴었다고 몸값이 하늘로 치솟은 것 같아? 막 부잣집 아가씨라도 된 것 같고 그래? 이
염지훈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유씨 가문에서 지내온 세월 동안, 다연이는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다 당신 덕분이고요. 유강후 씨,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때 다연이를 괴롭힌 사람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한들, 당신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열세 살이던 해에, 심미진이 다연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던 걸 당신이 막았잖아요. 강제로 다연이를 남게 했었죠. 그런데 남게 한 다음엔 뭘 했죠? 방치하고 대놓고 유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더 큰 괴롭힘을 받게 만들었잖아요!”“유강후 씨,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그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잖아요. 온준용이 다연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다연이를 자기 곁에 가두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다연이가 그렇게 아름다운 건 다연이의 유전자가 특별하기 때문이겠죠. 다연이의 친부모를 찾아주면, 그 사람들이 다연이의 편에 서서 다연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까 봐, 그래서 다연이가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요!”그러자 눈빛이 싸늘해지며 유강후가 말했다.“염지훈, 오늘 여기서 죽고 싶은 거야? 입 닥쳐!”하지만 염지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뭐예요, 내가 당신 약점 건드리니까 심장이 떨려요? 겁나요?”“유강후 씨, 정말 잘도 계획했네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은 곧 끝나게 될 겁니다.”“그리고 난 당신과 달라요. 나는 다연이를 데려가서 당신 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겁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단호히 말했다.“난 다연이를 존중해 줄 거예요. 자유를 줄 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응원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새로운 삶을 탐험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당신처럼 병적으로 다연이를 가둬두는 짓은 하지 않고요.”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닿았다.유강후는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에서 싸움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유강후는 낮게 포효했다.“나가! 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염지훈은 비웃으며 말했다.“의외로 남자답게 행동할 때도 있네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손목을 한 번 돌렸다.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풀어냈다.오랜만에 이런 싸움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오늘 이 방 안에서 유강후와 염지훈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쓰러질 것이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유강후 자신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염지훈이 반응할 틈도 없이 유강후는 표범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염지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렬한 펀치를 한 대 맞고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들은 방 안에서 두 명의 권위 높은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아무도 싸움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참 뒤, 유강후가 간신히 우위를 점했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일어서며 염지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이, 내가 이미 경고했지. 다연이는 네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다시 다연이한테 다가가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염지훈은 피를 뱉어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오늘 겨우 이겼다고 승리한 줄 알아요? 웃기지 마요. 그쪽은 다연이 옆에 설 자격이 없으니까. 그쪽이 하는 사랑은 결국 다연이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학교에 보내면서도 다연이가 금융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모든 금융 수업을 끊어버린 것. 다연이의 그림을 대가들이 감탄했을 때, 그 대가들의 전시 제안을 막아버린 것. 이런 것들은 다연이에게조차 숨긴 게 바로 그쪽이에요.”“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연이의 날개를 꺾고 깃털을 뽑아버리며 그쪽 곁에만 묶어두려 한 거죠. 개인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서.”“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은별의 집안에 대
“짝!”다음 순간, 강렬한 뺨 소리가 울리며 온다연의 손바닥이 염지훈의 얼굴에 꽂혔다.거의 모든 힘을 쏟아 때린 탓에 염지훈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염지훈은 손으로 상처를 닦으며 혀를 차고 말했다.“꽤 달콤하네.”분노가 차오른 온다연은 펄쩍 날뛰며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미쳤어요?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입술이 닳도록 씻은 뒤에야 다시 나왔다.그러자 염지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단지 한 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날 싫어할 필요 있어?”온다연은 문을 가리키며 낮게 소리쳤다.“나가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 그 사람은 네가 그렇게 할 가치가 없어.”“뒷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알려주는 거야. 그 사람이 한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온다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나와 그 사람의 문제지 지훈 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염지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다연은 다시 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외쳤다.“나가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염지훈 씨,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유강후 씨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염지훈 씨를 좋아할 일은 없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로요.”순간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염지훈의 눈빛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온다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말했다.“나가라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온다연!”갑자기 염지훈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이 도시에서 데리고 나갈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게. 유강후, 그놈 곁에...”끝내 그는 말을 멈췄다.온다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그놈은 자격이 없어.”이번에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내리깔
그러다 임정아는 갑작스레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다연 씨!”그 순간, 온다연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고 얼굴은 유령처럼 새하얘졌다.임정아는 다급히 다가가며 말했다.“뭐가 이렇게 급해요! 그냥 가능성을 말한 거지 사실이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창백한 얼굴을 한 채 뒤이어 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정아 씨, 함부로 말하지 마요. 내 아이는 살아 있어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이지...”눈앞이 깜깜해져 휘청거리더니 온다연의 몸은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흔들렸다.“내가 데려올 거예요. 반드시...”이 말을 끝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임정아는 깜짝 놀라 외쳤다.“여기! 빨리 119 좀 불러줘요!”그러자 임정아의 매니저가 급히 들어와 온다연을 부축하며 바깥으로 옮겼다.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여배우 한 명이 온다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어머, 이 사람 내 그 싸구려 동생이 말하던 여자친구 아니야? 왜 쓰러졌지?”그러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염지훈, 네가 찾아다니던 여자친구...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정보비는 2억, 한 푼도 깎지 마!”...온다연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방은 깨끗하고 밝았으며 침대 머리맡에는 백합꽃이 꽂혀 있었다.창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엔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온다연이 깨어난 것을 보자 그는 본래의 태도를 되찾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깼네?”염지훈은 다가와 뜨거운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물 좀 마셔.”온다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왜 여기 있어요?”염지훈은 살짝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 지도교수가 그러더라. 휴학했다면서. 잘 다니던 학교를 왜 갑자기 휴학한 거야? 혹시 유강후가 널 가둬뒀어?”유강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온다연의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
“그만해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까.”온다연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어떻게 해야 내 아이를 찾고 이 악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토록 증오했던 적이 없었다.유강후의 강압적인 통제 아래 그녀는 자신의 아이조차 지킬 수 없었다.아이는 이미 그의 손에 넘어갔고 온다연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완전히 맞서 싸울 용기도 없었다.‘무엇을 카드로 삼아야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을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튼 지금 상황은 이런데 넌 원하는 게 뭐야?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 수 있을지 말해줘.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나도 힘들어.”온다연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얼굴은 그녀가 본 얼굴 중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하지만 이 얼굴의 주인은 심장이 없었다.아니, 심장은 있었다.그저 온다연을 위한 심장이 아니었을 뿐이다.‘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내가 멍청하게 믿고 따라갔으니까.’“사람 목숨은 아저씨한테 중요하지 않죠? 왜냐하면 고통받는 건 아저씨 자신이 아니니까!”유강후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온다연의 영혼까지 꿰뚫으려는 듯 말이다.“온다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면 나도 괴로워.”그러나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괴롭다고요? 아저씨는 쉽게 유씨 가문 사람들을 용서하잖아요. 근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무자비해요?”유하령의 다리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고 그녀를 비호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곧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목을 붙잡고 낮게 말했다.“다연아, 유자성의 뒤에는 우리 아버지가 있어. 아버지는 내가 형과 대립하는 거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갔어. 내가 직접 손
차는 장례식장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 한구석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이 도시에서 21년을 살며 거의 떠나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은 그녀를 키워준 곳이자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준 곳이었다.이토록 화려한 곳에서 왜 이렇게 많은 악이 생겨나는 걸까?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연약한 이들에게 손을 뻗어 상처를 주는 걸까?그들의 삶과 생명을 조종하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는 걸까?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누군가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걸 가지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하지만 설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악마 중 하나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이제 유강후는 그녀가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그녀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온준휘의 생명을 끊었다.악귀들과 다를 바 없었다.아니, 어쩌면 더 끔찍했다!그 사람들은 온다연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주었고 그들의 악은 망설임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증오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준 것은 그녀의 뼛속까지 각인되게 만들 철저히 계획된 고통과 기만이었다.그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입꼬리가 비틀리며 냉소가 흘러나왔다.‘그 사람이 좋아했던 게 이 얼굴이지. 그 여자의 얼굴이 이랬으니 내 얼굴도 비슷해서 끌렸던 거겠지. 취향이 정말 변함없네. 이 얼굴이 망가진다면 그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여전히 다정한 척하며 날 기쁘게 하려고 애쓸까?’그때 뒤따라오던 경호원이 전화를 받더니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동교 묘지로 바로 가세요.”묘지에 도착하자 유강후가 검은 정장을 입고 어머니 묘비 앞에 서 있는게 보였다.그의 뒤에는 경호원 두 명이 각각 유골함을 들고 있었다.온다연이 다가오자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기분은 좀 나아졌어? 오늘 눈은 좀 보여?”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의
하지만 온다연의 눈에는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몇 걸음 달리자마자 바닥에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쫓아가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쓰러졌다.유강후는 이런 온다연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만해. 준휘는 이미 죽었어!”온다연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놔! 유강후, 이건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만든 결과라고!”“당신이 사람들한테 막으라고 했잖아!”“다 당신 때문이야!”“놓으라고!”곧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내 잘못 있어. 내가 정확히 지시하지 않아서 아래 사람들이 내가 준휘를 싫어한다고 오해했고 그것 때문에 응급처치 타이밍을 놓쳤어.”“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나는 그 애가 죽길 원한 게 아니라고!”“너희 아버지조차도 살릴 의도가 없었던 적은 없어!”“온다연, 정신 좀 차려!”하지만 온다연은 이미 감정이 폭발해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유강후, 당신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당신의 말 한마디, 심지어 한 문장부호조차 믿지 않아!”“꺼져, 밖에 당신이 좋아하는 여자들 많잖아. 나한테 집착하지 마. 이제 당신한테 마음 줄 일은 없어!”“비켜!”그녀는 울면서 소리쳤고 목소리는 이미 쉰 상태였다.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울다 보니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이 더 나빠질까 두려워 그녀의 손발을 제압했다.그리고 의사에게 신호를 보내 진정제를 주사하도록 지시했다.차가운 약물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자 온다연은 울면서 비명을 질렀다.“유강후, 또 나한테 뭐 주사했어?”“날 뭐로 보는 거야? 아이 낳는 기계? 아니면 애완동물?”“이렇게 대하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증오할지 알아?”“놓으라고!”“준휘야... 누나가 정말 미안해...”...결국 두 번의 진정제를 맞은 뒤 온다연은 힘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인평 병원의 큰 병실 안이었다.의사가 다른 약물도 주사했는지 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움직였다.몇 명의 간호사가 그녀 곁을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어떻게 죽을 수가 있지?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도 않았잖아. 처음 들어왔을 때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는데.”“위에서 압박이 들어와서 못 살리게 했다더라. 불쌍해. 아마 누군가를 잘못 건드린 거겠지.”“듣자 하니 유 대표님이 그렇게 지시했다던데...”“조심해. 이런 말 하다가 들키면 일자리 잃을 수도 있어.”“정말 끔찍해. 고작 열세네 살 아이가 누나를 지키려다가 자기 친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니.”“그리고 또 죽은 사람이 친아버지라던데, 혈액에서 대량의 알코올이 나왔대. 술 먹고 폭주했겠지.”“돈 많은 사람들이란... 어린애까지 이렇게 잔인하게 다루다니.”“그만 말하고 빨리 가자.”...간호사들의 대화 소리가 점차 멀어졌고 복도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뜻했지만 온다연의 온몸은 차가워 떨고 있었다.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만큼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고 등은 금세 식은땀으로 젖었다.‘이게 진실이었던 거야?!’온준휘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그는 분명 살아날 수 있었다.그러나 유강후가 살리게 두지 않았다.그래서 응급처치의 황금시간을 놓친 것이었다!하지만 소년은 아직 어렸다.제대로 성장할 기회도 없이 생명을 빼앗겨 버렸다.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와 다를 바 없는 살인자임을 깨닫고 고통에 몸부림쳤다.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와 분노로 가득 차 속으로 외쳤다.‘차라리 그때 유강후의 심장을 찔러버렸어야 했는데! 그 사람이 진정한 악마인데!’바로 그때, 유강후가 전화를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그녀의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온다연은 갑자기 폭발하듯 소리쳤다.“꺼져, 이 악마야!”“유강후,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유강후는 몸이 굳어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뭐라고 했어?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