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어느새 어두워졌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휴식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하며 그녀는 휴식실의 작은 침대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문이 천천히 열리고 키 큰 남자가 휴식실로 들어왔다.남자는 길고 마디마디 선명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조금 간지럽게 느껴진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방에서 퍼진 시원한 우디향을 맡게 되었다.비몽사몽 한 모습으로 갑자기 나오는 재채기를 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삼촌...”방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유강후는 셔츠 한 장을 몸에 걸치고 있었고 하얀 셔츠는 달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덕에 온다연은 정신이 확 들었다.하지만 빠르게 유강후의 손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졌다.“오후 내내 여기 있었던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부드러운 손으로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삼촌, 저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고개를 떨군 그녀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웅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인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유강후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안았다.“그 사람들 때문이야?”온다연은 그의 셔츠를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작게 말했다.“저 오늘 그 사람들 봤어요.”유강후는 침묵했다.어두웠던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는 것도 보지 못했다.시간이 꽤 흐른 뒤, 유강후는 그녀의 이마에 뽀뽀했다.“배 안 고파?”온다연은 갑자기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비비적거렸다.“삼촌, 우리 다른 곳으로 가요, 네?”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다만 그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여기 온천은 상처 회복에 좋으니까 며칠 뒤에 떠나자. 그때가 되면 더는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될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은 한 손도 올려 그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마지막으로 구경해 본 게 언제였을까?아마 4년 전일 것이다. 주한이 떠나간 뒤로 더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은 다시 허공에 붕 떴다. 유강후가 또 그녀를 안아 올린 것이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두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꼭 인형을 안고 있는 것처럼 품에 꽉 끌어안았다.두려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당연히 거부감도 들었지만 온다연은 자기 생각대로 했다.그녀는 버둥대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최대한 몸이 떨려오지 않도록 애를 썼다.유강후는 이 자세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 그녀를 안고 가만히 있었다.두 사람은 모두 얇게 입고 있었다. 그런데 찰싹 붙어 있으니 온다연은 그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껴지는 뜨거운 온기에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그녀는 너무도 불편했지만, 그는 계속 그녀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점점 허리가 뻐근해져 몸을 살짝 버둥대며 자세를 바꿔보려고 했다.그러나 움직이자마자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꽉 끌어안았고 자세를 바꿔 자신과 마주 앉게 했다.너무도 야릇하고 민망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그녀는 거의 그의 몸과 찰싹 붙어 있었고 그의 심장 소리도 들려왔다. 심지어 옷감 사이로 뜨거운 그의 온기도 생생하게 느껴졌다.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있었고 그의 옷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은 땀으로 축축해졌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자신의 몸에 비비더니 큰 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았다.그녀의 발은 그녀의 손처럼 작고 부드러웠다. 발가락도 동글동글하니 만지기만 해도 얼마나 귀여운지 알 수 있었다.게다가 그저 크기만 작을 뿐 살집이 조금 있었고 만지면 아주 말랑거렸다.꼭 말랑거리는 느낌에 중독된 사람처럼 그녀의 한쪽 발만 한참 만지작거렸다.온
유하령은 노크하면서 웃으며 말했다.“분명 나은별 씨는 아닐 거예요. 오늘 나은별 씨랑 만났었거든요. 삼촌, 언제부터 집안에 여자 숨기는 취미가 생기신 거예요? 얼른 나오세요. 우리 아빠가 아직도 삼촌 기다리고 계시잖아요.”온다연은 더욱 긴장해졌다. 버둥거리며 유강후의 몸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화가 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유하령, 자꾸 선을 넘는구나.”유리방이라 방음은 그다지 잘 안 되었다. 유강후의 분노가 섞인 차가운 목소리는 그대로 유하령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유강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유하령은 또 한 번 간 크게 기어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삼촌, 빨리 나오세요. 상의할 것이 있다고요.”말을 마친 후 방 문 앞에서 사라졌다.유강후는 일어나 옷을 입었다. 안고 있던 온다연만 의자에 홀로 남겨둔 채 허리를 굽혀 이마에 뽀뽀했다. 그제야 그는 온다연의 이마는 이미 축축할 정도로 땀이 나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손바닥도 축축했다.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휴지를 뽑아 이마와 손바닥을 세심하게 닦아주었다.“다연아, 예전에는 몰랐는데...”“삼촌!”순간 온다연이 갑자기 말허리를 잘랐다. 뒷말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새였다.“전 예전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발 제가 여기 있다는 거 그 사람들한테 알리지 말아요.”유강후는 그윽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쓸면서 다소 차가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사람들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온다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풀면서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삼촌, 나은별 씨랑은 언제 약혼해요?”유강후의 손이 멈추었다. 순간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온다연, 혹시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내리깐 채 그의 두 눈을 피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목소리에선 쌀쌀함이 느껴졌다.“다연아, 그날만 손꼽아 기다린대도 소용없어.”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드러운
유씨 가문의 두 형제는 아주 바람직하게 생겼다. 유자성은 40이 넘는 나이었지만 여전히 점잖고 위엄이 있었으며 그의 기세는 누구라도 탄복할 정도였다.유강후는 당연히 더 잘생겼다. 차갑고 귀티가 흐르는 냉미남 유형에 그 나이대에 보기 힘든 상위 포식자의 맹렬한 기운이 흘러넘쳤다.겉모습으로만 봐도 두 형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멀지 않았던지라 창가에 서서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유자성의 목소리는 묵직했다.“염지훈은 말도 잘하고 일도 척척 잘하지. 젊은이 중에서도 꽤나 잘생긴 축에 속하니까 하령이 짝으로 맺어주는 거 어떻게 생각해?”유강후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차가웠다.“하령이만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죠.”말을 마친 뒤 그는 틈이 생긴 창문과 커튼 쪽을 보았다.유자성은 동생의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염씨 가문은 수완이 좋아. 집안도 꽤나 좋고 흠잡을 데가 별로 없지. 하지만 같은 사업인으로서 생각하면 우리 유씨 가문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유강후는 유리방을 빤히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형, 유씨 가문이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만 해도 끝이 보이는데 정말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그래.”유자성은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리 잘 되고 싶어도 이제 더는 안 될 거야.”이때 심미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하령이는 염지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최근 두 달 동안 매일 염씨 가문으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잖아요. 젊으니까 가끔 마음 조절이 않나 봐요. 그래도 약혼식은 될수록 빨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속도위반으로 먼저 임신하기라도 하면 저희 가문의 이미지에도 안 좋잖아요.”그러자 유자성은 아주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그게 무슨 말이야? 내 딸은 그런 아이가 아니야.”심미진은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고 과일을 가져와 껍질 까는 척했다.유강후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커튼을 내리려던 온다연이 손이 멈추었다.“우리 두 가문도 그동안 많은 교류를 해왔잖아.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기도 하고. 비록 너희 둘 사이가 조금 틀어지긴 해도 3년이나 지났으면 이젠 화를 풀 때가 되지 않았나? 대충 화 풀고 날 잡아서 결혼해.”유자성은 이내 고개를 돌려 유리방을 힐끗 보면서 들으라는 듯 조금 크게 말했다.“네가 밖에서 고양이를 키우든 개를 키우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만 쥐여주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직 놀고 싶은 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아무나 곁에 두지 마. 유씨 가문의 문턱은 누구나 넘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유강후의 안색이 변하고 목소리가 싸늘해졌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형은 형 일에나 신경 써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시간도 늦었으니 형도 돌아가세요. 나도 이젠 쉬어야겠으니까.”유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심미진이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쉬겠다고 하잖아요. 우린 그냥 돌아가요. 가족끼리 언제든지 다시 모일 수 있잖아요. 형제 사이에 자꾸 상처가 되는 말 하려고 하지 말아요.”유자성의 표정이 다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심미진의 말대로 그냥 돌아갔다.두 사람은 함께 나갔다. 유하령은 바로 유강후의 곁으로 달려와 팔을 잡으면서 애교를 부렸다.“삼촌, 부탁할 거 있는데 꼭 도와줘야 해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뭘 갖고 싶은 건데. 알아서 사. 난 시간 없으니까.”그러자 유하령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댔다.“삼촌 지난번이랑 완전히 딴 사람 같아요. 만난 지 두어 번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엄청 밉네요.”이내 또 애교를 부리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삼촌은 예전에 나랑 민준이를 아주 예뻐해 줬잖아요. 혹시 애완견이라도 키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랑 민준이를 방치해 두고 있는 거죠. 나 삐질 거예요.”유강후는 별수 없이 유하령을 밀어냈다.“예의라곤 하나도 없네. 애완견을 키우고 있다니, 내가 네 선물 사 오지 않아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지난달에 네
분명 날은 춥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추위를 자주 탔던 온다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풀면서 또 움켜쥐기를 반복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더는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또 얼마나 지났을까, 유리방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체향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곧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유강후의 손길을 피해버렸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이 차가워지고 팔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확 끌어안으면서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다.예상대로 온다연은 그의 팔을 잡더니 힘껏 자기 몸에서 떼어냈고 이내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었다.방 안은 조금 어두웠고 침대도 크지 않았다. 온다연이 꿈틀대며 뒤로 물러서자 순간 침대에서 떨어졌다.유강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졌다.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울지도 않고 아프다고 소리를 내지 않아 꼭 숨소리마저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유강후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침대를 지나쳐 그녀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도망갔다.그러나 그녀의 두 다리는 유강후의 두 팔보다 빠르지 못했다. 벌떡 일어난 순간 바로 그에게 붙잡혀 버렸다.방은 어두웠기에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온다연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고 울고 있는 듯했다.유강후는 미간을 확 구겼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또 피해버렸다.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다연아?”온다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도망치려는 자세를 보였다.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커튼을 열었다.달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확 잡았다. 그리고 세게 깨물었다.온 힘을 다해 깨물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빠르게 그의 팔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유강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가 깨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느새 그녀가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피해버렸다. 그녀는 하악질을 해대는 고양이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손대지 말아요!”유강후의 눈빛이 더 차갑게 식어갔다. 얇은 입술도 일자가 되었고 두 사람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정원의 불빛에 그의 그림자는 문에 비쳤다. 온다연의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에 삼켜졌다.원래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였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더 심하게 느껴졌다.그의 커다란 그림자 속에 갇힌 온다연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화가 났고 숨 막혔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느껴지는 위압감에 그녀는 숨쉬기가 힘들어졌고 문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바닥은 아주 차가웠다. 전부 조약돌이었던지라 엉덩이가 너무 아플 것 같았지만 그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작은 짐승처럼 보였다.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리곤 거실로 들어갔다.소파 위에 그녀를 내려놓더니 티브이를 켰다.온다연이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채널을 돌렸다.“무한테크의 주가는 또다시 바닥을 쳤습니다. 무한테크의 고승철 회장은 떨어지는 회사 주가를 결국 붙잡지 못했습니다.”“무한테크는 한때 국내에서 AI 기술을 만들어 유명세를 떨친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파산의 길을 걷고 있어 많은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저희가 취재한 바로는 다른 자본이 무한테크에 개입해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현재 고승철 회장은 최선을 다해 내려가는 주가를 붙잡고 있다고 합니다...”...경제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온다연은 티브이에 집중했다. 한참 티브이를 보고 있으니 그녀도 점차 진정되었다.유강후는 약상자를 가져왔다.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힌 후 돌에 까진 발을 치료해 주었다.이번엔 반항하지 않았다.방금 그녀는 신발도 신지 않고 정원에 깔린 돌을 밟았다. 부드러웠던
유하령이라는 세글자에 온다연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유강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며칠, 그는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한꺼번에 알게 됐고 그 모든 것들이 그를 분노케 했다.그가 없는 몇 년간, 아니, 그가 경원시에 있었던 그 시간에도 온다연은 유 씨네 집에서 영상보다 더한 대우를 받았다. 그녀를 괴롭힌 주모자가 누군지 온갖 방법을 써 알아봤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누군지는 몰라도 어둠 속에 꼭꼭 숨은 인물이었다.물론 의심 가는 사람은 있었다. 심지어 그 의심의 화살이 친형에게까지 갔지만 그렇다 할 증거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그리고 만약 이 모든 게 정말 유씨 집안 사람 중 누군가의 짓이라면 분명히 이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이 있을 테고 그건 생각보다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또한 중요한 점은 아직 대놓고 배후를 찾아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가는 유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가루가 되어 흩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그 누구에게도 득은 아닐 것이다. 가문은 물론이고 미래 그룹 또한 불안정해지고 나아가서는 무너지고야 말 테니까.그런 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유강후 본인도 말이다.그러니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주모자가 누구든 놓아줄 생각은 없다. 반드시 찾아내 이런 짓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줄 것이다.다만 온다연은 그때를 기다리는 게 조금 힘든 듯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조금만 기다려줘. 고씨 가문은 그저 시작일 뿐이야.”온다연은 그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비스듬히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날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탓에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은 유하령이 좋아요?”유강후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네가 볼 때는 어떤데?”온다연의 얼굴색은 여전히 혈색 하나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많이 나
신중하게 정장을 고른 후 유강후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한 번 훑어보았다.뭔가 허전한 느낌에 곧바로 액세서리 상자를 열어 남성용 벨플라워 브로츠를 꺼내 정장 칼라에 꽂았다.유강후는 평소보다 젊어진 자신을 보며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오늘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대부분은 온다연과 비슷한 또래의 재벌 2세였으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꾸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곧 날이 저물었다.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크루즈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비록 약간의 비가 내렸지만 그들의 컨디션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파티의 주최자가 동국 왕자 연시온인 이유도 있지만 그 밖에도 오늘 크루즈에 거물이 나타난다는 소식에 빠짐없이 참석했다.오아시스 그룹은 대진 그룹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 그러니 오아시스 그룹 대표와 친해지는 기회를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그 사람과 친해진다면 앞날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재벌 2세들은 비를 무릅쓰고라도 파티에 참석해 조금이라도 엮일 기회가 있는지 엿봤다.여러 대의 대형 헬기가 착륙하자 검은색 정장은 입은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내렸다.곧이어 맨 가운데의 해치가 열렸고 포스 넘치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숨을 죽였다.그 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칼라에는 연보라색의 브로츠가 끼워졌다. 눈에 띄는 화려한 착장은 아니었지만 강한 강박감에 사람들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마치 모든 것이 그의 발밑이라는 듯 당당했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그 기세가 남달랐다.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던 그때 또 다른 헬기 한 대가 착륙했고 헬기의 날개에는 대진 그룹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유강후는 헬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온다연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었는데 미니멀한 디자인은 그녀의 가는 허리와 늘씬한 다리를 부각했다. 심지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피부를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연보락색의 귀걸이와 다이아몬드 목
“옷에 더러운 게 묻어서 그냥 버렸어요.”온다연은 관심 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돌아섰다.“이만 갈게요. 내일은 안 올 거예요.”그냥 가려다가 그래도 인사를 건네는 게 예의라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못 볼 꼴을 보게 되었다.‘왜 항상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온다연은 곧장 밖으로 향했다. 안심은 귀까지 빨개진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작은 거실을 쳐다보고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입구에서 싸늘하게 모든 걸 지켜보던 안윤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온다연이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다연아, 내일 저녁에 파티 있는데 너도 갈 거지?”온다연은 줄곧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듣자마자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안윤희가 말을 덧붙였다.“이번 파티는 좀 달라. 동국 왕자 연시온 씨가 주최했거든. 심지어 참석자는 전부 신국에서 명망 있는 후계자들이야. 가서 얼굴이라도 익히는 게 어때?”“어차피 곧 대진 그룹을 이어받아야 하잖아. 앞으로 이런 자리가 많을 텐데 계속 피하는 건 아니라고 봐.”온다연은 고민하다가 답했다.“알았어. 한번 가볼게.”아기 새처럼 영원히 진수현의 보살핌 하에 숨어서 사는 건 불가능한 노릇이니 이제는 슬슬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그녀의 확답을 들은 안윤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다음 날 점심, 유강후도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주최자가 연시온인걸 보고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이권은 자연스레 쓰레기통에서 초대장을 꺼냈다.“다연 씨도 참석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런 파티에는 도대체 왜 참석하는 거야. 귀찮아죽겠네.”“대진 그룹의 후계자인데 참석해야죠. 이번 파티에 신국의 명망 있는 후계자들은 전부 참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주최자는 연시온 씨입니다. 진씨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니 다연 씨가 참석하는 게 이상할 건 없죠.”“도련님, 가실 겁니까?”유강후는 단호
안윤희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머리를 정리하고선 유강후에게 차 한 잔을 따르며 부드럽게 말했다.“강 대표님, H국에서 수입해 온 녹차예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흰 원피스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까지 더해지니 온다연과 비슷해서 청순해 보였다.그러나 차를 건네자마자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센 향수 냄새가 코를 강타했는데 차 향이 나는 향수를 썼는지 유난히 역겹게 느껴졌다.유강후는 녹차를 마시지 않지만, 진수현이 바로 앞에 있고 안심의 조카라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안윤희의 차를 건네받았다.그런데 손이 닿는 순간 찻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안윤희는 의도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스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다 젖으셨네요.”안윤희는 급히 휴지를 집어 유강후 셔츠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얼굴에 혐오감이 드러났다.“됐어. 어차피 녹차를 안 마시거든. 제발 좀 가만히 있어.”안윤희는 얼굴을 창백해진 채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그의 반응에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안윤희는 그가 보고 자란 아이라 얼마나 착하고 순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따라 실수를 자주 하고 행동이 이상해졌다.하지만 뭐가 됐든 그의 앞에서 안윤희에게 무안을 주는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윤희야, 강 대표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얼른 나가봐.”안윤희는 입술을 깨문 채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았다.유강후는 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좋았다. 진유나에게 청혼 선물이라며 건넨 예물은 진씨 가문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왜 진유나 같은 X을 좋아하는 거지?’‘하여튼 진유나가 문제라니까. 염지훈도 모자라 이제는 강 대표까지 꼬시는 거야?’‘연약한 척? 그걸 누가 못해.’안윤희는 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대표님,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실수를 범했네요. 다음번에는 최고급 차로 준비할게요.”그 말을 끝으로 안윤희는 흰 원피스를 휘날리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은 왜 유나 씨가 싫어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진수현은 비웃는듯한 웃음을 보였다.“내 딸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설마 강 대표님이 저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진수현은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어르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강 대표님, 진심으로 충고하는 데 그 마음을 접는 게 좋을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훈이가 당장은 강 대표님보다 못하지만 속이 깊은 아이라 제가 택했습니다.”유강후는 적대감을 드러내더니 말투마저 싸늘하게 돌변했다.“그럼 회장님이 그분을 잘 지킬 수 있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현재로선 저희 가장 큰 적이거든요.”그 말에 눈이 번쩍인 진수현은 단번에 유강후의 멱살을 잡았다.“어딜 감히.”유강후는 말없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선 진수현을 밀어냈다.그러던 중 손목에 찬 검은 시계가 드러났다.이를 본 진수현은 흠칫하더니 그의 손목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이 시계는 어디서 구한 거죠?”진수현은 안심이 그에게 선물한 시계인 걸 한눈에 알아봤다. 줄곧 그 시계를 사랑의 증표로 여겼기에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왜 이 시계를 갖고 있는 거지?’얼마 전 안심은 그에게 진유나가 시계를 가져갔다고만 말했다. 어떤 걸 가져가는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이 시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심지어 진유나는 이 시계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유강후는 시계의 뜻을 모르는 듯 재빨리 손을 거두며 싸늘하게 말했다.“유나 씨가 선물해 준 겁니다. 회장님께서 아끼는 물건일지라도 다시 빼앗아 가는 건 상도덕에 어긋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평범한 시계일 뿐이잖아요.”“설마 그 정도 유치한 분은 아니시죠?”그 말을 들으니 시계를 돌려받는 건 더욱 불가능해졌다.진수현은 마음이 심란했다.그는 유강후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기회를 줄게요. 내 딸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면 쟁취해 봐요. 다만 신
진수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유강후는 패기가 넘쳤다.사실 모든 조건만 따져봤을 때 유강후는 최고의 사윗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정말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다.진수현은 자신의 딸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랑을 받길 원했다. 마음 정리조차 안된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다른 아이의 새엄마가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염지훈을 사위로 택한 건 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유나에 대한 감정이었고 눈빛만 봐도 뼛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그 진심이 좋았다.“지금껏 아무도 감히 나한테 이런 태도로 말한 적이 없는데 강 대표님은 참 배짱이 크네요. 손에 주식이 좀 있다고 해서 제가 굽신거릴 줄 알았어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요.”유강후는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은 아직도 저를 오해하고 계시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머지않아 이 오해들이 완전히 풀릴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외부적인 요소 때문에 고민도 없이 저를 부정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도 경쟁할 기회를 주셔야죠.”“기회?”진수현은 웃음이 터졌다.“강 대표님이 생각하는 기회란 뭐죠? 상대를 잔인하게 처리하는 건가요? 갑자기 왜 청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윗감으로 꼽은 사람이 있으니 괜한 희망을 갖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강 대표님은 노력해도 안 됩니다.”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동국 신에너지 개발의 지분 50%, 말레이시아 해상 유전에서 오아시스 그룹이 차지하는 모든 지분, 그리고 오아시스 그룹이 갖고 있는 인근 해역 100년의 개발권과 운송권. 염지훈 씨는 이것들의 10분의 1도 내놓지 못할 겁니다. 회장님, 이렇게 봐도 제가 부족하나요?”진수현은 단호했다.“그게 중요한가요? 전 딸의 행복이 최우선인 사람이에요. 행복은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안윤희는 옆 거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고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심에게 다가갔다.“이모, 저는 이모부랑 강 대표님에게 차 한잔 가져다드릴게요.”그 시각 안심은 방금 손에 넣은 핑크색의 다이아몬드 팔찌를 온다연에게 채워주며 끊임없이 예쁘다고 칭찬했다.그녀는 안윤희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뜸 물었다.“윤희야, 이거 어때? 유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안윤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는 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건 동국 왕비가 차던 팔찌였는데 불과 얼마 전 경매에 나와 70억의 고가에 낙찰되었다.모든 여자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팔찌를 안심이 갖고 있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평범한 선물인양 딸에게 건네는 그 모습을 보고 질투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안윤희는 진유나만 없다면 이 모든 게 본인의 소유라고 생각했다.‘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앞길을 막는 거야.’‘차라리 그냥 확 죽어버리지...’안윤희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유나는 이모 닮아서 예쁘잖아요. 뭘 차든 다 잘 어울려요.”그 말을 들은 안심은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들어 안윤희를 바라봤다.“아참, 경매에 사파이어 귀걸이도 나왔어.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한 쌍 샀는데 집사님한테서 가져가.”안윤희는 눈을 내리깔았다.“고마워요, 이모. 저는 차 우리러 갈게요.”‘고작 사파이어 귀걸이로 내가 물러날 것 같아?’‘이거 받고 떨어지라는 느낌인가?’안윤희는 반드시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 시각 작은 거실.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말도 없이 청혼이라뇨?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가요?”유강후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태연하게 말했다.“유나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진수현은 버럭 화를 냈다.“장난도 정도껏 해야죠,”그는 문 쪽을 힐끗 보고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유나는 아직 모르니까 당장 그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해서 가져가요. 괜히
‘그러니까 하루 종일 날 속였다는 거야?’‘아니, 설마 며칠 동안 속인 건가?’온다연은 최근 들어 지루 할때마다 유강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온갖 보기 싫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고 방에 아무도 없을 땐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설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강 대표님, 사실 며칠 전부터 다 보였죠? 날 속이는 게 재밌어요?”눈물을 그렁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선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울지 마요. 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온다연은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우리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권이 밖에서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병문안 오셨습니다.”진수현과 안심이 찾아왔다.온다연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창턱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다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왔잖아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온다연은 잽싸게 선방을 날렸다.“강 대표님, 저한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티 내지 마세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저 다음 달에 약혼해요. 오늘은 강 대표님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되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약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왠지 모를 살의가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주먹에는 서서히 핏줄이 튀어 올랐다.진씨 가문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조금씩 단서를 얻었다.온다연은 정말 이곳에 약혼자가 있었다.그리고 그 상대의 성은 박, 이름
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은 자신이 예전에 그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유강후는 평범한 잘생김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잘생겼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한들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그였다면 싫을 건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안된다. 곧 약혼하게 될 사람으로서 낯선 남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올바른 행동이다.사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등 뒤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한숨을 쉬는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가 뒤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유강후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부딪혔다.유강후는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감쌌고 온다연은 순식간에 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때마침 붉은빛 노을이 두 사람 위로 늘어졌고 어느새 그들 사이에는 모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마치 평생 서로에게 얽혀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마음이 심란해진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솔직히 이제 다 보이는 거죠?”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됐어요. 어차피 보이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내일부터 저는 오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간병인을 보내줄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유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있던 점은 그녀에게 물려 하얗게 변했다.유강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온다연, 내 허락 없이 이렇게 깨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예전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네요?”염지훈과 진수현이 얘기해준 적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다연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국에 온 이후로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강 대표가 이를 알고 있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 후, 더 이상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그저 온다연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밀려왔지만 참아야만 한다.만약 온다연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면, 비참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녀의 용서를 얻어야 할지 몰랐다.결국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시간이 유일하다.온다연은 아무 말 없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아직 그리움 속에서 허덕이는듯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혔다.“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그분... 저랑 많이 닮았나요?”‘그렇게 많이 닮았나?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네.”그 한 글자에는 유강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밀려와 너무 괴로웠다.‘얼마나 사랑하면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걸까?’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최소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유강후는 예상보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었다.그의 상태를 들은 곽혜진은 또 이상한 약을 보내왔다. 유강후는 이를 복용했고 둘째 주에 곧바로 시력을 회복했다.다만 온다연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된 뒤로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못 보는 척 연기를 이어갔다.제일 고생하는 건 그의 연기에 맞춰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다.때마침 이권이 서명할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문을 열어보니 유강후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다가서자 유강후는 곧바로 싸늘한 눈빛과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나가.’하지만 지금 당장 서명해야 될 중요한 서류였기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이권은 중요한 사항이라며 여러 번 손짓했지만 유강후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온다연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창틀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 바다를 바라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