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위층 화장실이 또 막혔다니! 후속 처리가 너무 엉망 아니야?”“그러니까, 요 며칠 내내 아래층까지 내려가야 하니 정말 불편하네.”...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에야 온다연은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유강후가 위층에 있는 걸까?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복도 모퉁이에 다다르자, 온다연은 로운이 한 여자를 부축하며 수술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곧바로 유강후가 그 여자의 붕대를 감은 손을 잡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스친 걱정과 안타까움은 너무나 선명했다.방금까지 마비된 듯했던 마음이 다시금 고통스럽게 저려왔다. 온다연은 숨을 참으며 허리를 숙여 자신의 배를 눌러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이번에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 여자가 바로 진시현인가?’그녀는 깜짝 놀랐다.그 여자는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 장화연이 ‘대체품' 어쩌고 운운했던 것이다.하지만 실은 자신이 그 대체품이었다. 진시현이야말로 그의 진짜 연인이었다.온다연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 돌아서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그녀는 두려웠다. 더 보면 자신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달려들어 그를 추궁할까 봐. 그렇게 되면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질 테고, 서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그리고 만약 그가 진시현을 위해 아이마저 외면한다면, 아이의 병은 언제 나을지 기약도 없을 것이다.의사가 아까 말했었다.“폐렴 치료는 짧아야 열흘에서 보름, 길면 한두 달은 걸립니다.”온다연은 속으로 다짐했다.‘참자, 아이가 안전해질 때까지만...’온다연이 돌아서는 순간, 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습니다. 연기 그만하셔도 됩니다. 저쪽은 철수했습니다.”유강후는 다른 출구 쪽 문을 바라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사람을 붙여.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로운이 즉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아래층.온다연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환자
“로운! 당장 저격수를 배치하고, 김원도의 은신처를 알아내!”로운은 유강후의 손을 잡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아직 때가 아닙니다. 성급하게 움직이면 그동안 쌓아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는 이제 막다른 길에 몰렸습니다. 한 달, 길어야 한 달이면 끝장날 겁니다.”유강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튀어나오며, 차갑게 일갈했다.“닥쳐! 이해 못 했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로운은 그의 분노에 기세가 눌려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밤 12시, 수십 대의 대형 헬리콥터가 외곽의 한 산속 저택을 향해 돌진했다.개조된 수백 대의 허머 차량은 전투 차량처럼 산길의 아스팔트를 짓밟으며 저택 앞에 도착했다.저택은 희미한 불빛만 비추고 있었고, 헬리콥터들은 저공에서 낮게 맴돌며 마치 죽음의 전조처럼 낮은 굉음을 울렸다.아무도 문을 열러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곧 단단했던 철문은 허머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전투 장비를 갖춘 저격수 수백 명이 중무장을 한 채 저택 안으로 돌진했다.차량과 사람들은 동양국 건축 양식의 저택을 완전히 포위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남기지 않았다.중앙에 멈춘 검은색 차량의 문이 열리고, 유강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검은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차량과 한 몸이 된 듯 보였다.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렸고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눈에 스친 날카로운 살기가 바람에 흩어졌다.입구에 선 집사는 이런 압도적인 기세를 본 적이 없는지 다리가 풀려 주저앉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저택의 정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지만 내부 상황은 알 수 없었다.유강후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로운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곧이어 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문이 강제로 부서졌고,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급히 걸어 나왔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잠옷 차림의 김원도였다.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을
그때, 큰 파도가 몰려오며 유람선이 흔들리더니 갑판 위의 여자와 아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김원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달려가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를 가로막았다.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유강후, 네 여자가 죽는 게 두렵지 않냐?”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더니, 바로 뒤에 있는 기둥에 박혔다.그와 함께 김원도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리며 떨어졌다.하지만 김원도는 그저 미동도 없이, 여유를 부리며 웃었다.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 이 정도로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한다고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이럴수록 네가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어. 영상 속의 모자로 나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없는 소리!”“나한테 아들이 하나뿐인 줄 알아? 그 애가 죽을 운명이면, 죽게 두면 되는 거지!”“유강후, 넌 여자 몇 명을 만나고 있어?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누구야?”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며, 서늘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노려보았다.“맞춰볼까? 가장 사랑하는 여자, 온다연 맞지?”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순간, 검은 총구가 김원도를 겨누었다.김원도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쏴, 내가 겁낼 줄 알아? 이곳은 경원시야. 법도가 있는 곳이지. 네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널 지킬 수 없어!”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무 대답 없이, 손가락을 천천히 방아쇠에 올렸다.김원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그 순간 검은색 한 대가 급히 달려왔다.순간, 송지원이 차에서 뛰어내렸다.그는 달려와서 유강후의 팔을 붙잡았다.“유강후, 너 미쳤어?”유강후는 여전히 김원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로운, 네가 이 녀석을 부른 건가?”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백 명이 넘
김원도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여기는 경원시야!”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게 뭐 어때서? 다시 나를 건드리면, 경원시에서도 너를 죽일 수 있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총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차가 장원을 떠날 때까지 김원도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지원은 냉정하게 말했다.“김원도 씨,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경원시를 떠날 겁니다. 여기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떠나는 유강후의 차를 예리하게 응시하던 김원도의 눈빛은 더욱더 악의에 차올랐다.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로운에게 말했다.“이 사람들 다 처치해, 서둘러!”한 시간 전, 고위층은 긴급회의를 열었다.그들은 미래 그룹이 비상 무기를 사용하고, 저격수들을 동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비록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바로 경원시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들은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조사 결과, 상부에서는 엄중히 경고했고 만약 30분 안에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으면 무력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그때에는 누구도, 설령 신선이라 해도 유강후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이 소식을 접해듣고 송지원은 급히 달려왔다.그는 유강후가 경원시에서 무력을 사용할 정도로 미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제시간에 도착했으니 다행이지, 만약 10분만 늦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헬리콥터들이 점차 멀어져 가자, 송지원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새벽 2시, 서교 파출소 안에서 유강후는 진술서를 마친 뒤,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이번 일은 너무 큰 소란을 일으켜 상위층에까지 긴급 연락이 갔고, 필요한 절차들을 다 밟아야 했다.하지만 이 일을 벌이기 전, 그는 그 후폭풍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그의 개인 변호사, 미래 그룹의 수석 법무팀장인 허윤재는 이미 그에게 이번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온다연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가세요.”장화연이 떠나자, 온다연은 곧바로 일어섰다.장화연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유강후는 회사에 아예 없었다.설령 회사에 있었다 해도, 그런 서류를 장화연이 가져갈 리는 없었다.직감적으로 장화연을 따라가면 그녀가 알고 싶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냥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온다연은 병원에서 간단히 간호사복으로 갈아입고, 가볍게 병원을 빠져나왔다.서교 파출소 앞까지 따라갔을 때, 온다연은 그가 뭔가 큰일에 휘말린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새벽의 사무실은 여전히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문 앞에는 경찰차들이 가득했다.장화연이 파출소에 도착한 순간, 유강후는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하얀 셔츠 하나만 입고, 손목에는 은색 수갑이 뚜렷하게 빛났다.그리고 그의 옆에는 경찰 두 명이 서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택시 문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그때, 로운과 진시현이 다른 차에서 내렸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하며, 손을 천천히 문에서 떼었다.차가운 봄바람이 그녀의 뼈까지 시리게 만들었다.차창을 반쯤 열었지만 그 바람은 온몸을 휘감았는데 마치 그녀의 마음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외치고 싶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택시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택시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그때 로운이 멀리서 보이는 검은색 파사트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김원도 그 미친놈은 아직도 포기할 기미가 없네요. 대표님, 좀 더 연기해 주세요. 이제 그들이 시현이 신분을 의심하지 않게 될 거예요.”유강후는 검은 차를 오래도록 응시한 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진시현의 머리를 스쳤다.진시현은 낮게 속삭였다.“실례하겠습니다, 대표님.”말을 마친 그녀는 유강후를 부드럽게 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오늘 열이 났어요. 빨리 나와요. 네? 저 혼자 집에 있으면 너무 무섭다고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뒤쫓아온 경찰이 그를 붙잡았다.“대표님, 함부로 행동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곤란해집니다!”장화연과 로운도 따라왔다.“도련님, 왜 그러세요?”유강후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얼굴이 창백해졌다.“장 집사, 다연이는 지금 어디에 있어?”장화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사모님은 병원에 계세요. 우림 도련님이 아프셔서 병실을 떠나지 않으려고 해요. 잠잘 때도 우림 도련님 곁을 지키고 계세요.”유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여전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온다연이 아이에게 얼마나 깊이 마음을 쏟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그는 아까 온다연이 그 차에 타고 있다고 느꼈었다!“장 집사 휴대폰으로 다연이에게 전화해 봐.”장화연은 곧장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유강후의 얼굴이 굳어졌다.“왜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장화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사모님께서 핸드폰을 두고 화장실에 가셨을 거예요. 병원은 우리 사람들만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림 도련님께서 아프시니 사모님께서 어디로 갈 리 없으세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경호팀에 연락해.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해.”장화연은 말없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제 핸드폰도 아마 도청당할 수 있어요. 혹시 불안하시다면, 바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의 전화로 사모님과 연락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다짐했다.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고통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났다.“장 집사,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두 사람 잘 부탁해.”장화연은 고개를 숙여 말했다.“제가 해야 할 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친 후, 차로 돌아갔다.그 차가 멀어져 사라지기까지, 유강후는 잠시 그 자리
이 비즈니스 제국은 마치 유강후 본인처럼 강력하면서도 사람을 불길 속으로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다.이 순간, 그녀는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 화려한 불빛 속에 서 있는 유강후를 바라보았었다.그 소년은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 그 후로 그는 그녀의 꿈속 단골이 되고 말았다.웅장한 건물들 옆을 지나는 차는 유독 작아 보였다. 그녀가 그의 앞에 서 있을 때와 꼭 같았다. 그토록 연약하고 하찮게.그러나 아무리 미약하고 저렴해 보이는 장난감일지라도, 그 자체의 존엄성은 있는 법.이제 그녀는 지쳤다.과거의 모든 것들은 이미 지나갔고, 앞으로 남은 인생은 새로운 시작이었다.온다연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기사님, 조금 더 빨리 가주세요.”병원에 돌아와, 온다연은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아이의 침대 옆에 잠시 앉아 있자, 장화연이 돌아왔다.온다연이 병실에 있는 걸 보자 마치 안도한 듯, 그녀는 다시 나갔다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그녀는 온다연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도련님께서 요즘 바쁘셔서 돌아올 수 없으세요. 한번 통화해 보세요.”온다연은 차분하게 전화를 받아들었다.유강후의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다연아, 요즘 내가...”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어버리며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그녀는 휴대전화를 꽉 쥐며 속으로 말았다. “당신이 바쁜 거 알아요. 괜찮아요.”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하지만 그 아픔이 뭐가 중요할까?지금 그가 나오지 못한다는 건 차치하고, 설령 나올 수 있다 해도 그가 이 아이 곁으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본처의 아이도 아프니 그는 원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유강후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천천히 말했다.“다연아, 나 보고 싶었어?”온다연은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보고 싶었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새벽, 유강후는 공항으로 떠나려고 했다.인기척을 느낀 온다연은 잠결에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왜 안 깨웠어요?”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혼자 가도 되니까 더 자요.”확실히 지난 이틀 동안 잠이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야식도 먹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유강후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온다연을 보며 며칠간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에 어젯밤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공항이랑 가까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집에 돌아왔을걸요?”온다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십 분만 기다려요.”그녀는 캐주얼한 옷을 갈아입고선 가볍게 화장을 한 후 10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밖으로 나가보니 강양호가 이미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림이는 아직 애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 가실 필요는 없어요.”강양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우리 증손자 데리러 가겠다는 데 불만 있어?”“그게 아니라 아직 6시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잖아요. 그냥 편히 집에서 쉬세요. 이번에는 우림이도 오래 있다가 갈 거니까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어요.”강양호는 심기가 불편했다.“우리 집안 독자인데 당연히 직접 마중가야지. 너희가 아이를 여러 명 낳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니?”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강양호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생일에 내 친구들도 많이 올 거다. 다들 자식과 손주가 있고 증손자까지 여러 명이란다. 나만 우림이 하나잖니.”“내 체면은 우림이가 받쳐주는 거야. 넌 믿을 구석이 없구나.”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속에 숨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온다연은 단번에 강양호가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걸 알 수 있었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서둘러 뒤에 있는 차로 걸어갔다.차량 행렬이 빠르게 저택을 빠
얼마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 팔찌를 엄청 좋아하네요?”온다연은 이 팔찌에 달린 호박석이 그녀가 잃어버렸던 것과 똑같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처음에는 유강후가 팔찌에 달린 호박석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다시 구슬을 꿰어주고 나서야 이 호박석은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커플템이었어요? 똑같아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우리한테도 아이가 있었다면...”온다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아이가 있었다고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좋아해요?”“당연하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유강후는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라며 손짓하고선 조용히 말했다.“곧 어르신 생신이잖아요. 내일 우림이가 온다는데 같이 마중 나갈래요?”온다연이 답했다.“좋아요.”온다연은 그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아이를 보자마자 온다연은 그녀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다는 관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유강후의 친아들인 줄 알고 기쁘면서도 괴로웠으나 나중에 단지 절친에게 부탁받은 고아라는 걸 알고선 몹시 아쉽고 슬펐다.그녀는 착하고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이를 생각하던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보고 싶네요. 양씨 가문에 간 지도 꽤 됐고 로운 씨가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자기가 강후 씨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똑똑한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유강후가 답했다.“보통 아이와 달리 우림이는 IQ가 180을 넘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온다연은 멍을 때리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중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갈까요?”유강후는 단호했다.“당연하죠. 전 우림이가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되찾도록
생리가 끝난 지 이틀밖에 안 됐으니 임신일 리가 없다.유강후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잠시 후 임혜린이 아이와 함께 나왔는데 금방 씻어서인지 아이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임동현은 밝은 노란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게다가 조금 졸린 상태였기에 손을 내밀어 도우미 이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보면 볼수록 아이가 너무 귀여웠던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어린 녀석을 품에 안고선 젖병을 잡아주었다.아이는 젖병을 빨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며 부드럽게 물었다.“졸려?”아무리 똑똑한들 결국에는 두 살 남짓의 아이였기에 그는 온다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흠칫했다.문득 그녀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도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입을 벙끗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임혜린은 아이가 정말 잠들려고 하자 서둘러 그를 데려갔다.“졸리면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한다니까? 하여튼 나쁜 버릇이 들었어.”온다연은 아이를 선뜻 건네지 않았다.“잠깐 안고있어도 돼?”갑자기 뭔가 떠오른 임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힐끗 쳐다봤다.평소 차갑기만 하던 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것 같았다.임혜린은 순간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침실로 돌아갔다.유강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다연을 바라봤다. 아
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런지 독특한 분위기가 아주 멋있네요. 북아메리카에 이런 집이 많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이곳으로 이사 올까요? 여기랑 연결되어 있는 별장도 샀어요. 나중에 뚫어서 유나 씨가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인테리어 해도 좋아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괜찮아요. 이런 곳은 아직 낯설어서요. 저는 강씨 가문 저택이 더 좋아요.”그녀는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일이 마무리되면 H국으로 갈까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어쩌면 기억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잖아요.”유강후는 말없이 걷다가 별장 입구에 이르러서야 입을 열었다.“도착했네요.”문밖에는 승용차 두 대가 주차되었고 두 명의 경호원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임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동현. 얼른 내려와. 올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말이 끝나는 동시에 하얗고 작은 아이가 온다연에게 달려왔다.그는 온다연을 보자마자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안녕하세요.”임동현은 귀여운 피카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고 흰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특히나 맑고 생기 넘치는 눈은 임혜린을 똑 닮았다.온다연은 한눈에 임혜린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네가 동현이구나?”임동현은 피카츄 인형을 안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누나 너무 예뻐요. TV에 나오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뻐요.”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보드라운 얼굴을 쓰다듬었다.“말을 엄청 잘하네?”이때 임혜린이 다가왔다.“왔어?”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찌나 체력이 넘치는지 나 어릴 때랑 판박이라니까?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조용하게 앉아 있는 법부터 가르쳐.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아플 정도로 뛰어다녀야 해.”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여기 정말 안전하죠?
온다연은 유강후를 째려보고선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몇 미터 달리지도 못하고 곧바로 유강후에게 품에 잡혔다.“왜 뛰어요?”섹시하고 매력적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온다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거 놔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긴 의자에 앉힌 뒤 돌아섰다.“올라와요. 업어줄게요.”온다연은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업히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괜히 투덜거렸다.“걸어갈 거예요.”온다연이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유강후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업고 가면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업혀요.”자신의 질투심을 들켰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걸어가도 되다니까요? 여자들이 쳐다보게 혼자 걸어요. 어차피 강후 씨도 그런 걸 즐기잖아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었다.“질투하는 거예요?”온다연은 입을 삐죽였다.“아니거든요?”그러자 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다리를 감싸며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비틀었다.“얼른 놔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옆에서 사람들의 작은 비명과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유강후는 멈추지 않았다.어느새 얼굴이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은 계속 유강후를 밀어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거의 숨쉬기 힘들 정도가 되고서야 유강후는 비로소 손을 뗐다.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지고 입술마저 부어올랐다.“미쳤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러면 사람들이 유나 씨가 내 아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온다연은 얼굴이 더 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었다.“아내라뇨? 우린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유강후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질투쟁이.”
직원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온다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쭈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죄송해요.”온다연은 따지기 귀찮은 듯 물건을 챙긴 후 유강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유강후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뒤따라오던 이권이 참다못해 온다연이 전화하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도련님, 참지 말고 그냥 웃으세요.”이권은 방금 온다연이 내뱉은 소유욕 넘치는 말이 얼마나 큰 효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다.유강후와 오랜 시간 일한 사람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무탈하게 지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유강후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요즘 다들 일을 너무 잘하니까 마음이 놓여. 이번 달 월급은 두 배야.”이권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물었다.“너도 다연이가 한 말을 들었지? 무슨 뜻일까? 질투하는 걸까? 다른 사람이 날 가로챌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맞지?”유강후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이권은 웃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맞습니다. 도련님을 향한 다연 씨의 애정이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 많이 좋아하네요.”유강후의 눈가에 떠오른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마치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애정 어린 부드러운 눈길도 뚫어져라 바라봤다.“권아, 솔직하게 말해봐. 나 정도면 잘생긴 편이지?”“도련님이 못생겼다면 이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없을 겁니다.”유강후는 올리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네. 앞으로 다연이 선물을 준비할 때 예쁘게 생긴 거로 골라.”말은 이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자부심을 느꼈다.한편으로는 자신이 잘생긴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외모를 중요시하는 온다연의 관심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이때 통화를 마친 온다연이 다가왔고 이상해진 분위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왜요?”이권은 웃으며 답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나 씨가 예쁘게 생긴 걸 좋아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