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욕의 물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작은 물결을 일으켰고, 온다연은 작은 배처럼 그에게 매달려 흔들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유강후는 지친 온다연을 안고 라운지체어에 앉았다.그녀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우유를 가져와 직접 먹여 주었다.부드러운 수건으로 그녀를 감싸 눕힌 뒤, 헤어드라이어로 한 가닥씩 정성스럽게 머리를 말렸다.온다연은 내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그대로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는 알 수 있었다. 이 작은 여자는 지금 화가 나 있다.유강후는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그녀를 안아 자신의 몸 위로 눕혔다.반쯤 마른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뭘 들었어?”온다연의 몸이 살짝 굳었다.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유강후가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고 차갑게 말했다.“그대로 있어. 움직이면 나중에 더 혼날 줄 알아.”“날씨도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았는데, 누가 너더러 그렇게 얇게 입고 나가라고 했어?”치마는 겨우 무릎까지 내려왔고 위에는 헐렁한 넓은 목의 니트 하나만 입고 있었다. 심지어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도우미들을 다 내쫓아야 할까 보다!그는 그녀의 통통한 발목을 꽉 쥐며 말했다.“겨우 몸 상태가 조금 좋아졌는데, 또 건강을 망치려고? 계속 약만 먹고 싶어? 이러다간 대체 언제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온다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당신이 나를 남한테 넘길 거라면서요. 그런데 대체 누구 아이를 낳으라는 건데요?”그러고는 벌떡 일어나려 했다.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눌렀다.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그의 가슴에 다시 몸을 맡겼다.“괜한 소리 하지 마. 응?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야?”온다연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요.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거짓말하려고 하지 마요.”유강후는 그녀의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유강후가 말했다.“그 하루코, 기억나?”온다연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었다.그 여자는 유강후의 눈길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유강후는 그녀에게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온다연에게는 달랐다.큰 잘못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그녀에게 맞춰주었고, 심지어 주한의 사건이 들통났을 때조차 그녀를 책망하지 않았다.그리고 세상을 떠난 유연서에 대해서는 유독 애틋하게 그리워했다.순간, 온다연은 유강후가 과연 냉정하고 무정한 사람인지, 아니면 깊은 사랑을 가진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에는 이미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유연서가 유강후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성장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하루코, 유연서, 그리고 나은별 같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아이만 그녀 곁에 있다면 유강후가 그어 놓은 울타리 안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았다. 때때로 그가 요구하는 무리한 부탁조차 순순히 따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의 아버지였으니까.그녀가 어릴 적에 가지지 못했던 것을, 그녀의 아이만큼은 반드시 누리게 하고 싶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강후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 하루코의 오빠, 이다 이치로가 H국에 왔어. 하루코의 죽음을 내 탓으로 여기고, 내가 하루코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복수를 원하는 것 같아.”잠시 말을 멈춘 그는 일부러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그 사람, 성격이 좀 과격해. 너한테도 조금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다만 조심하는 건 나쁠 게 없지.”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당분간 학교에 못 가게 되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머
집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사실대로 말했다.“접니다. 시간이 늦은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옷을 준비해 드리려고 보냈습니다.”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월급 계산하고 떠나.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집사는 깜짝 놀라며 급히 무릎을 꿇었다.“대표님, 제발 저를 해고하지 말아 주세요! 제 아들이 아직 학업 중이라 이 직장을 잃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해고만은 피해 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에 더해 전날 밤 겪었던 고생 탓인지, 온다연은 단잠에 빠져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잤다.몽롱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새로 온 집사가 데운 우유를 내밀며 공손하게 말했다.“사모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서 드시죠.”온다연이 우유를 받자 집사는 미리 준비해 둔 숄을 그녀에게 걸쳐주었다.온다연이 습관적으로 맨발인 것을 보고는 급히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온다연은 이런 섬세한 배려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어제 보던 직원들과 오늘의 직원들이 다르다는 것만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레 죽 한 숟가락을 떠먹으며 물었다.“어제 따라왔던 이 집사님은요? 집에 일이 생긴 건가요?”집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이 집사님은 업무 미숙으로 어젯밤에 찻잔을 깨뜨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온다연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직원들에게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단순히 찻잔 하나 때문에 사람을 해고했을 리 없었다.“강후 씨는요? 서재에 있나요? 와서 저랑 같이 아침 먹으라고 전해주세요.”집사는 잠시 망설이다 사실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옆방에서 회의를 하고 계십니다. 30분 전에 이 비서님이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셨는데 굉장히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그때 옆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평범한
유준석의 눈은 핏발이 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고 있긴 해? 내 할아버지가 강씨 가문에 공을 세운 걸! 그런데 왜 중요한 자리는 나한테 주지 않았어? 내가 분명 관리자가 될 수 있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맡긴 거야?”유강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냐? 실력 있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거야.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충성스럽지 않았다면 너는 강씨 가문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을 거야!”유준석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네가 날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널 배신하겠어? 그들이 나한테 뭘 약속했는지 알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준다고 했다고!”유강후의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 그는 단숨에 유준석의 배를 걷어차며 말했다.“변명은 그만해.”“감옥에 집어넣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해!”유준석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안 돼! 나를 감옥에 보낼 순 없어! 감옥에 가긴 싫다고!”유강후는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지체하지 말고 당장 끌고 나가. 다시는 이놈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으니까.”그 순간, 유준석은 갑자기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유강후, 네가 이런다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속박을 풀어내고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그것은 칠흑 같은 총이었다. 그는 그 총구를 유강후에게 겨눴다.탕!총성이 울리고, 유강후 뒤에 있던 방탄유리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러나 총알은 유강후를 맞히지 못했다.유준석이 총을 꺼내는 순간, 유강후는 그의 행동을 예측하고 가볍게 피했다.다음 순간, 유준석은 눈을 크게 뜨며 바닥에 쓰러졌다.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이권의 손에 들려 있던 총구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피어올랐다.이권은 총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유강후의 얼굴은 유난히 어두웠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유준석을 매섭게 응시했다.그는
온다연은 유강후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를 안았다.마치 평소 그가 자신을 다정히 안으며 달래주던 것처럼, 그녀는 그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힘껏 감싸 안았다.“저 왔어요, 강후 씨. 저 여기 있어요.”그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아주 작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떨림이었지만, 온다연은 분명히 느꼈다.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예고 없이 아파왔다.‘강후 씨도 이렇게 약해질 때가 있구나!’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이 사실을 깨닫자 온다연은 더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여긴 상황이 복잡합니다. 먼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놀라실까 걱정이 돼서...”“거기 누구 없어요?”온다연이 갑자기 말했다.“홍차 한 주전자 가져와요. 당장!”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이 집안의 안주인답게 침착하고 결단력이 있었다.“이 비서님, 저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아직 살아 있으니 살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안 된다면 평소 하던 대로 처리하세요. 깨끗하게 끝내야 합니다.”이권이 놀란 듯 굳어 있자, 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였다.단호하고 날카로운 톤이었다.“어서 가서 처리하세요!”이권은 정신을 차리고 즉시 대답했다.“네, 사모님!”몇 분도 지나지 않아 유준석은 끌려 나갔고, 바닥의 핏자국도 흔적 없이 정리되었다.방 안에 진동하던 짙은 피비린내만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방금 전까지 극도의 위기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곧 누군가 홍차를 우려 가져왔다.온다연은 그것을 옆 테이블에 두게 하고 창문을 열도록 지시했다.이른 아침 경원시의 날씨는 아직도 매섭게 추웠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면서 피비린내를 날려버렸다.방 안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온다연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캐시미어 숄을 풀어 유강후의 등 위에 덮어주었다.그리고 홍차를 따라 적당한 온도를 확인한 뒤 그의 입가에 내밀며 말했다.“조금 마셔요.”유강후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온다연은
온다연이 대답할 새도 없이,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홱 끌어당기며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온다연이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유강후는 조각난 잔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녀의 신발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어 한쪽으로 던지곤,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연아,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어. 무섭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부드럽게 대답했다.“무섭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강후 씨,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에겐 내가 있고, 우림이가 있어요.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유강후의 마음속은 거센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의 눈동자 속 감정은 서서히 넘쳐흘렀다.“다연아, 너 영원하다는 말이 뭔지 알아?”온다연은 조용히 말했다.“알아요. 이생 동안 당신 곁을 지키는 거요.”유강후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맹세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그를 힘껏 안으며 대답했다.“맹세할게요.”유강후는 낮고 강렬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오늘 네가 한 말을 꼭 기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이제 차를 마실 수 있겠어요?”유강후는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강렬하게 덮쳤다.차의 은은한 향기가 입술과 입술 사이를 스쳐갔다. 키스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거칠었지만, 온다연은 이번만큼은 그의 키스에 욕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그 키스는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공기 중엔 여전히 피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방금 전까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이것이 유강후와 나눈 키스 중 가장 특별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변할 거라
온다연은 그 메시지를 수업 중에 받았다.그녀는 메시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강의실을 떠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생각한 뒤, 그녀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대체 누구세요?]처음엔 이 번호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유하령이나 나은별 같은 사람이 일부러 그녀를 불쾌하게 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최근 들어 이 번호에서 보내오는 메시지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비록 온준용이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묘지에서 본 그 뒷모습이 떠오르자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피어났다.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서려던 순간, 휴대폰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열어보니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에는 13~14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얼굴 옆모습이 청순하고 색이 바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책상과 교복이 낡아 보여 주변 환경이 열악함을 짐작하게 했다.하지만 온다연의 시선은 사진 속 흐릿하게 처리된 어른의 모습에 멈췄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온준용이었다.그녀는 숨을 삼켰다.그가 살아 있었다니!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그 남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착한 딸아, 이 아이가 네 동생 준휘란다.]순간,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녀를 향한 온준용의 학대가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은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온다연은 거의 확신했다. 사진 속 소년의 상처는 온준용이 때린 자국이라는 것을.아들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착해 보이는 아이마저 폭행하다니.과거의 비참했던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온다연의 마음속엔 깊은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다.‘저런 인간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딸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본처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첩과 아들을 낳아 놓고도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라니.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그 순간, 또 다른 메시지
“반장, 나 이따가 또 수업 있어서 그러는데 교수님께 못 간다고 전해줘.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얘기해.”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교수님께서 이번엔 졸업 논문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어쩔 수 없이 온다연은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염지훈이 여유로운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손에서는 은색 라이터를 장난감처럼 돌리고 있었다.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이 집 케이크 맛있더라. 한번 먹어봐.”온다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케이크 먹으라고 날 부른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무 일도 없으면 저 수업 가야 해요.”염지훈은 느긋하게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나지막이 말했다.“먹어봐. 네가 가던 케이크 가게 것보다 훨씬 맛있어. 가정식 전문점에서 만든 거야.”온다연은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그가 또 별거 아닌 걸로 트집을 잡는 게 싫어 등을 돌리고 나가려 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보고, 낯선 번호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직감적으로 누가 전화했는지 알아챘다.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또 끊었다.두세 번 같은 일이 반복된 뒤, 염지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받아버렸다.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건 온다연이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착한 딸, 왜 아빠 전화를 안 받니? 아빠 보고 싶지 않아?”염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온다연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눈으로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뭘 바라는 거예요?”온준용은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히 내 딸을 보고 싶어서지. 이렇게 오랜만인데, 아빠가 널 보고 싶지 않겠니?”온다연은 휴대폰을 꽉 쥐었는데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보고 싶다고요? 엄마가 남긴 집이 값나가니 가져가고 싶
온다연은 옆에서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고 겁에 잔뜩 질려 얼어붙은 채로 유강후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그만해요! 제발 그만두세요!”하지만 그녀는 곧 경호원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염지훈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유강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는 줄 아시나 본데 그건 틀렸습니다. 유강후 씨가 이럴수록 온다연은 당신을 더 증오할 겁니다. 다연이를 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나요?”“유강후 씨가 아무리 다연이를 억지로 데려가도 쟤는 어떻게든 당신을 떠날 방법만 찾을 겁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을 자격이 없거든요.”그 말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그는 발을 들어 다시 염지훈을 거세게 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자비했다.염지훈은 거친 기침을 하며 피를 미친 듯이 뱉어냈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철저히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 순간,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에 핏빛으로 물든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통제 불가능한 모습은 마치 염지훈을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순간, 온다연의 시야에 방금 테이블 위에 놓였던 과도가 들어왔다.그러자 온다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집어 자신의 목에 갖다 댔고 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들며 외쳤다.“사모님, 안 됩니다!”“사모님, 칼 내려놓으세요!”온다연은 한 발짝 물러섰고 손에 힘을 주어 칼끝을 목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다가오지 마세요!”유강후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온다연을 보고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하지만 온다연의 목에는 이미 날카로운 칼날이 깊이 박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온다연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본 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칼 내려놔. 온다연.”그러나 온다연은 벽 쪽으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다가오지 마
온다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뒤에 있는 소파 천을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간신히 유강후에게 물었다.“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유강후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더 말랐네. 잠을 못 잤는지 눈 밑도 시커멓군.’ 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유강후는 온다연이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를 보았다. 그 셔츠는 마치 마트에서 2만 원도 안 하는 싼 물건 같았다.그걸 본 유강후의 눈에는 분노의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온다연이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자신과 함께 돌아가길 거부하다니?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가?이런저런 의문이 든 유강후는 손을 쭉 뻗어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또 도망갈 거야? 왜 안 도망치지?”유강후의 힘은 상당했고 온다연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쳤다.“전 당신과 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그 순간, 부엌에서 소란을 들은 염지훈이 급히 달려 나왔다.이내 유강후를 발견한 염지훈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씨, 당장 그 손 치우시죠!”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가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유강후의 경호원들이 곧바로 그를 가로막았다.염지훈 또한 싸움실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오늘 유강후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최정예 경호원들이었다.몇 명이 그를 꽉 붙들자 그는 도저히 그 사람들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분노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염지훈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유강후 씨, 어린 여자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게 그렇게 잘난 짓입니까!”하지만 유강후는 염지훈을 쳐다도 보지도 않고 여전히 온다연을 주시한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염지훈, 이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야. 네가 낄 자리는 없어.”그 말을 들은 염지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더 크게 외쳤다.“헛소리하지 마세요. 유강후 씨가 저지른 비열한 짓들을 다들 모를 줄 아세요? 당신이 바깥에서...”“그만. 이제
두 사람이 먹을 저녁은 간단하게 준비되었다.하지만 온다연이 직접 만든 음식은 솔직히 말해 맛이 있는 게 아니었다.소금을 과하게 넣어 음식이 너무 짜거나 아니면 반찬이 다 타버려 먹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너무 짠 반찬을 뜨거운 물에 헹궈가면서까지 입에 넣었다.염지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예전에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먹었어?”온다연은 젓가락으로 채소를 집어 뜨거운 물에 헹군 뒤 대답했다.“그런 좋은 반찬을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꿈도 크시네요. 전부 마트에서 세일해서 남은 것들이었어요. 정말 맛이 없었죠.”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계속 말했다.“지훈 씨는 귀공자처럼 살아온 사람이니까 이런 걸 이해 못 하겠죠. 제가 만든 게 마음에 안 들면 직접 하세요. 전 이 정도밖에 못 하니까.”염지훈은 그녀의 손등에 뜨거운 기름에 데어 생긴 물집들을 보며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괜찮아? 약이라도 바를래?”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그러자 염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잠시 후 색깔과 향, 그리고 맛까지 모두 완벽한 세 가지 반찬과 국 한 그릇이 테이블에 올려졌다.그걸 본 온다연의 눈이 반짝이더니 신이 난 듯 말했다.“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여요.”염지훈은 그런 온다연을 보며 미소 짓더니 반찬을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먹어. 아니면 차라리 가정부라도 부를까?”“필요 없어요. 여기 며칠밖에 안 있을 거니까. 게다가 가정부 부를 돈도 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염지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다연, 하여간 참 고집도 세다니까.”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지켜본 온다연의 학습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며칠간 밀렸던 수업도 다 따라잡고 앞으로 한 달 동안 배워야 할 내용까지 스스로 공부했다.심지어 학교 사이트에서 시험지를 다운로드해 풀었는데도 점수는 매우 높았다.하지만 생활 능력은 정말 최악
오후가 되자 온다연의 열은 다행히 떨어졌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에 든 핸드폰을 계속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녁 무렵, 염지훈이 밖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지금 경원시로 돌아가야 해. 유강후 그 미친놈이 내가 소유한 모든 부동산을 뒤지고 있어. 아마 곧 평진 쪽까지 알아냈을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경원시가 오히려 가장 안전해.” 온다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지금 바로 떠나는 거예요?” 염지훈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로 이끌었다. 그렇게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침묵하던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염지훈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핸드폰 화면에는 염지훈의 비서가 보낸 사진과 정보가 담겨 있었고 사진 속에는 유강후와 한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여자의 얼굴은 멀리서 찍혀 흐릿했지만 유강후만큼은 온다연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둘의 모습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게다가 유강후가 병원에서 나은별을 방문하는 사진도 몇 장 포함되어 있었다. 온다연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염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최근 3~4일 사이에 찍힌 사진이야. 그런데도 그 아이는 한 번도 찍히지 않았어. 유강후 씨가 그 아이를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서 거의 데리고 나오질 않아.”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유강후 씨는 요즘 거의 매일 밤 그 집에서 머물고 있어. 어젯밤도 포함해서.” 그 말을 들은 온다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묵직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커다랗게 도려내진 듯 아픔이 반복되었고 무감각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온다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핸드폰을 염지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경원시에 도착한
그 말에 염지훈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네. 좋아! 네 말대로 해보자.” 그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준철아, 놈들을 다른 길로 유인해. 최대한 멀리 끌고 가.”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준철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습니다! 운전은 제 전문이니까요!” 잠시 후, 흰색 차량은 천천히 출발했다.온다연의 예상대로 검문은 철수되어 있었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순조롭게 경원시를 빠져나왔다.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고 차는 한 저택 앞에 멈췄는데 문 앞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이 내리자 한 사람이 급히 나와 인사했다. “도련님, 도착하셨군요!” 이 저택은 전통적인 중식 건축 양식을 띠고 있었으며 유강후의 전통 한옥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파초 나무와 연못이 조화를 이루며 운치 있는 풍경을 자랑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 모든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고 방 한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화면에는 임정아와 관련된 더 많은 부정적인 소식이 떠오르고 있었다.‘아저씨는 내 주변 사람들까지 가만두지 않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잡히면 정말 감옥처럼 갇혀 살다 쓸쓸히 죽게 되는 걸까?’ ‘내 아들은 지금 그 여자 품에서 편히 잠들어 있을까? 그녀는 아이를 잘 보살피고 있는 걸까?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걸까?’ 온다연은 순간적으로 우림도 떠올랐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아이에게서 많은 정을 느꼈었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다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은 밤이 깊어질수록 멈출 줄 몰랐다. 동이 틀 무렵, 온다연은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었다.염지훈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온다연은 창가의 탁자에 엎드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가 그녀를 침대로 옮기려 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온도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이상한 느낌에 염지훈은 온다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고
염지훈은 뒤돌아 온다연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여자 너랑 정말 많이 닮았어. 놀랄 만큼.” 그 말은 마치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온다연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는 것 같았다.이미 무뎌져 버렸다고 생각한 마음이 다시금 은은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 여자를 그렇게까지 아끼면서 왜 자신에게 이토록 집착하는지 말이다. 그냥 놔주는 게 낫지 않은가? 왜 굳이 자신이어야 하는가? 그가 그런 얼굴을 가진 여자를 그렇게 좋아한다면 또 다른 비슷한 사람을 찾으면 될 텐데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심지어 헬기까지 동원해 사람을 찾는 꼴이 우스웠다. 마치 깊은 애정을 가장이라도 하는 듯 보였으니.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가고 있었지만 아예 신경 쓰지도 않았다.빛은 아주 어두웠지만 염지훈은 온다연의 눈에 서린 깊은 슬픔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한참을 어두워진 안색을 한 채 서 있던 염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마음 아파할 가치 없어. 정말로.” 온다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더 빨리 옮겼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각자 마음속에 무거운 생각을 안고 있었는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길을 걸었다. 두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작은 길의 끝에 다다랐고 그곳에는 검은색 지프 랭글러가 이미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후에도 두 사람은 말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도로의 불빛이 점점 많아지고 이내 교차로에 도착했을 때 운전 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 구역의 검문은 철수했지만 대신 호텔과 여관을 다시 검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호텔 근처에 이르렀다. 호텔을 지나칠 때, 익숙한 붉은 깃발이 걸린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차문이 열리
염지훈은 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누군가 우리가 있는 곳을 누설했을 거야. 아니면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없었을 거야.” 염지훈의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유강후가 이곳을 정확히 찾아낸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잠든 온다연을 한 번 쓱 쳐다봤다. “유강후는 온다연 씨를 유독 주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온다연 씨 몸에 위치 추적 장치가 붙어 있는 건 아닐까요?” 염지훈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는 잔뜩 어두워진 안색을 하고는 밑으로 내려왔다. 그는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 위에는 터키석으로 만든 단추가 하나 있었는데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걸 본 온다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게... 위치 추적 장치인가요?” 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군사용 최신 장치야. 다른 단추들은 진짜 터키석인데 이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어.” 그는 손에 힘을 주어 단추를 두 동강 냈고 그제야 안쪽에 숨어있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정밀하게 제작된 위치 추적 장치에는 작고 복잡한 부품들이 들어 있었는데 은밀하면서도 강력해 보였다. 염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나 말했다.“유강후가 정말 돈을 아끼지 않는군. 이렇게 작은 장치 하나가 수백만 달러짜리야. 막 개발된 신형 기술인데 군에도 몇 개 없대, 그걸 네 몸에 달아놨다니.” 온다연은 고개를 뚝 떨군 채 낮게 말했다. “저희 여기서 나가요.” 염지훈은 장치를 다시 맞춰 덮고는 옆 사람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멀리 던져버려. 사람 많은 곳이면 더 좋겠어. 유강후가 애타게 찾게.”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은 재빨리 장치를 들고 나갔고 염지훈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온다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가자. 유강후가 곧 도착할 거야. 여기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온다연이 말했다. “좋아요.” 아래 작은 정원에는 이미 두 개의 바비큐 그릴이 놓여 있었고 몇 개의 편안한 의자가 잔디 위에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기 중에는 바비큐 특유의 고소한 향이 가득했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염지훈과 온다연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고 그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염지훈은 그를 째려보며 대답했다. “헛소리하지 마. 아직 그럴 때 아니야.” 그 사람은 싱글벙글 웃으며 염지훈의 말에 대꾸했다. “그럴 날이 금방 올 것 같은데요?” 염지훈은 더 이상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온다연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저 사람들 원래 말 저렇게 해. 제멋대로라서.” 온다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더니 물었다. “괜찮으세요?” 그 사람은 다리에 감긴 붕대를 손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며칠 쉬면 나을 겁니다.” 온다연이 먼저 다가와 괜찮냐고 묻자 그는 오히려 당황하며 귀끝까지 빨개졌다. 잠시 후, 몇 술이 몇 상자나 도착하며 분위기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염지훈은 생굴 한 상자를 가져오더니 직접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를 손수 뜯어 작게 자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온다연은 염지훈이 건넨 고기를 받지 않고 스스로 닭 다리 한 조각을 뜯어 손에 들고는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먹은 온다연의 입가에는 기름이 번들거렸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기도 하고 지금 기분이 조금 나아진 터라 허겁지겁 먹게 된 것이다. 염지훈은 너무도 잘 먹는 그녀가 의외라는 듯 바라보다가 매운맛에 빨개진 온다연의 입술을 보고는 안색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이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먹어. 그리고 체하지 않게 조심하고...” 염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사람들의 아주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님이 직접 나서셨
염지훈이 수도관을 고치고 욕실에서 나올 때쯤 바이크 슈트를 입은 사람 몇 명이 들어왔다.“유강후 그 사람 정말 미쳤습니다. 경원의 중요한 교차로마다 검사대를 설치했다니까요? 바이크를 탄 사람은 전부 다 면허증을 제공해야 된대요. 우리를 잡으려고 눈이 완전히 뒤집힌 모양이에요.”염지훈은 젖은 옷을 벗어 소파에 내팽개치더니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찾으라고 해. 어차피 타 지역 번호판이랑 면허증이라서 못 찾을 거야.”곧이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하지만 정체가 이미 탄로된 것 같습니다. 유강후가 알아챈 게 틀림없어요. 지호 형님이 저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염지훈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콧방귀를 뀌었다.“여신 그룹 지분은 이미 진작에 포기했어. 이제 염씨 가문이랑 엮인 게 없으니까 어차피 형이 날 찾아도 달라질 건 없어.”“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유강후는 워낙 경원에서 세력이 큰 사람이잖아요. 저희가 아직 맞서 싸울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라갔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경원에서 그나마 이름을 알린 가문이라면 다 유강후의 투자를 받으려고 목을 매지 않습니까. 돈과 권력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유강후한테 굽신거리니 참...”“심지어 잘나가는 기업에는 무조건 유강후의 지분이 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강후를 따라서 투자한다잖아요. 참 빈틈이 없네요.”염지훈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았다.“금융 천재? 능력이 좋으면 뭐 해. 온다연은 아직도 벗어나려고 도망치고 있잖아. 유강후는 온다연을 소중히 여길 줄 몰라. 그러니까 애초에 가질 자격이 없는 인간이야.”남자는 온다연이 있는 방을 힐끔 쳐다봤다.“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저희도 배고파서 밖에 바비큐 그릴을 설치하는 중인데, 나중에 내려와서 좀 드세요.”그 말을 끝으로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다.염지훈은 소파에 잠시 앉아 있다가 여러 차례 통화를 마치고 온다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