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유강후는 살짝 헝클어진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깼어?”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온다연은 정현준을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손님 계시니까 전 우림이 보러 갈게요.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침착하게 말했다.“이분은 화양대의 정 총장님이셔. 다연이 미래의 교수님이기도 하지. 미리 인사드려.”온다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교수님? 난 이미 졸업했는데 갑자기 웬 교수님?’정현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유씨 가문의 아가씨인 유하령이 화양대를 다니고 싶어 가족들이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눈앞의 이 아름답고 여린 소녀는 그가 예전에 봤던 유하령과는 많이 달랐다.“대표님, 혹시 화양대에 진학시키려는 게 이분인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총장님, 앞으로 우리 아기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정현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지만 차마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유강후가 무슨 일을 계획했는지 알지 못했던 온다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화양대요? 설마 대학원?”유강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너 예전부터 계속 공부하고 싶어 했잖아. 화양대 바로 이 근처니까 한번 다녀봐. 금융학과나 경영학과를 다니면 나중에 보고서 보는 게 훨씬 쉬워질 거야.”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온다연은 두 귀를 의심했다.온다연은 지금껏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필코 다시 공부에 전념할 거라고 꿈꿔왔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아이가 더 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동시에 유강후의 곁에서 계속 그를 설득하다 보면 반드시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했다.기적은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다.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손님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장현준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물었다.“다연 씨 혹시 경원 사람인가요?”그 질문을 들은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싸늘하게 물었다.“그게 진학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죠?”온다연은 유강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총장님, 전 경원 토박이입니다.”정현준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친척 중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온다연은 정현준이 뭘 알고 싶어하는지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유강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걸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없습니다. 총장님이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정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20년 넘은 일이라 가물가물하네요.”곧이어 처음 도착했을 때의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을 되찾은 정현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럼 학교에서 뵙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정현준이 떠난 후 온다연은 몸을 돌려 유강후의 허리를 휘감았다.여전히 유강후가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아저씨, 지금 제가 꿈꾸는 거 아니죠?”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번쩍 안아 들고 서재로 향했다.“당연하지. 우리 다연이 사모님인데 이제부터 장부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워둬야지.”잔뜩 신이 난 온다연은 그를 꽉 껴안으며 귓가에 단호하게 속삭였다.“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절대 번복하면 안 돼요. 알겠죠? 갑자기 학교 못 가게 막으면 아저씨를 엄청 원망할 거예요. 아니, 다시는 아저씨랑 얘기 안 할 거예요.”기뻐하는 온다연을 보며 유강후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무사히 졸업해야지. 그런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세 개 있어.”온다연은 긴장하기 시작했다.“그게 뭔데요?”유강후는 그녀를 테이블에 앉혀놓고 나지막하게 말했다.“내가 말한 대로 여기에 쓰면 돼. 어기는 순간 벌을 받게 될 거야.”온다연은 방금까지 떠오른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럼 그렇지. 날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잖아.’“그
유강후는 온다연의 볼을 꼬집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동의 안 해도 소용없어.”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온다연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는 다연이가 남자 동기나 교수랑 오랫동안 대화하는 게 싫어. 여러번이면 화낼지도 몰라. 그러면 다음날 학교 못 가게 막을 수도 있어.”“다음날에 좋은 컨디션으로 공부해야 하니까 일찍 자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낮에는 하루 종일 학교에 있을 텐데 나랑 보내는 시간이 없잖아. 저녁에는 나랑 있어야지.”어쩌면 이것이 핵심 포인트다.“세 번째 조항은 솔직히 무시해도 돼. 다연이가 방금 말한 두 가지 행동만 잘 지키면 절대 내 마음대로 변경 안 하거든. 내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막말로 이걸 하나하나 수정할 시간도 없어.”유강후는 이미 많이 양보했다.처음에는 남자 동기와 3분 이상 대화하는 것도 금지였다.온다연이 여전히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유강후는 종이를 휙 가로채고 태연하게 말했다.“동의 안 하면 어쩔 수 없지. 학교 안 가도 돼. 어차피 난 처음부터 원치 않았어.”그 말을 듣고 초조해진 온다연은 재빨리 종이를 빼앗아 와 다시 한번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일찍 자는 건 얼마든지 지킬 수 있지만 남자 동기와 교수랑 얘기하지 말라는 건 정말 무리였다.“두 번째 규칙은 지킬 수 있어요. 그런데 첫 번째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무시해도 계속 말 거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요.”유강후는 단호한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그 사람 혀라도 뽑아버려야지.”온다연은 어이가 없었다.“다 서로 동기인데 말 걸었다고 혀를 뽑아버리는 건 너무 몰상식한 행동이잖아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종이를 테이블에 던지고 등을 돌렸다.화난 온다연을 보니 가슴이 미어진 유강후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부드럽게 달랬다.“다연이가 그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말 걸어도 신경 쓰지 않고 대충 답하면 나도 절대 화내지 않을 거야. 지키기 힘든 건 아니잖아. 안 그래?”온다연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온다연은 뭔가를 깨달은 듯 아차 싶었다.“설마 아들보다 딸을 더 좋아하는 건 아니죠?”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화를 냈다.“아저씨의 아들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죠? 계속 이러면 나중에 아이랑 같이 도망갈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선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다연이가 낳은 아이인데 싫어할 리가 없잖아. 난 뭐든지 다 좋아.”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귓볼을 보니 유강후는 또 참지 못하고 한입 깨물었다.“다 좋은데 다연이를 닮은 예쁜 딸이 있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그의 입맞춤에 온몸이 찌릿해진 온다연은 재빨리 몸을 피하며 말했다.“그건 싫어요. 너무 연약하고 만만한 성격이라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어요. 아저씨를 닮는 게 훨씬 좋죠. 비록 성질은 형편없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것보다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의 표정은 의미심장하게 변했다.‘성질이 형편없다고 말한 거야?’유강후는 모든 인내심을 온다연에게 쏟아부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 학교까지 보내줬는데 돌아오는 건 성질이 형편없다는 말뿐이다.기분이 상한 유강후는 혼내주기로 결심했다.그는 온다연은 안고 침실로 향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어제 보니까 치마 하나 더 있던데 지금 당장 갈아입어.”깜짝 놀란 온다연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안 돼요. 너무 많이 해서 몸이 힘들어요.”그러나 두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유강후의 품에 안겼다.“날 먼저 유혹한 건 너잖아? 힘들어도 받아들여야지.”유강후는 그녀를 번쩍 안은 채 재빨리 침실로 들어갔다.곧이어 애원을 비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 방안에 울려 퍼졌다.유강후가 다시 온다연을 안고 방에서 나왔을 때 장화연은 이미 점심을 두 번이나 데워놓은 상태였다.장화연은 온다연의 목덜미가 온통 붉은 자국으로 뒤덮인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참다못해 한 소리 했다.“도련님, 다연 씨가 곧 대학원 간다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죠? 목이 지금처럼 빨개진 채로 동기들과 첫인사를 하게 된다면 분명
유강후의 표정은 담담했다.“그게 뭐가 많아. 어차피 임혜린 마지막 주문인데 싸게 해준 셈인지.”온다연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혜린이 작업실을 막아버린 거예요? 아저씨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래요? 너무 하잖아요.”유강후는 표정이 싸늘해졌다.“너무한 건 임혜린이지.”“너한테 안 좋은 것만 가르쳐줬잖아. 내가 백번 양보해서 작업실만 막아버린 거야. 이 정도에서 끝내는 걸 다행이라고 알아야지.”“네 친구인 걸 봐서 체면을 세워준 거야.”솔직히 얼마든지 경원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온다연은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유강후때문에 골치가 아팠다.그런 옷을 안 좋아한다기엔 주문을 또 대량으로 넣었기에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지 못했다.“혜린한테서 안 좋은 걸 배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럼 주문은 왜 300벌이나 넣었어요?”화가 치밀어 오른 온다연과 달리 유강후는 여전히 차분했다.“넌 내 사람이야. 그러니까 널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임혜린은 그럴 자격이 없어.”더 이상 유강후와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온다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유강후는 곧바로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앞으로 임혜린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싫어.”온다연은 이를 악물었다.“아저씨, 저번에 저랑 약속했잖아요. 친구 사귀는 건 간섭하지 않기로. 저도 친구가 필요한 사람이에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게 말했다.“친구를 못 사귀게 막는 게 아니라 좋은 친구를 만나라는 거야. 이준이랑 헤어질 때 얼마나 뻔뻔했는지 알아?”“처음부터 돈 때문에 접근했어. 이준 어머님이 20억을 준다고 제안하니까 고민 없이 바로 헤어지겠다고 한 사람이 임혜린이라고.”온다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수년 동안 알고 지낸만큼 임혜린이 어떤 사람인지 온다연은 너무 잘 알았다.성격이 좀 급하면 돈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남의 재물을 탐하려고 접근하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생각하면 할수록
한이준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럴 줄 알았어. 수신인이 네 비서로 되어있더라고. 유강후, 내가 돈으로 임혜린을 막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300벌이나 주문한 거야? 너 미쳤냐?”유강후의 태도는 여전했다.“내가 천 벌을 주문하든 만 벌을 주문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이때 온다연이 그의 핸드폰을 갈아채고 한이준에게 말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온다연입니다. 혜린이는 대표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별일 없어 보이지만 어릴 때부터 남녀 차별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리고 가족이 많이 아파서 큰 금액의 돈이 필요했던 거예요.”한이준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차갑게 답했다.“그래서 뭐? 고작 그 이유때문에 날 ATM기로 사용해도 된다는 거야?”“정말 혜린이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인품을 의심해서는 안돼죠. 대표님처럼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영원히 모를 거예요. 수백만 원으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요.”“혜린을 싫어하는 거면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대표님이 아니더라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많거든요. 돈으로 옆에 묶어두면서 한편으로는 돈 때문에 굴복하는 모습을 업신여기는 게 참...”“역겹다는 생각이 드네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곧장 전화를 끊고선 핸드폰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유강후는 흥미로운 듯 온다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배짱이 점점 커지네? 날 욕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내 친구까지 욕하는 거야? 속이 좀 후련해졌어?”온다연은 콧방귀를 뀌더니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작은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유강후는 하얀 국물이 담긴 삼계탕을 온다연에게 건넸다.“얼른 먹어. 장 집사가 몇 시간 동안 푹 삶은 거야.”“다 먹고 수강 신청하러 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게 있을 거야.”온다연은 국물을 마시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번에는 아저씨 말 안 들을 거예요. 임혜린은 영원히 내 친구예요.”유강후는 못 들은 척 새우 껍질을 벗기더니 하얗고 부드러운
온다연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게 느껴진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그래?”온다연은 작은 얼굴을 품에 파묻고 손으로 그의 코트를 꽉 움켜쥐며 눈물을 쏟아냈다.온다연이 답을 하지 않자 유강후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었고 고운 얼굴에 몇 가닥의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조명 아래 비춰진 그녀의 피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더욱 하얗게 빛났다.짙고 검은 눈동자로 애틋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다연을 보니 그 청순함과 아련함을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온다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매번 이런 눈빛으로 바라볼 때마다 유강후는 저도 모르게 음침한 생각이 들었다.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온다연을 가둬 평생 본인의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가두고 나서는 매일 같이 괴롭혀서 울리고 이런 불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는 게 소원이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온다연을 학교에 보내는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아무리 꽁꽁 싸매도 온다연의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았고 오가는 남학생들은 뒤를 돌아볼 정도로 눈을 떼지 못했다.유강후는 마치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밖에 내놓은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왜 울어?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다른 곳으로 바꿔줄까?”온다연은 그의 옷을 움켜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네요...”그녀는 유강후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조용히 말했다.“행복해요. 곁에 아저씨도 있고 아이도 있고 이제 공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사실 꿈에서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거든요.”온다연을 코를 훌쩍이며 그의 따듯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부모도 없이 무시만 받으며 살아온 저한테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한평생 복수만 하다가 죽는 줄 알았는데...”
온다연은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남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점에 도착한 온다연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다. 하나는 보온팩에 넣었고 다른 하나는 손에 쥔 채 유강후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빨대를 꽂아 유강후에게 건넸다.“한입 먹어봐요.”그 시각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온다연을 계속 쳐다보던 몇몇 남학생들을 째려봤다. 그러고선 보란 듯이 온다연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난 단 거 안 좋아해.”말투는 다소 차가웠다.“온다연, 앞으로는 남자들 보고 웃지 마. 이게 세 번째 조항이야.”속 좁게 질투하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진 온다연은 자연스레 달래주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시고선 다시 유강후에게 건넸다.“얼른 마셔봐요.”유강후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그러자 온다연은 옆에서 알콩달콩하게 밀크티를 마시는 커플을 가리키며 속삭였다.“봐봐요. 커플들은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요. 나도 저런 거 하고 싶었는데...”그제야 안색이 풀린 유강후는 밀크티 한 모금 들이마셨다.너무 달아서 입에 맞지 않았지만 온다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하니 싫어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달고 괜찮네.”온다연은 기분 좋은 듯 해맑게 웃었다.“그쵸? 단언컨대 이 세상에 밀크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맛이 살짝 별로네요. 심지어 하나에 3천 원이에요. 예전이랑 주한이랑...”말을 내뱉고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온다연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밀크티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유강후의 눈치를 살폈다.반응을 보아하니 화가 난 것 같지 않았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랑 주한이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우리는...”유강후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때도 이렇게 하나를 같이 먹었어?”거짓말하기 싫었던 온다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비쌌어요. 하나에 천 원이었는데 그때는 돈이 없었으니까... 가끔 기분 좋을 일이 있을 땐 같이 하나 서서 나눠 먹었거든요.”순간 입맛이 사라진 온
그 남자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은 듯했지만,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딱 봐도 엘리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온다연의 손목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어,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온다연은 살짝 찌푸리며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한 채 말했다.“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저는 안씨가 아닙니다.”이상했다. 정 교장도 그녀에게 안 씨 성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자신과 그 사람이 닮은 걸까?남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놓으며 사과했다.“미안합니다. 고인의 후손을 만난 줄 알고 착각했네요.”그는 방금 모비크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꽤 가까워 보였다.온다연은 더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때 모비크가 서툰 중국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연아, 이분은 내 친구 문명원이라고 해. 신국 국립대학의 교장이기도 해. 한 작품을 가져왔는데, 네가 흥미를 가질 것 같아.”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 위에 덮여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시간이 느껴지는 오래된 유화 한 점이 드러났다.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이었다.그림 속 소녀는 검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다.복고풍의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장미밭에 서 있었으며, 두 팔에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그녀의 붉은 입술과 눈부신 피부는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었다.온다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화가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림은 고상하고 정교하며, 소녀의 피부 아래 보이는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분명 대가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소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중얼거렸다.“이거... 저인가요?”그러고 나서 스스로도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아, 아니에요. 그럴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봐봐, 너는 그놈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유강후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유강후 눈에 너는 개만도 못했지. 하지만 나는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죽으려고 했어!”“이 세상에서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뿐이라고!”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회색 항아리를 열고, 그 안의 재를 손가락에 조금 묻혀 차에 넣었다. 그리고 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잔을 꽉 움켜쥔 그의 눈은 핏빛으로 가득했다.“유강후, 넌 항상 날 짓눌렀어. 학교에서도, 지금도. 언제나 잘난 척하며 날 깔보고, 꼭 한 번은 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더군.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널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서라도 하루코를 위해 복수하고, 네 강씨 집안을 철저히 짓밟아버리겠어!”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순식간에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들어와.”문이 열리자, 이다 이치로와 임도현이 들어왔다.임도현은 경원시의 유명 연예 기획사 소속 매니저로, 최근 동양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동양국 최대 재벌의 후계자 김원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인맥을 동원해 찾아온 것이다.임도현은 억지로 웃으며 몇 장의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김원도 님, 안녕하십니까. 이 사진들은 유강후가 가장 신경 쓰는 여자들입니다. 이쪽은 유강후의 약혼녀 나은별입니다. 요즘 유강후가 어떤 여자를 집에 들인 후로 두 사람이 다툼이 잦아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얼마나 감정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그리고 이쪽이 갇혀 있는 여자입니다. 굉장히 아끼고 있어서 그 한옥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는다더군요. 하지만 이런 가문 출신들이 얼마나 진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잠깐의 흥미일 수도 있죠.”“마지막으로 이쪽은 유하령이라는 아이로, 유강후의 조카입니다. 유강후가 많이 아끼는 사람인데, 최근에 다리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김원도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나은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은 서늘하고 냉혹했다.“이 여
이권은 여전히 불안한 듯 말했다.“하지만 저는 김원도가 예전보다 더 미쳐버린 것 같아요. 이번에 심상치 않은 의도로 왔을 겁니다. 셋째 도련님, 다연 씨를 당분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강씨 집안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이권, 너도 이제 겁이 많아졌나? 나이가 들어서?”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이 숨을 이유는 없어.”이어 명령을 내렸다.“중산 가문과 마츠시타 가문에 연락해. 김원도와 이다가 무너지기만 하면, 강씨 가문이 동양국과 동아시아 시장은 모두 넘기겠다고 약속해. 해도 근처의 유전 개발 역시 협력하겠다고.”이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미 김씨 가문과 유전 개발에 수천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는데요!”“뭐가 문제야.”유강후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을 건드리겠다고? 그게 천황이라 해도 죽여버릴 거야. 어둠 속에서 장난질을 치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지.”“동양국의 몇몇 가문들, 이제 순위를 다시 정할 때가 왔어.”그때 전화가 울렸다. 확인하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원도였다.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감히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 대표, 오랜만이야!”상당히 유창하게 말했는데,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유강후는 차갑게 대꾸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H국까지 왔어?” 김원도가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봐도 유 대표는 여전히 유머러스하군. 왜, 내가 H국에 오면 안 되지? 같은 동창이었으니, 오늘 밤 술이나 한잔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자.”유강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얼마나 좋은 술이냐에 달렸지. 난 술에 까다로워서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거든.”김원도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유 대표, 설마 내가 술 한 병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유강후는 경멸스럽게 말했다.“돈은 많을지
로운은 주먹을 꽉 쥐고 눈에 살기를 띠며 단호히 말했다.“감히 그런 짓을?”이때 이권이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원도는 점점 더 미쳐가고 있습니다. 과거 셋째 도련님과 학교에서 함께 지낼 때는 그래도 조금은 정상적이었는데, 지금은 동양국에서도 아무도 그자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어서 설명했다.“김원도는 이다 하루코의 광적인 구애자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하루코가 사망한 후 그분의 시신을 화장해 일부를 다이아몬드로 가공해 매일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남은 유골은 자기 침실에 보관하고, 심지어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기까지 했다죠. 완전히 미친 사람입니다. 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니, 더 신경 써서 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로운은 차갑게 대답했다.“구 어르신이 안 계셔도 그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이권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셋째 도련님께서는 물론 두려워하지 않으시겠지만, 문제는 그자가 셋째 도련님 주변 사람들을 노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그래서, 셋째 도련님께서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당분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미친 자를 완전히 정리한 후에 밝히는 것이 안전합니다.”바로 그때 장화연이 들어왔다.“우림 도련님께서 깨어났습니다. 로운 씨, 저와 함께 가시죠.”로운의 눈이 순간 밝아지더니 급히 문 밖으로 나갔다. 유아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남아에서 악명 높은 이 거대한 인물의 눈가가 붉어졌다.부드러운 색감의 방과 정교한 물건들, 방금 나간 네 명의 전문 보모까지 모두 유강후가 양준구의 후손을 얼마나 정성껏 돌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마치 자신의 친아들처럼 키우고 있는 것이다.로운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했던 양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이 깜깜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이 철같이 단단한 사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한 방울 흘렸다.양준구와 너무 닮았다! 마치 한 틀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제지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다연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보아하니, 약효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작은 존재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일 리 없었다.온다연은 이미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몸이 낮부터 계속 이상했다.유강후 가까이에만 가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머릿속에는 둘이 낮에 엉켜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부끄러웠지만, 그 감정은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탄탄한 허리 위를 천천히 쓸고, 입술이 그의 목선을 따라 부드럽게 스쳤다.“강후 씨, 나 힘들어요... 조금만 더 세게 해줘요...”유강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이 작은 여자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러다가는 내일 침대에서 못 일어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책상 위에 밀어붙였다. 곧 그녀의 두 손은 뒤로 묶였고, 몸은 순식간에 뒤집혔다.그는 거칠게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며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곧 두 사람은 서로에게 휘말려 아무것도 멈출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오랫동안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다음 날 아침, 온다연은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났다.힘겹게 일어나 서둘러 아침을 먹고, 책가방을 챙겨 학교로 뛰어나가려 했지만, 유강후가 그녀를 붙잡고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이리저리 지체되다 결국 학교에 늦고 말았다.온다연이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유강후는 한옥으로 돌아갔다.서재 안에는 이권과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눈가가 붉어진 그는 목이 메인 듯 말했다.“셋째 도련님, 도련님의 은혜는 로운과 양씨 가문이 삼대에 걸쳐도 갚을 수 없습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일어서, 로운. 여기서는 그런 절차 필
오후 내내 그에게 시달리고, 묘지에서 한참 동안 찬바람을 맞았던 온다연은 돌아오는 길 내내 잠들어 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장화연이 다가와 말했다.“방금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다연 씨께 드릴까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순간, 온다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졸린 눈으로 장화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집사님, 무슨 물건이 저한테 왔나요?”유강후는 그녀를 안은 채 곧장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빨간 무언가가 눈에 띄게 놓여 있었다.온다연은 책상 위에 내려지자마자 그 증서들을 발견했다. 잠시 망설이더니 하나를 집어 들고 펼쳐보았다.그 안에는 그녀와 유강후의 빨간 배경 사진 위에 선명한 인장이 찍혀 있었고, 결혼증명서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였다.순간적으로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분명 며칠 전 사진을 찍을 때, 그는 그녀의 생일에 맞춰 혼인신고를 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앞당겨진 걸까?유강후는 그녀 손에 있는 결혼증명서를 빼앗아 들고 만족스럽게 살펴보았다. 사진 속 그는 다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하얀 셔츠를 입은 온다연은 마치 고등학생처럼 풋풋했다.그는 그녀의 사진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어루만지며,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아껴보았다.온다연은 다시 결혼증명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유강후는 얼른 닫아버렸다.“귀중한 물건이니까 내가 보관할게.”온다연은 잽싸게 다시 증명서를 빼앗아 들고 확인했다. 확실히 진짜였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생일에 하기로 했잖아요.”유강후는 그녀 손에서 증명서를 다시 가져가며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해봐.”온다연은 오후 내내 그가 자신을 놓지 않았던 기억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강제로 자신의 시선을 맞추게 하며 말했다.“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날이야. 알겠어?”사실 그는 오늘 결혼증명서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주한의
마치 무언가를 느낀 듯, 온다연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남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몸을 돌려 숲속으로 들어가는 척했다.사실 거리가 꽤 멀어서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다.하지만 온다연은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이 낯익다고 느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남자는 발걸음을 재촉해 금세 사라져 버렸다.그때, 유강후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이제 집에 가요.”차에 오르자 유강후는 무심한 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묘비를 닦느라 오래 손을 쓴 탓에 그녀의 손은 군데군데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희고 고운 피부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유강후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는 물티슈를 꺼내 하나하나 그녀의 손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물었다.“아프지 않아?”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유강후의 손이 잠시 멈췄다.“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고 있어?”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으며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유강후는 불쾌해졌다.그는 그녀를 강제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온다연은 피하려 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그의 입술이 거칠게 내려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술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피 맛을 느낀 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주며 터진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온다연은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졌다.“아파요... 왜 이래요?”두 사람이 화해한 이후로 그는 오랫동안 이렇게 거칠게 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분명히 달랐다.유강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다른 사람 생각하지 마. 네 마음엔 나만 있어야 해.”그제야 온다연은 그가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생각한 것은 주한이 아니었다.온다
“그 아이 이름은 우림이야. 아직 너무 어려서 데리고 오지 못했지만, 좀 더 크면 꼭 데리고 와서 보여줄게.”“주한, 나 요즘 꿈에서 네가 잘 안 보여. 혹시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거야?”“지금 난 화양대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화양대는 정말 너무 멋져! 매일 교실에 앉아서 정말 하늘의 별 같은 사람들이랑 함께 공부하는데, 가끔은 꿈을 꾸는 것 같아.”“맞다! 혹시 모비크 알아? 그 유화 거장, 우리가 엄청 좋아했던 그 사람! 이제 내 교수님이 됐어. 이 모든 게 정말 믿기지 않아.”...바람이 불어와 묘지의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뭇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마치 온다연의 이야기에 대답이라도 하듯이.온다연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끝없이 떠들며, 울다가 웃다가, 횡설수설하며 주한에게 이상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유강후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통해 주한과 함께했던 그녀의 과거를 지켜보는 것처럼. 그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그녀의 지난날이었다.그는 질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는.오랜 시간이 지나, 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강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주한의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온다연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고,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소리마저 쉬어 있었다.“주한아, 이 사람은 유강후야. 너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유씨 가문 사람이니까. 네가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이젠 우리 아이의 아빠야. 그리고 이제 유씨 가문과는 거의 관계가 없어.”그녀는 자신의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주었다.“나, 이 사람과 결혼할 거야. 그래서 우리 스물다섯 살의 약속은 이제 없던 걸로 할게. 주한아, 나를 위해 기뻐해 줄 거지?”온다연은 주한에게 여러 가지를 계속 이야기했다. 유강후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그녀의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잠시 후, 온다연이 말을 멈추고 멍하니 주한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유강후는
그녀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관계에 대해서는 인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그녀가 경험해 본 유일한 사람은 유강후뿐이었다. 문제는, 유강후가 그 일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강압적이고 독단적이었다는 것이다.그가 심어준 인식은 남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녀는 절대 반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모습은 너무 미친 듯이 적극적이었다.단지 적극적인 것을 넘어서, 그를 되려 덮쳤으니 틀림없이 불쾌해했을 것이다!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괴로워졌고, 이불을 꽉 움켜쥔 채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에서 이불을 빼내고, 옷을 가져와 입혀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내려 정돈한 후, 달빛처럼 하얀 머리핀을 꽂아주었다.마지막으로 달빛색의 스카프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고, 빈티지한 브로치로 스카프를 고정시켰다.그 브로치에는, 그의 넥타이 핀과 같은 Y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강씨 가문의 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유강후가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려던 찰나, 온다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스카프는 안 할래요. 제 스카프를 하고 싶어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걸어가, 가장 안쪽에 숨겨두었던 붉은색 스카프를 꺼냈다.유강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걸음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내가 매줬으니까, 이걸로 해.”온다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가 다시 낮게 말했다.“지금 벌써 네 시가 넘었어. 더 늦으면 시간이 촉박해질 거야. 가자.”그는 동의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강제로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작은 부츠를 신겨준 뒤, 그녀를 들어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온다연은 그가 데리고 나가는 동안 침대 위에 남겨진 붉은 스카프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묘지에 도착했을 때,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묘지 전체에 심어진 소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바람에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차에서 내려 안고, 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