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의 가슴이 단단히 아려왔다. 그는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는 온다연에게 한 아이를 빚졌고, 그녀의 평생을 빚졌다. 그는 고통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연이는 이 아이가 그렇게 좋아?”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투에 온다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유강후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알아채기 힘든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온다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고, 순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고집이 유난히 셌다. 오늘 밤에도 아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와 두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붉게 부은 눈가에, 몇 가닥 눈물에 젖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하얀 뺨에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엾고 순수해 보였다. 그 순간, 유강후는 자신이 끔찍한 악당처럼 느껴졌다. 어미와 자식을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다니.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강경하게는 안 되니, 이번엔 부드럽게 나서기로 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한 방울씩 닦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렇게 좋다면, 오늘은 조금 더 함께 있어도 돼. 그리고 앞으로 밤에도 잠깐은 같이 있을 수 있게 해줄게.”온다연은 그의 뜻밖의 양보에 깜짝 놀라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감히 더 묻지 못하고, 혹시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급히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아기방으로 향했다. 유강후는 그녀가 떠난 뒤 서재로 가서 장화연을 불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터 다연이에게 다양한 학습 과정을 배치해. 유화, 재무관리, 경영학 등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게 해. 단, 한 가지 목표는 다연이가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장화연은 요 며칠 동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유강후의
그는 온다연이 항상 그의 시야 안에만 머물렀으면 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일은 절대 없게 하고 싶었다. 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이미 반달이나 지났다. 그녀는 그와 냉전 상태로 보낸 시간이 반 이상이었다. 아이 때문에 온다연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고, 겨우 붙은 살도 반달 만에 모두 빠져버렸다. 예전에 말랑말랑했던 발목은 이제는 뼈가 더욱 도드라졌다.화양대는 바로 근처였다. 걸어서 십여 분, 차로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매일 직접 그녀를 데려다주고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그림을 가르칠 사람을 따로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일정이 끝나면 밤 9시쯤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 온다연이 아이와 잠시 시간을 보내더라도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점심시간과 저녁에 그림을 배우는 시간에는 그가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장 집사 말대로 해보지. 내일 화양대 교장을 초대하도록 해.” 그는 말을 마치고 방을 나와 아이 방으로 향했다. 아이 방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30~40평 정도 되는 공간이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 안에서는 온다연이 아이 옆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장가를 낮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강후가 들어서자, 아이 방에 있던 보조사가 그를 보고 급히 다가왔다. “대표님.”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있어요.” 보조사는 온다연이 아이의 등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며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 집에 온 지 반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온다연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보조사는 알 수 있었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마치 그녀를 자신의 보물처
유강후가 자신과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부드러운 얼굴에 가볍게 뽀뽀하며 해맑게 웃었다.“이것 봐요. 너무 부드러워요.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요?”온다연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보기만 해도 행복하네요. 너무 좋아요.”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얼마큼 좋은데?”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얼굴에 다시 뽀뽀하며 답했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전 아이를 선택할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온다연은 단번에 그의 품에 안겼다.유강후는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강압적으로 온다연의 입술을 깨물고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실수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봐.”자기 아들마저도 질투하는 유강후의 모습에 온다연은 예상하지 못한 듯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유강후의 목을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아저씨, 아들까지 질투하는 건 너무하잖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좋은 듯 마음이 나른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유강후에게 입을 맞추고선 부드럽게 말했다.“아저씨는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예요. 이제 됐죠?”유강후는 그녀의 애교섞인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고 품에 안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온다연,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여야만 해. 아들이라도 안돼. 네 마음속에는 오직 나만 있어야 하니까.”온다연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답했다.“안 돼요. 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게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속 좁은 사람처럼 행동해요?”유강후는 마음이 심란했다. 질투하는 것도 맞지만 그것보다도 답답하고 착잡한 기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눈앞의 아이가 진짜 아들이라 할지라도 유강후는 온다연이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서 쉬자.”온다연은 마지못해 아이를 돌아보
온다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입술을 깨물며 쭈뼛거리다가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저씨, 사실... 보여주고 싶은 옷이 있어요.”온다연은 분위기에 맞는 야릿한 말을 할 줄 몰랐다. 대놓고 이런 걸 얘기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임혜린이 부부 관계에 도움이 된다하여 고민 끝에 용기를 냈다.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으니 부부인거나 다름없다.피가 날듯 빨개진 그녀의 귀를 보며 유강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무슨 옷?”온다연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계속 시선을 피했다.“그냥 친구가 선물한 옷이에요. 단둘이 있을 때 입으면 좋다고 해서...”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목까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두리뭉실하게 답했지만 유강후는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챘다.‘갑자기 이렇게 유혹한다고? 다 컸네.’한편으로는 온다연이 준비한 이벤트가 너무 기대되었다.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으며 다소 위험한 어조로 물었다.“나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누가 선물했어?”온다연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사실 별거 아니에요. 혜린이가 직접 디자인한 한복인데 저한테 어울릴 것 같다면서 특별히 몇 벌 제작해 줬어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했다.“갖고 와봐. 아니다, 입어서 보여줘.”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살길 찾아 도망치듯 부랴부랴 옷방으로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이 옷방에서 나왔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에 들린 얇은 옷을 힐끗 보고선 눈빛이 더욱 위험하게 변했다.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 온다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한편으로는 몸을 파는듯한 느낌이 들었다.두피까지 저릿해지는 느낌에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유강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귓볼을 깨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보고 싶어. 얼른 입어줘.”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크게 다가와 온다연을 집어삼켰다.“아니에요
온다연은 투명한 연두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유강후의 눈앞에 나타났다.사실 옷을 입었다기에는 너무 얇은 소재라 안 입은 거나 다름없다.천쪼가리 하나로 몸을 가리는 건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불과 몇초간 봤을 뿐인데 유강후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느낌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심지어 눈빛도 돌변했다.마치 짐승이 사냥감을 노리는 것처럼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유강후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긴장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얼굴은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온다연도 이런 느낌의 치마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감히 유강후를 쳐다보지 못했다.“이런 옷인 줄 몰랐어요. 조금 짧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하네요. 그리고 원단이 이렇게 투명할 줄은 몰랐어요.”치마 입었을 때 지금 같은 효과라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때려죽여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솔직히 안 입는 거랑 별반 다를 바가 없다.온다연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다시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허리는 남자의 강한 손길에 의해 조여졌고 반응할 틈도 없이 거대한 품에 안기게 되었다.“다연아...”유강후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의 간절함을 대변했고 동시에 몸에서도 강렬한 반응이 일어났다.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깨물었다.애교를 부리기만 해도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기 힘들 지경인데 야릿한 옷을 입고 눈앞에 나타났으니 온다연의 손에 마구 놀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온다연, 이런 옷을 입고 날 유혹할 줄은 몰랐네? 후폭풍이 두렵지도 않은가 봐?”온다연이 설명하기도 전에 ‘찌익’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걸친 작은 치마가 찢겨졌다.당황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선에 들어온 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강후뿐이었다.‘끝일 났다.’온다연은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 되었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침대 위로 던
정현준은 지금껏 미래 그룹의 고위 임원들과만 업무적인 소통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미래 그룹의 현 대표인 유강후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당연히 미래 그룹의 본사에서 유강후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를 데리러 온 차는 시청 부근의 전통 한옥 입구에 멈춰 섰다.정현준은 이 한옥이 대표하는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시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옥은 경원시의 핵심 권력 중심지로 이 한옥에 살 수 있는 사람은 모두 H 국의 창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의 후손들이다.소문에 의하면 이곳에는 당시 4채의 한옥이 있었는데, 당시 최고 책임자가 직접 강씨 가문의 안주인에게 한 채를 선물하였다고 한다.금융 위기가 닥친 그해. 강씨 가문은 자신의 안전과 외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을 국내에 쏟아부어 큰 불황을 잠재우는데 큰 도움을 줬다.강씨 가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정현준은 지금껏 미래 그룹이 유씨 가문에 의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미래 그룹의 대표가 강씨 가문의 한옥에 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소리 없이 막강한 지원자가 강씨 가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정현준은 미래 그룹의 대표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었다.긴장한 채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강후가 나타났다.TV에서만 보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니 정현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유강후는 학자들을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하고선 장화연에게 더 좋은 차를 내놓으라고 부탁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눴고 정현준은 점차 유강후의 뜻을 캐치했다.유강후는 누군가를 화양대의 대학원생으로 진학시키려고 했다.여자인데 금융학과와 경영학과를 목표로 하고 있고 반드시 능력이 강하고 인내심이 뛰어난 여교수가 가르치는 게 전제조건이다.게다가 인원이 적은 소규모의 그룹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고 반
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유강후는 살짝 헝클어진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깼어?”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온다연은 정현준을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손님 계시니까 전 우림이 보러 갈게요.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침착하게 말했다.“이분은 화양대의 정 총장님이셔. 다연이 미래의 교수님이기도 하지. 미리 인사드려.”온다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교수님? 난 이미 졸업했는데 갑자기 웬 교수님?’정현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유씨 가문의 아가씨인 유하령이 화양대를 다니고 싶어 가족들이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눈앞의 이 아름답고 여린 소녀는 그가 예전에 봤던 유하령과는 많이 달랐다.“대표님, 혹시 화양대에 진학시키려는 게 이분인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총장님, 앞으로 우리 아기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정현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지만 차마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유강후가 무슨 일을 계획했는지 알지 못했던 온다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화양대요? 설마 대학원?”유강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너 예전부터 계속 공부하고 싶어 했잖아. 화양대 바로 이 근처니까 한번 다녀봐. 금융학과나 경영학과를 다니면 나중에 보고서 보는 게 훨씬 쉬워질 거야.”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온다연은 두 귀를 의심했다.온다연은 지금껏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필코 다시 공부에 전념할 거라고 꿈꿔왔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아이가 더 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동시에 유강후의 곁에서 계속 그를 설득하다 보면 반드시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했다.기적은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다.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손님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장현준은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물었다.“다연 씨 혹시 경원 사람인가요?”그 질문을 들은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싸늘하게 물었다.“그게 진학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죠?”온다연은 유강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총장님, 전 경원 토박이입니다.”정현준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친척 중에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온다연은 정현준이 뭘 알고 싶어하는지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유강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걸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없습니다. 총장님이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정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착각했나 보네요. 20년 넘은 일이라 가물가물하네요.”곧이어 처음 도착했을 때의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을 되찾은 정현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럼 학교에서 뵙죠. 진심으로 환영합니다.”정현준이 떠난 후 온다연은 몸을 돌려 유강후의 허리를 휘감았다.여전히 유강후가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아저씨, 지금 제가 꿈꾸는 거 아니죠?”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번쩍 안아 들고 서재로 향했다.“당연하지. 우리 다연이 사모님인데 이제부터 장부 어떻게 관리하는지 배워둬야지.”잔뜩 신이 난 온다연은 그를 꽉 껴안으며 귓가에 단호하게 속삭였다.“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절대 번복하면 안 돼요. 알겠죠? 갑자기 학교 못 가게 막으면 아저씨를 엄청 원망할 거예요. 아니, 다시는 아저씨랑 얘기 안 할 거예요.”기뻐하는 온다연을 보며 유강후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무사히 졸업해야지. 그런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세 개 있어.”온다연은 긴장하기 시작했다.“그게 뭔데요?”유강후는 그녀를 테이블에 앉혀놓고 나지막하게 말했다.“내가 말한 대로 여기에 쓰면 돼. 어기는 순간 벌을 받게 될 거야.”온다연은 방금까지 떠오른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럼 그렇지. 날 이렇게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잖아.’“그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무려 임산부였다.게다가 그 남자의 품에 안겨 가냘픈 목소리로 아저씨를 찾기도 했다.남자는 그녀가 숨이 딸릴 정도로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손을 쓰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그 꿈은 꽤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린 폭우가 쉼 없이 창문을 거세게 두드릴 때야 온다연은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본 광경은 키 큰 남자가 창가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었다.온다연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 사람을 부르려던 찰나 그 남자가 다급히 제지했다.“부르지 말아요, 저예요!”낮은 목소리는 익숙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한 끝에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다름 아닌 꿈속의 그 남자였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 가득하던 찰나 온다연의 인기척을 느낀 경호원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온다연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경호원들은 여전히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천둥소리에 놀라셨습니까? 같이 있어 줄 사람이라도 필요하십니까?”“필요 없다니까요!”“아가씨,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거셉니다. 문을 열어주시면 창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 저희가 검사해드리겠습니다!”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귀찮으니까 더 말 시키지 말아요!”온다연이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경호원들도 잠잠해졌다.유강후의 옷과 바지는 모두 반쯤 젖어있었고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유강후의 기세만큼은 가려지지 않았다.게다가 옷이 젖은 탓에 거의 보일락 말락 한 그의 탄탄한 몸매에 온다연은 얼굴이 붉어졌다.“강 대표님이 왜 창문으로 들어오는 거죠?”유강후는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깼어요?”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창문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여긴 2층이라고요!”유강후는 여
남자는 안윤희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채며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평범한 사람이라고?”“안 아가씨, 10년 전 금우역에서 불을 지른 일을 기억하나? 내 얼굴 좀 봐. 이 흉터, 네놈들이 지른 불 때문에 생긴 거야!”남자의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우리 부모님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어.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나를 잘 키워 공부를 시켜 성공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부모였어.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너희는 지나가다가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분들을 악의 화신이라 규정했지! 그러고는 우리를 집 안에 가둔 채 불을 질러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어. 우리 부모님은 필사적으로 날 품에 안으셨고, 덕분에 나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부모님은 그만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았지.”“그분들이 무슨 죄가 있었지?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살아갈 자격조차 없었다는 거야? 몇 년 동안 너희를 찾아 헤맸어. 그렇게 한 명씩 제거했지. 너희가 세상을 정화한다고? 난 너희 같은 악마들을 정화할 거다!”남자는 안윤희의 목을 세게 움켜쥐었고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안윤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너희들 정말 잘 숨어 있더구나. 한 놈을 찾는 데 꼬박 반년에서 일 년이 걸렸어. 그런데 오늘은 누가 너를 직접 내게 데려다주고 돈까지 준 거야.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이 있을 줄이야!”그는 안윤희를 거칠게 바닥에 내던지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형님들, 배 위에서 고기 구경 못한 지 오래됐지? 오늘 마음껏 즐겨보자!”“저기요, 이 아가씨는 신국 안씨 가문의 큰 아가씨입니다.”“걱정하지 마. 방금 뉴스에서 이 아가씨가 이미 죽었다고 나왔어. 심지어 시신도 확인됐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이 여자는 그저 안씨 가문의 아가씨를 닮은 여자일 뿐이야.”사람들이 크게 웃으며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안윤희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안 돼! 나는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너희가 날 건드리면 우리 이모부가
유강후는 진시현의 볼록하게 나온 배를 한 번 바라보며 웃음을 띠고 말했다.“얼마나 됐어?”진시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거의 다섯 달 됐어요.”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움직이기도 해요.”유강후의 눈에 잠시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전에 자신의 아이도 딱 이 정도였을 때...유강후는 곧 미소를 짓고 로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로운, 대단하네. 이제 아빠가 됐구나. 결혼식 때 참석 못한 게 많이 아쉬웠는데 나중에 네 아들 태어나면 큰 선물로 보답할게.”항상 무표정하던 로운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걸 받았습니다.”유강후는 말했다.“전에 준 건 모두 준구 것이었지. 지난 몇 년 동안 잘 관리해서 자산을 두 배로 늘렸더라. 하지만 이제 아내도 있고 아이도 생겼으니 너 자신을 위해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그걸 나눠서 20% 지분을 네가 가져. 내가 네 아들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하고.”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돌아 진시현의 볼록한 배를 몇 초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며칠 동안 도련님을 데리고 가서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조상님께 향도 한 번 올리고요.”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똑똑한 아이이니 지금처럼 잘 키우면 성년이 되기 전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가 일을 맡길 수 있을 거다. 데려가는 건 좋지만 아직은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물론입니다.”유강후는 다시 물었다.“내가 찾으라고 한 자료는 확인했어?”로운은 묶어둔 자료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이것은 성염 조직에 대한 정보입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굉장히 단결되어 있습니다. 한 번 목표로 삼으면 끈적한 반창고처럼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크게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상대하기엔 매우 불쾌한 존재입니다.”유강후는 자료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안윤희는 여기서
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갑고 무심한 시선으로 안윤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성염 조직, 너랑 무슨 관계야?”안윤희는 고개를 확 들어 올리며 눈빛에 불안함을 담고 대답했다.“무, 무슨 성염이요?”성염 조직은 국제적인 테러 집단으로 극단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불이 모든 것을 정화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악으로 간주한 대상은 무엇이든 태워 세계를 정화하려 했다.그들의 활동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악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정화의 대상이 되었다.이로 인해 암흑가뿐만 아니라 정계에서도 성염 조직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유강후는 안윤희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말했다.“네가 어떤 조직에서 왔든 상관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둬. 만약 네가 온다연에게 손이라도 대려 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야. 너희 안씨 가문과 성염 조직 모두 비참하게 끝날 테니까.”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유강후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 걸어 나갔다.안윤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천천히 일어섰다.방금 발에 차여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녀는 무릎이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통증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라져가는 유강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난 분명히 널 선택했어. 그런데 날 거부하고 그 재수 없는 여자만 원한 대가가 뭔지 제대로 보게 될 거야. 다연이가 그렇게 좋다면 두 사람 다 함께 끝장내주지.”“이모, 이모부. 저는 다연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애가 먼저 제 선택을 빼앗았어요. 뻔뻔한 사람은 다연이지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저를 탓하지 마세요.”안윤희의 낮은 혼잣말은 복도를 스치는 바람 속에 흩어졌다. 그러나 그중 일부가 안심의 귀에 닿았다.안심은 다친 채 서 있는 안윤희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엉망이야?”안윤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제가 실수로 넘어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함께한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호흡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만의 공간은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유강후가 온다연 앞에서 이렇게까지 낮은 자세를 보일 줄은.유강후는 온다연을 마치 손바닥 위에서 소중히 감싸 보호하는 것 같았다. 유강후는 모든 일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며 온다연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성과 인내를 아끼지 않았다.그리고 온다연은 그런 그의 행동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러다 부모님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서야 온다연은 자신이 유강후의 옷소매를 잡고 있었다는 것과 방금 그 소매로 입을 닦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황급히 손을 놓고 어쩔 줄 몰라 했다.방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안윤희만 질투 어린 눈빛으로 온다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유강후는 이 어색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는 듯 즉시 사람을 시켜 과일을 준비하게 했다.게다가 그가 준비한 과일은 전부 온다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과일이 준비되고 나서 진수현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강 대표, 당장 나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너무 오래 있었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일을 준비했으니 다연이가 다 먹는 걸 보고 나가겠습니다.”진수현은 조금의 인내도 없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다연이 부모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우리가 충분히 지켜줄 수 있어. 그러니까 네 도움은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나가!”유강후는 움직이지 않고 과일 접시를 들어 올려 깎은 과일 하나하나에 이쑤시개를 꽂았다. 심지어 샤인머스캣조차도 빠뜨리지 않았다.그는 과일을 다 준비한 뒤 온다연 앞에 과일 접시를 내밀며 낮게 말했다.“먹어.”온다연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과일 접시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딸기까지 반으로 잘랐어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안윤희는 눈가가 붉어진 채 무언가 말하려다 문득 들어오는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지만 강렬한 분위기와 또렷한 외모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는 방 안에 있는 안윤희를 힐끗 바라봤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안윤희의 온몸에 서늘한 전율이 퍼졌다.그의 눈빛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마치 독을 품은 칼날처럼 사람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안윤희는 자신이 수많은 남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했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가진 이는 유강후가 유일했다.안윤희의 마음이 급격히 흔들렸고 유강후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그러나 이내 스스로를 다독였다.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관련된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졌으니 불안할 필요가 없었다.죽은 사람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법이다.안윤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머리를 매만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강 대표님, 안녕하세요.”유강후는 더 이상 안윤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온다연 앞으로 다가가 작은 약병을 건네며 말했다.“이건 곽 의사가 방금 보내준 약이야. 먹어봐.”그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부드러움과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마치 세상에 수많은 아름다움이 있어도 그의 눈에는 온다연만이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인 듯했다온다연은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특이한 향이 풍겼고 어딘가 피 냄새와도 비슷한 기운이 섞여 있었다.온다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강후는 병을 다시 가져가 약을 꺼내 직접 하나 삼켰다.“봐, 문제없어. 이 약 총 20알이야. 곽 의사가 그러는데, 재료가 워낙 귀해서 자기한테도 40알밖에 없었대. 그중 절반을 나한테 준 거거든. 이거 먹으면 건강 진짜 좋아질 거야. 어쩌면 앞으로 약 안 먹어도 될지도 몰라.”그가 말을 마치자 진수현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약이 20알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하나를 먹었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유강후는 아무 대꾸 없이 옆에 있던 곶감을 집어 온다연의 입가로
“너도 명색에 안씨 가문의 큰딸이야. 가문이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지만, 여전히 명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좋은 물건이 부족할 리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거니...”안심은 말을 멈추고 온다연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다연아, 그저 한 세트의 장신구일 뿐이야. 너무 기분 상하지 말고, 엄마가 더 좋은 걸로 새로 준비해 줄게.”온다연은 안윤희 눈에 잠깐 스친 뚜렷한 분노를 보고는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이 딱 적합했다.“엄마, 더 큰 금고를 하나 마련해 주세요. 귀중한 물건들은 거기 보관하고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요.”안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물건은 네가 직접 챙기는 게 맞지.”안윤희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이건 분명 안윤희를 경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안윤희는 개의치 않았다. 고작 몇 개의 장신구일 뿐이었고 갚지 못할 정도의 거금도 아니었다. 대진 그룹의 부대표가 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온다연은 바보처럼 자신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있을 것이다.안윤희의 눈에 스친 냉소는 온다연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아버지 진수현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온다연은 속으로 생각했다.회사 관리를 원하지 않는 것과 관리 능력이 없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비록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업을 결코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온다연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아빠, 이제 제 신분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대진 그룹을 정식으로 이어받아 앞길을 열어가고 싶습니다.”온다연의 말에 안윤희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윤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다연아, 아직 몸이 좋지 않잖아. 건강을 회복한 뒤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회사 일은 우리한테 맡겨도 되잖아.”온다연은 안윤희의 말을 무시한 채 진수현을 향해 말했다.“아빠, 언제까지 아빠 뒤에만 숨을 수는 없어요. 이
안씨 가문도 명문가이긴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할 뿐 이미 속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만약 진씨 가문이 뒤에서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안윤희는 제대로 된 옷 한 벌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게다가 예전에 온다연에게서 가져간 물건 중 상당수는 이미 팔아버려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었다.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안윤희의 눈빛이 잠시 차갑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다연아, 이러지 마. 예전에 네가 선물로 줬던 물건들을 이제 와서 돌려달라니, 말이 돼? 난 우리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네가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온다연은 아무 말 없이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았고 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잠시 후, 진씨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안심은 안윤희가 온다연의 병상 앞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곤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윤희가 먼저 말했다.“이모, 다연이가 제가 예전에 받았던 장신구들을 다 돌려달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뭘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줬어요... 어젯밤에 제가 다연이를 제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혼자 둔 걸로 저를 원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제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안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심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다연아, 정말 그런 거야?”온다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안윤희를 차갑게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언니, 연기 그만해. 그동안 언니가 내 물건 가져간 건 전부 언니 멋대로였잖아. 빌린다고 말했지만, 내가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어제 언니가 가져간 건 내가 결혼식 때 쓰려고 준비해 둔 장신구였어.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건데, 그냥 가져가더라. 난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면 진씨 가문 물건은 언니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이야?”온다연의 말투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언제부터 진씨 가문이 안씨 가문과 한 식구가 됐는데?”
그때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화면에 표시된 번호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몇 분 후, 안윤희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안윤희는 연한 하늘색 발목 길이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러나 침대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안윤희의 마음속에 묘한 질투심이 피어올랐다.안윤희는 방 안을 둘러보고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안윤희는 장미꽃을 창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다연아, 몸은 좀 괜찮아졌어?”하지만 온다연은 원래부터 백장미를 싫어했다. 온다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쏘아보며 물었다.“왜 왔어?”안윤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와봤어. 그런데 아직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누가 진씨 가문을 노리기라도 했어?”온다연은 이번 일에 안윤희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내가 깨어난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인데?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안윤희는 순간 당황했다.온순했던 온다연이 요즘은 마치 가시가 돋은 듯 상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다연아, 혹시 어제 내가 목걸이를 빌려 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안윤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급해서 미처 말 못 했을 뿐이야.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온다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빌린 거라고? 그럼 어제 가져간 장신구 다시 돌려줄래? 내가 다시 쓸 일은 없겠지만, 그건 어머니가 내 혼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거라 남에게 줄 수는 없어.”안윤희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돌려달라고 요구하다니, 감히!원래 그 장신구는 안윤희,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온다연이 중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