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집에 돌아온 이후, 온다연은 계속 아기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작은 아이는 이제 정상적인 개월 수의 아기처럼 자라 있었다. 비록 생김새는 온다연이나 유강후를 닮지 않았지만, 여전히 매우 사랑스러웠다. 다만 지나치게 조용해서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갈아야 할 때만 가끔 소리를 냈다. 밤이 되어도 온다연은 여전히 아기와 함께 있겠다고 고집하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강후는 그녀를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온다연은 온 마음이 아이에게만 가 있었기에 그의 복잡한 눈빛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렇게 이틀, 사흘이 지나자 이상한 점이 생겼다. 유강후가 그녀와 아이의 접촉 시간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최고의 산후 관리사 몇 명을 불러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게 했다. 처음에는 온다연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결국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니 더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점점 이상해졌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30분 이상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유강후는 즉시 사람을 시켜 아이를 데려갔다. 특히 아이와 함께 잠을 자는 건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온다연은 화가 나서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녀가 화를 내든, 소리를 지르든, 심지어 두 번이나 밤중에 홧김에 집을 뛰쳐나가든, 유강후는 항상 묵묵히 뒤따라왔다. 그녀가 지쳐 걸음을 멈추면 그제야 그녀를 강제로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보름 정도 계속되었다. 온다연이 또다시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리자, 유강후는 마침내 이유를 설명했다. “남자아이는 너무 오냐오냐 키우면 안 돼. 나도 어렸을 때 하루에 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두 시간뿐이었어.” 온다연은 그의 말에 완전히 폭발했다. “오냐오냐 키운다는 게 뭔데요? 아직 이렇게 작은 데다,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잖아요! 다른 아이들보다 약하니까 더 많은 보살핌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온다연은 눈이 부을 정도로 울면서 말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려왔지
유강후의 가슴이 단단히 아려왔다. 그는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는 온다연에게 한 아이를 빚졌고, 그녀의 평생을 빚졌다. 그는 고통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연이는 이 아이가 그렇게 좋아?” 어딘가 의미심장한 말투에 온다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유강후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알아채기 힘든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온다연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고, 순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고집이 유난히 셌다. 오늘 밤에도 아이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와 두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붉게 부은 눈가에, 몇 가닥 눈물에 젖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하얀 뺨에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가엾고 순수해 보였다. 그 순간, 유강후는 자신이 끔찍한 악당처럼 느껴졌다. 어미와 자식을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다니.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강경하게는 안 되니, 이번엔 부드럽게 나서기로 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한 방울씩 닦아주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렇게 좋다면, 오늘은 조금 더 함께 있어도 돼. 그리고 앞으로 밤에도 잠깐은 같이 있을 수 있게 해줄게.”온다연은 그의 뜻밖의 양보에 깜짝 놀라며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감히 더 묻지 못하고, 혹시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급히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아기방으로 향했다. 유강후는 그녀가 떠난 뒤 서재로 가서 장화연을 불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터 다연이에게 다양한 학습 과정을 배치해. 유화, 재무관리, 경영학 등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게 해. 단, 한 가지 목표는 다연이가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는 거야.” 장화연은 요 며칠 동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유강후의
그는 온다연이 항상 그의 시야 안에만 머물렀으면 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는 일은 절대 없게 하고 싶었다. 비록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이미 반달이나 지났다. 그녀는 그와 냉전 상태로 보낸 시간이 반 이상이었다. 아이 때문에 온다연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고, 겨우 붙은 살도 반달 만에 모두 빠져버렸다. 예전에 말랑말랑했던 발목은 이제는 뼈가 더욱 도드라졌다.화양대는 바로 근처였다. 걸어서 십여 분, 차로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매일 직접 그녀를 데려다주고 데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밤에는 그림을 가르칠 사람을 따로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일정이 끝나면 밤 9시쯤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 온다연이 아이와 잠시 시간을 보내더라도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점심시간과 저녁에 그림을 배우는 시간에는 그가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장 집사 말대로 해보지. 내일 화양대 교장을 초대하도록 해.” 그는 말을 마치고 방을 나와 아이 방으로 향했다. 아이 방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30~40평 정도 되는 공간이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방 안에서는 온다연이 아이 옆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장가를 낮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유강후가 들어서자, 아이 방에 있던 보조사가 그를 보고 급히 다가왔다. “대표님.” 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있어요.” 보조사는 온다연이 아이의 등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며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이 집에 온 지 반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온다연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보조사는 알 수 있었다. 유강후가 온다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마치 그녀를 자신의 보물처
유강후가 자신과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부드러운 얼굴에 가볍게 뽀뽀하며 해맑게 웃었다.“이것 봐요. 너무 부드러워요.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요?”온다연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보기만 해도 행복하네요. 너무 좋아요.”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졌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얼마큼 좋은데?”온다연은 아이의 작은 얼굴에 다시 뽀뽀하며 답했다.“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전 아이를 선택할 거예요.”말이 끝나자마자 온다연은 단번에 그의 품에 안겼다.유강후는 주저 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강압적으로 온다연의 입술을 깨물고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실수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봐.”자기 아들마저도 질투하는 유강후의 모습에 온다연은 예상하지 못한 듯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유강후의 목을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아저씨, 아들까지 질투하는 건 너무하잖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좋은 듯 마음이 나른해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유강후에게 입을 맞추고선 부드럽게 말했다.“아저씨는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예요. 이제 됐죠?”유강후는 그녀의 애교섞인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고 품에 안긴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온다연,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여야만 해. 아들이라도 안돼. 네 마음속에는 오직 나만 있어야 하니까.”온다연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답했다.“안 돼요. 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게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속 좁은 사람처럼 행동해요?”유강후는 마음이 심란했다. 질투하는 것도 맞지만 그것보다도 답답하고 착잡한 기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눈앞의 아이가 진짜 아들이라 할지라도 유강후는 온다연이 자신 이외의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서 쉬자.”온다연은 마지못해 아이를 돌아보
온다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입술을 깨물며 쭈뼛거리다가 더할 나위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저씨, 사실... 보여주고 싶은 옷이 있어요.”온다연은 분위기에 맞는 야릿한 말을 할 줄 몰랐다. 대놓고 이런 걸 얘기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지만 임혜린이 부부 관계에 도움이 된다하여 고민 끝에 용기를 냈다.비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으니 부부인거나 다름없다.피가 날듯 빨개진 그녀의 귀를 보며 유강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무슨 옷?”온다연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계속 시선을 피했다.“그냥 친구가 선물한 옷이에요. 단둘이 있을 때 입으면 좋다고 해서...”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목까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두리뭉실하게 답했지만 유강후는 단번에 그 뜻을 알아챘다.‘갑자기 이렇게 유혹한다고? 다 컸네.’한편으로는 온다연이 준비한 이벤트가 너무 기대되었다.유강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으며 다소 위험한 어조로 물었다.“나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누가 선물했어?”온다연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사실 별거 아니에요. 혜린이가 직접 디자인한 한복인데 저한테 어울릴 것 같다면서 특별히 몇 벌 제작해 줬어요.”유강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돌변했다.“갖고 와봐. 아니다, 입어서 보여줘.”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살길 찾아 도망치듯 부랴부랴 옷방으로 달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이 옷방에서 나왔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에 들린 얇은 옷을 힐끗 보고선 눈빛이 더욱 위험하게 변했다.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 온다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한편으로는 몸을 파는듯한 느낌이 들었다.두피까지 저릿해지는 느낌에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유강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귓볼을 깨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보고 싶어. 얼른 입어줘.”불길한 예감은 점점 더 크게 다가와 온다연을 집어삼켰다.“아니에요
온다연은 투명한 연두색의 개량 한복을 입고 유강후의 눈앞에 나타났다.사실 옷을 입었다기에는 너무 얇은 소재라 안 입은 거나 다름없다.천쪼가리 하나로 몸을 가리는 건 역시나 불가능한 일이었다.불과 몇초간 봤을 뿐인데 유강후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느낌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심지어 눈빛도 돌변했다.마치 짐승이 사냥감을 노리는 것처럼 온다연을 잡아먹을 듯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유강후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긴장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얼굴은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온다연도 이런 느낌의 치마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감히 유강후를 쳐다보지 못했다.“이런 옷인 줄 몰랐어요. 조금 짧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하네요. 그리고 원단이 이렇게 투명할 줄은 몰랐어요.”치마 입었을 때 지금 같은 효과라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때려죽여도 입지 않았을 것이다.솔직히 안 입는 거랑 별반 다를 바가 없다.온다연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다시 갈아입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허리는 남자의 강한 손길에 의해 조여졌고 반응할 틈도 없이 거대한 품에 안기게 되었다.“다연아...”유강후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의 간절함을 대변했고 동시에 몸에서도 강렬한 반응이 일어났다.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부드러운 입술을 깨물었다.애교를 부리기만 해도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기 힘들 지경인데 야릿한 옷을 입고 눈앞에 나타났으니 온다연의 손에 마구 놀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온다연, 이런 옷을 입고 날 유혹할 줄은 몰랐네? 후폭풍이 두렵지도 않은가 봐?”온다연이 설명하기도 전에 ‘찌익’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걸친 작은 치마가 찢겨졌다.당황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선에 들어온 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강후뿐이었다.‘끝일 났다.’온다연은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 되었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침대 위로 던
정현준은 지금껏 미래 그룹의 고위 임원들과만 업무적인 소통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미래 그룹의 현 대표인 유강후가 그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당연히 미래 그룹의 본사에서 유강후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과 달리 그를 데리러 온 차는 시청 부근의 전통 한옥 입구에 멈춰 섰다.정현준은 이 한옥이 대표하는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시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옥은 경원시의 핵심 권력 중심지로 이 한옥에 살 수 있는 사람은 모두 H 국의 창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의 후손들이다.소문에 의하면 이곳에는 당시 4채의 한옥이 있었는데, 당시 최고 책임자가 직접 강씨 가문의 안주인에게 한 채를 선물하였다고 한다.금융 위기가 닥친 그해. 강씨 가문은 자신의 안전과 외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금을 국내에 쏟아부어 큰 불황을 잠재우는데 큰 도움을 줬다.강씨 가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정현준은 지금껏 미래 그룹이 유씨 가문에 의지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미래 그룹의 대표가 강씨 가문의 한옥에 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소리 없이 막강한 지원자가 강씨 가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정현준은 미래 그룹의 대표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었다.긴장한 채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강후가 나타났다.TV에서만 보던 사람이 바로 앞에 있으니 정현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유강후는 학자들을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하고선 장화연에게 더 좋은 차를 내놓으라고 부탁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눴고 정현준은 점차 유강후의 뜻을 캐치했다.유강후는 누군가를 화양대의 대학원생으로 진학시키려고 했다.여자인데 금융학과와 경영학과를 목표로 하고 있고 반드시 능력이 강하고 인내심이 뛰어난 여교수가 가르치는 게 전제조건이다.게다가 인원이 적은 소규모의 그룹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고 반
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유강후는 살짝 헝클어진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깼어?”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온다연은 정현준을 힐끗 쳐다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손님 계시니까 전 우림이 보러 갈게요. 편하게 얘기 나누세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침착하게 말했다.“이분은 화양대의 정 총장님이셔. 다연이 미래의 교수님이기도 하지. 미리 인사드려.”온다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교수님? 난 이미 졸업했는데 갑자기 웬 교수님?’정현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유씨 가문의 아가씨인 유하령이 화양대를 다니고 싶어 가족들이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눈앞의 이 아름답고 여린 소녀는 그가 예전에 봤던 유하령과는 많이 달랐다.“대표님, 혹시 화양대에 진학시키려는 게 이분인가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총장님, 앞으로 우리 아기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정현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지만 차마 섣불리 물어볼 수가 없었다.유강후가 무슨 일을 계획했는지 알지 못했던 온다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화양대요? 설마 대학원?”유강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바라보며 답했다.“너 예전부터 계속 공부하고 싶어 했잖아. 화양대 바로 이 근처니까 한번 다녀봐. 금융학과나 경영학과를 다니면 나중에 보고서 보는 게 훨씬 쉬워질 거야.”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에 온다연은 두 귀를 의심했다.온다연은 지금껏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필코 다시 공부에 전념할 거라고 꿈꿔왔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아이가 더 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동시에 유강후의 곁에서 계속 그를 설득하다 보면 반드시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확신했다.기적은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다.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손님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