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유강후와 온다연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친 것은 그냥 귀로 듣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그녀는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 유강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너희들...”유강후는 냉정한 눈길로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을 흘끗 쳐다보고, 또 방 안의 술병을 보더니, 사실은 전혀 상관없는 이 두 가지 일을 한데 엮어 놓은 듯했다.임혜린을 노려보던 그는 차갑게 물었다.“어젯밤 그 사람이 너였냐?”임혜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어 막 입을 열려고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고개를 들더니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그녀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유강후에게 불쾌한 태도로 말했다.“그쪽이랑 뭔 상관이죠?”그녀는 어지러운 테이블 위를 힐끗 보더니 일의 자초지종을 알 것 같았고, 저도 모르게 화가 나서 말했다.“술을 조금 마신 것뿐인데, 그쪽이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나?”유강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말속 진실과 거짓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그에게는 상위권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있어, 이렇게 심판의 눈길로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볼 때 상대는 종종 견디지 못하고 패했다.임혜린은 이런 압박감 어린 눈빛에 당황해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뭘 봐요? 잠옷 입은 여자 못 봤어?”유강후는 시선을 거두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계는 네가 남긴 거야?”‘웬 시계?’임혜린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제 것 아니면 누구 거겠어요?”유강후는 ‘흥’하더니 매서운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한이준 거 훔친 거야?”임혜린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그의 전 재산을 훔쳐 가도 그쪽이 뭐라고 할 자격 없거든요? 그리고 이 변태 아저씨, 우리 다연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온다연의 손을 잡아당기려고 하자 유강후는 몇 걸음 뒤로 하며 경고하듯 차갑게 말했다.“여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오
그는 참을성 있게 나지막이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다쳤을 수도 있어. 착하지, 여의사야, 보기만 하고 다른 건 안 해.”온다연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유강후는 그녀의 손가락을 조금씩 떼어내 담요를 열었다.온다연의 가냘픈 몸매는 온통 선명한 키스 자국들로 도배되었다. 워낙 피부가 하얗기 때문에 더 돋보이는 빨간색은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나이가 지긋한 여의사는 한눈만 보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혈기 왕성한 젊은 부부가 놀음에 지나쳐 다치게 되는 일은 그녀에게 있어서 늘 이상하지 않았다.자세한 검사를 진행한 후 그녀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입구 쪽이 조금 찢어졌으니 앞으로 조심하시고 부부생활은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그녀는 유강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두 분은 체형 차이가 크니 이런 일에선 남성분이 좀 자제해야 합니다. 충동적으로 마구 세게 부딪치면 안 되고 여성분이 그만큼 견딜 수 있는지도 잘 살펴야 하죠.”유강후의 다소 어두운 안색을 보더니 그녀는 좀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직접 보세요, 이 여성분의 몸은 대부분 아담하고 남성분께서는 덩치가 큰 편입니다. 어떤 말은 제가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으시죠? 여성분이 감당하기 어려워한다면 즉시 멈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칠 수 있어요.”의사는 말을 마치고 유강후의 점점 더 어두워지는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연고를 건네주며 말했다.“두 분이 부부 사이라면 이 약은 남성분께서 직접 발라주시는 게 좋습니다. 안팎 모두 자세히 바르면 3,4일 후에야 서서히 나아질 것입니다.”의사는 떠나기 전에 또 신신당부하였다.“안까지 모두 바르는 걸 잊지 마시고, 다 나을 때까지 합방하시면 안 됩니다.”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욕실로 향했다.뜨거운 물과 오일이 미리 준비된 욕조는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차 온다연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줬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따스한 물에 조심스럽게 담가주었고, 몸이 금방 물에 잠겼을 때 그녀는 상처가 물에 닿은 탓인지
온다연은 그가 뭐라도 더 할까 봐 두려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조금 아래쪽의 부위를 씻겨줄 때, 그는 다시 한번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그녀를 안아 욕조 변두리에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리 열어봐, 상처가 어떻게 됐는지 보자.”깜짝 놀란 온다연은 가느다란 다리를 꼭 닫고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은 채 그에게 쳐다볼 틈도 주지 않았다.그는 더 무리하지 않고 일어나 수건을 꺼내 그녀의 몸에 묻은 물을 닦아낸 뒤 안아서 세면대에 올려놓고 다시 타일렀다.“보여줘, 약 발라야 해.”온다연은 또다시 거절했고 반응도 점점 격해져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계속 손으로 그를 밀쳐내고 있었다.“다연아, 난 네 남자인데 뭐가 부끄러워? 앞으로도 이런 일 여러 번 있을건데 계속 숨기기만 할 거냐고. 평생 도망치기만 할래?”온다연은 이 말에 눈을 번쩍 뜨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뭐? 여러 번? 앞으로도 여러 번이라고?’‘그리고 평생 이 남자와 함께? 아니야, 싫어!’‘난 다른 여자와 한 남자를 공유하기 싫어!’‘이렇게 평생을 그와 함께하고 싶지 않아!’‘매일 이 사람과 나은별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아!’‘평생 진흙탕 속에 빠져 햇빛도 못 보는 잡초처럼 살고 싶지 않아!’‘평생은 너무 길잖아... 난 견딜 수 없어!’이런 생각들이 한데 엉키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쳤다.“난 평생 아저씨랑 함께 있는 거 싫어요. 너무 길잖아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에요!”유강후는 눈빛이 흐려지더니 얼굴색이 한순간 변해 버렸다.“뭐라고?”온다연은 매우 흥분되어 쉬고 찢어져 마치 우는 것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못 참겠어요, 같이 있지 않을래요, 아저씨를 원하지 않는다고요!”이렇게 말하며 그를 밀쳐내고 세면대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유강후에게 다시 제자리로 눌리고 말았다.그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몹시 안 좋았지만 애써 참는 것 같았다.그는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그럼 실망하겠네, 넌 평생 나랑 묶여 있을 거야!”그는 한 손으로 그
온다연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고 그 끝없는 질식감이 다시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온다연은 유강후를 두려워했지만 이 순간의 자신이 더 싫었다.이 상황에서도 온다연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유강후가 자신에게 그렇게 폭력적이었다는 것이 아니었다.유강후가 방금 나은별과 함께 있다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자신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유강후는 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은별의 향기를 품고 자신과 함께 있었다.온다연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유강후의 애완동물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온다연은 유강후의 몸에 다른 여자의 향기가 묻은 채 자신과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강후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라고 말했다.유강후가 앞으로도 나은별의 향기를 품고 자신과 함께 잘 작정이었단 말인가?유강후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온다연은 더럽다고 생각했다!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온다연은 가슴에 난 상처가 더 크게 벌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몸도 함께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찡그렸다.한쪽 손으로 온다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두려워해도 소용없어, 스스로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야.” 온다연은 이불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유강후의 마음속에서 온다연은 얼마나 비천하게 여겨졌을까. 이렇게 역겨운 일을 온다연 스스로 적응하도록 요구하다니!이 며칠간의 교류에서 온다연은 자신이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모든 것은 온다연의 착각이었다!온다연은 유강후 같은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을 리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아채야 했다.애완동물은 애완동물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결코 주인의 가끔 보여주는 온정을 탐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매장될 곳이 없을 것이다!아마도 너무 피곤해서인지 또는 체력이 너무 소진되어서
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반지일 뿐이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이권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인데 어떻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노회장님이 가주의 자리를 당신에게 넘기셨으니 이 반지는 신분의 상징입니다. 안씨 가문에서 특별히 사람을 보내서 가져온 것이니, 이제 도련님께서 시간을 내서 계승식에 참여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유강후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대리로 맡는 것뿐이야.” 이권은 말했다. “도련님의 어머니가 노회장님의 외동딸이시고, 도련님은 그의 유일한 손자이신데 도련님이 안씨 그룹을 계승하지 않으면 누가 계승하겠습니까? 이것은 언젠가는 있을 일이죠.” “참, 도련님의 친구인 그 북유럽 재벌 상속자님은 지금도 영운산에 있는 별장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나은별 아가씨도 그곳에서 그분을 돌보고 있는데 가서 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유강후는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에 하루 종일 함께 있었으니 충분해. 그는 나와 나은별의 공동 친구니까 나은별이 함께 있는 것으로 충분해.” 잠시 생각한 후 유강후는 다시 말했다. “영운산에 있는 집의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침실 디자인이 별로라서 온다연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나중에 디자이너를 불러서 내가 직접 얘기하겠어.” “네, 셋째 도련님.” 이권은 유강후의 지시를 모두 들은 후 상자를 들고 나가려 했다.이권이 문 쪽으로 가기 전에 유강후가 이권을 불렀다.이권은 돌아서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 유강후는 창가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유강후의 얼굴은 마치 차가운 금속 껍질로 덮인 듯한 냉혹함이 느껴졌고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금방 따낸 영원시 부동산 프로젝트를 유민준에게 넘겨줘.” 영원시의 부동산?이권은 얼어붙었다.그건 방금 큰돈을 들여 힘들게 따낸 대규모 프로젝트 아니었나?이권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 프로젝트는 큰 노력을 들여 겨우 따낸 거예요. 제
깊게 물어서인지 몇몇 곳은 피부가 찢어졌다. 이번에 유강후는 놀랍게도 인내심이 매우 강했고 끊임없이 온다연을 달래고 참으며 딸을 대하듯 온다연을 소중히 여겼다. 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를 물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으며 소통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유강후는 점점 더 참기 어려워졌다. 온다연이 또다시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자, 유강후는 사람들에게 직접 방의 문을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방문을 떼어낸 것을 보고 놀람과 분노로 감정이 폭발해 달려가 유강후의 팔을 세게 물어뜯었다.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온다연이 자신을 물어뜯는 것을 지켜보았다. 온다연은 온 힘을 다해 마치 그동안 받은 억울함과 괴로움을 모두 쏟아내려는 듯 유강후를 물었다. 한참 후 온다연은 피 맛을 느끼고 놀란 듯이 유강후의 팔을 재빨리 놓았다. 유강후의 하얀 셔츠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온다연은 그 붉은 자국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며 손을 뻗어 온다연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놓치고 말았다. 이권은 아주 빠르게 달렸고 잠시 후에는 마당 문까지 달려갔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마당 문을 나가려는 것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지며 소리쳤다. “온다연, 돌아와!” 온다연은 잠시 몸을 멈춰섰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달려갔다. 이때 장화연이 옆에서 낮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빠르게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크게 들썩였고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유강후는 온다연을 가둬 놓고 싶은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온다연을 가둬야만 말을 듣고 도망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온다연은 이미 사라졌다. 유강후가 밖으로 나갔을 때 온다연이 길모퉁이에서 사라지는 모습만 보였다. 온다연은 근처의
주인은 한숨을 쉬며 반쯤 나가던 온다연을 불러 세웠다. “아가씨, 오늘 밤에 큰 눈이 내린다고 해요. 정말 갈 곳이 없다면 나중에 쇼핑몰 뒤쪽에 작은 문이 열릴 거에요. 그 문은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인데 출입 카드를 찍으면 들어올 수 있어요.” 말을 하며 주인은 출입 카드를 온다연에게 건네주었다. “아가씨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네요. 오늘 밤 정말 갈 곳이 없으면 여기 와서 하룻밤 지내요. 여기 난방이 되니까 얼어 죽지는 않을 거예요.” 온다연은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출입 카드를 꼭 쥐고는 낮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주인은 온다연이 점점 더 가엾게 느껴져서 말했다. “만약 일이 없다면 여기서 일하면서 가게를 봐줄래요? 먹고 자는 건 제가 책임질게요. 다만 월급은 많지 않아요.” 온다연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쇼핑몰을 나선 온다연은 근처 가게에서 흰 장미 한 송이를 샀고 묘지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탔다.눈이 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온다연이 묘지에 도착했을 때 모든 곳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갈 곳도 없는 온다연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 시간에는 묘지의 문이 이미 닫혀 있었다.온다연은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다른 작은 길로 들어갔다.이 시간의 묘지는 아주 적막하고 조금 무서운 분위기였지만 온다연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곧장 어머니의 묘비 앞으로 걸어가 흰 장미를 돌 위에 놓고 낮게 말했다. “엄마, 나왔어.” 바람과 눈이 거세게 몰아쳤다. 온다연은 옷을 단단히 여미고 모자를 써서 어머니의 묘비에 기대어 앉았다.예전에는 어머니 생일에 항상 주한과 함께 오곤 했었다. 주한이 죽은 후 온다연은 보통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충 예를 올리곤 했다. 오늘 밤에 이렇게 어머니를 찾을 줄은 몰랐다.온다연은 묘비에 기대어 앉아 커다란 눈송이가 얼굴과 몸에 내려앉았지만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렸다. 곧 온다연의 몸은 흰 눈으로 덮였다. 온다연은 눈을 감고 눈송이가 몸에 닿는 것을 그대로 느끼며 자신의 체온이 점점 멀어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눈은 가장 깨끗한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눈 속에서 죽으면 자신도 깨끗해질 수 있을까? 온다연은 눈밭에 누워 마치 이미 생기를 잃은 사람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일정한 리듬의 무거운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몇 줄기 밝은 빛도 함께 나타났다. 눈보라 속에서 유강후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대문 쪽에서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눈이 많이 내려서 문에서 여기까지 그리 먼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강후의 머리와 어깨에는 이미 많은 눈송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유강후는 묘비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강후의 얼굴은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창백했고, 유강후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신이나 부처를 믿었던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자신의 소녀가 아직 따뜻하기를 기도하며. 유강후는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온다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부드러운 얼굴에는 얇은 눈이 덮여 있었고 거의 온기가 없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통증이 유강후를 거의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온다연!” 온다연이라는 이름은 유강후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심어졌던 씨앗이었다. 온다연이 자라면서 이 씨앗은 유강후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결국 거대한 덩굴로 자라 유강후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 그것을 뽑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유강후는 온다연의 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온다연을 품에 안아 코트 안으로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온다연에게 약간의 생기를 되찾게 했고 온다연은 누가 왔는지 알았다. 그리고 유강후가 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다연은 유강후가 오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온다
집에 들어선 후, 유강후는 시원한 연고를 가져와 온다연에게 발라주었다.그런데 장화연이 어쩌다 이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온다연은 한순간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밥도 먹지 않고 숨어 있었다.유강후도 너무 후회되어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달랬다.저녁에 아기 보러 병원에 갈 때까지 이 상황은 계속됐다. 아이의 상태가 좋아진 것을 보고 온다연은 그제야 겨우 화를 풀었다.이튿날 아침 유강후가 침실에서 나오니 이권이 벌써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셋째 도련님, 인터넷을 좀 보세요. 온다연 씨가 인터넷 스타가 됐어요.”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인터넷 스타라니, 무슨 소리야?”이권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건넸다.“일단 보세요. 제가 처리하고 있긴 하지만, 실검을 세 번이나 눌렀는데도 상황이 정리가 안 돼요.”‘상간녀가 보석 가게에서 본처를 때렸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에 비슷한 댓글이 가득 달렸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동영상을 열었다.어제 온다연이 보석 가게에서 나은별과 싸우는 장면이었다.동영상만 보면, 확실히 온다연이 먼저 때렸다. 게다가 온다연은 날뛰고 있고, 나은별은 한 번도 반격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맞는 모습이었다.동영상은 온다연이 나은별을 때리는 데서부터 시작돼 조아영이 그녀를 끌어낼 때까지 1분여 동안 지속됐다.중간에 편집 흔적이 전혀 없어 딱 봐도 원본 영상이었다.‘좋아요’가 600만 개 이상, 리트윗이 300만 개 이상에 달하고, 댓글 창은 온통 욕하는 말들로 도배됐다.[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간녀가 이렇게 대놓고 날뛰어도 되는 거야?][이건 너무 심하잖아. 상간녀가 누군지 신상 털어!][진짜 뻔뻔스럽군. 유부남을 꼬신 주제에 감히 이렇게 날뛰다니. 이 여자와 부모의 신상을 털어 온 가족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해.][본처가 진짜 나약하네. 내가 저 여자라면 그 자리에서 상간녀 머리를 부숴버렸을 거야.][상간녀가 어려 보이는
유강후는 좀 세게 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고작 몇 번 때린 것이 이렇게 빨갛게 부어오를 줄은 몰랐다.“많이 아파? 집에 가서 약을 바르자.”‘당연히 아프죠.’온다연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몹시 서러웠다.“화를 내도 된다면서요... 아저씨는 말한 대로 하지 않고 전혀 신용을 지키지 않아요.”유강후는 어이없었다.“화를 내도 된다고 했지, 반지를 던져도 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오늘은 세게 때린 것도 아니야. 또 한 번 반지를 던지고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아예 의자에 앉지 못하게 엉덩이를 부숴버릴 거야.”온다연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아저씨도 저를 때렸으니 맞비긴 셈이에요. 만약 아이를 보지 못하게 하면, 저도 아저씨의 점수를 깎아버리고 영원히 보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걸어가면서 말했다.“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왜 아기를 못 보게 하겠어? 오늘 나한테 순순히 반지를 끼워준 것을 봐서 벌을 취소할게.”“하지만 그 점수라는 게 뭔지 나한테 알려줘.”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엎드려 통증을 참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아저씨만 저를 벌할 수 있는 줄 알아요? 저도 아저씨를 벌할 수 있어요.”유강후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무슨 벌인데?”온다연이 코웃음을 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저한테 점수를 적는 공책이 있어요. 모두 100점인데, 아저씨가 잘하면 가산점이 붙고 잘못하면 감점이 돼요.”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원래 70점이었는데, 20점 깎여서 지금 50점이에요. 0점 혹은 마이너스 점수가 되면 저는 아저씨를 버릴 거예요.”유강후는 웃음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하면 가산점이 붙고, 어떻게 하면 감점이 되는지 말해봐.”온다연이 정색하며 말했다.“예를 들면, 그웬을 데려다 아기를 살린 것은 589점, 주희를 구한 것은 50점, 저에게 불고기를 만들어준 것은
그는 손을 내밀고 반지를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네가 자발적으로 나한테 반지를 끼워줬잖아. 반지를 끼워준 건 프러포즈한 것과 같으니, 앞으로 네가 나를 책임져야 해.”온다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의 강요에 못 이겨 끼워준 것인데, 어떻게 그녀가 프러포즈한 것이 되는지?그녀는 눈을 비비며 울먹거렸다.“아저씨가 끼워달라고 했잖아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그거지. 별 차이 없어. 내가 끼워달라고 말했더니 네가 바로 끼워줬잖아. 이게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뭐니?”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아이를 못 보게 할까 봐 걱정인 온다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유강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반지도 꼈으니 결혼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온다연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해야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결혼반지를 나눠 껴도 결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부부가 된 거니까.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유강후는 눈빛이 흔들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프러포즈했고 내가 받아줬으면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어. 결혼했으면 영원히 서로의 곁에 있어야 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안 돼. 알았지?”온다연은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서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결혼했으면 둘이 같이 잘 지내야 한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약간 서러웠다.“다시는 나은별을 만지면 안 돼요. 저는 그 여자가 싫어요.”그녀는 또 한마디 덧붙였다.“살짝 닿는 것도 안 돼요.”“만나도 3m 거리를 유지해야 해요.”유강후는 그녀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아까 나은별이 너한테 어쨌길래 머리가 터질 정도로 쳤어? 온통 유리 조각이던데, 손은 다치지 않았어?”유강후는 말하면서 온다연의 손을 당겨다 자세히 검사했다.그는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손에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유강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반지를 버리거나 결혼 문제를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 알았어?”온다연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가 허리를 꽉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제가 아니라 아저씨가 장난쳤잖아요. 아직도 나은별을 마음에 담고 있어요?”그녀는 너무 서러웠다.“아직도 그 여자가 좋으면, 아기를 데리고 떠날 테니 그 여자랑 사세요!”유강후는 화가 나면서도 웃겼다.“내가 언제 나은별을 생각했다고 그래? 뭘 보고 이러는 거야? 내가 나은별을 잡아당긴 것 때문에?”온다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은별이 유강후의 품에 기대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여자를 안고 있었잖아요. 가슴에 기대고 있던데요.”유강후는 웃음이 나왔다. 알고 보니, 질투하는 것이었다.어린 것이 질투심은 왜 이렇게 강한지?“질투 났어?”온다연은 몹시 화가 났다.“누가 질투해요? 놔요. 저는 갈래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으며 이를 악물었다.“내가 언제 나은별을 안았고, 언제 내 몸에 기대게 했는데? 똑똑히 말해봐.”그는 나은별을 바닥에서 잡아당겨 일으킨 후 온다연이 바로 폭발했던 기억밖에 없다.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더욱 화가 나서 얼굴까지 빨개졌다.“아저씨가 그 여자를 안았고, 그 여자가 아저씨 품에 기대어 있는 것을 똑똑히 봤는데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는 이제 불합격이에요. 미워요. 이거 놔요.”발버둥 치다가 방금 맞은 곳을 건드렸다. 얼얼한 통증에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고, 엉겁결에 손으로 맞은 곳을 가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동작을 보고 방금 너무 세게 때려서 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몸을 뒤집은 후, 치마를 올리고 살펴보려 했다.온다연은 그가 또 엉덩이를 때리려는 줄 알고 놀라서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그만 때려요. 아파요.”“반지를 주워 왔잖아요. 또 때리면 다시는 당신을 안 볼 거예요.”유강후는 손을 빼며 말했다.“붓지 않았는지 보려고
유강후는 괴로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10일.”“온다연, 너 계속 이러면 아기 퇴원하는 날에도 못 볼 줄 알아.”그 말을 듣고 얼어붙은 온다연은 재빨리 그의 손을 놓았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온다연은 알고 있다. 정말 그를 화가게 한다면 아마 한 달 동안 아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꾹 참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심하게 때려서 그런지 유강후는 온다연의 걷는 자세가 살짝 잘못된 걸 발견했다.하지만 결혼반지를 던지고 걷어찼던 행동을 생각하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온다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는데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이권도 그곳에 있었지만 감히 나서서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엉덩이를 맞은 걸 모든 사람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분하면서도 수치스러웠다그러나 반지를 주워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유강후가 아기로 협박을 하니 그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다.온다연은 유강후에 대한 호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70점이었다면 이제는 50점밖에 되지 않았다.온다연은 씩씩거리며 눈물을 닦고선 마지못해 바닥에 있는 반지를 주웠다.온다연이 휴게실로 돌아오자 유강후는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끼워줘.”그 모습은 어찌나 무자비하고 싸늘한지 마치 인정머리 없는 제왕 같았다.온다연은 화가 나서 반지를 다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아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분을 참으며 유강후에게 반지를 끼웠다.유강후는 반지를 한번 꼼꼼히 확인하더니 스크래치가 없는 걸 보고선 마음속의 분노가 절반 가라앉았다.그는 자리에 앉아 온다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온다연은 대답하기 싫은 듯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물을 닦았다.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과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유강후도 마음이 반쯤 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네가 말해봐.
유강후는 그저 말없이 가만히 온다연을 쳐다봤고 온다연은 그의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서야 힘을 풀었다.유강후는 곧바로 다시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내리쳤다.심지어 전보다 더 무자비해졌다.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온다연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미워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날 때릴 자격이 없잖아요.”유강후는 얼굴빛 변한 온다연을 보고선 가슴이 아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또 함부로 버릴 거야?”온다연은 유강후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울분이 치밀어 올라 더욱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버릴 거예요. 평생 찾지 못하게 바다에 던질 거라고요. 때려죽이든 마음대로 해요.”일말의 작은 연민은 온다연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유강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까지 떨었다.결혼반지라는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버렸으면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유강후는 손을 들어 세게 두 번 정도 내리쳤다.전보다 훨씬 힘을 주어서 그런지 온다연은 괴로움에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었다.울면서도 잊지 않고 유강후를 비난했다.“분명히 은별 씨 편을 들었으면서...”“차라리 때려죽여요. 그러면 은별 씨랑 결혼해도 되잖아요.”“우리 이제 그만해요.”...온다연이 말할수록 유강후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끝내 또 세게 때렸다.분노와 두려움, 공포와 고통의 감정이 뒤섞이자 저도 모르게 주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너무 아파... 주한아, 나 좀 도와줘.”“그만 때려요.... 아픈단 말이에요.”...유강후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주한... 온다연은 주한에게 도움을 청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유강후는 숨이 멎을듯한 고통이 찾아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온다연은 심하게 울부짖은 탓에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뭐라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나 괴롭히고 때릴 줄밖에 모르잖아요. 싫어요. 아저씨같은 사람이랑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유강후는 이마에 핏줄이 솟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안긴 방금 전의 상황이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으니 마치 유강후가 키우는 고양이나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별반 다를게 없는 느낌이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온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싫어요.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유강후는 고집불통인 온다연의 모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눈앞에 있는 반지는 그가 이 생에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이다. 이런 마음도 모른 채 온다연은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다.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여러 번 짓밟는 격이다.유강후는 머리가 피가 쏠릴 정도로 화가 나서 소리쳤다.“주우라고.”온다연은 유강후가 화난 걸 알았지만 그녀도 같은 상황이기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분명히 나은별을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유강후는 기댈 수 있게 팔을 내어주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면 차라리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온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싫어요. 그리고 제가 나은별 씨를 먼저 때렸어요. 아저씨가 아끼는 사람을 때려서 가슴이 아파요? 그럼 다시 날 때리면 되겠네.”유강후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네가 언제 가슴 아프다고 했어?”욕하고 때리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유독 이 반지를 떨어뜨린 건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그의 마음과 진심을 짓밟는 것과 다름없는 해동이다.“주워서 깨끗하게 닦아.”유강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온다연 마음속의 작은 화산이 완전히 폭발하였고 곧바로 눈앞의 반지를 발로 차버렸다.“주울 생각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싼 반지는 아저씨한테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나은별 씨한테 더 비싼 거로 사달라고 하세요.”온다연의 발차기에 반지는 더 멀리 날아갔다.유강후는 너무 화가 나서 목의 핏줄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으르릉거렸다.“온다연, 넌 오늘 혼 좀 나야겠다.”그
나은별은 손톱이 살을 피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후 씨, 이제 내 말은 믿지도 않는 거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연 씨가 먼저 손쓴 걸 봤는데도 여전히 내 문제라는 거야?”유강후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싸늘한 시선으로 조아영을 바라봤다.“조세진이 그쪽 아버지?”조아영은 극심한 고통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차마 유강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맞아요.”유강후의 말투는 단호했다.“아버지한테 전해. 파산할 거니까 미리 마음 준비하라고.”조아영은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울부짖었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유강후는 무자비했다.“들리는 그대로야. 오늘부터 조씨 가문은 너 때문에 파산하게 될 거야. 기대해.”조아영은 고개를 번쩍 들고 마지막으로 발악했다.“분명히 저 여자가 먼저 때렸는데 왜 우리가 이런 불이익을 받아야 하죠?”유강후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먼저 때렸다고? 그래서 뭐? 내가 있는 한 다연이가 사람을 때려죽여도 잘했다고 칭찬할 거야. 너 같은 인간을 수없이 많이 봤어. 내가 너보다 지위가 낮았다면 그런 표정이랑 행동으로 말했을까?”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유강후는 곧바로 경호원에게 말했다.“은별이는 병원으로 데려가고, 다른 사람 전부 다 내보내. 당장.”나은별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강후 씨,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유강후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선 뒤를 돌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내가 왔을 때 여기에 사람이 남아있으면 너희들도 끝장인 줄 알아.”경호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네, 도련님.”나은별은 멀어지는 유강후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에서는 악의가 번쩍였다.‘유강후, 날 이렇게 대한다는 거지? 두고 봐, 나도 더는 안 참아.’경호원들은 나은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의무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얼른 가시죠. 도련님이 분부했으니 저희는
유강후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은별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거렸다.밀어내려고 할수록 나은별은 그의 옷을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온다연의 눈에 비친 이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연인 같았다.순간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나은별의 말대로 유강후는 어쩌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지금처럼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내가 때렸어요. 왜요? 가슴 아파요?”그 말에 화가 난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온다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겠죠.”이때 반지를 수정하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직원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수정된 반지와 함께 걸어왔다.“다연 씨, 요청하신 대로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온다연은 번쩍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제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 줘요.”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그러기만 해봐.”온다연은 시선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어있는 나은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두 사람 결혼해요. 아주 천생연분이네.”그 말을 한 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환불해 줘요. 이제 필요 없어졌거든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직원은 정석대로 안내했다.“죄송합니다. 이니셜이 새겨진 특별 제작한 반지라 환불이 불가합니다.”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반지를 집고 땅바닥에 내던졌다.“그럼 버릴게요.”단단한 반지가 바닥에 닿자 몇 미터 높이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자신이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 당장 주워.”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보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분노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강후는 단번에 나은별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