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가슴이 철렁하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없어요.”유강후는 꼼짝 않고 온다연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그녀의 생각을 모두 꿰뚫기라도 하듯 한참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진짜 없어?”온다연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서러움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는 왜 자꾸 저랑 염지훈 씨를 함께 엮는 거예요? 제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잠깐 멈췄다가 그녀는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염지훈 씨는 하령의 남자친구잖아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할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어디 한번 좋아해 봐!”유강후는 온다연의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갑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걸 언젠가 내가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너도 잘 알 거야.”그 말속에는 엄중한 경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온다연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아저씨, 그럴 일은 없어요.”유강후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머리는 왜 또 안 말린 거야?”문득 그는 빨갛게 부어오른 온다연의 손목을 보고 눈빛이 변했다.“손은 왜 그래?”온다연은 손을 한번 보았다. 방금 염지훈이 잡았던 곳을 그녀가 세게 문지른 탓에 껍질이 살짝 벗겨져 있었다.“방금 구월이한테 긁혔어요.”유강후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앉힌 뒤 드라이기를 꺼내와서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은은한 로즈 향이 밀폐된 공간에서 퍼져 두 사람의 코끝을 맴돌았고 분위기도 점점 더 야릇해졌다. 지금 이 야릇한 느낌은 시작에 불과했다.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름 사이에 겨울이 서서히 다가왔다. 경원시의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유강후의 집은 아주 따뜻했는데 꽃방에까지 보일러를 설치했다. 며칠 전에 온다연은 스치듯 해바라기와 붓꽃을 주문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이튿날에 바로 열몇 개나 되는 최상급의 해바라기와 붓꽃 화분이 배송되었고 이들은
무언가 그녀를 일깨워주는 듯한 기분이었다.온다연은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확실히 유씨 가문으로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그곳에서 챙겨야 할 그녀의 물건도 있었고 심미진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다.집사는 멍해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그동안 잘 보살핀 덕에 살이 조금 붙은 모습이었지만 멍을 때리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가끔 이젤 앞에 앉아 두세 시간 멍을 때리기도 했다. 아무런 말도, 그림도 그리지 않고 그저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집사는 온다연이 겉으론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긴 해도 멘탈은 훨씬 더 나약해졌다고 생각했다.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와 집사가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께서 돌아오셨네요. 다연 씨, 혹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도련님께 물어보세요.”말을 마친 집사는 꽃병을 들고 거실로 갔다.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고급스러운 마이바흐 한 대가 대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기세가 남다른 남자가 내렸다.남자는 재질이 아주 좋은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도 키가 커 보이고 차가운 분위기도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들어 꽃방이 있는 곳을 힐끗 보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온다연은 펜을 내려놓고 유리문을 열어 그대로 달려나갔다.몇 걸음 만에 그녀는 유강후의 품에 안겼다.집안은 아주 따듯했고 그녀는 품이 좀 너른 편안한 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다. 조금 얇은 옷감이었던 탓에 추운 한기가 그대로 옷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추위에 몸을 덜덜 떨게 되었다.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품으로 안긴 그녀를 보더니 단번에 들어 올려 성큼성큼 꽃방으로 들어왔다.그녀를 커다란 책상 위로 내려놓은 뒤 다소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이렇게 얇게 입고 밖으로 달려 나온 거야?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정말 몰라서 그래?”온다연은 이미 그의 환심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감으면서 나긋나긋 말했다.
역시나 그가 꽉 끌어안았던 곳에 빨간 손자국이 나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빨간 손자국을 보았다.“피부가 이렇게나 연약해서야. 또 붉어졌네.”온다연은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또 욕구가 들끓기 시작했다.가느다랗고 보드라운 그녀의 허리를 만지며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허리도 작고, 정말 부러뜨리고 싶게 만드네.”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워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온다연은 그가 정말로 자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것만 같아 작게 중얼거렸다.“아저씨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요.”나른한 목소리에 유강후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눈빛마저 변했다.“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지?”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온다연은 더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가끔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평소에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들으니 묘하게 욕구가 끓어올라 그녀를 삼켜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겨났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유강후 씨.”유강후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겁도 없이.”하지만 목소리엔 다정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고 그녀를 혼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사실 지금 이런 순간에 온다연도 무감각한 것은 아니었다.유강후는 예전에 그녀가 제일 힘들었을 때 빛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고 이름만 들어도 감격스러웠다.그의 이름은 그때 그 시절 그녀에게 엄청난 희망을 안겨주었다.만약 두 눈으로 직접 어린 시절의 유강후를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그녀 같은 사람은 절대 이 세상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흐르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피라미드의 정상에 앉았을 뿐 아니라 외모도 훌륭하고 능력도 아주 좋았다.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알 수 있었다.반면 그녀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인이었다. 이런 사람
그녀는 예전에 유강후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났는지 모른다. 지금도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왔을 수도 있고, 그가 다른 여자를 어떻게 대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는 유강후가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주한이 세상을 떠난 뒤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작게 말했다.“아저씨, 유씨 가문 본가에 내 물건이 있어요. 그걸 가져오고 싶어요.”유강후는 자신에게 안겨 붙은 그녀의 모습을 아주 좋아했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가느다란 발목을 만지작거렸다.“그래, 오늘 저녁에 마침 본가에 갈 일이 있었거든.”온다연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으며 비비적거렸다.“고마워요, 아저씨.”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어투가 다소 차가워졌다.“이번엔 유강후 씨라고 안 부르는 거야?”느껴지는 고통에 온다연은 숨을 들이쉬면서 작게 말했다.“예의가 없어 보이면 안 되잖아요.”유강후가 코웃음을 쳤다.“흥, 이제 와서 예의를 찾는다고?”“아저씨,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숨기면 안 될까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아주 담담한 표정이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애초에 그녀를 대중들 앞에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의 이름을 바꿔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녀가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소 당황스러웠다.‘그렇네, 우리가 무슨 사이이지?'‘연인? 내연 관계? 둘 다 아니잖아!'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았다. 그녀는 그의 힘을 이용해 복수할 생각이었고 그는 그녀의 젊음과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새로움을 느끼려 하고 있었다.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으니 당연히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사이를 공개해서는 안 되었다.더구나 유강후에겐 약혼녀가 있었다.온다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며 작은 그녀의 턱을 잡았다.
온다연은 대문 앞에 멍하니 서서 유강후가 내민 손을 보았다.그는 검은색 양털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기품이 흘러넘쳤다. 눈이 내려도 그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아 어깨에 눈꽃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고귀하던 그에게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그 순간, 그녀의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다연아, 이리와.”몇 년 전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남자도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그녀는 유강후를 빤히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빠르게 뛰면서 아프기도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잡더니 그대로 얼굴을 그의 코트에 파묻으며 중얼거렸다.“보고 싶었어요.”‘너무도!'차가운 눈꽃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져 녹아버렸다. 그 탓에 눈가가 촉촉해져 꼭 그녀가 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였다.‘주한아, 보여? 첫눈이 내리고 있어.'유강후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모습에 아주 흡족해하고 있었다.그녀가 입고 나온 옷도 검은색 양털 코트였다. 머리를 올려 묶은 탓에 하얀 그녀의 목선이 그대로 드러났다.연약하면서도 활력이 있는 모습이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있다가 몸을 돌려 차 안에서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쇼핑백을 꺼내 안에서 두 개의 체크 무늬 목도리를 꺼냈다.그중 조금 짧은 것은 그녀의 목에 따듯하게 둘러주었고, 남은 하나는 자신의 목에 둘렀다.두 사람은 분명 체형 차이가 있었지만, 나란히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어울렸다.꼭 다른 사람은 끼어들 수가 없는 그런 분위기도 흘러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얽히고 얽혀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없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더 깊이 얽혀들 것이 분명했다.온다연은 부드러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아저씨, 왜 자꾸 나한테 이렇게 좋은 걸 줘요. 난 아저씨한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유강후는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나한테 선물 아니었어?
온다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유강후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이따가 내 옆에 앉아. 다른 데 앉지 말고.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너랑 함께 물건 가지러 가줄게.”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는 그저 유강후가 갈 곳이 없는 온다연을 불쌍히 여겨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었고 온다연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들은 질투에 휩싸였다.다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유강후의 관심과 편애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특히 유하령은 질투에 휩싸여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 오늘 그녀는 유강후와 오해를 풀고 다시 전처럼 친하게 지낼 생각이었고 그 김에 유강후에게 온다연을 내쫓으라고 설득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유강후가 온다연을 본가로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다정하게 대하며 온다연을 챙겨주고 있었다.유강후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챙겨주고 아껴주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심지어 나은별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우러러보던 작은 아빠는 의자를 빼내며 온다연에게 앉으라고 했다. 그 모습과 태도는 너무나도 다정했고 그녀조차도 받지 못한 대우였다.그런데 그 대우를 온다연 같은 천박한 사람이 받고 있다고 하니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한참 지켜보던 유하령의 안색이 점차 보기 흉하게 구겨졌다. 더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작게 말했다.“하령아, 참아.”말을 꺼낸 사람은 이화평의 손녀 이효진이었다. 지금은 유민준의 약혼 상대이기도 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힐끗 보곤 소곤거렸다.“저런 사람 하나 때문에 네 작은 아빠랑 사이가 틀어질 필요는 없잖아.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참아.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어. 이따가 우리 함께 시도해보자.”비록 유하령과 이효진은 온다연의 사선 방
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온다연의 머리만 쓰다듬고 서재로 갔다.유강후가 가버리자 장화연이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 씨, 우리 가요.”온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유민준이 다가오며 말했다.“다연아, 눈이 많이 안 좋았다며. 지금은 괜찮아?”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요.”말을 마친 뒤 장화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유민준은 그녀가 나가려 하자 다소 마음이 급해졌다.온다연이 집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는 온다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오늘 그녀가 입은 옷 때문인지, 아니면 유강후의 곁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던 탓인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더 많이 예뻐진 것 같았고 보면 볼수록 그녀가 더 좋았다.하지만 가족들과 이효진이 곁에 있었기에 아무리 온다연이 좋아도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온다연과 장화연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따라갔다.“다연아!”유민준은 온다연의 옷깃을 잡았다.“다연아, 나 너한테 따로 할 말이 있어.”유민준은 다소 급박한 얼굴로 말했다.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온다연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온다연이 그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말이다.예전에 온다연은 심하게 다친 적도 있고 사라진 적도, 며칠 동안 본가로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그가 찾으려고 하면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녀가 사라졌었던 동안 그는 그녀의 소식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그리고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온다연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그녀를 너무도 좋아해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때 마음이 불안해졌고 쉽게 잠을 이루지도 못했고, 그녀를 너무도 좋아해 가족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가 함께 있고 싶었다.온다연의 출신이 아직 문제였던지라 지금의 그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몸을 돌린 온다연은 담담하게 말했다.“할 말이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보았다.그녀의 두 눈은 원래부터 예뻤다. 머루알 같은 두 눈으로 유민준을 빤히 보고 있었다.그 눈빛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꼭 오래전부터 그를 원망하고 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유민준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다연아, 너 사실은 날 좋아하고 있는 거지? 방금 한 말은 홧김에 일부러 한 말이지, 그렇지? 내가 다른 여자랑 약혼한다니까, 내 약혼자가 계속 널 괴롭히니까 화가 나서 그런 거지?”어두운 불빛이 유민준의 잘생긴 얼굴에 내려앉았다.사실 그와 유강후는 조금 닮아 있었다. 두 사람 전부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유민준에게선 유강후와 같은 범접할 수 없는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고 상위 포식자 같은 위압감도 없었다.간단히 말해 유민준은 유강후의 질 낮은 버전이었다.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온다연은 아이러니했다.유강후와 유민준은 외모가 닮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성격도 닮아 있었다.분명 약혼자가 있음에도 두 사람 모두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비뚤어진 감정이 생겨났다. 그 감정은 빠르게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다.‘그래, 마음껏 좋아하고 있어. 네가 날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넌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될 테니까!'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앞머리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려버린 탓에 유민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은은한 불빛 아래 고개를 숙이며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선을 보니 유난히도 예쁘고 가늘어 보였다.유민준의 시선에서 마침 그녀의 예쁜 목선과 살짝 흔들리는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하얗고 예뻐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당장이라도 괴롭혀 울려주고 싶었다.유민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제일 가치가 없는 것이에요. 나를 좋아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
곧 온다연은 가방에서 한 장의 수표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M 국 은행의 국제 수표입니다. 보상이 필요하다면 금액은 원하는 대로 적으세요.”그 커다란 액면의 국제 수표를 본 순간, 유강후는 그녀가 진수현의 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런 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천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의 최고 인사들뿐이었다.‘역시 그랬구나.’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다연이가 진수현의 딸이었다니!’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겠어?”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다연의 모든 행동은 방어적이었다.그것도 완전히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보이는 방어였다.유강후는 확신했다. 온다연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가슴이 누군가 칼로 깊게 도려낸 듯 아팠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겁주지 말아야 해.’하지만 손에 쥔 펜을 너무 세게 잡아 펜이 약간 휘어질 정도였다.“다연아, 나 유강후야.”“유강후. 설마 너 정말 날 기억 못 한다는 거야?”‘유강후?’이 세 글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온다연의 의식을 깊게 파고들었다.‘유강후!’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름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그 어떤 통증보다도 극심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내장까지 꼬이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온다연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러자 유강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그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안으며 외쳤다.“다연아!”익숙하고 차가운 스노우 우디향과 담배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그러나 그 순간, 온다연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너무 아파요!”“아파!”“건드리지 마요! 저리 가
눈앞의 남자는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고 온다연은 그 시선에 빠져드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가장 소중한 그 보석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이 고통은 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그래서 크루즈로 다시 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헬리콥터를 준비하게 했다.온다연은 한 걸음씩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낮의 밝은 빛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급 맞춤 수트가 그를 더욱 고귀하게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같았다.단순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마치 온 세상을 발아래 둔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온다연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무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그녀가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온다연과 시선을 마주쳤다.그의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꿰뚫는 순간,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숨이 막힐 것 같았다.남자와 가까워질수록 온다연은 더 답답함을 느꼈다.그리고 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눈빛은 마치 자신을 작은 사냥감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거대한 맹수처럼 그가 언제든 달려들어 삼켜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온다연은 인터넷을 뒤져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했으나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오아시스 그룹이 세계 해양 자원 개발의 선두 기업이라는 사실과 수많은 크루즈와 원양 항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막대한 자산 규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의 대표, 즉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책상 앞까지 가지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녕하세요.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만히
주먹을 꽉 쥐더니 아이의 눈가가 붉어졌다.“역시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 분유까지 줄이겠다고요?”아이의 똑똑함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지만 기본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였다.특히 우유에 대한 집착이 심해 매일 밤 200mL를 마셔야만 잠이 들곤 했다.유강후가 분유를 끊겠다는 말에 아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울며 상심해 하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마음이 약해졌다.어렸을 때부터 손수 키운 아이였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저 친자식 같았다.특히 지난 3년 동안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보통의 부자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그는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히고 하인이 건네준 우유를 받아 아이 앞에 내밀었다.“마셔요, 작은 도련님.”아이는 한동안 거짓 울음을 흘리다 결국 우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이내 아이는 우유병을 받아 들고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아빠는 사랑에 빠져서 많은 걸 제대로 못 보고 있어요.”그러고는 얼굴을 약간 들리더니 당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보석 가짜예요. 근데도 그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그걸 차고 있었어요.게다가 값비싼 장신구들과 함께 말이에요. 그건 그 보석이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죠. 평소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 이해돼요?”“지금 분명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거예요!”“하지만 배로 찾아오진 않았어요. 그건 아빠를 두려워한다는 뜻이죠!”유강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감을 내비쳤다.‘쪼끄만 녀석이 또 조금 더 똑똑해졌군. 잘 키워낸다면 양씨 가문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어.’“혼수 얘기는 무슨 뜻이야?”아이는 손에 든 우유병을 흔들며 말했다.“아빠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했어요. 혼수는 크루즈 전부와 이 넓은 바다라고 했고요. 나랑 약속했어요. 그 약속은 깨지 않을 거예요!”유강후의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듯했다.이 정도 재산이 뭐가 대단하겠는가.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두려
그 시각, 크루즈에서는 손님들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지만 유강후는 여전히 찾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온다연은 마치 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결국 두 부자는 지친 모습으로 갑판에 앉아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작은 아이는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정말 쓸모없네요! 내가 간신히 찾아냈는데 아빠가 금방 놓쳐버렸잖아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조차 못 찾다니... 창피한 줄 알아요!”“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요! 진짜 너무 화나요!”유강후는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헬리콥터를 가만히 응시했다.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오늘의 손님 명단을 전부 유강후에게 건넸다.“도련님, 모든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남성 손님은 전부 제외했고 사모님 연령과 체격에 맞는 여성 손님은 총 101명입니다.”유강후는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난간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저곳이 바로 대진 그룹의 정원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었는데 진수현이 그의 부인 안심을 위해 조성한 사유 정원이었다.그곳에서 본 안심은 온다연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근데 왜 다연이가 딸이 아닌 거지? 분명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을 거야.’유강후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조사할 필요 없어. 오늘 배에 탑승한 진씨 가문의 명단을 불러봐.”이권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시에 따라 진씨 가문의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진수현은 진씨 가문 사람들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고 신국의 다른 가문 정보는 대부분 손에 넣었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는 전혀 얻지 못했다.진씨 가문의 실종된 딸을 찾았다는 소식만 있었을 뿐 그녀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이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건 분명했다.그녀는 이 재벌가의 딸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내일이면 북아메리카로 떠나야 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엔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돌아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거야. 그래야 다연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고요.”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 혼자 가는 게 불안한 거지?”온다연은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곧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온다연은 염지훈을 걱정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처럼 느껴졌다.염지훈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상담은 계속 받아야 해. 내가 없더라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누군가 확인하러 갈 거니까.”“그리고 긴장을 풀게 해주는 최면 치료도 빠뜨리면 안 돼.”과거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최면을 선택했던 건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당시 온다연은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정하며 누구도 믿지 못했다.심리 치료사는 몇 번의 철저한 검사를 거쳤고 매번 나온 결론은 명확했다.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계속 빠져 있다면 자신을 더욱 심하게 해치거나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를 잊게 한 건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현재의 온다연은 새로운 정체성에 완벽히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게다가 그녀는 관심 있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온다연의 그림은 국제무대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재 소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금융 분야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이런 온다연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과거의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최면 이야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다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냉정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왔다.게다가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황급히 아이를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꼬마야, 가족 왔으니까 난 먼저 갈게.”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는 자신의 아들이 낯선 여자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아이는 사실 평소에 낯을 많이 가려서 자신과 장화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그러나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옆모습만 드러난 평범한 얼굴이었다.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결국 난간 근처까지 물러난 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그러자 아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엄마!”그녀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강후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순간, 그의 가슴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듯했다.그녀의 눈. 그 눈은 온다연의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조명이 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 속에는 깊고 따뜻한, 샘물이 고인 듯한 투명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강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다연은 온몸이 경직되어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이내 두려움에 온다연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유강후가 너무도 두려웠다.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