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보았다.그녀의 두 눈은 원래부터 예뻤다. 머루알 같은 두 눈으로 유민준을 빤히 보고 있었다.그 눈빛엔 감정이 담겨 있었다. 꼭 오래전부터 그를 원망하고 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유민준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다연아, 너 사실은 날 좋아하고 있는 거지? 방금 한 말은 홧김에 일부러 한 말이지, 그렇지? 내가 다른 여자랑 약혼한다니까, 내 약혼자가 계속 널 괴롭히니까 화가 나서 그런 거지?”어두운 불빛이 유민준의 잘생긴 얼굴에 내려앉았다.사실 그와 유강후는 조금 닮아 있었다. 두 사람 전부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유민준에게선 유강후와 같은 범접할 수 없는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고 상위 포식자 같은 위압감도 없었다.간단히 말해 유민준은 유강후의 질 낮은 버전이었다.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온다연은 아이러니했다.유강후와 유민준은 외모가 닮았을 뿐만 아니라 욕심이 많은 성격도 닮아 있었다.분명 약혼자가 있음에도 두 사람 모두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비뚤어진 감정이 생겨났다. 그 감정은 빠르게 그녀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그에게 상처를 줄 생각이다.‘그래, 마음껏 좋아하고 있어. 네가 날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넌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될 테니까!'온다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앞머리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려버린 탓에 유민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은은한 불빛 아래 고개를 숙이며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선을 보니 유난히도 예쁘고 가늘어 보였다.유민준의 시선에서 마침 그녀의 예쁜 목선과 살짝 흔들리는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하얗고 예뻐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고 당장이라도 괴롭혀 울려주고 싶었다.유민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하는 마음은 세상에서 제일 가치가 없는 것이에요. 나를 좋아한다면서 어릴 때부터 괴롭히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
온다연은 두 눈을 꼭 감고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꺼냈다.이렇게 해야 그녀는 더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고, 더 괴로워해야 더 많은 힘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방금 한 말이 진실 반 거짓 반이었다면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전부 그녀의 상처이자 괴로운 악몽일 것이다.“이효진은 사람을 시켜 절 골목으로 끌고 가 남자 세 명이 내 옷을 찢어버렸어요. 만약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발견해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골목에서 그 사람들에서 치욕스러운 짓을 몇 번이나 당했을지 모르죠.” “어디 그뿐일까요? 전교생이 있는 앞에서 한겨울에 얼음물을 저한테 부었어요. 그 덕에 전 고열에 시달렸고 폐렴도 걸려 3개월 동안 치료해서야 나을 수 있었어요.”“사람을 시켜 때리고 배를 걷어찬 탓에 전 지금도 자주 피를 토해내요. 전부 이효진이 한 짓 때문에요!”그녀가 말을 하면 할수록 유민준은 괴로웠고 결국 입을 열었다.“그만해, 다연아. 제발 그만 말해.”온다연의 눈빛은 너무도 냉랭한 나머지 꽁꽁 얼어버린 얼음 같았다.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주한까지 건드려 죽게 했다.가해자들이 잘살고 있는 꼴을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란 말인가. 그녀에게 유일하게 잘해주었던 사람마저 죽여버렸는데...그녀에게 치욕을 안겨준 사람과 주한을 죽게 만든 사람 전부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복수할 생각이다.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민준은 다시 불안해져 그녀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다연아, 난 전혀 몰랐어. 널 괴롭히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렇게 심하게 괴롭힐 줄은 정말로...”온다연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괴롭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다니요.”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촉촉해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민준 오빠, 전 오빠를 이해할 수 있어요. 오빠는 제 이모가 오빠 어머니를 죽게만 든 것 같아 저한테 화풀이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전 이해해요. 시간이 흐르면 오빠를 용서해줄 수 있을
“온다연, 대체 왜 네 이모를 밀어버린 거야? 네 이모는 임신 중이었잖아. 꼭 그렇게 밀었어야 했어?”온다연은 고개를 확 들어 이효진을 보았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이효진은 기세등등한 얼굴로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온다연, 너 어떻게 그렇게 악랄할 수가 있어? 그분은 네 친이모잖아!”그녀의 웃음에 온다연은 이효진이 악마처럼 느껴졌다.예전에도 그들은 오늘처럼 그녀를 괴롭히고 치욕을 안겨주었고 옆에서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겁게 웃었다.꼭 다른 사람의 목숨은 그들의 눈에 별것 아닌 장난감처럼 여기고 있었다.이때 심미진이 소리를 내었다.“피, 피가 나. 어떡해 내 아기...”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보았다. 심미진은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다리 사이엔 붉은 피가 새어 나와 바닥을 적셨다.“배, 내 배!”“내 아기, 내 아기 살려줘!”깜짝 놀란 온다연은 바로 몸을 굽혀 심미진의 배를 만지며 다급하게 말했다.“이모, 괜찮을 거예요! 제가 지금 바로 구급차 부를게요!”심미진의 이마엔 식은땀이 가득했고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온다연은 다급하면서도 행여나 심미진의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때 유하령과 이효진이 내려왔다.유하령은 온다연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확 던지며 차갑게 웃었다.“온다연, 만약 네 이모가 유산하게 되면 우리 아빠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 이모의 아기는 우리 아빠의 아들이거든!”온다연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핸드폰을 다시 주운 뒤 구급차를 부르려 했지만, 액정이 망가져 작동되지 않았다.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 거실로 나왔다.유민준도 달려 나왔다.강해숙도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언성을 높였다.“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른 병원에 보내야지 멍청하게 서서 뭣들 하는 거니? 얼른 구급차 불러!”장화연이 온다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물었다.“다
유하령이 차갑게 웃으며 비꼬았다.“온다연, 네 이모도 네가 밀었다고 말하잖아. 그런데도 아니라고? 그럼 설마 네 이모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니?”온다연은 유하령을 보지 않았다. 그저 심미진만 빤히 보고 있었다.그녀는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처럼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손으로 막아도 피는 계속 흘러나왔다.갈라진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모, 그러면 좋은 거예요?”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온다연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허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일어날 수가 없었고 그저 배만 감싸 안은 채 고통 속에서 구급차만 기다렸다.구급차가 오고 도우미가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그녀의 다리 사이에선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구급차로 가는 도중에도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온다연은 그녀가 흘린 피를 보며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모,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로 이모가 편해질 수 있다면 내가 한 거로 할게요. 이 일로 앞으로 더는 이모한테 빚진 거 없는 거예요. 앞으로 이 집안에서 이모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길 바랄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강해숙이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일을 벌이고 자기 이모한테 더 이상 빚진 거 없다고? 하, 넌 우리 집안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 굶어 죽었을 애야!”강해숙은 지팡이로 바닥을 쾅쾅 치면서 화를 냈다.“자기 친이모마저 계단에서 밀어버리는 악랄한 인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당장 경찰에 신고해!”“미진이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넌 바로 감방에 가는 거야!”“다들 뭐해, 얼른 쟤 잡아!”말을 마치자마자 도우미 두 명이 다가오며 온다연을 잡으려 했다.장화연은 온다연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말했다.“세 사람의 말로만 다연 씨가 밀었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증거도 없이요?”강해숙은 분노에 휩싸여 온다연을 손가락질하며 욕했다.“쟤 이모가 직접 말했잖아, 쟤가 밀었다고. 설마 우리가 누명을
장화연의 안색이 변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이미 도착해버린 경찰이 대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빨간색과 파란색 등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온다연은 눈이 따가워 저도 모르게 찌풀 했다.그녀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었다. 귀에서는 알 수 없는 이명이 들려오고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과 이마엔 식은땀이 났다.빠르게 제복을 입은 경찰이 다가오며 현장은 시끄러워지게 되었다.온다연은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꼭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와 따져 묻는 말을 듣고 있으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를 죽여버릴 것 같았다.다만 그녀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고 주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장화연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걱정하지 말아요. 저도 있잖아요. 도련님께선 절대 다연 씨를 감방에 보내지 않을 거고 저도 지금 다연 씨랑 함께 갈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장화연의 그녀의 손을 얼마나 세게 잡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은 경찰차 옆까지 끌려오게 되었고 장화연도 다른 차량에 올라탔다.이때 유민준이 달려 나오며 온다연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다연아, 왜 밀었어? 네 친이모잖아!”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민준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빠는 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거 알잖아요, 맞죠?”그녀는 이토록 유민준이 미웠던 적이 없었다. 그가 너무도 미워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기를 바랐다.그를 빤히 보는 그녀의 두 눈엔 원망이 가득했다.“민준 오빠는 이모 아기가 태어나지 않길 바랐잖아요. 이모가 유산하면 제일 큰 이익을 얻게 될 사람은 누굴까요? 사실은 제가 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모든 걸 제가 뒤집어쓰길 바라는 거죠, 그렇죠?”유민준은 온다연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중에서 유재성이 더욱 그러했다.그의 막내아들 유강후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잘 드러낸 적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해냈으며 자제력도 대단해 실태를 부린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그는 유강후가 아주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웠다. 자식 중에서도 유강후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컸다.그런데 그 자랑스럽던 막내아들이 갈 곳도 없는 여자아이 때문에 이런 실태를 부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그의 친손녀인 유하령의 뺨까지 때렸다.유강후는 어릴 때부터 유하령을 아꼈고 유하령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들어주었다.온다연이 유강후의 마음속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바로 알렸다. 조금 전 서재에서 온다연이 불쌍해서 거둬주고 있다는 말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가슴 속 깊이 불안감이 피어오른 그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강후야, 하령이는 네 조카잖니. 무슨 일이 있으면 말로 해결해야지 다짜고짜 뺨을 때리면 되겠니? 고작 그 아이 때문에 조카를 때려야겠니?”이때 유하령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유강후에게 처음 맞아 보았다. 그것도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앞에서 말이다.유강후의 한방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기까지 했다.맞은 뺨은 얼얼해졌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너무도 아팠다.그녀는 얼얼하고도 빨갛게 부어오른 뺨에 손을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다.“작은 아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왜 남을 위해 날 때렸냐고요! 왜!”강해숙도 충격 속에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울며 소리를 지르는 유하령에 가슴이 아픈 듯 얼른 자신의 뒤로 숨기곤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유강후에게 말했다.“강후야, 지금 남을 위해 가족을 때린 거니? 네 마음속에 그 오갈 곳 없는 고아가 네 친조카보다 더 소중한 거니?”유자성과 유민준은 여전히 충격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가족들의 질책하는 시선에 유강후는 몸을 돌려 유자성을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형, 형수가 지금 병원으로 이송
유강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다연이가 심미진을 계단에서 밀어버리지 않았을 거야. 다연이는 내가 제일 잘 알아.”그는 고개를 돌려 취조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지? 아직도 안 나온 거야?”장화연은 고개를 저었다.“취조실에 함께 있는 사람은 전서후 서장님이십니다. 이미 부드럽게 묻고 있는데도 다연 씨의 상태가 좋지 않아 진술을 써 내려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연 씨는 여기로 온 뒤부터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경찰서로 온 지 2시간 정도 지나긴 했지만, 취조실에 들어간 시간은 반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그녀는 이내 뜸을 들이며 말했다.“하지만 다연 씨는 조금 전 본인이 심미진 씨를 민 것이 맞는다고 인정했습니다. 만약 심미진 씨가 고소라도 하면 일이 더 복잡하게 될 겁니다.”유강후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취조실로 다가가 노크했다.작고 압박감이 느껴지는 취조실 안에서 온다연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없었다.누군가 취조실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꼭 이미 세상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설령 유강후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전서후가 말했다.“전혀 협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심미진을 계단에서 민 것이 맞냐고 물었을 때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곤 입을 열지 않더군요.”유강후가 나직하게 말했다.“둘이서 얘기를 나눠도 될까요?”전서후는 얼굴을 구기긴 했어도 동의했다.“10분 만입니다. 시간을 더 길게 드릴 순 없습니다.”유강후는 감사 인사를 했다.전서후가 나간 뒤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몸에 기댈 수 있게 끌어당겼다.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난 네가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그는 뜸을 들이다가 아주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설령 네가 밀었다고 해
온다연과 심미진은 피를 나눈 가족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심미진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지금 그녀는 백치처럼 유강후에게 쓸데없는 질문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생각해도 가소로웠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엔 혈연관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뿐이었다.그러니 그의 말이 진심일 리가 있겠는가?더구나 두 사람은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 눈에 떳떳하지 못한 사이였다. 유강후에겐 약혼녀가 있었다.“다연아,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유강후는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게도 맹세하는 것처럼 웅장하게 들렸다.온다연의 눈빛이 흔들렸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유강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모는 이미 절 버렸는걸요. 제 친이모도 절 버리고, 감방에 가길 바라고, 죽길 바라는데... 아저씨도 언젠가 제가 질리면 버리게 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겠냐고?'온다연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었다.피로 이어진 가족마저 그녀를 버렸는데 어떻게 유강후를 믿고 안심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옷자락만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유강후는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손을 들어 혈색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이내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결혼하고 싶어?”온다연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그의 옷자락만 잡고 있었다.결혼이란 무엇일까?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몸이 살짝 떨려왔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무서운 것이에요. 전 결혼
병원에서.며칠간의 치료와 정성 어린 간호 끝에 나은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그녀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소이섭이 깎아준 사과를 받아들었다.“그 사람은 어떻게 처리했어요?”소이섭은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죽었어.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은 살려둘 수 없지.”나은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 사람... 강후 씨 비서였잖아요. 갑자기 죽으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그러자 소이섭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강후는 지금 온다연이라는 여자애를 찾느라 온 세상을 뒤지고 있어.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곧 나은별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이번 수는 제대로 먹혔네요. 비서를 이용해 강후 씨의 말을 왜곡해서 아래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고 강후 씨가 온준휘를 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오해를 만들었잖아요. 그 결과 온준휘는 골든타임을 놓쳐 죽게 됐고 지금 온다연의 눈에는 강후 씨가 살인범이나 다름없겠죠.”“온다연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어요. 자신이 잠깐 돌봐줬다는 이유만으로 심미진이 온다연을 학대하고 유하령이 괴롭히게 놔뒀는데도 아직도 심미진을 잊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애가 가장 중시하는 건 가족이에요. 그런데 온준휘가 강후 씨의 무관심으로 죽었다고 믿고 있으니... 온다연이 강후 씨를 용서할 리 없겠죠.”“게다가 온다연은 강후 씨가 자기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버렸다고 믿고 있어요. 이제 강후 씨를 더더욱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근데 정말 보고 싶어요. 그 여자가 자기 아이가 사실 이미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소이섭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온다연이 그 사실을 알게 하면 안 돼. 김원도와 계획한 대로 모든 걸 진행해야 해. 하지만 걱정 마. 온다연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던 만큼 내가 온다연한테 그보다 더한 고통을 줄 거니까.”나은별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온다연 따위가 감히 나와 경쟁
유강후는 온다연이 다른 남자를 위해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만약 내가 안 된다고 하면?”온다연은 침묵했다.그녀의 손에는 지금 그를 위협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유강후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아마 그녀의 목숨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완전히 가지고 놀지 못했다.한참을 망설인 끝에 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나쁜 소식을 들으면 나는 이곳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로... 너무 지쳤어요.”그녀의 눈에 가득한 피로감은 거짓이 아니었다.유강후는 가슴 한가운데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가 또다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를 위협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녀를 찾기 위해 유강후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염지훈과 그녀가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그럼에도 온다연이 김원도의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봐 그는 끊임없이 조바심을 냈다.몇 차례 그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강후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몰랐다.사실 유강후는 한 번도 이렇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어린 시절 임씨 가문의 미치광이가 유강후를 방 안에 가둬두고 불을 지를 때도, 납치되어 피를 뽑히고 총구가 이마에 겨눠졌을 때도, 심지어 고층 건물에서 떠밀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도 그는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온다연이 어딘가에서 고통받거나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심지어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거짓 소식을 들었을 때는 순간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릴 뻔했다.이런 이유로 그는 염지훈을 죽이지 않았다.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염지훈은 이미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비록 온다연을 데리고 갔지만 염지훈은 그녀를 김원도의 광기에서 철저히 보호했다.그런 점에서 염지훈을 죽이는 대신 단지 한 번 심하게 때리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물론 유강후는 여전히 염지훈을
그 대답을 들은 유강후는 애써 참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그는 천천히 온다연의 목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참 안됐군. 너는 평생 나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 죽어도 내 무덤에 묻혀야 하고 묘비에는 내 이름이 새겨질 거야.”이내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곁을 떠나 있었던 날들이 며칠인지 기억이라도 나?”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기억도 안 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저씨 곁에 없는 동안 훨씬 자유로웠다는 거예요.”유강후는 그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지만 차분히 온다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절대 날 떠나지 않겠다고.”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 눈빛 속의 감정은 더없이 서늘해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말 다 잊어버리세요.”그 순간, 유강후는 갑자기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며 말했다.“온다연,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어가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 일이 10년 전이었다면 난 염지훈을 내 손으로 죽였을 거고 너도 직접 목을 졸라 끝냈을 거야.”“5년 전이었다면 네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웠겠지. 그리고 널 평생 감옥 같은 곳에 가둬뒀을 거야.”“하지만 지금은 내가 좀 나이를 먹었으니 참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너 때문에 물러나 주는 거야.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뿐이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널 새장 속에 가둬둘 거야. 내 말 하나하나 다 진짜니까 의심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에서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차가움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피해버렸다.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그러자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염지호의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뭐라고?”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장 이난과 연락하고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전화했어. 그러니까 이제 칼 내려놔.”온다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칼을 내려놓았다.칼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유강후 또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상처를 확인했다.칼날은 매우 날카로웠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는 생각보다 많이 깊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재빨리 안아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는 경호원이 건넨 붕대를 건네받더니 온다연의 상처를 간단히 응급으로 처치를 해줬다. 그리고는 곧바로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상처는 꽤 깊어서 열 몇 바늘을 꿰매고 지혈제를 맞은 후에야 겨우 피가 멈췄다.그제야 유강후는 안도하며 온다연의 손에 시선을 돌렸고 그제야 아까 자신에게 밟힌 손가락 중 하나가 부어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것은 바로 예전에 문에 끼어 부러졌던 그녀의 새끼손가락이었다.온다연의 손가락을 본 유강후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아프지? 왜 안 말했어?”온다연은 그런 유강후를 조롱하듯 대답했다.“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말하면 아저씨가 절 걱정이라도 해줄 것 같았어요?”“게다가 이 손가락도 아저씨가 부러뜨린 거잖아요. 한 번 더 부러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눈에 깃든 증오의 감정을 보고 마음이 저려오는 듯했고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을 쥐어뜯는 기분이 들었다.이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온다연,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연기는 그만하죠. 구역질 나니까.”유강후는 그녀가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고 더 이상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의사를 불러 검사를 요청했다.결국 예
온다연은 옆에서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고 겁에 잔뜩 질려 얼어붙은 채로 유강후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그만해요! 제발 그만두세요!”하지만 그녀는 곧 경호원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염지훈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유강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는 줄 아시나 본데 그건 틀렸습니다. 유강후 씨가 이럴수록 온다연은 당신을 더 증오할 겁니다. 다연이를 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나요?”“유강후 씨가 아무리 다연이를 억지로 데려가도 쟤는 어떻게든 당신을 떠날 방법만 찾을 겁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을 자격이 없거든요.”그 말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그는 발을 들어 다시 염지훈을 거세게 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자비했다.염지훈은 거친 기침을 하며 피를 미친 듯이 뱉어냈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철저히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 순간,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에 핏빛으로 물든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통제 불가능한 모습은 마치 염지훈을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순간, 온다연의 시야에 방금 테이블 위에 놓였던 과도가 들어왔다.그러자 온다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집어 자신의 목에 갖다 댔고 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들며 외쳤다.“사모님, 안 됩니다!”“사모님, 칼 내려놓으세요!”온다연은 한 발짝 물러섰고 손에 힘을 주어 칼끝을 목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다가오지 마세요!”유강후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온다연을 보고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하지만 온다연의 목에는 이미 날카로운 칼날이 깊이 박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온다연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본 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칼 내려놔. 온다연.”그러나 온다연은 벽 쪽으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다가오지 마
온다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뒤에 있는 소파 천을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간신히 유강후에게 물었다.“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유강후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더 말랐네. 잠을 못 잤는지 눈 밑도 시커멓군.’ 그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유강후는 온다연이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를 보았다. 그 셔츠는 마치 마트에서 2만 원도 안 하는 싼 물건 같았다.그걸 본 유강후의 눈에는 분노의 감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온다연이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자신과 함께 돌아가길 거부하다니?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건가?이런저런 의문이 든 유강후는 손을 쭉 뻗어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또 도망갈 거야? 왜 안 도망치지?”유강후의 힘은 상당했고 온다연은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외쳤다.“전 당신과 가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그 순간, 부엌에서 소란을 들은 염지훈이 급히 달려 나왔다.이내 유강후를 발견한 염지훈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유강후 씨, 당장 그 손 치우시죠!”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그가 앞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유강후의 경호원들이 곧바로 그를 가로막았다.염지훈 또한 싸움실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오늘 유강후가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최정예 경호원들이었다.몇 명이 그를 꽉 붙들자 그는 도저히 그 사람들을 뚫고 나갈 수 없었다.분노와 무력감에 사로잡힌 염지훈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유강후 씨, 어린 여자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게 그렇게 잘난 짓입니까!”하지만 유강후는 염지훈을 쳐다도 보지도 않고 여전히 온다연을 주시한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염지훈, 이건 우리 부부 사이의 문제야. 네가 낄 자리는 없어.”그 말을 들은 염지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더 크게 외쳤다.“헛소리하지 마세요. 유강후 씨가 저지른 비열한 짓들을 다들 모를 줄 아세요? 당신이 바깥에서...”“그만. 이제
두 사람이 먹을 저녁은 간단하게 준비되었다.하지만 온다연이 직접 만든 음식은 솔직히 말해 맛이 있는 게 아니었다.소금을 과하게 넣어 음식이 너무 짜거나 아니면 반찬이 다 타버려 먹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너무 짠 반찬을 뜨거운 물에 헹궈가면서까지 입에 넣었다.염지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예전에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먹었어?”온다연은 젓가락으로 채소를 집어 뜨거운 물에 헹군 뒤 대답했다.“그런 좋은 반찬을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꿈도 크시네요. 전부 마트에서 세일해서 남은 것들이었어요. 정말 맛이 없었죠.”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계속 말했다.“지훈 씨는 귀공자처럼 살아온 사람이니까 이런 걸 이해 못 하겠죠. 제가 만든 게 마음에 안 들면 직접 하세요. 전 이 정도밖에 못 하니까.”염지훈은 그녀의 손등에 뜨거운 기름에 데어 생긴 물집들을 보며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괜찮아? 약이라도 바를래?”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그러자 염지훈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잠시 후 색깔과 향, 그리고 맛까지 모두 완벽한 세 가지 반찬과 국 한 그릇이 테이블에 올려졌다.그걸 본 온다연의 눈이 반짝이더니 신이 난 듯 말했다.“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여요.”염지훈은 그런 온다연을 보며 미소 짓더니 반찬을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먹어. 아니면 차라리 가정부라도 부를까?”“필요 없어요. 여기 며칠밖에 안 있을 거니까. 게다가 가정부 부를 돈도 없고요.”그녀의 대답에 염지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다연, 하여간 참 고집도 세다니까.”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지켜본 온다연의 학습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며칠간 밀렸던 수업도 다 따라잡고 앞으로 한 달 동안 배워야 할 내용까지 스스로 공부했다.심지어 학교 사이트에서 시험지를 다운로드해 풀었는데도 점수는 매우 높았다.하지만 생활 능력은 정말 최악
오후가 되자 온다연의 열은 다행히 떨어졌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 보였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에 든 핸드폰을 계속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녁 무렵, 염지훈이 밖에서 돌아왔지만 그의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지금 경원시로 돌아가야 해. 유강후 그 미친놈이 내가 소유한 모든 부동산을 뒤지고 있어. 아마 곧 평진 쪽까지 알아냈을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경원시가 오히려 가장 안전해.” 온다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지금 바로 떠나는 거예요?” 염지훈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로 이끌었다. 그렇게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침묵하던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말 하려고 했어요?” 염지훈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핸드폰 화면에는 염지훈의 비서가 보낸 사진과 정보가 담겨 있었고 사진 속에는 유강후와 한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여자의 얼굴은 멀리서 찍혀 흐릿했지만 유강후만큼은 온다연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둘의 모습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게다가 유강후가 병원에서 나은별을 방문하는 사진도 몇 장 포함되어 있었다. 온다연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지만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염지훈이 먼저 말을 꺼냈다. “최근 3~4일 사이에 찍힌 사진이야. 그런데도 그 아이는 한 번도 찍히지 않았어. 유강후 씨가 그 아이를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서 거의 데리고 나오질 않아.”그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유강후 씨는 요즘 거의 매일 밤 그 집에서 머물고 있어. 어젯밤도 포함해서.” 그 말을 들은 온다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서서히 묵직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커다랗게 도려내진 듯 아픔이 반복되었고 무감각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온다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핸드폰을 염지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간 되겠죠.” 경원시에 도착한
그 말에 염지훈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네. 좋아! 네 말대로 해보자.” 그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렸다.“준철아, 놈들을 다른 길로 유인해. 최대한 멀리 끌고 가.”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준철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좋습니다! 운전은 제 전문이니까요!” 잠시 후, 흰색 차량은 천천히 출발했다.온다연의 예상대로 검문은 철수되어 있었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순조롭게 경원시를 빠져나왔다.그렇게 깊은 밤이 지나고 차는 한 저택 앞에 멈췄는데 문 앞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이 내리자 한 사람이 급히 나와 인사했다. “도련님, 도착하셨군요!” 이 저택은 전통적인 중식 건축 양식을 띠고 있었으며 유강후의 전통 한옥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파초 나무와 연못이 조화를 이루며 운치 있는 풍경을 자랑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 모든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고 방 한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화면에는 임정아와 관련된 더 많은 부정적인 소식이 떠오르고 있었다.‘아저씨는 내 주변 사람들까지 가만두지 않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잡히면 정말 감옥처럼 갇혀 살다 쓸쓸히 죽게 되는 걸까?’ ‘내 아들은 지금 그 여자 품에서 편히 잠들어 있을까? 그녀는 아이를 잘 보살피고 있는 걸까?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걸까?’ 온다연은 순간적으로 우림도 떠올랐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아이에게서 많은 정을 느꼈었다.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온다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은 밤이 깊어질수록 멈출 줄 몰랐다. 동이 틀 무렵, 온다연은 탁자에 엎드린 채 잠들었다.염지훈이 방에 들어섰을 때 이미 온다연은 창가의 탁자에 엎드린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가 그녀를 침대로 옮기려 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온도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이상한 느낌에 염지훈은 온다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