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째로 오는지도 모를 익숙한 그곳에 발을 들이자, 임슬기는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가해자 처지가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 찾아온 것이라 마음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철문 앞에 서자, 단 하루 만에 연다인은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비싼 옷은 어제와 같았지만, 머리는 흐트러지고 화장은 번져 경찰의 추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연다인, 겨우 이거로 부족하지. 엄마의 죽음, 집사님이 받은 고통 그리고 동생의 인생까지. 지금 네가 받는 이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이를 악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서서, 차갑고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오정태의 장례식이니만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배정우는 손에 든 꽃을 묘비 앞에 놓고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끝나면 얘기 좀 해.”그의 말에 임슬기의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설마 연다인을 변호하러 온 건가?’“시간 없어.”거절당한 배정우는 마치 무심코 던진 말인 양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돌
“배정우 씨, 여기 있었네요. 그럼, 아내를 좀 잘 다스려요. 2년 전 같은 스캔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물론 차희라도 배정우가 두렵기는 했지만, 딸을 위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러세요? 2년 전 제 아내가 누명을 썼던 건 모르셨나 보네요?”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승윤이는 내 친구인데, 제 아내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단순히 체면을 위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건지 의아해졌다.순간 임
‘은혜를 갚는다고?’비록 임슬기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김현정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마침, 김현정과 눈이 마주친 임슬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진승윤, 그래서 보내야만 하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명인 시에 머무르면 배정우든, 연다인이든, 김씨 가문이든 김현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김현정은 임슬기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결국 임슬기 대신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만약
“배정우 씨.”갑자기 김서우가 배정우에게 다가와 임슬기의 말을 가로막았다.“정말 다인이를 버리는 거예요? 만나러 갔었는데 애가 완전히 야위어 있었다고요.”배정우는 김서우를 무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임슬기를 추궁했다.“뭐가 없다고?”김서우의 등장에 정신이 번쩍 든 임슬기는 배정우의 질문과 이 모든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방금 임슬기는 배정우에게 자신도 신장 하나가 없으며, 그것도 연다인과 같은 위치라는 사실을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폐암도 믿지 않는 그가 이를 믿을 리 없었다.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비웃었다.“뇌
배정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떠나려는 찰나 김서우는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배정우 씨, 지금 연다인한테 가는 거예요?”“손 놓으시죠?”배정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김서우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 뒤따라가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다인이는 배정우 씨한테 진심이었어요. 이렇게 냉정하게 대하면 안 되죠.”배정우는 어두운 표정으로 김서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시죠.”말을 마친 배정우는 두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무슨 냄새지? 너무 역겨운데.’임슬기는 역겨운 냄새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납치된 건가? 누가 이런 짓을?’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고통으로 인해 임슬기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기절했다....‘숨 막혀...’임슬기가 갑자기 눈을 뜨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암실에 갇힌 건가?’하지만 손과 발이 모두 장애물에 닿자, 그제야 임슬기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며 땅을 적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빗물이 진흙을 섞어 경사진 곳을 따라 흘러내렸다.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커브를 돌며 진흙물을 튀기고는 언덕 위에 멈춰 섰다.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급히 내려 초조한 얼굴로 비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누런 흙뿐이었다. 게다가 빗물까지 섞여 지면의 모든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다.그때, 조수석에서 한 남성이 내려 우산을 들고 빠르게 다가오며 말했다.“대표님, 범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