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배정우? 하지만 배정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는데. 그는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인데...’머리가 흐릿한 와중에 임슬기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죽어서 혼이라도 된 건가? 배정우, 내가 죽으면 너는 날 위해 울어 줄까?’...빈 공터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여기 있어요! 찾았어요!”순간 모두가 그곳으로 달려갔다.얼굴이 창백해진 배정우는 급하게 달려가 넘어지듯 땅에 무릎을 꿇고 피로 물든 손으로 빠르게 흙을 파
익숙한 얼굴에 임슬기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하며 물었다.“현정아? 너 왜 여기 있어?”김현정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조절한 뒤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그건 내가 물을 말이에요. 절 버리지 않겠다 약속해놓고 왜 거짓말했어요? 심지어 수면제까지 타서 먹였잖아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절 내쫓아야 했어요?”임슬기가 반박하려 했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혀 창백한 입술만 달싹거렸다.김현정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언니, 전에 제가 왜 계속 언니 옆에 있겠다고
임슬기가 김현정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언니,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원래 장례식장에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보니 하늘 위를 날고 있잖아요. 정말 소름 끼쳤어요. 누군가 언니를 해치려는 줄 알고 바로 반격했죠.”“내가 남긴 편지 못 봤어?”“편지?”김현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봤기는 봤는데 떠나기 싫었어요.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언니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잖아요. 언니가 사람을 얼마나 걱정시키는지 아세요?”임슬기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또 신경 쓰게 해서.”“그런
진승윤은 허리를 굽혀 임슬기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임슬기, 맹세컨대 나는 모든 사람을 다 속여도 너만은 안 속일 거야. 만약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슬기가 그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맹세 같은 거 하지 마.”“슬기야.”진승윤은 잠시 멍해졌고,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임슬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임슬기, 너 계속 이러면 진짜 더는 내 감정을 억제 못 할 수도 있어.'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임슬기는 손을 내려놓고 코를
“누군가 했더니? 그 더러운 손 치워요!”임슬기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강한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중심을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임슬기의 앞에서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차희라였다.“여사님, 괜찮으세요?”“좀 착한 척 그만 해요.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혼자 주변에서 맴돌지나 말든가.”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에 임슬기는 눈썹을 찡그리고 대꾸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임슬기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어
연다인을 떠올리자, 임슬기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배정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연다인의 죄를 벗겨줄까?’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나는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는 말자.’임슬기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임슬기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산책을 나온 임슬기는 다시 차희라와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임슬기는 말다툼을 피하려고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린 채 차희라가
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있던 간호사까지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겼다.“사모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임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눈에는 연약함과 단단한 의지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저 알아요. 당신 그냥 동생을 살리고 싶은 거죠?”그녀는 차희라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분만 놓아주신다면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분이 입원비를 대신 내드릴 거고 곧 도착할 육 선생님이 당신 동생을 진료하실 겁니다. 지금 이 기회를 정말로 놓치고 싶으세요?”그 말에 차희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임슬기가 눈짓을
방금 전 그 칼은 사실 임슬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찌르려 했던 것이다.빚에 쫓겨 더는 물러설 곳도 없던 그는 누군가 동생을 살려줄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판을 벌여서라도 절대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건 임슬기가 그걸 간파했고 심지어 자신의 몸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남자는 병상에 누워 있는 김현정을 바라보며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만약 누군가 임슬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