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날이 서고 차가워졌다.“임슬기, 너 혹시 네 신분을 잊은 거 아니야?”“아니, 잊지 않았어. 감히 잊을 수도 없고.”“임슬기!”배정우가 점점 더 압박해 왔지만 임슬기는 더 이상 그와 실랑이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고 곧장 휴대폰 전원까지 꺼버렸다.진승윤은 멍해졌다.“정우예요?”“네.”“또 슬기 씨한테 뭐라 했어요? 우리 그냥 밥 먹지 말고 제가 먼저 데려다줄까요?”그동안 그는 배정우가 임슬기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봤기 때문에 그녀가 너무 걱정되었다.
임슬기의 뽀얀 볼에 은은한 홍조가 감돌며 별빛이 깃든 듯한 눈동자는 술에 취했음에도 여전히 맑았다.그녀는 잔을 들어 진승윤의 잔에 부딪쳤다.“승윤 씨, 집사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마지막으로 절 아껴주던 사람이 가버렸는데 앞으로 울고 싶을 때 전 누구를 찾아가야 해요?”진승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나한테 오면 되잖아요.’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잠시 망설이더니 꺼내지 않았다.“연다인이 제 동생도 망쳐놨어요. 동생이 이제 절 원수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연다인이 제 동생을 이용해 절 협박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임슬기는 이미 술에 취해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는데, 배정우가 확 밀어버리자 침이 잘 못 넘어가 사레가 들렸다.“콜록, 콜록...”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배정우의 손을 찰싹 때렸다.“얼굴 좀 그만 만져! 아파!”“임슬기, 아직도 취한 척할래?”그는 임슬기의 주량이 꽤 센 편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취할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임슬기는 토라진 아이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었고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녀는 배정우의 손목을 붙잡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정우를 17년 동안 사랑했는데 왜 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배정우라는 걸 확인한 순간 임슬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내 옷은...”배정우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설마 내가 널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잊지 마,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해.”그 말에 임슬기는 순간 가슴이 아릿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적어도 실수로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배정우와의 결혼 생활에 충실했다.임슬기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 그런 오해 하지 않았으니까.”옷을 갈아입던 배정우는 그 말에 동작을
임슬기는 갑자기 김현정을 꽉 끌어안으며 울먹였다.“현정 씨,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김현정은 잠시 멈칫하다가, 곧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슬기 언니, 앞으로 나한테 절대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고 말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의지하세요. 앞으로 내가 언니랑 함께할게요. 안심하고 나만 믿어요.”임슬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고마워요.”김현정은 임슬기의 어깨를 잡고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하며 말했다.“언니, 나 진심이에요.”임슬기
배정우가 임슬기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며 연다인을 데리고 떠나려던 찰나 그녀가 말을 이었다.“슬기야,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굳이 밀 거까진 없잖아. 그래놓고 모른 척까지 해?”연다인의 말에 배정우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임슬기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임슬기, 그 질투심 좀 거둬.”“난, 민 적 없어!”“없다고? 그럼 다인이가 널 억울하게 몰아붙인다는 소리야?”임슬기는 비웃으며 말했다.“걔가 나를 억울하게 몰아붙인 적이 한두 번이었어? 연다인 때문에 억울하게 당한 일은 셀 수조차 없이 많아.”“아직도 변
“저 아니에요. 전 억울해요!”정신을 차린 임슬기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임슬기 씨, 지금은 단순히 조사와 진술을 받기 위해 데려가는 겁니다. 당일 현장에 있었던 만큼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임슬기는 경찰을 멍하니 바라보며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조사만 받는 거예요?”“네, 조사만 받는 겁니다.”혼이 나간 듯 멍해져 있는 임슬기를 보자, 김현정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슬기 언니, 내가 부축할게요. 진 변호사님을 찾으면 돼요. 별일 없을 거예요.”“그래요.”임슬기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속에는 분노와
“진 변호사님, 어떻게 됐어요?”“경찰 측에서 슬기 씨와 관련된 외도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어떻게든 슬기 씨와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에요.”“뭐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연다인이 그런 거 아니에요?”진승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가 위증을 한 것 같아요. 만약 정말 누군가가 슬기 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일이 매우 복잡해질 수 있어요.”경찰은 증거와 증인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고 연다인은 누명을 씌우는 데 능숙한 사람이니 경찰의 사고를 흐트러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