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없이 뻥 뚫린 베란다라 비가 오면 그대로 젖게 될 것이다.‘정우는... 오늘 밤에는 들어오지 않겠지. 다인이가 옆에 있으니까.’그 생각에 임슬기는 또다시 가슴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유리문도 잠겨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아래층 잔디밭을 내려다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에도 여기서 기어 내려갔으니 이번에도... 가능하지 않을까?임슬기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조심스럽게 난간을 넘었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 미끄러진 바람에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바닥에 박힌 도자기
‘임신?’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임신했다고요?”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네. 근데 폐암에 걸린 상태로는 임신해선 안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잘 쉬셔야 한다고요. 근데 항암 치료도 받지 않고 또 자꾸 다쳐서 병원에 오면 어떡합니까? 슬기 씨, 이러면 제가 아무리 명의라도 슬기 씨를 치료하지 못해요.”의사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슬기 씨, 아이를 포기해요. 그럼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어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슬기의 머릿속에는 임신이라는 말만
배정우는 임슬기가 떨어지거나 다쳤을까 봐 비를 맞으면서 아래층을 찾아 헤맸지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 진승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임슬기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허. 또 도망쳤어?’“정우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믿지 않아서 이젠 너무 지쳤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임슬기의 목소리에 배정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여 어둡기 그지없었다.“나랑 이혼하고 다른 남자한테 가려고? 어림도 없어.”배정우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봐.
배정우는 순간 멍해졌다.‘폐렴이 폐암이 되고 위가 텅 비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거야? 다인이가 날 속인 건가? 근데 그렇게 착한 다인이가, 내가 가장 힘들 때 살려줬던 다인이가 거짓말했다는 게 말이 돼?’배정우는 병원을 떠나지 않고 복도를 서성거렸다.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임슬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임신했다는 것도 진짜란 말이야?’그때 한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를 끌고 그의 앞을 지나갔다.“빨리요. 어젯밤에 교통사고로 들어온 연다인 씨가 또 출혈이 있대요. 혈액은행에 RH- 혈액이 있는지 확
배정우는 임슬기를 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몸이 절로 부들부들 떨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슬기! 당장 내려와! 네 동생 생각은 안 해?”“하! 넌 항상 내 동생으로 날 협박하더라. 그거 말고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뭔데? 전에는 날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그 약속을 지킨 게 지금 이 상황이야?”임슬기는 말을 하다 보니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서러웠다.“네가 나한테 무릎을 꿇으며 청혼한 거잖아. 그래서 너와 결혼한 건데. 지금 봐봐. 네가 무슨 짓을
임슬기의 몸이 덜덜 떨렸고 산소가 부족해지며 더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실 발버둥이라도 쳐보려고 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배정우의 두 눈동자를 보니 다시금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의 심장도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됐어. 뭐하러 발버둥 쳐.'‘나도 이젠 지쳤어. 그냥 이대로 배정우 손에서 죽을래.'‘애초에 날 살린 것도 배정우니까 죽이는 것도 배정우가 하게 할래. 그럼 더 이상 빚진 것도 없잖아.'그렇게 그녀는 두 눈을 감으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꼭 죽음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다.그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력이
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미안해요. 오늘 아침에 재판이 있어서 정우한테 연락했었어요. 정우가... 슬기 씨 괴롭힌 건 아니죠?”그때의 일이 떠오른 임슬기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았고 힘겨운 미소를 지어냈다.“네. 아니에요.”진승윤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다. 이내 상을 올려주며 죽 그릇을 내려놓았다.“닭죽이에요. 영양가가 아주 많다고 하더라고요.”“고마워요.”그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진승윤이라도 없었으면 그녀
진승윤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정우야.”배정우는 그들에게 다가간 뒤 상을 엎고는 임슬기를 확 끌어내렸다.“임슬기, 재주가 좋다?”임슬기는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몰랐고 그저 고통만 참으로 말했다.“배정우, 나와 변호사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그만해.”“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야밤에 널 병원으로 데리고 와주겠어?”임슬기는 화가 났다.“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내 말은 안 믿는다고 쳐도 네 절친한 친구인 변호사님의 말은 믿어줘야 하
임슬기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났고 울면서 안기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투명한 벽이라도 놓인 듯 가까이 갈 수 없었다.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초조해진 임슬기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엄마!”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을 뿐, 점점 멀어져 갔다.“엄마, 가지 마!”임슬기는 울부짖으며 투명한 벽을 깨뜨리려 몸을 던졌다.“나도 데려가 줘... 엄마, 제발...”그렇게 울던 임슬기는 눈을 떴다. 손은 아직도 진승윤의 팔을 꼭 붙잡
“말해!”배정우는 온성현의 멱살을 낚아채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잔혹하게 번뜩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누가 시킨 거야? 누가 내 아내를 해치라고 했지?”이때의 온성현은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는 도련님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온성현은 울먹이며 애원했다.“배, 배 대표님...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배정우는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놓고 곧바로 그의 배를 짓밟았다. 살짝만 힘을 줬을 뿐인데 온성현은 피를 쏟으며 고꾸라졌다.“온성현. 지금 네가 운 좋은 건, 죽어가는 사람
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였어.”그 말에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진승윤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고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고마워, 승윤아. 정말 고마워...”임슬기가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때 그녀가 17년을 사랑했던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었던 진승윤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녀를 살렸다.그 은혜를 임슬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에게 철저하게 부서졌다.진
배정우는 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는 거칠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다인이를 죽게 둘 수 없어.”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등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가슴 어딘가에 날카로운 칼이 꽂힌 듯 그 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얼려버렸다. 슬픔도, 원망도 전부 꽁꽁 얼어붙었다.연다인이를 죽게 둘 수 없다는 그 말은 곧 임슬기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연다인은 절대 안 된다는 뜻이었다.배정우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그렇게도 하찮은 존재인데, 대체 왜 지금까지 놓아주지
지금 이 순간 임슬기는 배정우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당장 놔!”“말해!”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손에 힘을 더 주며 움켜잡았다.“왜? 그렇게 다인이가 죽길 바라는 거야?”“아파, 이거 놔!”“하, 아프다고? 다인이가 죽으려고 손목 그었어. 너 알고나 있어?”그 말에 임슬기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곧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래, 난 걔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걔는 집사님이랑 우리 엄마를 죽였고, 아빠도 죽게 만들었어. 게다가 이제 너까지 빼앗아 갔어. 그런 인간은 죽어 마
“임슬기 씨?”임슬기가 고개를 들자 위용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안쪽을 가리켰다.“현정이... 빨리! 현정이 좀 살려줘요!”둘이 병실 문 앞까지 달려갔을 때 안에서 김현정의 비명이 들려왔다.“아악!”위용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제압했고 임슬기는 쓰러진 김현정을 얼른 안았다.그때 임슬기의 눈에 들어온 건 김현정의 가슴에 깊이 꽂힌 칼과 피였다.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김현정의 가슴팍은 피로 뒤덮였고 선홍빛이 임슬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현정아!”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김현
“이건...”순식간에 또 다른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치고 올라왔다.[최악의 불륜녀 연다인. 상류층 입성을 위해 자작 교통사고. 본처에게 죄 뒤집어씌워]임슬기의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요동치며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그녀는 기사 제목을 눌러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심지어 의사의 증언까지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연다인은 정말 끝이었다.댓글은 하나같이 연다인을 향한 비난으로 가득했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도 많았다. 보다 못한 임슬기는 결국 화면을 닫아버렸다.“현정아...”눈물이 저절로 흐르기 시작했다. 임슬기
“또 다른 딸이 있다고요?”김현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러자 임슬기는 계단 입구에서 우연히 듣게 된 대화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놨다.이야기를 다 들은 김현정은 곧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혹시 김서우가 진짜 김씨 집안 딸이 아닌 거 아닐까요?”‘김서우가 친딸이 아니라고?’임슬기는 그 말에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설마... 그럴 리 없잖아. 명인시에서 다 아는 일이잖아. 김진국 차희라 부부가 얼마나 김서우를 아끼는지. 진짜 딸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임슬기는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어떻게 왔어?”진승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어제도 왔었어. 근데 네가 자고 있길래, 무사한 거 확인하고 그냥 갔지.”그러다 이내 표정이 굳으며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런데 넌 이런 큰일이 생겼는데도 나한텐 말도 안 해? 나를 남으로 생각하나 보지?”그 말에 임슬기의 마음이 따뜻해지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별일도 아니었고.”“별일이 아니라고? 임슬기, 다음부턴 거짓말하려거든 대본이라도 써놔.”할 말이 없어진 임슬기는 고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