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제가 임신했다고요?”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네. 근데 폐암에 걸린 상태로는 임신해선 안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잘 쉬셔야 한다고요. 근데 항암 치료도 받지 않고 또 자꾸 다쳐서 병원에 오면 어떡합니까? 슬기 씨, 이러면 제가 아무리 명의라도 슬기 씨를 치료하지 못해요.”의사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슬기 씨, 아이를 포기해요. 그럼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어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슬기의 머릿속에는 임신이라는 말만
배정우는 임슬기가 떨어지거나 다쳤을까 봐 비를 맞으면서 아래층을 찾아 헤맸지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 진승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임슬기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허. 또 도망쳤어?’“정우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믿지 않아서 이젠 너무 지쳤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임슬기의 목소리에 배정우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눈빛에 살기가 가득하여 어둡기 그지없었다.“나랑 이혼하고 다른 남자한테 가려고? 어림도 없어.”배정우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임슬기의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봐.
배정우는 순간 멍해졌다.‘폐렴이 폐암이 되고 위가 텅 비었다고?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거야? 다인이가 날 속인 건가? 근데 그렇게 착한 다인이가, 내가 가장 힘들 때 살려줬던 다인이가 거짓말했다는 게 말이 돼?’배정우는 병원을 떠나지 않고 복도를 서성거렸다.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임슬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임신했다는 것도 진짜란 말이야?’그때 한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를 끌고 그의 앞을 지나갔다.“빨리요. 어젯밤에 교통사고로 들어온 연다인 씨가 또 출혈이 있대요. 혈액은행에 RH- 혈액이 있는지 확
배정우는 임슬기를 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몸이 절로 부들부들 떨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슬기! 당장 내려와! 네 동생 생각은 안 해?”“하! 넌 항상 내 동생으로 날 협박하더라. 그거 말고 다른 거 할 줄 아는 게 뭔데? 전에는 날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그 약속을 지킨 게 지금 이 상황이야?”임슬기는 말을 하다 보니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서러웠다.“네가 나한테 무릎을 꿇으며 청혼한 거잖아. 그래서 너와 결혼한 건데. 지금 봐봐. 네가 무슨 짓을
임슬기의 몸이 덜덜 떨렸고 산소가 부족해지며 더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사실 발버둥이라도 쳐보려고 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배정우의 두 눈동자를 보니 다시금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그녀의 심장도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됐어. 뭐하러 발버둥 쳐.'‘나도 이젠 지쳤어. 그냥 이대로 배정우 손에서 죽을래.'‘애초에 날 살린 것도 배정우니까 죽이는 것도 배정우가 하게 할래. 그럼 더 이상 빚진 것도 없잖아.'그렇게 그녀는 두 눈을 감으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꼭 죽음을 받아들인 모습이었다.그 순간 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력이
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미안해요. 오늘 아침에 재판이 있어서 정우한테 연락했었어요. 정우가... 슬기 씨 괴롭힌 건 아니죠?”그때의 일이 떠오른 임슬기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바닥을 보았고 힘겨운 미소를 지어냈다.“네. 아니에요.”진승윤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묻지 않았다. 이내 상을 올려주며 죽 그릇을 내려놓았다.“닭죽이에요. 영양가가 아주 많다고 하더라고요.”“고마워요.”그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진승윤이라도 없었으면 그녀
진승윤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정우야.”배정우는 그들에게 다가간 뒤 상을 엎고는 임슬기를 확 끌어내렸다.“임슬기, 재주가 좋다?”임슬기는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몰랐고 그저 고통만 참으로 말했다.“배정우, 나와 변호사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그만해.”“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야밤에 널 병원으로 데리고 와주겠어?”임슬기는 화가 났다.“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니까. 내 말은 안 믿는다고 쳐도 네 절친한 친구인 변호사님의 말은 믿어줘야 하
그날 밤 임슬기는 베란다에서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연다인이 아래층에서 통화하는 내용을 말이다.“배정우가 널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겁먹고 있어? 네가 나서지 않으면 임슬기가 사람을 빼돌렸다는 거 어떻게 증명하라고?”“그래, 알았어. 내가 곧 갈 테니까 일 처리 똑바로 해.”연다인은 애초에 배정우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위장해 그녀가 사주한 것처럼 그날 밤의 진실을 덮으려고 한 것이다.‘하, 악랄해. 아주 완벽한 계략이네.'어쩐지 왜 매번 연다인에게 지고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