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은 살짝 짜증이 났다.진승윤이 없었더라면 누가 이 집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임슬기에게 확실하게 가르쳤을 텐데.하지만 하필 배정우와 친한 진승윤이 옆에 있어 혹여나 들키기라도 한다면 배정우도 그녀를 의심할 것이다. 하여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연다인이 계단을 내려와 눈살을 찌푸리고 진승윤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변호사님도 왜 슬기의 어리석은 짓에 같이 놀아나는 거죠? 슬기가 아파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 말려야죠. 환자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다가 더 심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가식적인 것.’임슬
임슬기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배정우는 믿지 않을 것이다.양측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그때 배정우의 품에 안긴 연다인이 울음을 터트렸다.“정우야, 슬기한테 뭐라 하지 마. 다... 내 탓이야. 내가 봐서는 안 되는 걸 봐서 내 목을 졸랐던 거야.”“목을 졸랐다고?”배정우는 고개를 숙여 연다인의 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목에 생긴 선명한 손자국을 본 순간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임슬기, 네가 그랬어?”임슬기는 피할 수 없다
이 한마디는 또다시 배정우를 자극하고 말았다. 배정우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임슬기의 목을 힘껏 조였다.“임슬기, 다시 말해봐.”임슬기의 얼굴이 시뻘게졌고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목구멍에서부터 전해지는 짙은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배정우, 그 손 내려놔!”진승윤은 배정우에게 주먹을 날려 손을 떼어낸 다음 힘없이 쓰러지려는 임슬기를 끌어안았다.“슬기 씨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슬기 씨 지금...”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임슬기가 옷을 잡아당기더니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질문을 던진 후 진승윤은 스스로도 많이 놀란 듯했다.‘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지? 분명 두 사람의 사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었는데...’“사실 변호사님한테 이혼 합의서를 부탁하려고 했었어요.”“지금은요?”진승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떨렸고 심지어 임슬기와 배정우가 이혼하기를 바라기도 했다.임슬기가 피식 웃었다.“전에는 이혼할 생각이었어요. 셋이서 힘들게 지낼 바엔 서로에게 자유를 주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변호사님도 보셨겠지만 정우는 나한테 자유를 줄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고 또 잘 지낼 생각도 없고
배정우가 문을 등진 채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게 느껴졌다.임슬기는 내려달라고 진승윤을 툭툭 친 후 문에 기대어 심호흡했다.“또 뭘 알고 싶은 건데?”두려운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이런 적이 자주 있었나 보네.’배정우는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면서 비웃었다.“임슬기, 난 네가 심하게 다쳐서 이젠 얌전해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실망하게 하는구나.”임슬기는 진승윤의 팔을 잡고 절뚝거리며 병실 안으로
배정우는 문을 열고 휙 가버렸다.‘임슬기가 곧 죽는다고?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그냥 폐렴일 뿐이잖아. 폐렴인데 죽어? 이젠 열도 내렸고 팔팔하게 뛰어다니면서 승윤이한테까지 꼬리 치는데 죽는다고? 말도 안 돼.’배정우가 씩씩거리면서 병실로 들어갔을 때 임슬기는 안절부절못하며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겁에 질린 얼굴로 배정우를 쳐다보았다.“정우야, 나랑 진 변호사님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아무 소용이 없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설명했다.“허.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럼 이 밤중
배정우가 움직임을 멈추고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임슬기는 두려움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큰일 났어. 정우가 단단히 화난 것 같아.’그녀는 눈을 감고 목을 움츠린 채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배정우는 손을 대지 않았다.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손가락 사이로 살펴보았다. 그녀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놀랍게도 배정우가 병실에 없었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녀가 먼저 연다인을 괴롭히자 연다인은 거짓말로 임슬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그 후
진승윤은 휴대폰을 꺼내 임슬기에게 건넸다.“어젯밤에 휴대폰을 사 왔는데 슬기 씨가 이미 잠들었더라고요.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가져갔어요. 원래 쓰던 휴대폰이 고장 난 건 아닌데 예전 같지 않아서 새로 하나 샀어요. 데이터 다 옮겼으니까 그냥 쓰면 돼요.”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속으로는 선을 넘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자꾸만 임슬기의 눈치를 보았다.임슬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배정우가 변하고 임현호가 죽은 후로 그녀를 이토록 걱정해준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강압적이지 않은 관심에 그녀는 마음이 편했
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있던 간호사까지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겼다.“사모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임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눈에는 연약함과 단단한 의지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저 알아요. 당신 그냥 동생을 살리고 싶은 거죠?”그녀는 차희라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분만 놓아주신다면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분이 입원비를 대신 내드릴 거고 곧 도착할 육 선생님이 당신 동생을 진료하실 겁니다. 지금 이 기회를 정말로 놓치고 싶으세요?”그 말에 차희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임슬기가 눈짓을
연다인을 떠올리자, 임슬기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배정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연다인의 죄를 벗겨줄까?’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나는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는 말자.’임슬기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임슬기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산책을 나온 임슬기는 다시 차희라와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임슬기는 말다툼을 피하려고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린 채 차희라가
“누군가 했더니? 그 더러운 손 치워요!”임슬기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강한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중심을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임슬기의 앞에서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차희라였다.“여사님, 괜찮으세요?”“좀 착한 척 그만 해요.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혼자 주변에서 맴돌지나 말든가.”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에 임슬기는 눈썹을 찡그리고 대꾸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임슬기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어
진승윤은 허리를 굽혀 임슬기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임슬기, 맹세컨대 나는 모든 사람을 다 속여도 너만은 안 속일 거야. 만약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슬기가 그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맹세 같은 거 하지 마.”“슬기야.”진승윤은 잠시 멍해졌고,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임슬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임슬기, 너 계속 이러면 진짜 더는 내 감정을 억제 못 할 수도 있어.'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임슬기는 손을 내려놓고 코를
임슬기가 김현정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언니,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원래 장례식장에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보니 하늘 위를 날고 있잖아요. 정말 소름 끼쳤어요. 누군가 언니를 해치려는 줄 알고 바로 반격했죠.”“내가 남긴 편지 못 봤어?”“편지?”김현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봤기는 봤는데 떠나기 싫었어요.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언니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잖아요. 언니가 사람을 얼마나 걱정시키는지 아세요?”임슬기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또 신경 쓰게 해서.”“그런
익숙한 얼굴에 임슬기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하며 물었다.“현정아? 너 왜 여기 있어?”김현정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조절한 뒤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그건 내가 물을 말이에요. 절 버리지 않겠다 약속해놓고 왜 거짓말했어요? 심지어 수면제까지 타서 먹였잖아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절 내쫓아야 했어요?”임슬기가 반박하려 했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혀 창백한 입술만 달싹거렸다.김현정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언니, 전에 제가 왜 계속 언니 옆에 있겠다고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배정우? 하지만 배정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는데. 그는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인데...’머리가 흐릿한 와중에 임슬기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죽어서 혼이라도 된 건가? 배정우, 내가 죽으면 너는 날 위해 울어 줄까?’...빈 공터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여기 있어요! 찾았어요!”순간 모두가 그곳으로 달려갔다.얼굴이 창백해진 배정우는 급하게 달려가 넘어지듯 땅에 무릎을 꿇고 피로 물든 손으로 빠르게 흙을 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며 땅을 적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빗물이 진흙을 섞어 경사진 곳을 따라 흘러내렸다.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커브를 돌며 진흙물을 튀기고는 언덕 위에 멈춰 섰다.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급히 내려 초조한 얼굴로 비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누런 흙뿐이었다. 게다가 빗물까지 섞여 지면의 모든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다.그때, 조수석에서 한 남성이 내려 우산을 들고 빠르게 다가오며 말했다.“대표님, 범
‘무슨 냄새지? 너무 역겨운데.’임슬기는 역겨운 냄새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납치된 건가? 누가 이런 짓을?’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고통으로 인해 임슬기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기절했다....‘숨 막혀...’임슬기가 갑자기 눈을 뜨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암실에 갇힌 건가?’하지만 손과 발이 모두 장애물에 닿자, 그제야 임슬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