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임슬기는 호흡기를 단 채 조용히 누워있었다. 두 손등은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기에 의사는 결국 두 팔에 주삿바늘을 꽂을 수밖에 없었다.두 다리와 무릎, 그리고 복부까지 전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다친다면 아마 미라가 되어버릴 것이다.그녀의 안색은 창백해 백지장 같았고 의료 기기가 일정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살아있다고 믿기 어려울 것이다.배정우는 그녀의 침대 옆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임슬기, 죽지 마. 난 죽으라고 허락한 적 없으니까!”
“앞으로 다인이랑 화목하게 지내. 다인이는 마음이 여리잖아. 게다가 둘은 원래부터 친구였으니까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 더 쉽겠지. 네 동생도 무사해. 난 네 동생한테 손을 댄 적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말을 하고 나니 배정우는 다소 힘들어져 한참 가만히 임슬기를 빤히 보았다.그녀는 확실히 전보다 많이 야윈 상태였고 더는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았다.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날 밤 어디 아픈 곳이 있었다면 그를 불렀어도 그 오랜 시간 비를 맞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으니까......반도에 있는 별장.이미 오전 10시가
‘장 보러 갔다고?'오정태는 다소 미심쩍었다.그도 그럴 것이 임슬기는 임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직접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 없었다. 설령 배정우와 결혼한 뒤에도 임슬기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었기에 직접 장 보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양녀인 연다인은 집에 가만히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이미 임슬기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줄곧 연다인이 수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 대신 일단 관찰하기로 했
오정태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왔다.하지만 연다인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여하간에 여기서 죽게 된다면 분명 그녀가 한 짓임을 알게 될 테니까.머리를 굴리니 금방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임슬기가 돌아오면 임슬기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조금 걱정되는 것은 오정태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방금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면서 옷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을 발견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그
임슬기는 여전히 머릿속이 조금 흐릿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다인을 위한 배정우의 억지로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원래는 자신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에 그녀는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고 폐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피가 울컥울컥 입안으로 역류해 나왔다.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눈을 감게 되었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 숟가락 먹고 나니 임슬기는 드디어 목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기침을 하자 목이 찢어질 듯 아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고마워요, 변호사님. 이젠 제가 알아서 떠먹을게요.”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뭐라도 조금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일단 죽을 데워 왔어요. 살코기 죽인데 괜찮아요?”그는 지난번 살코기 죽을 먹고 싶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살코기 죽으로 사 오라고 했고 두 시간 동안 보온 팩에 있긴 했지만 이미 식어버려 다시 데워 왔다.임
“난 바람을 피운 적 없어.”임슬기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바람을 피운 적 없었지만 배정우가 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배정우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때 남자랑 호텔은 왜 간 건데? 설마 연기라도 했다는 거냐?”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난 남자와 호텔에 간 적도 없어.”“없다고? 임슬기, 넌 내가 바보로 보이나 봐? 내가 두 눈 뜨고 네가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없다고!”“날 믿어줘.”그날 그녀는 확실히 호텔을 간 적 있었지만 그런 목적으로 간
“대표님, 연다인 씨가 또 출혈 과다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혈액 창고에도 연다인 씨 혈액형과 맞는 혈액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임슬기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다인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네, 알겠습니다.”그는 임슬기의 곁을 지키느라 하루 동안 연다인의 상태를 살펴보지 못했다. 여하간에 연다인의 몸 상태는 연약해도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철인이었으니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방금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이렇듯 팔팔
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있던 간호사까지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겼다.“사모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임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눈에는 연약함과 단단한 의지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저 알아요. 당신 그냥 동생을 살리고 싶은 거죠?”그녀는 차희라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분만 놓아주신다면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분이 입원비를 대신 내드릴 거고 곧 도착할 육 선생님이 당신 동생을 진료하실 겁니다. 지금 이 기회를 정말로 놓치고 싶으세요?”그 말에 차희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임슬기가 눈짓을
연다인을 떠올리자, 임슬기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배정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연다인의 죄를 벗겨줄까?’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나는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는 말자.’임슬기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임슬기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산책을 나온 임슬기는 다시 차희라와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임슬기는 말다툼을 피하려고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린 채 차희라가
“누군가 했더니? 그 더러운 손 치워요!”임슬기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강한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중심을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임슬기의 앞에서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차희라였다.“여사님, 괜찮으세요?”“좀 착한 척 그만 해요.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혼자 주변에서 맴돌지나 말든가.”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에 임슬기는 눈썹을 찡그리고 대꾸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임슬기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어
진승윤은 허리를 굽혀 임슬기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임슬기, 맹세컨대 나는 모든 사람을 다 속여도 너만은 안 속일 거야. 만약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슬기가 그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맹세 같은 거 하지 마.”“슬기야.”진승윤은 잠시 멍해졌고,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임슬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임슬기, 너 계속 이러면 진짜 더는 내 감정을 억제 못 할 수도 있어.'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임슬기는 손을 내려놓고 코를
임슬기가 김현정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혀를 내밀며 웃었다.“언니,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원래 장례식장에 있었는데, 갑자기 깨어보니 하늘 위를 날고 있잖아요. 정말 소름 끼쳤어요. 누군가 언니를 해치려는 줄 알고 바로 반격했죠.”“내가 남긴 편지 못 봤어?”“편지?”김현정이 입술을 삐죽거렸다.“봤기는 봤는데 떠나기 싫었어요.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언니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었잖아요. 언니가 사람을 얼마나 걱정시키는지 아세요?”임슬기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또 신경 쓰게 해서.”“그런
익숙한 얼굴에 임슬기는 한참 멍하니 있다가 어리둥절해서 하며 물었다.“현정아? 너 왜 여기 있어?”김현정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베개를 조절한 뒤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그건 내가 물을 말이에요. 절 버리지 않겠다 약속해놓고 왜 거짓말했어요? 심지어 수면제까지 타서 먹였잖아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절 내쫓아야 했어요?”임슬기가 반박하려 했지만,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문이 막혀 창백한 입술만 달싹거렸다.김현정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언니, 전에 제가 왜 계속 언니 옆에 있겠다고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배정우? 하지만 배정우가 나를 부를 리가 없는데. 그는 내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인데...’머리가 흐릿한 와중에 임슬기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 없었다.‘죽어서 혼이라도 된 건가? 배정우, 내가 죽으면 너는 날 위해 울어 줄까?’...빈 공터에서 갑자기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여기 있어요! 찾았어요!”순간 모두가 그곳으로 달려갔다.얼굴이 창백해진 배정우는 급하게 달려가 넘어지듯 땅에 무릎을 꿇고 피로 물든 손으로 빠르게 흙을 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며 땅을 적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빗물이 진흙을 섞어 경사진 곳을 따라 흘러내렸다.갑자기 검은색 마이바흐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더니, 커브를 돌며 진흙물을 튀기고는 언덕 위에 멈춰 섰다.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급히 내려 초조한 얼굴로 비가 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고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누런 흙뿐이었다. 게다가 빗물까지 섞여 지면의 모든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다.그때, 조수석에서 한 남성이 내려 우산을 들고 빠르게 다가오며 말했다.“대표님, 범
‘무슨 냄새지? 너무 역겨운데.’임슬기는 역겨운 냄새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납치된 건가? 누가 이런 짓을?’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고통으로 인해 임슬기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기절했다....‘숨 막혀...’임슬기가 갑자기 눈을 뜨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암실에 갇힌 건가?’하지만 손과 발이 모두 장애물에 닿자, 그제야 임슬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