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갔다고?'오정태는 다소 미심쩍었다.그도 그럴 것이 임슬기는 임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랐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직접 주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 없었다. 설령 배정우와 결혼한 뒤에도 임슬기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었기에 직접 장 보러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양녀인 연다인은 집에 가만히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이미 임슬기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줄곧 연다인이 수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 대신 일단 관찰하기로 했
오정태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왔다.하지만 연다인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여하간에 여기서 죽게 된다면 분명 그녀가 한 짓임을 알게 될 테니까.머리를 굴리니 금방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임슬기가 돌아오면 임슬기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조금 걱정되는 것은 오정태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방금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면서 옷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을 발견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그
임슬기는 여전히 머릿속이 조금 흐릿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다인을 위한 배정우의 억지로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원래는 자신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에 그녀는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고 폐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피가 울컥울컥 입안으로 역류해 나왔다.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눈을 감게 되었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 숟가락 먹고 나니 임슬기는 드디어 목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기침을 하자 목이 찢어질 듯 아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고마워요, 변호사님. 이젠 제가 알아서 떠먹을게요.”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뭐라도 조금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일단 죽을 데워 왔어요. 살코기 죽인데 괜찮아요?”그는 지난번 살코기 죽을 먹고 싶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살코기 죽으로 사 오라고 했고 두 시간 동안 보온 팩에 있긴 했지만 이미 식어버려 다시 데워 왔다.임
“난 바람을 피운 적 없어.”임슬기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바람을 피운 적 없었지만 배정우가 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배정우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때 남자랑 호텔은 왜 간 건데? 설마 연기라도 했다는 거냐?”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난 남자와 호텔에 간 적도 없어.”“없다고? 임슬기, 넌 내가 바보로 보이나 봐? 내가 두 눈 뜨고 네가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없다고!”“날 믿어줘.”그날 그녀는 확실히 호텔을 간 적 있었지만 그런 목적으로 간
“대표님, 연다인 씨가 또 출혈 과다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혈액 창고에도 연다인 씨 혈액형과 맞는 혈액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임슬기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다인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네, 알겠습니다.”그는 임슬기의 곁을 지키느라 하루 동안 연다인의 상태를 살펴보지 못했다. 여하간에 연다인의 몸 상태는 연약해도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철인이었으니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방금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이렇듯 팔팔
임슬기는 온몸이 아팠다. 폐는 물론이고 복부, 손, 무릎 전부 아팠고 아무리 힘을 넣어보려고 해도 넣어지지 않았기에 배정우에게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두 무릎은 원래부터 돌에 부딪혀 상처가 난 상태였고 빨갛게 부어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차가운 타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니 그 고통은 말 못 할 정도였다.그 순간 임슬기는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울지 않으려고 이를 빠득 갈며 애를 쓰면서 배정우에게 멈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이상함을 감지한 배정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잔뜩 고
배정우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심드렁한 눈빛으로 보았다.“임슬기, 연기하지 마. 어차피 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다 아니까.”죽지 않을 거라니...그녀는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 사실을 잊은 것일까?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죽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 임슬기는 헛웃음만 나왔다.“정우야, 우리 내기할래? 내가 죽는지 안 죽는지 말이야.”순간 배정우의 살짝 흔들리며 아팠다. 그러더니 이내 내기를 받아들였다.“그래. 내기하자.”그 말을 들들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서우가 대뜸 다가와 임슬기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임슬기의 고개가 홱 돌아가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화면이 켜지면서 진승윤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떴고 이어 전화기 너머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슬기야? 무슨 일이야?”그 목소리에 기름을 부은 듯 김서우의 얼굴은 더 일그러졌고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리더니 임슬기의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이 더러운 년,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승윤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그럼 이건 뭐야! 다인이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넌 그
김현정을 제대로 쉬게 하려고 임슬기는 식사를 마친 후 일부러 그녀에게 더 자라고 말했다. 처음엔 김현정이 완강히 거절했지만 결국 임슬기를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다시 눕게 되었다.병실로 돌아가던 길, 임슬기는 계단 입구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차희라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내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 알잖아. 꼭 살아서... 그 애를 만나야 해.”“사모님, 벌써 스무 해가 넘었잖아요. 이제 그만 포기하시는 게... 김서아 씨도 계시고, 충분하지 않나요?”하지만 차희라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야, 달라. 그 애
밤새 울었던 탓에, 아침에 눈을 뜨자 임슬기의 눈은 또 퉁퉁 부어 있었다.부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까지 하고 나서야 간신히 외출할 얼굴이 되었다.몸단장을 마치고 김현정을 보러 가려던 참에 문을 나서자 문 앞에 놓인 영양제들과 보온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임슬기는 영양제를 방 안에 들여놓고 보온 가방을 열어보았다.안에는 보온 도시락 두 개가 들어 있었고 흔들어보니 안에 국물이 담긴 듯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어디에도 쪽지는 없었고 누가 두고 간 건지도 알 수 없었다.찜찜한 기분에 임슬기는 잠시 눈
‘얼마나 기억하고 있냐고?’배정우는 조심스레 기억을 더듬었다. 떠오르는 건 임슬기의 배신, 차가움 같은 상처뿐이었고 좋은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다.그런데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임슬기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게 증오든, 사랑이든.예전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아직도 임슬기를 사랑하고 있다는걸. 다만 미움까지 놓기엔 아직 어렵다는 것도.갑자기 배정우가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으윽!”권민은 그 소리에 놀라 서류를 던지고 황급히 달려갔다.
육문주는 막 귀국한 터라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진 못했다. 하지만 임슬기의 말투와 눈빛에서 어쩐지 깊은 쓸쓸함이 느껴졌다.“형수님, 사실 정우 형... 아직도 형수님을 신경 쓰고 있어요.”그 말에 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요, 그 사람의 신경 쓰는 방식은 아마 웬만한 사람은 버티지 못할걸요.”감금, 모욕, 배신이 신경 쓰는 거라면 말이다.“형수님...”육문주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임슬기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아까 그 남자 경찰 쪽에 연락해서 그냥 풀어달라고 해 주세요. 현정이도 심하게 다친 건 아
방금 전 그 칼은 사실 임슬기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찌르려 했던 것이다.빚에 쫓겨 더는 물러설 곳도 없던 그는 누군가 동생을 살려줄 수 있다면 목숨을 걸고 판을 벌여서라도 절대 물러서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건 임슬기가 그걸 간파했고 심지어 자신의 몸으로 그를 막으려 했다는 사실이었다.남자는 병상에 누워 있는 김현정을 바라보며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만약 누군가 임슬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임슬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옆에 있던 간호사까지 놀라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당겼다.“사모님, 진정하세요.”하지만 임슬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남자에게 다가갔다. 두 눈에는 연약함과 단단한 의지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저 알아요. 당신 그냥 동생을 살리고 싶은 거죠?”그녀는 차희라를 돌아보며 말했다.“이분만 놓아주신다면 제가 약속드릴게요. 이분이 입원비를 대신 내드릴 거고 곧 도착할 육 선생님이 당신 동생을 진료하실 겁니다. 지금 이 기회를 정말로 놓치고 싶으세요?”그 말에 차희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임슬기가 눈짓을
연다인을 떠올리자, 임슬기는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배정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연다인의 죄를 벗겨줄까?’문득 드는 생각에 그녀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참, 나는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지는 말자.’임슬기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털어 버리며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임슬기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다음날 산책을 나온 임슬기는 다시 차희라와 마주쳤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임슬기는 말다툼을 피하려고 일부러 못 본 척 시선을 돌린 채 차희라가
“누군가 했더니? 그 더러운 손 치워요!”임슬기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강한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중심을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임슬기의 앞에서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차희라였다.“여사님, 괜찮으세요?”“좀 착한 척 그만 해요. 정말 착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약혼자 주변에서 맴돌지나 말든가.”역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임슬기를 바라보는 차희라의 모습에 임슬기는 눈썹을 찡그리고 대꾸하려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임슬기는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