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 여리여리한 몸매에 온화한 표정이지만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묘한 가시가 돋쳐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상황만 보더라도 십분 전까지 낙하산 직원을 응징하는 훌륭한 상사에서 불쌍한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마녀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총 세 라운드입니다.”조현아는 이를 악물었다.“다른 직원들도 필기시험, 1차, 2차 면접까지 총 세 라운드를 거쳐서 입사했으니 한소은 씨도 그 정도 테스트는 받아야죠?”그제야 허리를 다시 세운 한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당연히 받아야죠.”“그럼 두 번째 테스트는 뭐죠? 아니면 방금 전 테스트는 그저 기본 테스트였고 지금부터 정식 테스트인 건가요?”한소은의 진지한 질문에 조현아는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조현아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가 이끄는 팀원들이 모두 앉아있는 자리에서 한낱 어린 낙하산 여자애한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방금 전 질문은 연습 문제에 불과했다고 다시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는데... 오히려 한소은이 선수를 치니 입장이 괜히 난처해졌다.“방금 전에 첫 번째 라운드를 통과했다고 했잖아요? 연습 테스트는 없어요. 우리 신생을 뭐로 보고!”“뭐로 보다니요? 제가 앞으로 열정을 바쳐 일할 회사로 보고 있죠.”한소은은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됐어요. 그런 아부는 넣어둬요. 그런 전략은 나한테 안 먹히니까. 그리고 앞으로 진행할 테스트는 앞선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려울 테니 각오해 둬요.”“걱정하지 마세요. 전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팀장님처럼요.”팀장님처럼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더 강조하는 한소은의 모습에 조현아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좋아요.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다들 나가봐요.”조현아의 말에 방금 전까지 팝콘 각을 세우고 있던 직원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섰고 곧 조현아와 한소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마지막 팀원이 회의실 문을 닫는 순간, 조현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오늘은 운이 꽤 좋았
“일이요?”조현아는 고개를 저었다.“아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으니 기획팀 일원이라 할 수 없고 기획팀 팀원이 아니니 일을 맡길 수도 없어요.”잠깐 멈칫하던 조현아가 말을 이어갔다.“물론 굳이 여기 있고 싶다면 청소라도 하든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아니요. 괜찮지 않습니다. 전 조향사예요. 제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향수를 개발하는 일이지 청소가 아닙니다. 청소부를 비하하는 말은 아니에요. 그저 적어도 신생에 청소부로 들어온 건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3일 안에 테스트 내용을 공지해 주겠다고 하셨고 그 사이에는 저에게 일을 맡길 수도 없다고 하셨으니 전 팀장님 소식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싱긋 미소 짓던 한소은이 말을 이어갔다.“아, 참. 만약 3일 뒤에도 테스트 문제를 보내주지 않으시면 절 기획팀 팀원으로 받아들이신 것으로 생각하고 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하겠습니다.”당당한 한소은의 모습에 조현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직급으로 기를 눌러놓으면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깔끔하게 거절하다니.손과 코를 아끼는 건 프로 조향사로서 훌륭한 자세이긴 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소은은 그녀에게 부탁을 하는 입장이 아닌가? 왜 저렇게 당당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한소은이 회의실에서 나와 회사를 나서자 기획팀 팀원들은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모두들 한소은이 조 팀장과 독대한 뒤 회사를 나서는 걸 보고 딜이 실패했을 것이라 추측했고 이 소문은 기획팀을 넘어 신생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물론 한소은은 그런 헛소문 따위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설령 오해가 있다 해도 언젠가 풀릴 일, 지금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했다.3일이라는 시간이 생겼으니 노형원 쪽의 일부터 완벽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어.차에 탄 한소은의 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한 소은 씨 되십니까?”낯설지만 예의 바른 목소리였다.“네, 누구시죠?”“전 시원 웨이브 담당 변호사입니다. 노형원 씨의
고민도 없이 패소할 게 분명한 고소를 선택하는 한소은의 모습에 변호사는 당황한 듯 잠깐 침묵하다 곧 말을 덧붙였다.“한소은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되시나 봅니다. 패소하신다면 사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시원 웨이브 쪽에서 정식으로 피해 보상금을 요구할 테고 운이 안 좋으면 구속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고민해 보심이 어떠실지? 지금 제 의뢰인인 노형원 씨도 단순히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하는 것뿐이니...”“아니요. 노형원한테 전하세요. 사과는 꿈도 꾸지 말라고.”한소은은 변호사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다.“그리고 전 절대 패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법정에서 뵙는 걸로 알고 이만 끊겠습니다.”웃기는 자식. 조작한 자료들과 매수한 증인들로 날 밟아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지금까지 그녀가 노형원의 그날 아래에 있으면서 불평 한 마디 없었던 건 노형원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노형원의 성공이 곧 그녀의 성공이라 생각했기에 기꺼이 그의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노형원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노형원 앞에서 더 이상 비굴하게 굴지 않아도 됨을 의미했다.집으로 돌아온 한소은은 현관에 놓인 김서진의 신발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쯤이면 회사에 있어야 할 텐데...거실로 들어가니 김서진도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지 정장 재킷만을 벗은 상태였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보이는 섹시한 쇄골에 한소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한편, 김서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태블릿을 보고 있느라 한소은이 집에 온 지도 모르는 눈치였다.“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한소은이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물었다.“밥 아직 안 먹었죠?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요.”말을 마친 한소은이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김서진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아니요. 일단 이쪽으로 와봐요.”소매를 걷어올린 한소은은 진지한 김서진의 표정을 발견하고 다가갔다.“왜요?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내가 회사 일 따위로 고민할 사람으
액정에 비친 것은 폭로 전문 너튜버가 올린 영상이었다.피식 미소를 짓던 한소은이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당신 이런 너튜브도 봐요? 의외네요?”하지만 김서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눈빛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한소은은 태블릿을 들어 영상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너튜버가 올린 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한소은 그녀였다.한소은 그녀의 실명까지 밝힌 영상은 그녀가 대학교에 입학한 뒤로 지금까지의 인생사를 모두 닮고 있었다. 그중 가장 집중적으로 다룬 건 바로 그녀와 노형원, 강시유 세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게다가 어그로를 끌기 위한 타이틀은 더더욱 자극적이었다.“바람녀가 판치는 세상”영상을 확인한 한소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화가 난다기보단 이렇게 허접한 수단까지 사용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이었다.그의 추잡한 수작은 자료를 조작하고 증인들을 매수하는 데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너튜버까지 매수해 여론까지 조작하려 하다니. 노형원, 당신 날 정말 사랑하긴 한 거야? 아니면 지금 당신이 가진 명예와 재부가 우리의 추억들을 이렇게 매도할 정도로 중요한 거야?“이게 도대체...”다시 한번 영상의 내용을 확인하던 한소은이 김서진을 바라보았다.“이 내용을 정말 믿어요?”이런 말도 안 되는 루머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건 바로 김서진의 생각이었다.“안 믿어요. 이렇게 황당한 루머를 내가 믿을 리가 없잖아요?”김서진은 태블릿을 꺼버린 뒤 한소은을 품에 꼭 안았다. 바다처럼 깊은 눈빛으로 한소은을 바라보던 김서진이 물었다.“화났어요?”한소은은 고개를 저은 뒤 김서진의 목을 더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면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한소은이었다.김서진이 정말 영상의 내용을 믿었다면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겠지. 그런데 이 남자 도대체 왜 그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는 걸까? 누구라도 혹할 만큼 잘 꾸며진 이야기인데... 도대체 왜...하지만
한소은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신생은 환아의 계열사일 뿐이잖아요? 본사 대표와 계열사 기획팀 팀장... 뭐 거의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죠. 갑자기 부르면 깜짝 놀라서 기절할지도 몰라요.”“풉.”오버스러운 한소은의 말투와 표정에 김서진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내가 그렇게 높은 사람이에요? 아주 마음에 드는 아부였어요. 상을 내려야겠는걸요?”“무슨 상이요?”한소은이 눈빛을 반짝였다.“어떤... 상을 원하는데요?”김서진의 섹시한 목소리가 한소은의 귓가에 울렸다.순간 당황한 한소은은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그건...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일, 일단 밥부터 먹어요. 나 배고프단 말이에요.”한소은은 도망치 듯 주방으로 뛰어가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김서진의 표정이 곧 차갑게 굳었다.아무런 근거도 없는 루머뿐이라지만 그의 여자를 이렇게 모욕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그 대가는 제대로 치러야겠지?한편, 손을 씻고 냉장고를 연 한소은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음료수나 즉석식품 정도나 들어있을 줄 알았던 냉장고에는 싱싱한 채소부터 고기, 온갖 소스까지 없는 게 없었다.일하는 아주머니는 이틀에 한 번씩 와서 청소만 해주신다 했고...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봤을 것 같이 생긴 김서진이 설마 직접 요리라도 하는 건가? 한소은은 고개를 갸웃했다.이리저리 재료의 상태를 살피던 한소은은 자세한 건 식사를 하며 묻기로 하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워낙 바쁘기도 했고 남자친구의 바람에 소송까지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일들만 일어나다 보니 김서진과 함께 외식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끼니를 제대로 챙긴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집밥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집밥이라면 갈비찜이 빠질 수 없는 법. 일단 한소은은 냉장고에서 꺼낸 손질한 갈비의 핏물을 빼기 위해 물에 담근 뒤 채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거실에서 이런저런 파일을 검토하던 김서진은 아직도 잠잠한 부엌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손을 씻고 거실로 돌아온 한소은은 소파에 앉아 물을 마셨고, 눈을 돌리자 한쪽에 놓여있는 태블릿이 보였다. 그녀는 sns를 열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깨물며 폭로된 내용들을 열심히 바라보았다.방금은 김서진과의 관계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았고, 단지 그들 세 사람이 대학에 다닐 때의 일에 대한 것이란 것만 대충 알고 있을 뿐, 고의로 사실을 왜곡한다고 밖에는 표현이 안 됐다. 하지만 그녀가 흥미롭게 여긴 것은 폭로된 내용들은 모두 노형원이나 강시유 이 두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제3자인 방관자의 신분으로 모두 그들의 대학 동창들이거나, 소위 ‘친구’들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원래는 조금 화가 났었는데, 계속 보다 보니 화가 나기는커녕 가소롭기만 했다.그 이름들은 단지 좀 낯익어 보일 뿐 어떤 사람들은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과 데이터 수집에 할애했으며 캠퍼스에서 무의미한 사교 활동을 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강시유와 노형원이 대학에서 어떻게 만났고 어떤 관계를 가졌으며 그녀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연애에 끼어들어 불륜녀가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묘사에서 그녀가 바로 그 불륜녀였고, 그 두 사람의 선량함 때문에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었기에에 여전히 그녀와 친구로 지냈고, 그녀가 가장 힘들고 초라했을 때,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를 미워하지 않고 곁에 두었지만 그녀는 감사할 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회사의 데이터와 강시유를 농락하며 적반하장의 태도였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야말로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넋을 놓고 보았고, 처음의 화났던 감정이 후에는 차츰 평온해졌으며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듯했다. “밥 먹어요.”맛있는 냄새가 그녀의 코끝에 전달되며, 김서진은 찌개를 식탁에 놓은 뒤 그녀를 부르고는 고개를 돌려
김서진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식탁에 가만히 앉아서 가사도우미가 모든 걸 다 하고, 심지어는 나한테 밥까지 먹여주면서 흘린 밥알을 치운다고 생각하는 거죠?”“......피식!”그 장면을 상상하자 한소은은 저도 모르게 웃음 흘러나왔다.그의 묘사는 비록 좀 엉뚱하긴 했지만, 사실 꽤나 들어맞았다."적어도 직접 요리할 필요는 없겠죠.”그녀는 갑자기 그의 생활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 궁금해졌다."만약에 원한다면 당연히 요리할 필요는 없죠.”그는 딱히 부정을 하지 않았고, 그의 출신과 지위로는 당연히 이런 사소한 일을 직접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원하지 않는 건가요?"한소은은 더욱 궁금해졌다, 설마 그가 요리를 취미로 하고 있는 걸까?그렇지 않으면 방금 전 그녀를 주방에서 쫓아내고 직접 요리를 안 하지 않았을까.한소은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고, 김서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전 외국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어요.”"그런데요?"그는 말을 하다 말았고, 한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해외에서 유학을 한다고 해도, 그의 집안의 경제적 조건으로는 가사도우미가 집을 관리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아 참,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집에 가사도우미가 있는 것을 안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가 직접 일을 하는 걸까?김서진는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환아와 김 씨 집안의 후계자로서 상업 관리라는 점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훈련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때 요리를 배웠고, 스트레스를 푼 셈이었죠."이 주제에 대해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 기간 동안 그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고, 또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방금 전 제가 요리하는 걸 막은 것도 내 솜씨를 못 믿어서 그런 거죠?”한소은은 자신이 끓인 찌개를 한 입 먹었고, 분명 맛이 나쁘지 않았다.설령 그의 요리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해도 이런 식으로 그녀
밥을 먹고 난 뒤 한소은은 일어나 식탁을 치우려고 했지만, 또다시 그에게 제지당했다."움직일 필요 없다니까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앞으로 부엌은 당신 금지 구역이니까 들어오지 말아요.”“......”한소은은 조금 체념한 듯했다.“난 예전에도 항상 혼자 요리를 해먹었었는데......”"옛날은 옛날이고, 앞으로는 안 돼요!"그는 식탁에 놓인 식기를 말끔히 치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안에서 물줄기가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한소은은 부엌으로 가서 문틀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매를 높이 걷어붙여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고, 그의 피부는 매우 하얬지만 건강해 보이지 않는 창백함이 아닌 윤기 있는 새하얀 피부였다.그 두 팔이 그녀의 허리를 꽉 감았던 것을 생각하니 몸이 저절로 떨렸다."이제 그 일에 응할 생각인 거예요?”그가 설거지를 하면서 갑자기 말을 걸자 한소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응? 뭐라고요?”“그때, 그 재미없는 것들 말이에요.”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명예에 영향을 미쳤고 더군다나 지금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미래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김서진이 그녀 때문에 괜한 오점을 뒤집어쓰게 하지 않아야 했다."어떻게 할래요? 해명할래요?”김서진이 계속해서 물었고, 한소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이런 일은 해명할 것도 없고, 해명을 할수록 더 의심받을 거예요. 만약 내가 나서서그 사람들이랑 논쟁하면 그들은 더 좋아하겠죠.”그때가 되면 대중들은 그녀가 제발에 저려 화를 낸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아마도 일부 사람들이 그녀를 믿을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시간이든 명예든 다 망가질 것이고, 그녀는 새 회사에서 어떻게 버틸 것이며 동료들은 또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노형원과 강시유에게 그들은 단지 입만 움직이면 됐고, 돈을 써서 사람을 찾아 조작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