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원은 어이없어 그냥 웃었다. "내가 당신을 아끼는 걸 안다면 고집부리지 말아요? 어쨌든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이런 질투의 말을 들으면 그 어느 여자든 좋아한다. 강시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품으로 깊이 안겼다. "지금 질투하는 거네요. 정말 오랫동안 당신이 나를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정말 기뻐요!""그럼 이번에 더더욱 로젠 씨와 같이 가야겠네요." 그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감히!" 노형원 팔을 벌려 그녀의 목을 감싸고 사납게 말했다. "감히 그 남자랑 같이 도망친다면 내가 당신 다리를 부러뜨릴 거예요. 믿든 안 믿든!""아이고 무서워라!" 그녀는 메롱 하면서 뭔가 생각이 난 듯 쑥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걱정 마요. 설사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마음이 있더라도 어떻게 되지 않아요. 특히…지금.”"무슨 뜻이에요?" 노형원은 이해하지 못했다."임…."처음에 노형원은 무슨 뜻인지 반응하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리자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을 더 주면서 감격의 목소리와 함께 말했다. "임신했어요? 당신 임신했어요?! 애가 생긴 거예요? 내 거예요?!"기뻐서 날뛰는 모습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강시유는 약간 성내면서 그를 살짝 쳤다. "그거 말이라고 해요! 당신 애 아니면 누구 애겠어요!""그럼. 그렇지. 내가 아빠가 되네, 내가 아들 생겼네!" 그는 마치 아이를 만지고 있는 것처럼 기뻐했다."움직이지 말아요. 가능하다는 거예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확실하지 않다고요?"강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리 기간이 보름이나 지났는데 안 오고 또 요즘 자꾸 메스꺼워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확인해 봤는데 임신 맞는 거 같아요.”"임신이면 임신이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뭐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병원에 가서 검사받지 않았어요?" 이런 얘기는 남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아직 이른데 병원에 가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고 들었어요.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이 나왔는데 선명하지 않지만
강시유는 허리를 비틀며 말했다. "암튼 날 못 믿는 거잖아요!""그게 아니라, 가고 싶으면 가요. 이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해요."더 이상 그녀에게 어리광 부릴 틈을 주지 않는 것이 노형원의 마지막 한계이다.사실 마음속으로 그도 가고 싶었다. 이번에 전문가 수준인 조향사 몇 분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행사 참석 외에도 인재를 발굴하고 싶었다.그는 한소은의 일로 크게 곤두박질치고 나서 특히 인재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반드시 인재를 좀 더 많이 유치해야 한 사람이라도 빠질 경우 회사 경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끔찍했다!그런데 하필이면 이번에 오일 문제가 생겨서 지금까지 애쓰고 있는데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되므로 그가 직접 지켜봐야 해서 떠날 수 없다.강시유가 가도 나쁘지 않으며 이 참에 견문도 넓히고 나중에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한소은보다 경력과 스펙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충성하고, 이제 그의 아이까지 가졌으니 더욱 마음이 놓였다.아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아랫배를 바라보게 되는데 여전히 평평하지만 이미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다니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다.그의 뿌듯한 기분과 달리 강시유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놀러 가는 건데 뒤에 꼬리가 따라다니면 어찌 된 일인가! 게다가 로젠 씨는 어떻게 생각할까!그만하자. 지금은 말이 안 통할 것 같으니, 그때그때 상황을 지켜보면서 결정하기로 하였다.——한소은이 출장 가는 날, 누가 볼까 봐 김서진은 그녀를 배웅하지 않았고, 그녀는 심지어 집에 있는 기사가 배웅하는 것도 거절하고 혼자서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타고 갔다.떠나기 전 그녀는 은근히 투덜대는 누군가를 달래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진한 포옹을 하며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잘 다녀올게요. 보고 싶을 거예요. 사고 치지 말아요!""당신도요." 김서진은 그녀를 껴안고 복수한다 치고 그녀의 허리를 살짝 쥐었다."어이…" 이 남자, 진짜!그녀가 차에 올라 공항으로 달려가자, 김서진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차가
비행기, 탑 클래스 좌석에 앉은 강시유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강시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코너미석과는 다른 럭셔리함, 이 모든 건 옆에 앉은 로젠 덕분이다.노형원과 함께 출장을 떠날 때도 비행기를 타는 일은 많았지만 탑 클래스 좌석에 앉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형원은 아직 회사가 자리를 잡지 않아 아낄 수 있는 건 전부 아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강시유도 그런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노형원의 회사도 성공할 것이라고, 그러면 부잣집 사모님들처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탑 클라서 좌석에 앉는 순간, 강시유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왜 굳이 기다려야 하지? 이미 모든 걸 가진 남자도 있잖아?”“시혁 씨, 이번 품감회에 함께 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혹시라도 실수한 게 있다면 바로 지적해 주세요.”강시유가 싱긋 미소 지었다.“시유 씨는 아주 똑똑한 사람인 것 같아요.”강시유를 훑어보던 로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배우는 속도가 꽤 빠르더구나.”“그래요?”강시유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더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시혁 씨한테서 더 많이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머리카락을 넘기는 강시유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로젠이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대답했다.“분명 있을 겁니다.”“그럼...”강시유가 뭔가 더 말하려는 그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강시유의 눈이 커다래졌다.한소은?! 쟤가 여긴 왜 온 거야!한편 한소은과 조현아는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탑 클래스 좌석 구역으로 이동한 것이었다.비행기에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워낙 중요한 출장이라 회사 복지 차원에서 특별히 좌석을 탑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했다고 말이다.그냥 단순히 기뻐하는 조현아와 달리 한소은은 의아한 마음이 더 컸다.정말 단순히 차 대표가 내린 결정인 걸까? 아니면..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좌석에 앉은 조현아가 싱긋 웃었다.“이번 비행은 지루하지 않겠는데요?”“그럴 리가요.”한소은이 담담하게 말하더니 담요를 덮었다.“저쪽에서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한소은은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그녀는 출장 중이다. 강시유와 나쁜 감정으로 얽히긴 했지만 절대 사적인 일로 회사 일정에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재밌네요.”조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강시유 씨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건가요?”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그런데 말이에요. 강시유 씨 옆에 앉은 외국인 왠지 낯이 익은데요?”조현아가 다시 한번 그쪽을 힐끗 바라보았다.딱 봐도 노형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강시유와 노형원은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니는 닭살 커플 아니었나?물론 한소은도 이를 발견했지만 외국인의 정체가 누군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소란 없이 이번 비행을 마치길 바랄 뿐이었다.“팀장님, 전 일단 좀 자야겠어요. 품감회는 저녁이잖아요?”말을 마친 한소은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하, 결국 무시하는 쪽을 택하겠다?싱긋 웃던 조현아도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다. 간만에 누리는 회사 복지인만큼 뽕을 뽑아야겠지.한편, 강시유는 안절부절 못하며 한소은 쪽 좌석을 계속 돌아보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잠든듯한 모습에 강시유의 마음은 더 착잡해졌다. 처음 타보는 톱 클래스 좌석에 마음이 잔뜩 부풀어있었는데 한소은 저 계집애 때문에...게다가 그녀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잠까지 청하는 걸 보니 더 천불이 일었다. 며칠 동안 그녀와 노형원은 오일 제조법을 알아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오늘 노형원이 품감회에 동행하지 않은 것도 오일 원료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이렇게 큰 사고를 쳐놓고 속 편하게 잠이나 자?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에 힘을 주려던
비행기가 착륙하고 승객들이 하나 둘 공항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노형원은 강시유를 위해 5성급 호텔은 물론 고급 차량까지 불러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에 타려던 강시유는 한소은이 어떤 차를 타는지 궁금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비록 신생은 환아라는 대기업을 등에 업고 있지만 결국 소규모 지사일 뿐, 단순히 호사 규모만 놓고 본다면 시원 웨이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톱 클래스 티켓? 그거야 뭐 우연이겠지.“고객님?”문을 연 강시유가 차에 타지 않자 기사가 고개를 갸웃했다.“아, 네.”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시유가 차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한소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여유롭게 트렁크를 끌고 나온 한소은과 조현아의 앞에 선 차는...롤스로이스였다!강시유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차에 대해 전혀 모르는 강시유도 롤스로이스 로고는 알고 있었다. 무슨 시리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롤스로이스인 이상 분명 억대 이상일 것이다.아니야. 그냥 우연히 앞에 선 거겠지. 저 차에 탈 리가 없어!손잡이를 쥔 강시유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롤스로이스에서 내린 기사가 트렁크를 받아 차에 싣고 차 문까지 열어주는 걸 본 순간, 일말의 희망마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그렇게 한소은과 조현아가 탄 차는 여유롭게 그녀의 앞을 지났다.왜! 한소은 저딴 계집애가 뭐라고 롤스로이스까지 불러준 거야! 왜!강시유는 고개를 돌려 벤츠 로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도 으쓱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꿀리는 기분이었다.“저쪽은 벌써 갔어요. 얼른 타요.”이미 차에 앉은 로젠이 덤덤하게 말했다.그제야 강시유는 차에 몸을 실었다. 꼭 깨문 입술이 금방이라도 피를 뿜어낼 듯 빨갛게 부어올랐다.강시유에게 한소은은 마치 불운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든 한소은만 나타나면 나쁜 일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강시유는 로젠을 힐끗 바라보았다. 말투를 보아하니 그녀와 한소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알고 있는 듯하고 비행기 안에서 그리
돈이 좋긴 좋구나 싶었다. 부자들은 어딜 가나 이런 대접을 받을 거란 생각에 질투심이 밀려왔다.로젠은 젠틀하게 그녀를 먼저 호텔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하지만 방문을 여는 순간 강시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쾌적한 공간, 킹사이즈 침대, 냉장고, 전자레인지까지 일반 호텔과 비교하면 훨씬 좋은 조건이었지만 실망감은 감출 수 없었다.“시유 씨, 짐은 여기 둘게요. 그럼 푹 쉬어요.”로젠이 강시유의 어깨를 두드렸다.“잠깐만요!”로젠이 방문을 닫으려던 순간, 강시유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잠깐만요!”그녀의 목소리에 로젠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게...”한참을 망설이던 강시유가 결국 입을 열었다.“아, 그게... 아직 별로 안 졸려서요. 그러니까... 로젠 씨 방 좀 구경해 봐도 될까요?”로젠은 아무런 말 없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왠지 불편한 기분에 강시유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물론이죠!”그렇게 강시유는 로젠과 함께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 숫자가 점점 올라가는 걸 바라보는 강시유는 마음은 왠지 콩닥거리기 시작했다.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진짜 부자들의 삶을 엿보고 싶었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시유 씨?”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시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도착... 했네요.”로젠은 싱긋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나섰고 그녀도 그의 뒤를 따랐다. 역시 스위트룸은 복도부터 엘리베이터가 달랐다. 그리고 로젠이 방문을 연 순간, 강시유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도시 전체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탁 트인 창문, 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리고 푸른 숲...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그리고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온 강시유는 그제야 이곳이 스위트룸의 거실일 뿐임을 눈치챘다.하지만 거실만 봐도 강시유의 방보다 훨씬 더 쾌적했다. 고급스러운 재질 소파, 최고급 브랜드의 정수기와 커피 머신 온갖 비싼
순간, 강시유의 몸이 어색하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로젠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귓가에 로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마음에 들어요?”어색한 한국어, 이국적인 얼굴, 화려한 호텔방, 로젠은 그녀와 다른 세계에 다른 사람이었다. 잔뜩 굳은 채 로젠의 품에 안긴 강시유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이것들... 가지고 싶지 않아요?”로젠이 다시 물었다.잠깐 고민하던 강시유는 방금 전보다 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 물론 가지고 싶죠!”이것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상류층의 삶이 바로 눈앞에 있다. 잘 사는 남자를 만나 평생 먹고 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보장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그녀가 재벌 2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0에 가까웠다. 우정을 배신하면서까지 유혹한 노형원마저도 일개 스타트업 회사 대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노형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언젠가 노형원과 시원 웨이브가 성공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과연 그녀의 바람대로 시원 웨이브는 몇 년간 승승장구했고 업계에서 나름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비록 대외적으로 노형원은 여전히 한소은의 남자친구였지만 진작 그녀에게 넘어온 터라 노형원과의 결혼은 떼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다.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표절 사건부터 오일 제조법 위기까지 그녀가 쌓아온 모래성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녀가 금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시원 웨이브는 제품 원료 하나 때문에 근본이 흔들릴 정도로 연약했다. 중소기업은 어디까지나 중소기업 대기업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바꿔줄 거라 믿었던 남자 노형원은 이러한 사태들을 해결함에 있어 비굴하게 한소은에게 부탁하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무능한 남자의 미래라...상상하는 것 자체가 두려울 정도로 암울했다.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강시유가 배운 게 하나 있었다.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생각했지만 진짜 상류층,
너무나 쉽게 돌아서는 로젠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강시유 쪽이었다.로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더니 캔맥주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시유 씨,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네요.”고개를 젓던 로젠이 말을 이어갔다.“난 시유 씨가...”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로젠이 어깨를 으쓱했다.“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요? 강시유 씨가 원하는 걸 마침 내가 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걸 마침 강시유 씨가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엄밀히 말하면 강시유에게 차인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로젠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유로움에 강시유는 더 비참한 기분이 밀려들었다.“아,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거절의 뜻을 밝힌 여성을 힘으로 굴복시킬 생각은 없으니까요.”고개를 끄덕이던 로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이제 이만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서요.”대놓고 나가라고 눈치를 주는 로젠의 모습에 강시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로젠은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고 젠틀한 태도로 일관했으니 화를 내려 해도 명분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전 이미 거절의 뜻을 밝혔으니 이제 와서 말을 돌리는 것도 꽤 쪽팔린 일이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푹 쉬세요.”결국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방문을 나서려던 그때, 로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시유 씨!”강시유가 발걸음을 멈추었다.“앞으로 여기서 일주일 동안 있어야 하잖아요? 그 동안 천천히 고민해 봐요.”맥주캔을 든 로젠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네...”강시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방을 나섰다.방에 혼자 남겨진 로젠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젠가 강시유가 넘어오게 될 거란 걸 알고 있 듯이 말이다.한편, 강시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