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강시유의 몸이 어색하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로젠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귓가에 로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마음에 들어요?”어색한 한국어, 이국적인 얼굴, 화려한 호텔방, 로젠은 그녀와 다른 세계에 다른 사람이었다. 잔뜩 굳은 채 로젠의 품에 안긴 강시유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네.”“이것들... 가지고 싶지 않아요?”로젠이 다시 물었다.잠깐 고민하던 강시유는 방금 전보다 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 물론 가지고 싶죠!”이것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상류층의 삶이 바로 눈앞에 있다. 잘 사는 남자를 만나 평생 먹고 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런 삶이 보장된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인 그녀가 재벌 2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0에 가까웠다. 우정을 배신하면서까지 유혹한 노형원마저도 일개 스타트업 회사 대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노형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언젠가 노형원과 시원 웨이브가 성공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과연 그녀의 바람대로 시원 웨이브는 몇 년간 승승장구했고 업계에서 나름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비록 대외적으로 노형원은 여전히 한소은의 남자친구였지만 진작 그녀에게 넘어온 터라 노형원과의 결혼은 떼놓은 당상이라 생각했다. 모든 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표절 사건부터 오일 제조법 위기까지 그녀가 쌓아온 모래성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녀가 금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시원 웨이브는 제품 원료 하나 때문에 근본이 흔들릴 정도로 연약했다. 중소기업은 어디까지나 중소기업 대기업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바꿔줄 거라 믿었던 남자 노형원은 이러한 사태들을 해결함에 있어 비굴하게 한소은에게 부탁하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무능한 남자의 미래라...상상하는 것 자체가 두려울 정도로 암울했다.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강시유가 배운 게 하나 있었다.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생각했지만 진짜 상류층,
너무나 쉽게 돌아서는 로젠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건 강시유 쪽이었다.로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더니 캔맥주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시유 씨,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네요.”고개를 젓던 로젠이 말을 이어갔다.“난 시유 씨가...”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던 로젠이 어깨를 으쓱했다.“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요? 강시유 씨가 원하는 걸 마침 내가 줄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걸 마침 강시유 씨가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엄밀히 말하면 강시유에게 차인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로젠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여유로움에 강시유는 더 비참한 기분이 밀려들었다.“아,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 거절의 뜻을 밝힌 여성을 힘으로 굴복시킬 생각은 없으니까요.”고개를 끄덕이던 로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이제 이만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서요.”대놓고 나가라고 눈치를 주는 로젠의 모습에 강시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로젠은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고 젠틀한 태도로 일관했으니 화를 내려 해도 명분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전 이미 거절의 뜻을 밝혔으니 이제 와서 말을 돌리는 것도 꽤 쪽팔린 일이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푹 쉬세요.”결국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지 못하고 방문을 나서려던 그때, 로젠이 다시 입을 열었다.“시유 씨!”강시유가 발걸음을 멈추었다.“앞으로 여기서 일주일 동안 있어야 하잖아요? 그 동안 천천히 고민해 봐요.”맥주캔을 든 로젠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네...”강시유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방을 나섰다.방에 혼자 남겨진 로젠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언젠가 강시유가 넘어오게 될 거란 걸 알고 있 듯이 말이다.한편, 강시유
노형원의 말에 강시유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시 봐도 로젠의 스위트룸과 비교하면 초라할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강시유가 대답했다.“나쁘지 않네.”“뭐야? 나쁘지 않다니. 그 방 다른 방보다 훨씬 더 비싸다고.”시큰둥한 강시유의 반응에 노형원이 오히려 불만섞인 표정으로 구시렁댔다.“뭐 비싸면 얼마나 더 비싸다고 그래.”평소라면 바로 의견을 굽혔겠지만 강시유도 마음이 착잡하니 말이 이쁘게 나갈 리가 없었다.“5만 원이다 더 비싸다고.”하지만 강시유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말을 이어갔다.“시유야, 우리 사정이 예전보다 나아진 건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 회사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새로운 직원도 뽑아야 하고 시장 규모도 더 확대해야 해. 내가 계산해 봤는데 앞으로 한동안은 좀 더 아끼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 그래도 앞으로는...”“앞으로는! 앞으로는! 그놈의 앞으로는!”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시유가 결국 버럭했다.“내가 원하는 건 지금이야! 그런데 넌 맨날 앞으로란 소리밖에 안 하더라? 그렇게 막연한 미래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고!”울분을 쏟아낸 강시유의 뺨으로 눈물 한 줄기가 쏟아져내렸다.강시유가 이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라 노형원도 당황했는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시... 시유야?”노형원이 더듬거렸다.“너 오늘 기분 별로야?”“응!”“나 때문에?”잠깐 고민하던 노형원이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로젠 그 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노형원이 로젠을 언급하자 괜히 찔린 강시유가 반박했다.“그럴 리가 있겠어.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네 머릿속에는 그런 거밖에 안 들었지? 다 한소은 그 계집애 때문이라고!”“한소은?”생각지 못한 이름에 노형원이 흠칫했다.“한소은 만났어? 걔도 진해시에 간 거야?”“그래! 걔도 톱 클래스 좌석에 마중 온 차는 롤스로이스더라! 노형원, 이게 뭐야! 왜 걔는 시원을 나가고 승승장구 중인데 너랑 난 이렇게 궁상이나 떨고
“시유야? 시유야?”몇 번이나 강시유의 이름을 부르던 노형원은 결국 굳은 표정으로 통화를 종료했다.한소은? 걔도 진해시에 있다고?그리고 다시 강시유의 말을 되돌이켜 보았다.톱 클래스 좌석? 롤스로이스? 신생이 그렇게나 통이 큰 회사였나? 아무리 환아 산하라고 하지만 일개 지사에게까지 이 정도 서포트가 들어간다고?“대표님.”이때 실험실 직원이 밝은 표정으로 달려왔다.“신제품 테스트 결과 나왔습니다. 예전과 똑같아요!”“그래요?”기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노형원은 곧 다시 감정을 제어했다.“정말 완전히 일치한 거 맞죠? 단 한 치의 차이도 있어선 안 됩니다!”한소은, 그녀가 만든 향수는 마치 특별한 마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고객들을 마니아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향이 조금만 달라져도 바로 극성팬들의 항의가 올라오곤 했다. 이번 사태가 이렇게 큰 물의를 일으킨 것도 바로 예민한 팬들의 후각 덕분이었다.그래서 100% 일치 여부에 대해 노형원이 이렇게나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다.“...”실험실 직원은 방금 전 테스트 결과를 돌이켜 보는 듯 잠시 침묵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네! 완전히 똑같습니다!”“좋아요!”노형원은 신제품을 확인하기 위해 바로 실험실로 달려갔다. 테스트 용지에 향수를 뿌리고 시향하는 순간, 며칠 내내 찌푸려졌던 노형원의 미간에 드디어 힘이 풀렸다.“어서 제조법을 공장에 제출하세요. 밤을 새서라도 제품 출시일에 맞춰야 합니다. 이번에는 모든 게 명심해야 해요.”말을 마친 노형원은 또 뭔가 떠올린 듯 말했다.“아, 아닙니다. 내가 직접 갔다 오죠.”워낙 중요한 일이라 사원들에게 맡기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럼 이제 조금만 더 수고해 줘요.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휴가에 보너스까지 쏘겠습니다!”“네, 감사합니다. 대표님!”직원들은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러 갔다.실험실을 나서려던 노형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아, 오이연 씨는 오늘도 출근 안 한 겁니까?”“오늘... 개인적인
“대표님?”오이연은 상황 파악을 하려 애 쓰며 눈을 깜박였다.“저희 집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오늘 회사에 안 나왔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회사 상사로서 부하 직원의 신변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문 밖에 서 있는 노형원은 오이연이 문구멍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라도 챈 듯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훅 들어온 노형원의 얼굴에 깜짝 놀란 오이연이 뒷걸음질 쳤다.“대표님!”“오이연 씨, 문도 안 열어줄 겁니까? 이렇게 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할 건가요?”“그게 대표님... 제가 오늘은 몸도 안 좋고 집에 저 혼자라서 좀...”물론 아프다는 건 뻥이었고 노형원과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좋은 일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을 테고... 그나마 엄마가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게 다행이라 싶었다.이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아, 안녕하세요. 오이션 씨 회사 대표 노형원이라고 합니다.”“네? 대표님이요?”회사 대표라는 말에 오이연의 엄마는 바로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왜 여기 서 계세요. 이연이 집에 있는데. 이 계집애 분명 자느라 못 들은 걸 거예요. 제가 문 열어드릴게요.”“젠장...”엄마가 온 이상 문이 열리는 건 시간 문제. 오이연은 일단 방으로 다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대표님, 편하게 앉으세요!”오이연의 어머니는 장에서 사온 야채들을 식탁에 올려둔 뒤 다시 오이연을 부르기 시작했다.“이연아! 이연아! 대표님 오셨다니까.”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오이연의 엄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일단 앉으세요. 얘가 워낙 잠귀가 어두워서 한번 잠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니까요.”“그래요? 아까 인기척을 들은 것 같은데.”소파에 앉은 노형원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방에 돌아와 대화를 엿듣고 있던 오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숨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에 결국 방문을
그런데 노형원이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는 건 완전히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괜찮긴!”오이연의 어머니가 딸의 등을 찰싹 때렸다.“어쩐지 요즘 좀 이상하다 했어! 너 왜 그래? 회사는 왜 안 나간 거야!”오이연의 어머니는 속상해 주겠다는 표정으로 오이연의 등을 몇 번 더 내리쳤다.말없이 맞고만 있던 오이연이 한숨을 푹 쉬었다.“엄마, 내 일이니까 엄마는 신경 쓰지 마.”“하이고, 나야말로 정말 네 인생에 신경 끄고 싶어! 그럼 네가 알아서 잘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얼마나 못 나게 굴었으면 대표님이 직접 집까지 찾아오셔!”“엄마...”한편, 노형원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모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이연이 몇 대 맞은 뒤에야 느릿느릿 일어서며 어머니를 말렸다.“어머님, 이연 씨도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혼내지 마세요. 그리고 저도 오이연 씨 혼내러 온 거 아닙니다. 진심으로 부하 직원이 걱정돼서 온 거예요.”“대표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나가서 하시죠?”노형원, 이 비겁한 자식! 집까지 찾아와서 부하 직원 걱정하는 대표인 척 연기를 해? 오이연은 속에 천불이 이는 기분이었다.반면 노형원은 목적도 달성했겠다 바로 어깨를 으쓱했다.“네, 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오이연의 어머니는 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다급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 이연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애 같은 구석이 많아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많이 가르쳐주세요. 혹시 실수라도 하면 엄하게 혼내시고요!”“엄마, 그만 좀 해!”오이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하지만 오이연의 속을 알 리가 없는 어머니는 부모 마음도 몰라주는 딸이 야속하기만 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이연 씨는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니까요.”자리에서 일어선 노형원이 싱긋 미소 지었다.“네, 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오이연의 어머니가 딸에게 눈치를 주었다.“어서 고맙다고 말씀드려!”어느새 문 앞까지 걸어간 오이연이 짜증스레 말했다.“대표님,
그녀의 당혹스러운 시선에 노형원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다소 득의양양하게 웃었다.“못 믿겠으면 실험실로 가서 직접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세요.""오이연 씨,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어요, 한소은이 이연 씨에게 뭘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떠났고 이미 매우 자유로운 상태인데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신경 쓴 적 있나요? 지금 그 사람이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롤스로이스로 픽업 받는 걸 알기나 해요? 근데 당신은요? 이연 씨는 어머니와 이런 낡은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연 씨는 지금 저한테 성질을 부리면서 무단결근까지 하고, 그 월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일 년, 아니면 석 달? 그 다음은……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이연 씨 계약은 아직 2년 남았습니다, 만료되기 전까지 전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사직서를 제출해도 저는 승인하지 않을 거고, 억지로 가려고 하면 위약금을 가져오세요! 오이연 씨, 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뒤에 기댄 채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마치 승리를 거머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오이연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노형원은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고 느꼈고, 웃음은 점점 더 깊어졌다."오이연 씨, 사실 저는 당신에게 매우 관대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연 씨가 요즘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어떤 대표가 이연 씨를 용납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무슨 소란을 피웠는지 한 번 말해볼래요? 나랑 한소은의 일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저도 한소은과 개인적인 문제인 건데, 당신 끼어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말을 마친 뒤, 봉투를 탁자 위에 놓았다."이거는 수고비니까 받으세요. 마음을 잘 추스르고 출근해요, 과거는 신경 쓰지 말고요,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을 겁니다.” “노형원 대표님.” 오이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은 뒤 봉투를 짓누르며 말했다. “일은 제가 하겠지만, 돈은……받을 수 없겠네요.” 이어 그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면 월급 없는 날이 계속되고, 집세, 수도, 전기, 생활비, 모든 게 돈이 필요했기에 돈이 없다면 매우 곤란했다. 돌아가서 정상적으로 일하고, 만약 노형원이 계속해서 그녀를 압박한다면 그녀는 그를 고소할 수 있었고, 더군다나 그녀도 돌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 보고 싶어 했다. 시원 웨이브의 사람들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고, 만약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이전처럼 난장판이지 않았을 것이고 노형원도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360개 업종에서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더욱 적다.이것이 시원 웨이브가 한소은에게 이렇게 의존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설마……강시유에게 정말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건가? ——저녁 6시, 디 메리어트 호텔. 강시유는 노형원과 통화한 후 한참을 울다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자 벌써 5시가 넘었다.저녁에 또 행사를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샤워하고 단장했다. 그녀는 사실 미모가 매우 강점이었고, 생김새가 온화하고 예쁘며, 게다가 자신의 장점을 잘 활용할 줄 알았다.그녀의 눈썹꼬리 부분의 분위기는 매우 남달랐기 때문에 노형원을 그렇게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오후에 잠깐 울었을 뿐인데도 강시유의 눈은 부어 있었다. 강시유는 한숨을 내신 뒤 아이섀도를 꺼내 짙은 색상으로 가리고 파우더를 발라 전체적으로 정돈을 하자, 붓기는 잘 보이지 않고 얼굴이 더욱 화사하게 빛이 났다. 펜슬을 내려놓고 그녀는 립스틱을 가지고 와서 입술에 발랐고, 몇 번 바르지 않았을 때에 속이 갑자기 울렁거렸으며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불편해졌다. 그녀는 얼른 입술을 가리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토를 했고, 사실 아무런 이물질이 나오지 않았고 그저 물만 토해냈으며, 속이 매우 쓰라렸다.긴장을 풀자 그녀는 한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점점 더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그녀가 정말로 임신을 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 말이다. 그녀의 기분은 매우 애매했고,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