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는 룸 안에서 찾은 분홍색 알약과 흰색 가루를 심명에게 보여주었다."대표님, 경찰에 신고할까요?""경찰에 신고하지 마요, 신고하지 마요!"그는 누구보다도 경찰을 무서워했다!"경찰에 신고해!" 심명은 차갑게 입을 열었고 발로 이혁을 걷어찼다."냄새나는 쓰레기 주제에 감히 내 구역에서 약을 먹어? 죽으려고 작정했나!"매니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럼 이 cctv 기록은 경찰에게…...""지워!"심명은 그의 말을 끊고 담담한 목소리로 화면 속 여자애를 가리키며 명령했다."그녀가 나타난 화면만 모두 삭제해버려. 경찰이 물으면 인터넷이 끊겼다고 해."로비 매니저는 심명이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심명은 또 웨이터 한 명을 불렀다."잠시 후에 네가 경찰서에 가서 증인하고 와. 이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자기들끼리 문제가 생겨서 싸운 거라고, 알았어?"웨이터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표시했다.이 사람들은 평소에 좋은 일 외에는 다른 더러운 짓거리를 너무 많이 했기에 경찰서에 들어가면 그들이 이전에 한 짓들만 조사해도 한참 걸릴 것이다.심명이 떠나기 전에 또 룸 안에서 울부짖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힐끗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독하긴 독해. 지난번에 자신이 그녀한테 맞은 것을 생각하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뻐했다. 보아하니 그녀는 그래도 나름 그를 봐줬던 것이었다!룸 안으로 돌아와서 심명은 매니저더러 소희가 떠난 동영상을 그에게 보내라고 했다.그는 영상을 두 번 보며 표정은 매우 흥분했다. 그녀가 사람을 때리고 떠날 때 평온한 표정으로 외투를 벗은 뒤 닥치는 대로 쓰레기통에 던진 것을 보면 유난히 멋있었던 것이다!만약 두 사람 사이에 원한이 있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그러나 자신이 그녀를 크게 도왔으니 그는 어떻게 그녀더러 갚아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 했다!......10분 뒤, 구택은 소희를 차에서 안아 내렸다. 그녀는 온몸에 뼈가
구택은 온몸에 힘을 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쥐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까불지 마요, 나도 남자니까요!"모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밀폐되고 더운 공간에서, 그는 남자였고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유혹하는 여자였다.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눈빛 속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며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다가와요!"구택은 숨이 멎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자신이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요?""응." 소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대답인지 아니면 저절로 나오는 신음 소리인지 그는 잘 몰랐다.구택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나는 소희 씨의……"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소녀는 갑자기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으며 즉시 힘껏 그의 입술 안으로 혀를 내밀었다.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몸속의 벌레들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어릴 때부터 받은 훈련은 그녀에게 생명은 언제나 최우선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자신의 생명을 잘 보호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하물며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그러니 그는 마땅히 그녀를 도와야 했다.구택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운 밤, 그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눈을 감고 소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기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안 돼요!"이 두 글자를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이것은 소희를 경고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경고하는 건지 그는 잘 몰랐다."왜 안 돼요?" 소희는 욕실 벽에 기대어 작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응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녀는 억지로 일어섰다."당신이 안 된다면 다른 사람 찾아가서 해결할 수밖에 없네요!"그녀는 그를 밀치고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몇 걸음 만에 갑자기 누군가에게 팔을 잡히며 그의 품 안에 안겼다.그녀는 남자의 목을 꼭 잡으며 그의 팔에서 전해오는 힘을 느꼈다.구택은 그녀를 안으며
이튿날 아침, 소희가 깨어났을 때 날은 이미 밝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낯선 방을 보며 한참 지나서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났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침대에 그녀 혼자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구택도 창문에서 뛰어내린건 아니겠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소희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니 남자가 그녀를 등진 채 베란다에 서서 전화를 하는 것을 보았다.구택은 목욕가운을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에 가는 허리, 그리고 늘씬하고 긴 두 다리. 뒷모습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그는 명우에게 물었다."소 씨네와의 계약은 아직 며칠 남았지?"소희는 마음속으로 계산해 보니 아직 한 달 정도 남았다.전화기 너머로 명우는 그에게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었다.구택은 목소리가 담담했다."소 씨네 집에 연락하여 앞당겨서 파혼해. 요 며칠 수속 밟아."그는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다. 소 씨네 집안에 줘야 할 것도 이미 준 상태였다. 비록 그와 소 씨네 아가씨는 만난 적이 없고 그녀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외국에서의 이 3년 동안 그는 이 결혼을 이미 충분히 존중했고 그녀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다.귀국 후, 그는 어쩔 수 없이 강요당해서 그런 일을 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든 간에 그는 혼인에서 서로 충성하는 신조를 어겼고 더 이상 소 씨네 아가씨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소희는 남자의 듬직한 뒷모습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찌질이네, 자자마자 이혼이라니!"그녀가 속으로 욕을 할 때 남자는 이미 전화를 끊고 들어왔다.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태연했다. 소희도 일부러 침착하게 물었다."내가 입을 수 있는 잠옷 있어요?"그들은 호텔에 있지 않았다. 회백색에 인테리어가 간단한 것을 보면 이곳은 아마도 구택이 임시로 휴식하는 오피스텔 같았다.구택은 나갔다 바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 셔츠 하나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지내는 집을 원하는 건가요?" 구택이 다시 물었다.소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너무 가까워서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지금 그녀는 구택의 악마스러운 모습을 본 것 같다.구택은 고개를 숙이자마자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하며 바로 일어났다. 그는 약간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나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거든요. 하룻밤 보냈다고 집 한 채를 주면 나 좀 손해 보거든요."남자는 부드러운 것 같기도 냉정한 것 같기도 했다.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뒤섞여 있어서 그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눈빛은 냉담했고 싸늘했다.소희는 어젯밤 밥을 먹지 않은 데다 또 꽤 오래 운동했으니 지금 아미노산이 결핍하여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아 혼돈 상태에 빠졌다.그녀는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구택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어젯밤 즐거웠어요?"티를 내지 않고 숨을 들이마신 소희는 이불 밑에 있던 손바닥에 땀이 나며 축축해졌다."이 집은 강성대와 아주 가까워요. 평소 8시 30분에 수업 있는 소희 씨가 여기에서 지내면 8시 15분까지 늦잠을 자도 되죠. 앞으로 이 집이 완전히 소희 씨의 것이 되면 그때 소희 씨의 할아버지를 데려올 수도 있고요."구택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똑똑한 사람이라 굳이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소희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경악하여 입을 열었다."지금 나더러 구택 씨의 애인을 하라는 말인가요?"구택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이게 바로 소희 씨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어요?"소희는 그를 계속 쳐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웃긴 그녀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누워 이불에 머리를 묻히며 어깨를 떨며 웃었다."왜 웃어요?" 구택이 물었다.하도 웃어서 눈물까지 난 소희는 이불 위에 엎드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구택을 바라보며 입가의 미소를 거두고 담담하게
방문이 닫힌 순간, 소희는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 구택과의 대화를 돌이켜보면 좀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은 맞은편 캐비닛에 충전하고 있었다. 전원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전원을 켜자마자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카카오톡 문자가 튀어나왔다.청아가 보낸 것도 있었고 오 씨 아주머니가 보낸 것도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온 문자는 바로 소정인이 보낸 것이었다.그녀는 소정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고 있었기에 먼저 청아와 오 씨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청아는 너무 급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려 했다. 그녀는 어젯밤 소희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보고 줄곧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또 블루드에 달려가서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마터면 청아는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소희는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다며 그녀에게 안부를 전했다.청아는 전화 너머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다니 다행이야. 아 맞다, 내가 어젯밤에 다시 블루드에 갔을 때 문밖에 경찰차가 있는 거 봤어. 이혁 그 사람들이 모두 잡혀갔더라고."그녀는 당시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희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이건 어찌 된 일이었을까?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아마도 블루드의 사람이 신고한 거야."그녀의 계획에 따르면, 이혁은 스스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블루드의 사람이 경찰에 신고한다면 그녀는 푸른 독수리더러 cctv 기록을 지우게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만약 경찰이 그녀를 찾는다면 그녀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하지만 약을 탄 술을 마시는 바람에 그녀의 계획이 흐트러졌고, CCTV는 삭제되지 않았다. 이혁이 만약 그녀를 고발했다면 지금 아마도 경찰이 그녀를 찾았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부재중 전화를 뒤졌지만 경찰서의 전화는 없었다.청아를 위로한 뒤 그녀는 또 오 시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한 후에야 소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소정인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소희를 봤을 때 항상 무뚝뚝한 그는 보기 드물게 놀라움을 표시했다.소희는 일어나서 예의 있게 말했다."앉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어요."명우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서 소희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그렇구나!일이 이렇게 되다니!소희는 담담하게 웃었다."놀랄 거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명우 씨를 더 놀라게 만들걸요."......30분 뒤 명우는 소희와 함께 카페를 떠났다. 한 사람은 왼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두 사람은 마치 낯선 사람처럼 갈라졌다.두 사람은 방금 새로운 협의에 달성했다.명우는 차에 탔을 때까지 아직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소희가 바로 구택의 아내라니. 더욱 믿기 힘든 것은 자신이 방금 그녀를 도와 이 사실을 함께 숨기겠다고 대답한 것이다.그는 뒤늦게 자신이 소희를 얕잡아 봤다고 느꼈다. 그녀는 앳되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모든 사람을 속였다.그녀는 구택 앞에서 아무런 흔적도 드러내지 않고 심지어 자신을 설득해 이 사실을 숨기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만약 어두운 곳에 매복했더라면 기필코 치명적인 한방을 날릴 것이다.이혼 수속을 밟을 필요가 없으니 명우는 요 며칠 무슨 핑계로 구택을 속일지 생각했다.다행하게도 구택은 줄곧 그를 믿었다.......소희는 청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희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매우 흥분했다."소희야, 너 집에 갔어? 내가 이따가 너 데리러 갈게. 우리 같이 놀러 가자."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오늘은 안 돼. 나 지금 돌아가서 짐 정리하고 이사 준비해야 돼.""이사?" 연희는 영문을 몰라 물었다."어디 이사 가려고?"소희는 싸늘하게 웃었다."다 네 덕분이지. 어젯밤에 왜 안 왔는데?""무슨 말이야? 어디 가?" 연희는 멍했다.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 전화 못 받았어?"그녀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즉시 통화 기록을 뒤져 어제저녁 1
밥을 먹고 소희는 물건을 정리하러 올라갔다. 오 씨 아주머니는 자신이 만든 케이크, 아이스크림과 초코 젤리를 들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작은 아씨 만약 이것들 먹고 싶으면 돌아오세요. 내가 또 해드릴게요. 밖에서 파는 건 맛없어요."소희는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쉬워하는 눈빛을 보고 잠시 목이 메어 앞으로 다가가서 살포시 안아주었다."아마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아주머니는 목이 멘 채로 천천히 말했다."우리 두 사람은 여기서 작은 아씨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먼저 옷을 정리하고 내일 가지러 올게요. 앞으로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설희를 돌봐줘야겠네요!""그래야죠!" 아주머니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아씨도 몸 잘 챙겨요.""네!"……다음날 오후, 수업이 없던 소희는 별장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어정으로 가려 했다.옷과 책은 이미 다 정리된 상태였다. 그녀는 서랍 가장 안쪽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어 사진이 끼어 있는 그 페이지를 뒤졌다.사진의 배경은 원시림이었다. 9명의 사람들은 용병 제복을 입고 철모를 쓰고 얼굴에 위장을 그린 채 오직 늑대 같은 눈만 밖으로 들어냈다.중간의 남자는 포악하고 거칠어 보였고 매서운 눈빛으로 손을 옆에 있는 작은 꼬마의 어깨에 얹고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꼬마는 작고 말랐지만 눈빛은 매우 냉랭하고 매서웠기에 전혀 여자애 같지 않았다. 무언가가 문득 그녀의 바지를 잡아당기자 소희는 고개를 숙여 설희를 보았다. 그녀는 책을 덮은 뒤 다시 서랍의 가장 안쪽에 넣었다.설희는 그녀가 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계속 그녀 뒤를 졸졸 따랐다.소희는 설희를 안고 평소처럼 베란다의 소파에서 잠시 놀다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영상통화를 눌렀다.통화가 연결되자 고풍스러운 정원에서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나무를 다듬고 있었다. 그는 소희를 보고 방긋 웃으며 물었다."집에 오는 거야?"소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사 가는 거예요
소희는 그녀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침착한 척하며 대답했다."괜찮았어."연희는 계속 걱정했다."무슨 이상한 버릇없어?"소희는 귓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며 희미한 기억 속에서 찾아보았다."없을걸."연희는 안심하고 손으로 사물함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소희에게 던졌다."지금 임신하고 싶지 않으면 이거 먹어. 매번 한 알씩. 이 약은 안전해서 몸에 부작용이 거의 없지만 100% 안전을 위해 다음에는 콘돔을 쓰라고 해."소희는 약 박스를 한 번 보더니 약 한 알을 꺼내어 바로 입에 넣었다.4살 때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녀는 바로 복지원에 들어갔다. 여자의 생리, 감정, 그리고 성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연희가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그들은 서로의 절친이자 서로의 선생님 그리고 가족이었다.……어정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안은 소희가 떠날 때 그대로였다.요 며칠 구택은 오지 않았다.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짐을 내려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맞은편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연희가 물었다."만약 구택이 자주 오지 않는다면 너 혼자 거기서 지낸다는 거잖아. 그럼 너 밥은 먹을 수 있겠어? 도우미 아줌마라도 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스테이크를 천천히 썰며 눈도 들지 않았다."돈 없는 학생이 가정 교사 알바를 해서 월세 냈다 쳐도 도우미를 청하면 의심 사잖아."연희는 웃으며 물었다."그럼 언제까지 속이려고?"소희는 처음부터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가 한 말은 그녀로 하여금 그의 앞에서 신분을 밝힐 수 없게 했다. 후에 발생한 일들은 확실히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언제 들키면." 소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녀는 계속 말했다."임구택은 이곳에 별로 오지 않지만 방은 그래도 깨끗한 거 보면 가사도우미가 따로 있을 거야. 밥은 내가 하면 되는 거고."연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밥을 한다고? 하긴, 어차피
유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비 내리는 거리에서 방향도 없이 걸었다. 손에는 여전히 서인을 위해 산 셔츠가 들려 있었다. 서인에게 전해주지도 못한 채, 유진은 그것을 잊어버린 듯 꼭 쥐고 있었다.언제부터인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순식간에 흠뻑 적셔 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유진의 몸을 더욱 식혀 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오히려 유진을 속 시원하게 만들었다.[분명 포기하고 싶었는데.][하지만 여전히 널 붙잡고 싶어.][이렇게까지 부딪혔는데도, 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오랫동안 널 사랑했는데...][그냥 친구가 되는 건 너무 가혹해.][네가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걸 보고 싶지 않아.]길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더욱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서인은 늘 유진을 철없는 어린아이 취급했지만,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유진은 그렇게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도, 한순간의 설렘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뼛속까지 스며든 깊은 사랑이었다.하지만 결국, 유진의 마음은 공허한 바람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서인은 단 한 번도 유진에게 흔들리지 않았다.유진의 사랑은, 서인에게 있어서 오로지 부담일 뿐이었고, 그것이 그녀의 사랑 결말이었다.유진은 계속해서 떠올렸다.흥성에서의 그 며칠. 유진은 서인을 당연한 듯 의지했고, 장난도 마음껏 쳤다. 그리고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받아 주었다. 그게 마치 자신도 특별하다고 착각하게 했다.그래서, 이문 오빠의 생일날 밤 유진은 서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유진은 선을 넘었기에, 서인은 화가 났고 결국 유진을 밀어내 버렸다. 그러니 유진은 후회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그저 알 수 없이 눈물만 흘렀고, 빗물과 섞여, 감정을 숨길 수도 없었다.[날 차갑게 외면할 때, 넌 또 누구의 마음을 데우고 있는
유진은 애써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없이 낮추며 간신히 말했다.“지난번엔 내 잘못이었어요. 내가 순간적으로 충동적이었어요.”그러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진은 간절하게 속삭였다.“더는 사장님이 부담스러워할 말도 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을게요. 사장님을 곤란하게 하지도 않을 거예요.”“사장님이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눈물이 쏟아지는 걸 막지도 못한 채, 그녀는 마지막으로 애원했다.“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를 쫓아내려고 다른 여자를 이용하지 마요.”유진은 불안했다, 서인이 갑자기 진수아와 사귀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떠올랐다.‘지난번, 이문 오빠 생일날 내가 키스해서 화가 났던 걸까?’‘그때부터 모든 게 변해버린 걸까?’서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유진이 울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그는 속이 답답해지는 걸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임유진, 왜 아직도 모르겠어?”“너와 나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어.”“아무리 붙잡아도, 아무리 애써도, 결과는 변하지 않아.”그는 마치 자신에게도 되뇌는 듯,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사랑 같은 건 몰라.”“그냥 적당한 사람이면 돼. 그래서 진수아와 사귀는 거야.”유진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그럼 우리 둘은요? 우리는 맞지 않는 거예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단호하게 답했다.“맞지 않아.”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차가운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눈앞이 흐려지고,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유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도, 서인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더는 매달리지 마.’‘이건 사랑이 아니야. 그저 나 혼자만 미쳐 있는 거야.’유진은 조용히 뒷걸음질 쳤고, 눈물이 연신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시야 속에서 서인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오현빈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누굴 찾으시죠?”진수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사장님을 찾아왔어요.”그 순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평소처럼 검은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소박한 차림이었지만, 다부진 체격과 날카로운 이목구비 덕분에 여전히 눈에 띄는 분위기를 풍겼다.임유진은 진수아가 서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살짝 수줍은 기색까지 보였다.그러나 서인은 유진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오직 수아에게만 시선을 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위층에서 이야기하죠.”수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서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가슴 한쪽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이에 현빈이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아마도 형님의 친구겠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거겠고.”그러나 오직 유진만이 알고 있었다. 수아는 서인과 맞선을 본 상대라는 걸.시간이 길어졌고, 유진은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꾸만 위층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심지어 올라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엿듣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한 시간쯤 지나, 수아가 2층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수아의 얼굴은 처음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수아는 현빈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며 가게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그러다, 우연히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아, 여기서 일하고 있었네요?”수아는 놀랍다는 듯 말했고 유진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사장님을 구은정이라고 부르네?’그 순간, 수아도 무언가 떠올랐다. 과거 설날 맞선 자리에서, 유진과 유민이 자신을 골탕 먹였던 일을. 그녀는 경계의 눈빛을 띠며 물었다.“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현빈이 대신 대답했다.“꽤 오래됐어요.”수아는 현빈이 유진을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러고는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나 과일 주스 한 잔 가져와 줘요. 생과일로 직접 짠 걸로요.”그러나
오현빈이 다가와 말했다.“애옹이 데려왔어요. 그리고 형님, 같이 술 한잔하러 가시죠?”“너희들끼리 마셔.”서인은 무심하게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현빈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다들 보고 있어요. 유진이가 왜 매번 주말마다 여기 오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쇼핑도, 놀러 가는 것도 마다하고 굳이 여기 와서 서빙하겠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서인은 여전히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대답하지 않았다. 현빈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형님도 아시겠지만, 유진이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요. 이렇게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려온 사람이 또 있을까요?”“이제는 형님도 뭔가 답을 줘야 하지 않겠어요?”서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가 내뿜는 연기 속에서 복잡한 심경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그러다, 서서히 고개를 들고 차갑게 말했다.“걔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걔를 받아줘야 해?”그러고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덧붙였다.“어떻게든 결론은 내릴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술이나 마셔.”현빈은 서인의 말에 뭔가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형님 제발 신중하게 생각하세요.”그러나 서인의 태도는 단호했다.“사랑과 현실은 다르다.”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가웠다.“내가 원하는 게 유진이를 평생 이 샤부샤부 가게에서 살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서인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나는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현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서인은 담배를 힘껏 비벼 끄고 불을 껐다.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차단됐지만, 달빛이 여전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는 짜증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렸다.‘비 온다면서 왜 이렇게 달이 밝은 거야?’뒤척이기를 반복하다 결국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엇인가 손에 닿는 느낌이 들어 서인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커다란 천둥이 울려
우정숙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대답이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제가 임유진에게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에요. 그러니 유진이를 탓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고 철이 없을 뿐, 전부 제 문제예요.”우정숙은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래서 우리 유진이가 혼자만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군요?”서인은 굳게 다문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고, 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꽤 부담됐겠어요. 대신 사과할게요.”서인의 가슴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아니에요.” 우정숙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앞으로 유진이가 여기에 오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시간이 지나면 유진이도 점점 식어갈 테고,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죠.”서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방법을 생각해 보죠.”“좋아요. 믿을게요.”우정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서인은 2층 베란다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구은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에도 말했던 맞선 이야기요. 언제 진행할 건가요?”구은태는 뜻밖이라는 듯 놀라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드디어 마음을 정한 거야?]서인은 담담하게 말했다.“집에는 당분간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만나볼 수 있어요.”구은태는 한순간 고민하더니 물었다.[그러면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 거야?]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구은태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서인이 결혼을 전제로 여자를 만날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전화를 끊자마자, 구은태는 곧바로 서선영을 찾아가 맞선 일정을 조율했다.다음 날, 서선영이 서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만났던 진수아 어때? 사실 걔가 너를 마음에 무척 들어서 했어.]그리고 덧붙였다.[수아
서인은 새로 도착한 테이블을 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이거 내가 산 거 아닌데. 다시 가져가세요.”배송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손님, 임유진 씨가 이미 결제하셔서 반품이 어려워요.”서인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말했다.“그러면 테이블은 놔두고, 돈은 돌려주세요. 대신 내가 결제할게요.”그러나 직원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죄송해요, 이미 결제된 금액은 환불이 불가능해요.”서인의 얼굴에 짙은 불만이 떠올랐다. 하지만 배송 직원들에게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결국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후원에 놔두세요.”직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오현빈이 직원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갔다. 서인이 따라갔을 때, 테이블은 이미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최고급 황화리 원목으로 제작된 수제 테이블. 정교한 수공예로 깎아낸 꽃무늬 장식은 유명 장인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뒷마당의 분위기가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변했다.서인은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유진이 장난스럽게 말했던 말.“이 뒷마당엔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어요. 뭔가 값비싼 거라도 하나 놔둬야 하는 거 아닌가요?”유진은 일부러 이 테이블을 주문한 걸까?한편, 한쪽에는 부서진 낡은 탁자가 여전히 버려진 채 남아 있었다. 현빈이 그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건 이제 버려야겠네요!”그러나 서인은 한 번 흘깃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놔둬.”그 말에 현빈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현빈이 다른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서인은 부서진 탁자를 완전히 분해하고 있었다.그는 그 나무판자를 가져다가 애옹이와 야옹이의 집 사이에 덧대고 있었다. 애옹이는 아직 어려서 나무 지붕에서 야옹이 쪽으로 뛰어내릴 때마다 자주 미끄러졌다.하지만 이제는 그사이에 작은 다리가 생겼으니, 더 이상 떨어질 일은 없을 터였다.현빈은 벽에 나무판자를 못질하는 서인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우리 형님
임유민은 더욱 흥미로워하며 물었다.“구은정 아저씨는 어떻게 반응했어?”“그, 그게...”임유진은 문득 마지막 순간, 유진이 반사적으로 서인의 옷깃을 붙잡았던 기억이 떠올랐다.어두운 밤, 희미한 빛 속에서 본 그의 표정 다시금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진은 황급히 그 순간의 기억을 밀어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서인의 반응을 떠올려 보려 했다.하지만 그때 상황이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서로 예상하지 못했던 흐름에 유진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도망쳐 나왔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서인의 얼굴이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하지만 확실한 건 서인이 자신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 아주 잠깐 저항했던 것 같기도 하다.그러나 유진이 술김에 더욱 과감하게 나서자, 결국 서인도 서서히 받아들이며 주도권을 잡았던 듯했다.둘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탐하며 키스했다. 그 생각이 다시금 떠오르자, 유진은 또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다행히 어두운 테라스에서는 티가 잘 나지 않았다. 유민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는 신이 난 듯 말했다.“오! 잘했네! 이렇게 빨리 진전이 있을 줄이야!”유진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마.”유민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원했다.“힘내! 몇 번 더 키스하면 확실해질 거야.”“야!”유진은 유민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감정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하지만 과연 그런 기회가 다시 올까?’그날 밤, 서인은 뒷마당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문과 오현빈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누군가 서인을 불렀지만, 그는 대충 응답만 하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향했다.문을 열자마자, 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옹이가 언제 들어왔는지, 자신의 침대 한가운데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서인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했지만, 이상하게도 애옹이는 그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심지어 매번 서인의
공기마저 멈춰버린 듯한 순간이었다....임유진은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지만, 얼굴이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자, 결국 유진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기로 했다.테라스로 나가 보니, 밤하늘은 흐린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달빛조차 비치지 않았다. 별 하나 없이 검게 가라앉은 하늘.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복잡하게 뒤엉켰다.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익명으로 SNS 고민 상담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남자가 여자에게 반응하는 건, 그 여자를 좋아해서일까요?]잠시 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그렇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반응한다고 하더라고요.][제가 남자인데,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여자가 충분히 매력적이면 다 반응해요.][윗댓 의견 반대요. 그럼 동물과 다를 게 뭐예요?][애초에 인간도 동물이잖아요.]...유진은 계속해서 새로 고치며 댓글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읽었다. 어떤 댓글을 보면 마음이 설레다가도, 또 어떤 댓글을 보면 불안해졌다. 혼란스러움과 기대감이 엇갈려 마음이 쉴 새 없이 출렁였다.그때,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해?”임유민이었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급히 껐다. 그러고는 서둘러 휴대폰을 뒤로 감추며 더듬거렸다.“아, 아냐! 아무것도 안 했어!”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뭐야,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유진은 얼굴이 뜨거워지며 발끈했다.“꼬맹이는 신경 꺼!”그러자 유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부모님 출장 가시면서 누나 나한테 맡기고 가셨거든? 그러니까 누나 문제는 내 문제지. 뭔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조언해 줄 수도 있으니까.”유진은 반박하려다가,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동생을 바라보며 체념
후원에는 벽에 걸린 벽등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온 마당은 은은한 황금빛에 감싸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장미꽃은 조용히 피어 있었고, 애옹이는 작은 집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야옹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앞발로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고 있었다.서인은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 있었고,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서인은 오늘 많은 술을 마셨다. 기분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중 절반은 유진 대신 술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유진은 조용히 다가가, 서인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그가 정말 잠든 건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넋을 잃고 말았다.서인의 짙고 선명한 눈썹은 마치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고 선명했다. 책에서 묘사하는 ‘긴 눈썹이 관자놀이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였다.그 눈썹만 봐도, 서인의 차갑고 오만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눈은 길고 날렵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콧날은 오뚝하고 반듯해, 본래부터 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턱선에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덮여 있어, 평소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상관없었다.서인이 어떤 모습이든, 유진은 다 좋아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그의 수염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유진은 거의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서인의 턱에 닿기 직전 갑자기 서인이 눈을 번쩍 떴다.서인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와 서늘한 기운이 번뜩였다. 산길에서 적들의 포위에 둘러싸였을 때처럼, 그의 몸에는 순식간에 살기가 감돌았다.유진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뒤에 있던 탁자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낡은 탁자는 이미 몇 번이나 수리를 거쳤던 터라, 유진의 몸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쾅! 순식간에 탁자가 부서졌다. 몸을 지탱할 곳이 사라지자, 유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그 순간 굵은 손이 유진의 팔을 붙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