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소혜 씨, 세상에 좋은 남자가 꼭 여진구 사장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 필요 없지 않나요?”소혜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 그 사람의 표정 하나에 기뻐하고,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진다. 온 마음이 휘청이고, 어떤 이치도 통하지 않는다.아무리 다른 사람이 잘해줘도, 대체할 수 없다. 그 감정은 오직 그 사람만 줄 수 있는, 단 하나뿐이니까.현준은 소혜의 그런 모습을 보며 안쓰러운 듯 소혜의 손을 잡으려 했다.“소혜 씨.”그러나 소혜는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 손을 확 빼며 날카롭게 말했다.“손대지 마세요.”현준은 당황한 얼굴로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그때 방연하가 여진구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유진은 방 안 사람들에게 연하를 소개했고, 소혜를 제외한 모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연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진구도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익숙한 듯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자리에 앉았다.다른 직원들은 연하가 진구와 아는 사이란 걸 알고 나서는 그녀에게 더 호의적으로 대했다. 음식과 술이 모두 준비되자, 소혜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었다.“유진 씨, 이제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해요!”유진도 잔을 들며 웃었다.“저도 잘 부탁드려요!”소혜는 자기 잔을 가득 채우고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다 같이 유진 씨에게 건배하죠! 앞으로 유진 씨가 우리 실수했다고 사장님께 고자질하지 않게, 잘 지내야 하니까요!”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말에 방 안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제 유진은 그들의 상사였고, 동시에 진구의 비서이자 측근이었다.유진이 진구의 귀에 말 한마디만 해도 팀원들의 평판이나 업무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연하는 회사 사람이 아니었지만, 바로 분위기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작게 속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한결 명확해졌다. 사람들은 앞다퉈 임유진을 환영하며, 좋은 상사를 보내준 여진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처음엔 어딘가 어색하던 분위기도 순식간에 밝고 유쾌하게 바뀌었다. 다 함께 건배한 후, 각자 자리에 앉았다.진소혜는 술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질투심은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처럼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칭찬과 환영을 받는 유진을 향한 시선은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방연하는 조용히 진구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낮게 웃었다.“사장님, 꽤 하시네요?”진구는 유진을 한 번 바라보고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유진이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그럼, 한잔 받아요!”연하가 진구에게 잔을 들어 보이자, 진구는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들이켰다.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혜가 정현준에게 눈짓을 보냈고, 시선은 술잔을 향했다. 그리고 현준은 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 씨, 나도 한 잔 따를게요. 앞으로 일하면서 잘 부탁드려요.”진구는 유진이 벌써 두 잔을 연이어 마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도수가 낮은 술이라도 계속 마시면 버거울 수 있었다.그래서 진구는 재빠르게 유진의 손을 막으며 말했다.“이 잔은 내가 대신 받을게요.”현준은 무테안경 너머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다른 술은 몰라도, 이건 안 되죠. 저 유진 씨랑 같은 학교 선후배예요. 앞으로 같이 일할 사이인데, 이건 제가 직접 올려야죠.”유진은 웃으며 잔을 들었다.“부팀장님 말씀이 맞아요. 이 잔은 제가 마셔야죠.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현준은 금세 활짝 웃으며 진구를 향해 말했다.“봐요, 유진 씨가 사장님보다 훨씬 그릇이 크잖아요!”진구는 유진이 잔을 비우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쩍 현준을 째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맞는 말이네요. 여자지만 어떤 남자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졌으니까요. 특히, 어떤 속 좁은
진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변하자 방연하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요, 난 이 호텔 얘기한 거예요. 겉보기엔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카펫에 사람이 걸려 넘어질 정도면 좀 저렴하잖아요?”해명이라기보단, 딱 봐도 찔린 사람에게 던지는 한마디 같았고, 오해하지 말라는 말은 오히려 더 확신을 주는 뉘앙스였다.소혜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며 발밑의 카펫을 밟았다.“곧바로 여기 매니저한테 컴플레인 넣을게요!”그러고는 억지로 웃으며 임유진을 바라봤다.“유진 씨, 괜찮죠?”직원이 와서 바닥을 정리했고, 유진의 하얀 셔츠에는 눈에 띄게 붉은 와인 자국이 번져 있었다.하얀 옷은 한 방울만 튀어도 얼룩이 져 티가 나는데, 붉은 와인이라니... 유진은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식사 끝나고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이 상태로는 2차를 따라가는 건 무리였다. 소혜는 속으로 의도가 통했다며 더욱 천연덕스럽게 말했다.“정말 미안해요. 오늘은 유진 씨 축하하자는 자리였는데, 우리끼리만 가면 너무 무례하잖아요?”이에 연하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역시 오늘 목적은 유진일 빼놓고 진구 선배에게 다가가려던 거였군.’이에 연하는 곧바로 받아쳤다.“그 말도 맞긴 한데, 참 다행이죠. 내가 오늘 낮에 쇼핑하다가 새 옷 하나 샀거든요. 유진이랑 사이즈 비슷하니까, 내가 빌려주면 돼요.”“유진아, 우리 화장실 가서 갈아입고 계속 같이 놀자!”이에 소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애초에 오늘 유진을 모임에서 떼어내려던 건 여진구와 가까워질 기회를 노리기 위함이었는데, 연하가 이를 가로막은 셈이었다.진구는 고개를 끄덕였다.“갈아입고 와. 갈아입으면 바로 출발하자.”연하는 가방을 들고 유진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프라이빗 룸에 딸린 화장실은 넓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문을 닫자마자 연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진짜 소름 돋는 여우네.”유진은 거울에 비친 얼룩진 셔츠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 애, 선배 좋아해.”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그럼
방연하의 방금 전 조롱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서 정현준의 말이 괜히 더 신경 쓰였고, 진소혜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식사가 끝난 뒤, 일행은 넘버 나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다들 술이 들어간 터라 정신이 맑진 않았고, 프라이빗 룸의 분위기 탓에 점점 더 흥에 겨워졌다.서로 잊은 듯, 또다시 임유진에게 건배를 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유진의 승진을 축하한다며 술잔을 들었다.여진구와 방연하가 옆에서 지키고 있었지만, 유진도 어쩔 수 없이 몇 잔은 받아 마셨다. 다행히 맥주라 취기가 심하진 않았다.룸 안은 조명이 반짝였고,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환호하며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유진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같은 부서 남자 직원 둘이 서로 사랑 노래를 부르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주변의 웃음소리에 맞춰 실없이 웃었다.연하가 유진에게 병맥주를 건네며 잔을 부딪쳤다.“카! 이 맛에 마시는 거지!”연하는 병을 반쯤 비우자, 유진은 곧장 휴지를 꺼내 건네며 걱정했다.“천천히 마셔, 그렇게 마시면 금방 취해.”“나 이번 프로젝트 곧 끝나. 이제 더는 그 변태 꼰대한테 안 시달려도 돼!”연하는 숨을 내쉬며 말했다.“한 달이나 참았다고!”유진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그 인간, 너한테 뭐 했는데?”“퇴근 시간에 일부러 따로 부르고, 회식 자리에서 손도 대고. 심지어 속옷 세트까지 선물했어. 토 나오는 줄!”“그때 반응은 제대로 했지?”“걱정하지 마. 그딴 놈 손에 안 잡히게 했지. 내가 누군데. 만만한 사람 아닌 거 몰라?”그 얘기를 옆에서 들은 진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음에 또 그런 일 생기면 그냥 뺨 한 대 갈겨.”연하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랬다간 내 자리도 날아가죠.”이에 진구는 비웃듯 말했다.“그게 뭐가 무서워? 나한테 와. 지금보다 더 줄게.”연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진짜 더 못 참겠으면 연락할게요.”“왜 그때를 기다려? 지금 오면 되잖아.”진구는 시원하게 말했다.“
방연하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토할 듯한 제스처를 하자, 진소혜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도망쳤다.곽시양은 소혜가 초라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진 씨가 있는 한, 사장님은 우리랑 어울려 놀 일은 없어요. 그러니 그만 건드려요.”그러나 소혜는 이를 악물며 분했다.“난 절대 내가 임유진보다 못하다고 생각 안 해!”시양은 시선을 피하며 술잔을 건넸다.“화내지 마요.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이제 같은 부서에서 계속 보게 될 텐데, 기회는 더 많지 않겠어요?”소혜는 술잔을 받아 들고,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 소혜가 멀찍이 사라진 뒤, 연하는 소파에 털썩 기대더니 실컷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진구와 유진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진구는 감탄하며 말했다.“정말 대단하네.”연하는 자랑스럽게 한쪽 눈썹을 올렸다.“내가 괜히 저딴 변태들한테 안 잡히는 줄 알아요? 다 이유가 있는 거죠!”소혜가 꾸민 수준 낮은 수작쯤은 연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구는 연하에 대한 호감이 더 커졌다.“진심으로 말하는데, 우리 회사 와. 지금 받는 연봉 두 배로 줄게.”“사장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요.”연하는 유진 옆으로 돌아와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곧 승진이 코앞이에요. 이렇게 오래 일해온 걸 쉽게 포기하긴 아깝죠.”이에 진구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 사람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고,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술도 계속 들어갔다. 연하는 유진의 어깨에 팔을 둘러친 채, 핸드폰을 꺼내 셀카를 찍었다.그러자 갑자기 진구가 유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유진의 어깨에 기대 사진 속에 들어왔다. 결국 찍힌 사진은 세 사람의 단체 샷이 됐다.연하는 그 사진을 바로 SNS에 올렸다.위층 프라이빗 룸. 아래층 젊은이들의 활기찬 분위기와 달리, 이곳은 형식적인 웃음과 인사치레가 오가는 자리였다. 조명이 테이블 위에 늘어선 술병에 반사되어 오묘한 빛을 뿜고 있었다.문이 열리자, 각기 다른 스타일의 여성 접대부들이 들어왔다. 최이석은
이건 명백히 KN그룹과의 협력을 빌미로 구은정을 압박하여 서종호를 다시 회사에 복귀시키려는 수였다.양사는 거의 10년 가까이 협력해 왔고, 얽힌 이익도 상당했다. 만약 은정이 오윤열의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구씨그룹은 큰 손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요구를 받아들여 종호를 다시 들인다면, 은정은 회사 내에서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물론, 경영권에도 심각한 타격이 가해질 것이 분명했다.최이석은 서성의 측근으로, 종호의 복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일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조금만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었다.최이석이 이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은정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SNS의 사진을 계속 보고 있었다 말이 끝난 후에도 은정은 눈을 들지 않았다. 마치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최이석은 잠시 눈을 돌리더니 다시 반복했다.“사장님, 오윤열 사장님께서 꼭 서종호 부사장님가 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해요.”그제야 은정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본인 생각은 어떻나요?”그 말에 최이석은 속으로 웃음이 났다.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그는 잠시 망설이는 척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우선은 복직시키고, 계약을 먼저 마무리하는 게 어떨까요?”쾅! 와장창! 굉음이 연달아 터지며 말을 가로막았다. 최이석은 놀라 뒷걸음질 치다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은정은 발로 대리석 테이블을 걷어찼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병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고, 술이 바닥에 엉켜 퍼지면서 강한 술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곧 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 잠겼다.은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강한 존재감에 방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차가운 눈빛으로 최이석을 바라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냉철하게 말했다.“오윤열 사장님한테 전해요. 내가 KN그룹과 협력
방연하도 술에 많이 취해 말이 꼬였다.“구, 구은정 씨!”놀란 듯한 표정은 짓고 있었지만, 혀는 이미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여진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구은정 씨가 왜 여기에 계시죠?”은정은 누구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오직 임유진만 바라보며 말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유진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눈빛은 풀려 있었고, 입술에는 술 자국이 가득했다.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삼촌.”은정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집에 가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멍한 얼굴로 웃었다. 유진의 그 웃음에 은정은 심장이 녹아내릴 듯한 감정을 느꼈다. 은정은 유진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고, 부드럽게 유진을 반쯤 안아 일으켰다.유진은 반쯤 그의 몸에 기대었지만, 전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진구는 그 모습을 보며 속이 뒤집혔다. 급히 일어나 은정의 앞을 막아섰고,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소리쳤다.“지금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은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비키시죠?”진구는 비웃듯 말했다.“당신 예전에 유진에게 얼마나 상처 줬는데, 이제 와서 다른 얼굴로 접근하면, 있었던 일들이 다 없게 되는 건가요?”“지금 유진이 본인을 잊었으니 괜찮다는 건가요? 만약 기억이 돌아오면, 당신을 얼마나 미워할지 몰라요?”술기운에 진구는 지금껏 참고 있었던 울분을 모두 쏟아냈다.“유진이 너를 잊었을 때를 틈타 들어오는 당신이 나는 진심으로 혐오스러워요!”유진은 진구의 격한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점점 머리가 아파져 얼굴을 찡그렸다.그동안 은정은 아무 말 없이 유진의 어깨를 부드럽고 단단히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유진아, 가지 마!”진구는 유진의 팔을 붙잡았다.“다시 저 사람이랑 엮이지 마!”은정은 결국 더는 참지 않았다. 유진의 팔을 붙잡는 진구를 본 순간, 은정의 주먹이 그대로 진구의 얼굴을 강타했다.진구는 몇 걸음이나 물러나며 휘청거렸고, 곧
구은정은 소파 앞에 무릎을 꿇듯 반쯤 앉아, 애옹이를 조심스레 밀어내고는 손을 들어 임유진의 뺨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불렀다.“임유진.”“응.”유진은 나직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지 않았다. 그녀는 이마를 살짝 찡그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소파 가장자리에 엎드렸다.은정은 바로 이마를 찌푸리며 유진의 등을 토닥였다.“속이 안 좋아? 토할 거 같아?”유진은 몇 번 마른 헛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이내 힘없이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붉게 달아오른 얼굴, 살짝 깨문 입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유진을 더 애처롭고 순해 보이게 만들었다.“구...은정...”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눕고 싶어?”은정이 낮고 부드럽게 물었지만, 유진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 동작에 더 어지러워진 듯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싫어요.”“그래, 안 누워도 돼.”은정은 얼른 달래듯 맞장구쳤다.“물 마실래요.”유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댄 채 웅얼거렸다. 은정은 부엌으로 가 꿀물을 들고 와 유진의 입술 가까이에 가져다 대며 조심스레 말했다.“천천히 마셔. 조금 뜨거워.”유진은 은정의 손에 기대어 몇 모금 마셨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를 툭 기울이며 그의 어깨에 기대고는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이거 말고 술 마시고 싶어. 방연하, 술 한 병만 더 줘.”은정은 순간 날카롭게 말했다.“또 술 마셔봐, 진짜 혼난다.”유진은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은정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왜 혼내는데요?”희고 말랑한 얼굴, 복숭앗빛 입술에 남은 술기운, 유진의 모든 향기와 숨결이 은정의 감각기관을 마비시켰다.은정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고, 긴 손가락으로 유진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응?”유진이 순순히 대답했다. 은정의 눈동자는 잉크를 쏟은 듯 깊고 어두웠고
연하는 재빨리 따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효성의 팔을 붙잡았다.“효성아, 너 오해한 거야!”하지만 효성은 연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보여. 너 전에 나한테 선배 가까이하지 말라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난 그게 임유진을 위한 줄 알았는데, 결국 너 자신이 가로채려고 그런 거였네!”“연하야, 난 예전부터 네가 마음에 안들었어. 자존심도 없고, 자기 몸도 함부로 굴리고, 남자만 보면 달려드는 꼴, 진짜 더러워!”“근데 설마 유진이 좋아하던 남자까지 너랑 자게 만들 줄은 몰랐네. 정말 역겹다!”효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차가운 눈빛으로 연하를 마지막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앞으로 난 너 같은 친구 없어.”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마지막 틈새에서, 효성의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연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손끝까지 시린 듯,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여진구가 다가와 인상을 깊이 찌푸렸다.“내가 효성이한테 전화해서 설명할게.”연하는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으니까 이제 가요. 나도 출근해야 해요.”“이 상태로 무슨 출근이야?”진구는 걱정스럽게 말하자, 연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나를 너무 얕보지 마요. 하늘이 무너져도 난 일하러 가야 해요. 누가 뭐래도, 돈 버는 건 멈출 수 없으니까요.”진구는 연하 집 안으로 들어가 자기 재킷을 집었다.“혹시라도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말했잖아요, 선배 잘못 아니에요. 아마 우리 사이엔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을 거예요.”연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효성이 성격 알잖아요. 입은 독하지만 마음은 여려요. 며칠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올 거예요. 우리 예전에도 자주 싸웠거든요.”진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난 간다.”“잘 가요.”연하는 문 앞까지 배웅한 뒤, 힘없이 거실로
앞으로 어떤 더 큰 프로젝트가 나타나든, 더 큰 유혹이 있든, 과연 계약을 따내기 위해 몸까지 내줄 수 있겠는가?그래서, 애초부터 한 발짝도 물러서선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준선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진구는 연하의 맥주 캔과 자신의 것을 부딪치며 말했다.“그래야지, 그게 맞는 거야.”연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물었다.“담배 피워도 돼요?”이에 진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담배 피우는구나?”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할 때 한 대 피우는 게 습관이에요.”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연하는, 연기를 내뿜으며 당당하고도 시원한 기운을 풍겼다.“하루 종일 일 마치고, 이렇게 늦은 밤에 바람 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이 시간이 제일 편안해요.”진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담배 너무 자주 피우지 마. 특히 여자한텐 더 안 좋아.”“그래요.”연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더는 마음에 닿지도 않았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맥주를 다 마신 연하는 다시 일어나 술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이야기꽃이 피었고, 바닥엔 텅 빈 캔들이 하나둘 늘어갔다.시간은 어느덧 새벽을 넘었고, 방연하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이제 정말 못 버티겠어요. 선배가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내 목숨까지 줄 수는 없어요. 난 이만 자러 갈 테니까. 나갈 땐 문 좀 잘 닫고 가요. 고마워요.”연하는 휘청이며 안방으로 향했고, 진구는 맥주 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잘 자.”“잘 자요.”연하는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안방 문을 닫아버렸다.다음 날 아침.연하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숙취로 머리가 아파 지끈지끈했고, 눈도 제대로 안 뜨인 채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거실로 나왔다.“누구야?”‘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다니.’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연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거의 주저앉을 뻔한 그녀는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진구를 보고 소리쳤다.“선배
호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김문혁의 상처를 확인하고 증거를 채집한 뒤 병원으로 이송시켰다.“누가 때린 거죠?”경찰이 묻자, 연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제가 때렸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성추행하려고 해서, 저항하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쳤어요.”연하는 말을 마치고, 목에 난 멍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여진구가 연하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감싸 안으며, 또렷한 얼굴에 냉철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제가 때렸어요.”연하는 진구를 말리려 했지만, 진구는 그녀의 팔을 단단히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경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들것에 실려 나가는 김문혁도 흘끗 본 뒤,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일단 경찰서로 같이 가시죠. 진술이 필요해서요.”거의 자정 무렵, 진구와 연하는 함께 경찰서를 나섰다. 김문혁이 연하를 성추행하려다 폭력을 가한 사실과, 진구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는 점, 룸 안의 CCTV와 다른 사람들의 진술까지 확인된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연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진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정말 고마워요.”진구는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가볍게 웃었다.“다음에 만나면 모르는 척 말고 오빠라고 한 번 불러. 그걸로 충분해.”연하는 코웃음 쳤다.“분명히 선배가 먼저 삐진 거잖아요.”진구는 비웃었다.“너, 정말 남자 앞에서 의리도 잊는 스타일 아니야?”연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만약 남자에 눈이 멀었으면, 선배랑 임유진을 맺어주고 나는 구은정을 쫓아다녔겠죠. 내가 이런 짓까지 한 건 다 유진이를 위한 거예요.”“선배도 유진이를 위한다면, 유진의 기억을 되찾게 도와주고, 구은정이랑 다시 이어주는 게 맞지 않아?”진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넌 구은정이 예전에 유진이한테 뭘 했는지 몰라서 그래! 자기 손으로 밀어내 놓고, 지금 와서 되돌리라고? 말도 안 돼
두 달 전, 김문혁의 아내가 그가 애인을 숨겨둔 사실을 들켜, 여자를 찾아가 얼굴을 긁어버린 일이 한동안 시끄럽게 퍼졌었다.방연하는 이 일을 이용해 김문혁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우리 마누라가 감히 연하 씨 얼굴을 긁기라도 하면, 바로 쫓아낼게. 오빠가 든든히 지켜줄 건데, 뭐가 무서워?”‘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짐승보다도 못한 놈이었고, 짐승도 이 사람보단 염치가 있을 거다.연하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사장님은 든든하시겠지만, 저는 감히 사모님을 도발할 용기가 없어요. 이렇게 하죠. 진심을 담아 석 잔 마실게요. 그 정도면 괜찮으시죠?”김문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내 소원은 러브샷 한잔하는 거예요. 연하 씨가 내 소원 들어주면, 나도 연하 씨 소원 들어줄게요.”장연구는 초조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다 연하에게 말했다.“연하 씨, 그렇게 까탈 부리지 마요. 김문혁 사장님이 연하 씨를 여동생처럼 아끼시는 거 몰라요?”“술 한잔한다고 뭐가 어때서요? 마시기만 하면, 바로 서명하신다잖아요.”연하는 속으로 장연구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익에 눈이 멀어 사람 인격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방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말했다.“그러면 사장님, 말한 대로 해주셔야 해요.”김문혁은 흥분한 얼굴로 몸을 기울였고, 한 팔을 연하의 뒤통수 너머로 뻗으며 억지로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진구는 옆 사람과 대화 중이었다가, 그 장면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연하와 김문혁이 러브샷을 하려는 걸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명확한 혐오가 스쳤다.‘다른 사람들을 훈계할 땐 그토록 당당하더니, 자기 일이 되니 결국 돈 때문에 뭐든 하는구나.’연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김문혁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아무리 피해도 상대가 악의를 품으면 피해 갈 수 없었다.술을 마시는 순간, 김문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연하
연하는 더욱 부드럽고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사장님,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진짜 속 좁아! 그때 그냥 진실 좀 말했다고 아직도 이러는 거야? 유치하게.’하지만 오늘 같은 자리에서는 얌전히 얼굴 세워주기로 했다. 여진구가 아니라, 자리를 위해 참는 거였다.김문혁이 연하를 불렀다.“연하 씨, 여기 옆자리 비워놨어요. 이리 와요.”마침 김문혁 사장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마치 일부러 그녀를 위해 비워둔 것 같았다. 연하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가 느긋하게 앉았다.김문혁은 연하의 쇄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힐끔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연하 씨 오늘 정말 예쁘게 입었네요. 평소엔 늘 정장만 입어서 그 아름다움이 다 가려졌던 것 같아요.”연하는 살짝 웃었다.“오늘 김문혁 사장님 뵌다고 해서 특별히 옷 갈아입었죠.”진구는 그연하 얼굴에 떠오른 영업용 미소를 힐끔 보고, 저 미소가 왜 그리 위선적으로 느껴지는지 불쾌했다.김문혁 사장은 계속해서 말했다.“주말에 불러내서 미안하긴 한데, 연하 씨는 괜찮죠?”연하는 웃으며 대답했다.“주말에 사장님을 뵐 수 있다니, 오히려 더 기뻐요.”김문혁은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연하 씨, 정말 기분 좋게 말씀하시네요. 이 한 잔, 연하 씨께 드릴게요.”연하는 깔끔하게 한 잔을 들이켰다. 그녀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마시는 걸 본 김문혁은, 연하가 체면을 세워준 걸 느끼며 만족해했고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았다.술자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연하는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김문혁은 진구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고, 장연구가 진구와 가까운 부사장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알고 그를 통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장연구는 김문혁을 도와주는 명분으로, 이번 협업 건의 다음 기획 계약을 따내려 했고, 그래서 연하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연하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 맡아왔고, 장연구도 그녀를 꽤 신뢰하고 아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즉, 이 자리에 모
유민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찾으러 왔다고? 근데 왜 하늘만 보고 있었어?”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야경 좀 보면 안 돼?”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툭 얹었다.“가자, 밥 먹으러!”유민은 유진보다 머리 반쯤은 더 컸고, 키도 크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총명한 소년이었다.“누나,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또 누굴 좋아하게 된 거야?”“또?”유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유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연애 한 번 했었잖아. 그러니까 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유민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유진은 거의 주민이라는 사람을 잊고 있었다.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연애는 무슨 괜한 상상하지 마.”일요일 저녁.연하는 거울 앞에서 화장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주말에까지 불러내서 접대라니, 이건 너무하잖아.’화장을 마치고 차를 몰고 나설 때쯤, 해는 이미 지고 거리엔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저녁노을과 번화한 불빛, 차량 행렬이 교차하는 거리였다.연하는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길이 막혀서 늦을 것 같다고 알렸다. 사장은 일요일에 그녀를 불러낸 게 미안했는지, 별다른 말 없이 조심히 운전하라고 했다.전화를 끊은 연하는 운전석에 기대어 긴 차량 행렬을 바라보며,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졌다.호텔에 도착한 건 이미 8시를 넘긴 뒤였다. 그녀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흡연 구역으로 향해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웠다.담배를 물고 벽에 기댄 그녀는, 연기를 내뿜는 자세조차 당당하고 시크했다. 희미한 연기가 그녀의 정교한 메이크업을 감싸 안으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근처에 있던 남자가 한참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번호 좀 줄 수 있어요?”이에 연하는 완벽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피처폰 써요.”그 말에 눈치 있게 물러났다. 담배를 다 피울 즈음,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룸 쪽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하자, 연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얼굴에 어색하지
서선영도 유진을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유진은 급히 티슈를 꺼내 서선영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고, 그 손길은 꽤 거칠었다.“전 정말 여사님인 줄 몰랐어요.”“방금 어떤 사람이 은정 삼촌을 험담하는 걸 듣고, 또 어떤 못된 입방정 떠는 여자라고 생각해서 그랬지, 이모님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서선영은 얼굴에 뜨거운 차를 맞은 데다, 유진이 얼굴을 세게 문질러 닦여서, 화장이 완전히 번져버렸다.얼굴은 그야말로 염색공장을 연 것처럼 오색빛깔이었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에 서선영은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괜찮아! 안 닦아도 돼!”유진은 손을 거두며, 복숭아빛 피부에 앙증맞은 얼굴로 얌전하게 웃었다.“여사님, 저 기억하시죠?”“그럼, 유진아!”서선영은 난처한 표정으로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유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서서히 가셨다.“근데 이상하네요. 여사님은 분명 은정 삼촌의 어머니신데, 왜 뒤에서 은정 삼촌을 그렇게 험담하시죠?”“저번에 저랑 할아버지랑 댁으로 인사 갔을 때, 누가 은정 삼촌을 험담한다고 화내셨잖아요? 근데 그 말들, 다 여사님이 퍼뜨린 거였네요?”“그건.”유진은 또박또박,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까지 악의적이고 혐오스러울 수 있나요?”다른 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이쪽저쪽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서선영은 그동안 자애로운 계모 이미지를 만들어왔고, 은정을 이야기할 때마다 다들 그 아이가 속 썩인다는 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야 진실을 알아버린 것이다.다정한 어머니 이미지는 전부 가짜였고, 뒤에서 험담한 것이 진짜였다. 정말 너무 악의적이었다.서선영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졌고, 급하게 해명했다.“나, 나도 들은 얘기일 뿐이야. 괜히 정태영 여사 조카한테 피해 줄까 봐.”“여사님 말씀 들었을 땐 그렇게 확신에 차 계시길래, 직접 본 줄 알았죠. 알고 보니, 들은 얘기였네요?”유진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호텔 옥상에서 누군가 드론을 날리고 있었다. 이에 유민은 흥미가 생겨 그쪽으로 다가갔다.식사는 하나둘씩 차려지기 시작했지만, 유민은 돌아오지 않았고 핸드폰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임유진은 결국 그를 찾으러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유진은 맨 뒤에 서 있었다.3층에 도착하자 진주 장식으로 치장한 부유한 중년 여성 둘이 올라탔다. 그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식사 끝나고 우리 한 판 칠까요? 오늘은 늦게 가요.”다른 여성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안 해요. 요즘 너무 재수가 없어서요.”그 말을 듣고, 유진은 고개를 들어 여성을 바라보았는데, 역시, 예상대로 서선영이었다.서선영은 연한 하늘빛 고급 맞춤 롱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세트를 풀 착장한 모습이었다. 품위 있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지나치게 과시적인 느낌이 들었다.먼저 말한 여자가 계속 설득했다.“오늘은 또 다를 수도 있잖아요. 운이 트일 수도 있고.”“어제도 그렇게 말했잖아요.”“그랬어요?”여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오늘도 지시면, 제가 책임질게요.”“그러면 저도 사양 안 할게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10층에서 내렸고, 10층엔 야외 티 라운지가 있었다.유진은 눈을 굴리더니 조용히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 외출하면서 그러데이션 렌즈의 안경을 쓰고, 후드티에 모자까지 뒤집어썼기에 웬만큼 가까이 오지 않는 이상 알아보기 어려웠다.유진은 서선영을 따라 티 라운지로 들어갔고, 서선영 뒤편 테이블에 조용히 앉았다. 서선영과 함께 온 사람은 모두 네 명, 다들 사모님 풍의 차림이었다.서로 마주 앉자마자 상투적인 칭찬을 주고받더니, 이내 서선영의 새로 산 한정판 가방이 화제가 되었고, 곧장 명품과 패션 이야기로 대화가 넘어갔다.유진은 점점 지루해졌고, 일어나려던 찰나, 함께 온 정태영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사모님, 구은정은 여자친구 없어요? 제 조카가 막 유학 끝내고 박사까지 마치
임씨 저택에 도착한 유진은 동생 유민에게 사온 피규어를 건넸다. 유민은 책상 앞에 앉아 숙제하던 중이었고, 피규어를 받아 디테일을 살펴보다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유진은 유민의 책상 위에 놓인 갓 채점된 시험지를 보고 다가가서 들춰보았다.“요즘 성적은 어때?”“별로 안 늘었어.”유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진이 본 것은 수학 시험지였다. 만점에 추가 점수 10점까지 있는 문제였고, 그 10점은 마지막의 경시 문제였다.확실히, 지난번에도 만점이었고 이번에도 만점이었다. 성적이 늘었다고 보긴 어려웠다.유진은 시험지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구은정에게 마지막으로 수업해준 날, 자신이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었다.“이렇게 오래 가르쳤으면 시험 한 번 봐야 하지 않을까?”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겼지만, 그게 두 사람의 마지막 수업이 될 줄은 몰랐다.유민은 유진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시험지에 거울이라도 있어?”유진은 시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너 공부 열심히 해. 소희 곧 돌아올 거야. 나 거실에서 기다릴게.”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오늘 점심쯤 도착하신대.”유진도 알고 있었다. 어제 우정숙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으니까. 우정숙과 임지언은 2주간의 출장 후 집으로 돌아왔고, 소희와 임구택도 함께 돌아왔다.저녁엔 온 가족이 함께 외식하러 나갔다. 장소는 명우가 예약한 호텔. 분위기 있고 조용한 환경이 가족 모임에 안성맞춤이었다.약 30평 정도 되는 룸은 휴게 공간과 식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시설이 구비되어 고급스럽고 편안했다.넓고 높게 트인 유리창 너머로는 형형색색의 야경이 펼쳐졌고,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룸에 딸린 정원이 이어졌다.정원에는 해당화 향기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고, 작은 물줄기가 구불구불 흐르며 부드러운 밤바람과 어우러져, 흔들의자에 앉아 야경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우정숙은 정원의 라탄 의자에 앉아 소희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유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