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굉장했고 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지승현은 사실 매우 말이 많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잘 살피는 사람이라서 어색하거나 침묵이 흐르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가 줄곧 화기애애했다.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승현은 차를 가지러 갔고, 강아심은 레스토랑 밖에서 기다렸다.“아심!”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아심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뒤를 돌아봤으나, 살짝 굳은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성연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옆에는 소희도 있었다.소희는 여전히 섬세하고 차가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투명하고 고요했다. 차분한 시선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소희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아심아.”“소희!” 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결혼한다면서, 축하해!”“고마워.” 소희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그때 꼭 와줬으면 해.”“꼭 갈게.” 아심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심아!”승현이 차에서 내려 친근하고 부드럽게 아시믕ㄹ 불렀다. 다가오면서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고, 소희와 연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친구들이야?”그러자 아심이 고개를 끄덕였다.“소희, 성연희.”“연희 씨, 전에 본 적 있었죠.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승현은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희는 승현이 아심에게 외투를 걸쳐주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를 이미 깨달았다. 이전에 연희가 소희에게 말한 적이 있었고, 소희는 아심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지금 직접 보니, 여전히 가슴이 조였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었지만, 그녀의 가슴 속은 마치 얼음과 눈으로 가득 찬 듯했다.특히 명절에 함께 집에서 복조리를 달며, 설날 음식과 불꽃놀이를 즐기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 속에 가시가 걸린 듯 답답했다.연희 역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승현의 따뜻한
소희는 스스로 마음이 강하다고 자부했었다. 과거에 구택을 찾는다는 신념에 의지해 다시 삶의 희망을 불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심은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웃어줄 수 있었을까?아심은 자신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심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왜 오빠를 포기했는지, 왜 지승현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말이다.오빠는 소희의 삶 그 자체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희망 없는 기다림은 그녀의 생명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예를 들어, 지난번 오빠가 떠났을 때 소희는 거의 생존 의지를 잃을 뻔했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만 겪어야 할 일이지, 두 번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희는 지금 아심이 내린 결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네 말을 들으니, 나도 이해가 돼.” 연희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난 여전히 아심을 친구로 대할 거야. 앞으로 다시 만나더라도, 승현 씨에게는 불편하게 대하지 않을게.”“그래.”그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소희가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연희가 비웃으며 말했다.“집에 30분 뒤에 도착한다고 전했으면서, 왜 또 전화해?”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자기야.”[아직 집에 안 왔어?] 구택이 불만스럽게 물었다.[연희 씨는 또 어디로 데려간 거야?]“아니야,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소희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길이 조금 막혀서, 곧 도착할 거야.”구택은 그제야 어조를 풀며 말했다.[먼저 씻고 있을 테니, 빨리 와.]소희는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자, 연희가 비웃었다.“내가 널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우리 먼저 안 건 나였는데, 지금은 둘이 약속을 잡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네?”소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희야, 너무 신경 쓰지 마.”연희가 툴툴거렸다.“그럼 대답해 봐. 넌 나를 더 사랑해? 아니면 임구택을 더 사랑해?”소희는 잠시 멈추었다가 차창 밖의 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달이 참 둥
아심은 죽은 걸까? 그렇지만 만약 아심이 죽었다면, 왜 아직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것이 아심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 세계에 남아, 점점 굳어가는 아심의 육체를 지키고 떠나지 않으려 하며, 그를 계속 추적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아심은 꿈속에서 깨어나 몸서리를 쳤다. 머릿속에 맴도는 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심은 눈을 뜨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며 스스로를 웅크려 몸의 온도를 느껴보았다.왜일까,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도 점점 더 절망하게 되는 건....다음 날 아침, 아심은 무척 바쁘게 보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승현이 찾아왔다.그는 많은 꽃을 들고 왔고, 회사의 거의 모든 여직원에게 꽃과 디저트, 사탕 등을 나눠주었다. 여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모두 준비한 셈이었다. 회사 안은 환호성과 놀라움이 끊이지 않았다.승현은 가장 특별한 꽃다발을 들고 아심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매너 있게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사귄 지 일주일째,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의 행복을 기원해.”아심은 의자에 기대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계속 이러면, 우리 회사에 오지 못하게 할 거야.”그러자 승현은 억울한 듯 웃으며 물었다.“왜? 내가 올 때마다 회사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아심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우선 밥 먹으러 가자.”두 사람은 회사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회사 직원들도 몇 명 와서 승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에 아심은 웃으며 말했다.“이러다간 네가 우리 회사를 인수하겠어.”승현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난 네 회사를 원하지 않아. 다만 모든 사람의 호감을 네 한 사람의 호감으로 바꾸고 싶을 뿐이야.”아심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물었다.“만약 네가 모든 걸 쏟아붓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겠어?”“당연히 그럴 리 없지!” 승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우린 이미 사귀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아심은 다시
4월 초, 임씨 집안에서 강씨 집안에 혼수품을 보내기 위해 운성으로 향했다. 강재석은 사람들을 시켜 서원의 객실을 정리하고, 임씨 집안의 혼수품을 보관하도록 준비했다.임시호와 노정순은 직접 강씨 집안으로 향했고, 임지언과 우정숙도 시간을 미리 조정해 함께 왔다. 임구택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혼식에 관한 모든 일을 그가 직접 챙기고 있었다.임씨 집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운성의 언론은 총출동했고, 심지어 언론사에서도 사람들이 강씨 집안에 모였다. 강재석은 이번에는 조용히 있지 않고, 보안 업무만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떠들썩한 하루였고, 운성 전체가 임씨 집안과 강씨 집안의 결혼식을 이야기했다. 앞마당은 매우 북적거렸고, 소희는 뒷마당에서 반려동물인 하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구택이 다가와 솔방울을 주워 껍질을 벗겨 소희에게 건네며 물었다.“힘들어?”“아니.” 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잠시 쉬러 왔어. 아까 어머님한테 말했어.”“말하지 않아도 네 마음을 잘 알아.” 구택은 뒤에서 소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요즘은 조금 시끄러울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소희는 구택의 부드러운 말투에 마음이 느긋해졌다.“대부분 당신이 다 막아주잖아, 알아. 괜찮아, 나도 그렇게 성급한 편은 아니야.”구택은 미소를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만약 조금 전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소희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소희가 뒤돌아 물었다.“오빠는 돌아올 수 있을까?”“작은 문제가 좀 있어.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는데, 어떻게 형님이 결혼식에 없을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마, 꼭 돌아올 거야.”소희는 맑은 눈빛을 살짝 감았다.“사실 지금은 오히려 오빠가 돌아오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예전에는 기대했지만, 지금은 아심과 승현이 사귀고 있기에, 강시언이 돌아와서 실망하거나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시언은 아심을 좋아한다는 것
진언은 직접 흥천으로 가서 H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일로 모든 갈등이 완전히 일단락되었고, 백협은 향후 50년간 국제 용병계에서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진언이 흥천에서 돌아왔을 때는 백협에 아침이 막 밝아올 무렵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자신을 맞이하러 온 시경에게 물었다.“준비됐나?”시경은 답했다.“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한숨도 못 주무셨는데, 잠시라도 쉬었다가 가시는 게 어떱니까?”진언은 외투를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시야가 오후에 올 거야. 그가 왜 오는지 모를 줄 알아?”시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진언님이 이렇게 서두르는 건 시야가 일을 벌일까 봐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C국에 가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진언은 총을 챙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뒤돌아 시경을 바라보자, 시경은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지나쳤습니다.”진언은 다시 옷을 입으며 태연히 말했다.“네 말이 맞아. 사실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시경은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난 간다. 시야가 오면 당장 쫓아내. 괜히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진언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하지만 별일 없으면 괜히 날 부르지 마.”시경도 그를 따라나서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설령 그들이 일부러 일을 만들더라도, 진언이 가 있는 곳에서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방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며칠 전 진언이 돌아왔을 때 보였던 그 폭발하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어쨌든 30대 중반의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진언은 뭔가 느낌이 온 듯 갑자기 멈춰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시경을 쳐다보았다. 이에 시경은 즉시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행운을 빕니다.”진언은 살짝 웃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운성헬리콥터가 개인
시언은 강재석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결혼도 못 하고, 아이도 못 낳겠어요.”“소희도 결혼할 텐데, 오빠라는 사람이 그렇게 뒤처져도 되겠어?” 강재석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지금까지 널 재촉하지 않았더니, 정말로 내가 좋은 성격인 줄 아나 보군.”시언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바로 소희가 결혼하기 때문에, 저는 더 서두를 필요가 없죠.”“소희를 핑계 삼지 마라. 돌아온 이상, 이제는 나를 좀 편하게 해 줘야지.” 강재석이 말했다. 시언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어조는 진지했다.“할아버지, 지난 세월 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강재석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무슨 고생이라는 말을 하냐? 너와 소희만 잘 지내준다면, 앞으로 10년이라도 더 기꺼이 고생할 수 있어.”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식사는 거의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시언을 보며 말했다.“뭘 또 따라오냐? 할 일 있으면 얼른 가서 해라!”시언은 대답했다.“방금 돌아왔으니, 어디 안 갑니다. 오후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게요.”“내가 늙은이가 무슨 같이 있을 가치가 있다고, 빨리 가서 할 일을 해라. 설날에 갑자기 사라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서 정리할 것도 안 하고 있잖아.”강재석은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내가 너랑 같이 있는 것보다, 날 화나게 하지 않는 게 더 나아.”시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녀올게요.”“빨리 가, 소희 결혼식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강재석은 덧붙였다.“그리고 도경수네 집에는 머물지 마라. 불편할 테니.”시언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집은 이미 준비해 두었어요.”“잘했어!” 강재석은 연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서, 가능하다면 소희 결혼 전에 그 사람도 함께 데리고 와라. 그 아가씨를 한번 보고 싶구나.”“그럴게요.” 시언이 말했다...
강시언은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서 거센 바람이 일었다가, 순식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변했다. 마치 믿기 힘든 광경을 보는 듯했다.이에 시언은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오랜만이네요.”강아심의 차가운 손은 지승현의 따뜻한 손바닥 덕분에 약간의 온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시언을 바라보며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언제 돌아온 거예요? 소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온 거예요?”저녁노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고, 시언의 눈빛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그의 깊은 눈 속에서 빛은 하나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승현이 입을 열었다.“미리 예약해 둔 식당이 있어요. 아심과 함께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미스터 강도 함께 하시겠어요?”“아니, 괜찮아요.”시언의 차가운 눈빛은 더욱 싸늘하고 거리를 두었다.“이곳을 지나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려고 했어요. 다른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을게요.”시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뒤돌아 떠났다. 그의 단단하고 넓은 어깨 위로 어둑한 금빛이 떨어졌다. 석양은 시언의 높고 큰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고, 어쩐지 쓸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시언은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인파 속을 지나 멀어져 갔다.멀리서 보면, 시언의 기세는 여전히 매섭고, 어둑한 저녁 속의 그림자조차 차가웠다. 조금 전 느꼈던 그 쓸쓸함이 단순한 착각처럼 느껴졌다. 아심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크게 뜬 채 저무는 해가 지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심의 얼굴은 마치 하늘가의 노을이 사라진 뒤의 회색빛 하늘처럼 안 좋았고, 몸은 긴장해서 굳어 있었다. 아심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승현은 조용히 아심의 곁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만나고 싶다면, 내가 물러나도 상관없어. 너만 행복하면 돼.”그러나 아심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승현의
식사 중, 강아심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승현은 아심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심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승현 역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업에서 만난 특이한 고객 이야기를 하고, 회사에서 일어난 웃긴 일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아심은 승현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었지만, 가끔씩 생각이 딴 곳에 가 있는 듯한 흐릿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식사가 끝난 후, 승현은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자, 아심이 말했다.“오늘은 좀 피곤하네, 다음에 가자.”승현은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가고 싶을 때 가자!”승현은 아심을 집에 데려다주었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아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아심아!”승현의 부름에 아심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왜?”어둠 속에서 승현은 아심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잘 쉬어, 내가 보고 싶을 거야.”“응.” 아심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심히 가.”아심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갔고, 문을 닫자마자 벽에 기대어 섰다. 집에 도착한 순간, 마침내 얼굴의 미소를 지우며 온몸이 탈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아심은 일어나 외투를 벗고 안으로 걸어갔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할 일을 했다. 잠옷을 꺼내 입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맥주 한 캔을 꺼내어 발코니에 나가 앉았다.맥주 캔을 따려던 순간, 아심은 의사가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 생각났다. 맥주를 내려놓자, 그녀의 마음속이 갑자기 공허해졌다. 마치 의지할 것을 하나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아심은 항상 강성의 밤을 좋아했다. 조용함을 즐길 수 있지만, 뒤돌아서면 화려함이 바로 닿을 것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강성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다시 발코니에 앉은 그녀는 갈팡질팡하는 혼란과 두려움만을 느꼈다.오늘 강시언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아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
이날, 임유진은 티타임에 진소혜와 마주쳤다. 소혜는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팀장님, 구씨그룹의 총애를 받으니 우리 부서 실적도 쭉쭉 오르겠죠? 부서 직원들 대신 감사드려요, 팀장님.”유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다, 소혜의 옆을 지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 소혜 씨가 한 거라는 거 알아요. 이미 누가 나한테 말해줬거든요. 그래서 소혜 씨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소혜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고, 고개를 돌려봤을 땐, 유진은 이미 자리를 떠나 있었다.오후 회의에서 유진은 이렇게 발표했다.“이번 평가 기간 동안 곽시양 씨가 업무에 성실히 임했고,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따라서 정현준 씨의 직책을 승계하여 부서 부팀장으로 승진해요.”“인사팀에서 곧 공식 공지드릴 예정이에요.”유진의 말이 끝나자 회의실엔 놀라움이 번졌고, 시양 본인조차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부서 내에서도 존재감이 적었고, 입사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으며, 능력이나 실적 모두 소혜에 비해 부족했기에, 시양이 발탁된 건 모두에게 의외였다.소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팀장님, 부팀장 선발 기준이 뭔가요? 기준을 명확히 해주시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혜를 응시하며 말했다.“기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게 기준이라면 기준이겠죠”소혜는 눈을 크게 떴고, 유진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있는 시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시양 씨, 제 사무실로 잠깐 와요.”“네?”시양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소혜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유진을 따라갔다.유진이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서는 수군거림이 폭발했다. 최근 있었던 일로 인해 유진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었고, 그런 유진이 능력도 부족한 신입을 뛰어넘어 부팀장으로 발탁했다는 점에서 불만과 의문은 더 커졌다.현준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인사 결정은 사전 상의 없이 유진이 발표한 것이었고, 그 역시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소혜는 맞은편에 앉은 베
유진은 구은정의 표정을 보고,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는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고, 유진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어제 술 마셨다던데, 괜찮아요?”은정은 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안 좋아 보이던데, 이제 술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진이 조용히 은정에게 당부했다.“응.”그 말에 은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시간 됐어요. 나 출근해야 해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고, 그렇게 둘은 스쳐 지나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유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조금 전 은정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고, 급히 뛰쳐나왔다.그러나 복도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내가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니, 지금은 내 문제부터 정리해야 해. 괜히 그 사람한테 짐이 되어선 안 돼.’그날 오후, 은정은 늦게서야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법무팀에 최이석 관련 고소를 철회하라고 지시했다.마심호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 사람 같은 놈은 봐줄 이유가 없죠. 이번 기회에 서성 라인 애들도 좀 눌러놓는 게 나아요.”그러나 은정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저도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그날 저녁, 은정은 늘 그랬듯 이경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도를 지나, 곧장 유진의 집 앞으로 갔다.문 비밀번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은정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 안은 예전 그대로였고, 유진은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았다.그런데도 방 안은 왠지 썰렁했는데, 무언가 본질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은정은 그녀가 드라마를 자주 보던 소파에 앉았다.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울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정은 책상 위의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녹음 안 했어요.”서선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은정아, 이 일은 내가 밖에 알리지 않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최이석 일, 바로 고소 취하하고 다시는 들추지 마.”“그리고 스스로 구씨그룹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회사도, 강성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네 아버지에겐 그냥 말하면 돼. 죄책감 때문에 이 집에 더는 못 있겠다고. 이번엔 분명히 놔줄 거야.”“네가 떠날 땐, 내가 사람을 시켜서 돈도 챙겨줄게. 아버지한텐 그걸로도 충분히 체면 세워준 셈이 될 거야.”은정은 서선영을 냉랭하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당신 딸을 희생해서까지 날 함정에 빠뜨린 이유가 최이석 때문이었네요.”서선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해명했다.“그 사람은 내 동생 밑에서 오래 일했어. 난 내 동생을 위해서 한 거야. 은정아, 지금 네가 분위기 바꿔서 빠져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내가 당신 말대로 안 하면요?”은정은 담배를 내뿜으며 한껏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난 이미 악명 높은 놈이 됐어. 하나쯤 더 얹혀도 그만이죠. 오히려 구은서는 이제 절대 부잣집 자제와의 결혼은 꿈도 못 꾸겠죠.”서선영의 얼굴은 날카롭고 차가웠다.“끝장을 보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은서는 동정받는 쪽이 될 거야.”서선영은 은정을 똑바로 노려봤다.“임유진하고 너, 꽤 가까운 사이잖아. 그 애는 나랑 너 때문에 몇 번이나 맞붙었지. 근데 만약 그 애가 네가 술에 취해 여동생을 건드린 놈이라는 걸 알게 되면?”“그 아이 눈엔 네가 어떻게 보일까? 널 어떻게 생각할까? 넌 그걸 감당할 수 있어?”그 말에 은정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선영은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은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대로 해. 열흘 안에 강성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안 그러면 임유진이든, 임씨 집안이든, 강성 전체가 너란 인간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알게 될 거야.”“널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거고, 임유진도 널 경멸하
은정은 격노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저는 그런 짓 하지 않았어요. 이건 서선영 저 사람이 꾸민 함정이에요.”서선영은 엉엉 울면서 외쳤다.“내가 내 딸을 희생시켜서 너한테 함정을 판다고? 구은정, 네가 나를 미워하는 건 알아.”“예전부터 나한테 편견이 있었지. 그래, 미우면 나한테 손찌검을 해. 왜 애먼 은서를 괴롭혀?!”“은서는 아직 시집도 안 갔어. 이제 어떻게 살라고 해? 이 소문이 밖에 나가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끝장이야!”은정은 오직 구은태만 바라보며 물었다.“저를 믿으세요?”구은태는 아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오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때 갑자기 은서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듯 달려갔다. 죽을 각오로 내달리는 눈빛이었다.“은서야! 안 돼, 은서야!”서선영이 급히 은서를 껴안고 붙잡았고, 울음이 멎지 않았다.“은서야, 제발 그런 짓 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거기 누구 없어요! 얘 좀 붙잡아줘요!”서선영은 울먹이며 도우미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의 도우미가 급히 달려와 은서를 붙들고 감싸 안았다.그중 평소 은서를 따르던 도우미가 조심스럽게 구은태 앞에 다가와 입을 열었다.“회장님, 사실은 전에도 도련님께서 밤에 아가씨 방문을 두드리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었어요.”“하지만 도련님이 너무 무서워서, 보복당할까 봐 말씀 못 드렸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 도우미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제가 좀 더 일찍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은정은 도우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애옹이가 은서에게 보내졌던 그날 밤, 은정은 술에 취해 돌아와 애옹이가 사라진 걸 알고 은서를 찾아갔다. 그때 이 도우미가 어두운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구은태는 거기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죽을힘을 다해 몸을 던지려던 은서, 그리고 도우미의 일방적인 증언이 더해지자, 구은태는 은정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다시 근처에 있던 물
[말 좀 해봐요.][삼촌?]서선영이 천천히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집어 장말숙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눈짓을 보냈다. 이에 장말숙 아주머니는 눈치를 채고 전화를 받아 들고 말했다.“유진 씨죠? 저희 도련님이 술에 취하셨어요.”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네, 신세 좀 질게요. 잘 부탁드려요.]“네!”장말숙 아주머니는 괜히 말을 더했다가 실수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은정의 까만 눈동자가 서선영을 향해 있었지만, 그 시선은 이미 흐릿했다.서선영은 은정을 부축하듯 손을 내밀며,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은정아, 술 너무 많이 마셨잖아. 방으로 데려다줄게.”“으악!”날카로운 비명에 은정은 정신이 번쩍 들며 눈을 떴고, 날은 훤하게 밝아 있었다.옆에서는 구은서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옷가지로 몸을 허둥지둥 가리고 있었고, 얼굴은 절망감에 젖은 눈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분노로 떨리는 눈으로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서의 비명은 곧 서선영과 집 안 도우미들을 방으로 불러 모았다. 문이 열리고 방 안 풍경을 본 순간, 모두가 굳어버렸다.은정은 조금씩 의식을 되찾았고, 은서를 훑어보며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이불을 들추고 자신을 확인해 보니, 바지는 제대로 입고 있었지만 상의는 전혀 없었다.은정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이마를 짚으며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머리가 묵직하게 지끈거렸다.“엄마!”은서는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 울부짖었다.“은서야!”서선영이 달려와 은서를 안고, 옷을 덮어주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몰라요!”구은서는 서선영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다.“밤에 오빠가 갑자기 방에 들어왔어요. 술에 취해서 저를 한 대 치더니 그다음은...”은서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드러난 어깨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짐승 같은 놈!”서선영은 벼락을 맞은 듯 충격에 빠져 온몸을 떨며 은정을 향해 소리
우정숙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전에 은정은 분명히 임유진은 내 스타일 아니라며 선을 그은 적이 있는데,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쫓고 있는 걸까?“넌 어떻게 생각해?”우정숙이 묻자,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조금 냉정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돌아왔어요.”그 말투가 생각보다 무거워, 우정숙은 분위기를 일부러 누그러뜨리며 웃었다.“이미 거절했는데도 냉정해져야 해?”유진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어쨌든, 엄마는 이 일.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 그리고 삼촌한테도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그 말에 우정숙은 딸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갑자기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온 이유 혹시 일이 더 커질까 봐? 너희 할아버지가 구은정한테 가서 따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야?”유진은 재빨리 대답했다.“누가 그 사람 걱정했대요? 밖에서 사는 게 질려서 온 거지, 그 사람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하지만 우정숙의 따뜻하고 조용한 눈빛은 유진의 진심을 꿰뚫고 있었다. 우정숙은 다만 조용히 숨을 내쉬며, 더는 묻지 않았다.그날 밤, 구은정은 외부 일정으로 접대를 나갔고,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좀 늦을 것 같아. 집에 들어가면 애옹이 좀 봐줘.]유진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저도 집에 왔어요. 아주머님께 부탁하세요.]은정은 유진이 하루 정도 집에서 자려는 줄로만 알고, 별 의심 없이 답했다.[알겠어.]밤 10시.은정은 아직 접대 자리에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에 구은태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들어왔다.[은정아, 나 몸이 좀 안 좋다. 한번 집에 들러줄래?]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몸 안 좋으면 병원 가시죠.]그렇게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응답은 없었다.술자리가 끝나고 나니 이미 자정 무렵이었다. 은정은 그래도 아버지를 확인하고자 구씨 저택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자, 애옹이를 돌봐주던 장말숙 아주머니가 거실에서 그
정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했죠? 임유진 건드리지 말랬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진소혜는 웃었다.“들었어요. 적이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없애버리라는 그 말, 정말 감명 깊었거든요. 곧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쫓겨날 거예요.”현준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임유진은 쫓겨나지 않아요. 사장님이 반드시 지킬 거니까요.”현준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유진 씨, 그 정체가 간단하지 않아요. 사장님이 곤란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바로 그 애였다고요.”“이렇게 성급하게 나가면 결국 당하는 건 소헤 씨라고요.”소혜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런 것도 그 얼굴 덕 아니었을까요? 임유진이 무슨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도 돼요?”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 애, 성이 임이야.”소혜는 비웃었다.“강성에 임 씨 많은데요? 임씨라고 다 임씨 집안이예요?”“임유진이 정말 그 임씨 집안 사람이었으면, 이런 작은 곳에서 평사원으로 일할 일이 없죠.”강성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집안, 그 임씨 집안 사람이라면 당연히 격이 달랐을 것이다.현준은 소혜를 바라보며, 무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소혜 씨, 소혜 씨는 너무 자만해요. 이제 막 졸업한 사람이잖아요. 세상이 어떤지 아직 몰라요.”“내가 경력은 부족하지만, 머리는 좋아요.”소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어요.”현준은 더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고, 소혜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 달 말이면, 임유진은 이 회사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질 거예요.”이메일은 해외 IP에서 발송된 것으로 확인되어, 추적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루머는 벌써 영업팀까지 퍼진 상황이었다.한때 유진이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걸 보고 감탄했던 동료들조차, 그녀가 정말 실력만으로 이룬 건지 의심하기 시작했다.너무 젊은 나이에, 임씨 그룹 같은 대형 고객을 설득하고, 이미 다른 부서에서 거의 성
서선영은 유혹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거절하려는 듯하면서도 몸은 피하지 않았다.“안 돼. 나, 한 시간밖에 못 나와 있어.”“당신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최이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선영의 치마 지퍼를 내렸다.“밖에 사람 세워놨어. 아무도 안 들어와.”...오전, 임유진은 구씨그룹과의 계약을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회사 고위층 회의에 참석했고, 회의가 끝나고 마케팅부로 돌아왔을 때쯤, 팀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유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모두는 급히 예의를 갖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진은 손에 든 자료를 들고 여진구를 찾아갔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진구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유진이 들어오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무슨 일 있었어요?”유진이 맑은 목소리로 묻자, 진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아니야. 너 손에 든 거, 청원안 자료야? 나 좀 볼게.”하지만 유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휴대폰, 보여줘요.”진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다시 켰다. 방금 보고 있던 건, 유진과 은정이 함께 있는 사진들이었다.둘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그리고 둘이 함께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장면. 얼마 전 중식당에서 있었던 그날이었다.진구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누군가 이 사진들을 너희 팀 메일에 전체 전송했어. 내용은, 네가 구씨 프로젝트를 따낸 게 구은정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어서라고.”유진은 이미 그 메일을 확인했었다. 메일에는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구씨 그룹 사장을 유혹했다는 식의 악의적이고 천박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업계 풍기를 망친다는 말까지, 표현이 거칠고 추했다. 유진은 이를 꽉 물었지만, 곧 침착하게 물었다.“발신 IP 추적할 수 있어요?”진구가 답했다.“지금 IT팀에서 추적 중이야. 내부 직원일 수도 있고, 유지그룹 쪽의 보복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반드시 밝혀낼 거야.”“일단 외부로 확산은 안 됐고, 회사 내부 루머 수준이야. 이미 전체 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