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랑은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테스트기 위에 선명한 두 개의 빨간 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 앉아 언제 임신이 된 건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마 지난달쯤이었겠지.’그때 사랑은 심태경을 따라 C시로 출장을 갔었다. 마침 호텔 스위트룸에 준비된 콘돔은 떨어져 있었고, 온천에서 막 나온 사랑은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태경이 그녀를 침대에 눕혔을 때에도 사랑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를 받아들였다.달콤하면서도 짜릿한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모든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눈을 떴을 때, 태경은 이미 말끔한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었다.사랑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그날 떠나기 전에 병원에 가서 피임약을 처방 받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사랑은 원래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며칠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태경을 따라다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까다로운 상사였고, 사랑을 봐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사랑이 모든 일이 끝나고 병원에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나버렸다. 그녀는 그때 잠시 고민했지만, 이렇게 쉽게 임신할 리 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그 일을 뒤로 미뤘다.현실로 돌아온 사랑은 조용히 임신 테스트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을 나와 찬물로 얼굴을 씻으며 진정하려 애썼다.세수를 마친 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사랑은 생각했다.‘내가 임신을 했다니... 이제 어떡하지?’...사랑이 사무실로 돌아가자, 비서실 신입 비서가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왔다.“강 비서님, 또 누가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사랑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누군데?”비서실 신입 이미현이 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소 거만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또 그 송예진 아가씨예요.”소문에 의하면, 얼마 전 태경과 사귀던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안 되어 차인 뒤로, 송예진은 두 번이나
고등학교 때, 태경은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사랑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고, 마치 동화 이야기 속 지나가는 행인처럼 왕자와 공주의 달콤한 사랑 묵묵히 지켜보았다.언제부터 태경을 짝사랑해왔는지, 사실 사랑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태경이 결혼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3년 동안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사랑은 태경과 말 한마디밖에 한 적이 없었다.“안녕, 난 강사랑이라고 해.”그러나 태경은 사랑이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수줍어하며 자신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사랑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실 불을 켜지 않아, 방안은 무척 어두웠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만졌다. ‘내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니. 그것도 나와 태경의 아이. 아니야, 임신 테스트기도 정확한 건 아니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사랑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할 시간이 없었기에, 내일 다른 브랜드의 테스트기를 몇 개 더 사서 검사해 보려 했다.‘임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만약 정말 아이를 가졌다면... 그건 너무나도 골치가 아픈 일이야.’태경은 자신의 계획을 벗어난 그 어떤 일도 좋아하지 않았고, 사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태경은 매번 주의를 했지만, 유독 지난달 출장 갔을 때 콘돔을 쓰지 않았다.‘그때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 태경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만약 태경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직접 병원에 예약해서 수술 날짜를 잡겠지.’아무도 태경이 결정한 일을 바꿀 수 없었다.막 결혼했을 무렵, 사랑은 천진난만하게 태경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그것이 단지 자신의 환상이란 것을 깨달았다.사랑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생각하면 슬플 것이 뻔했기에,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며 억지로 잠을 잤다.그날 저
사랑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시간 나는 대로 갈게요.”덕훈은 멋쩍게 웃었다.“건강검진은 내일로 예약했으니 꼭 병원에 가보세요.”사랑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알았어요.”그녀는 태경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제시간에 도착할게요.”...오후 내내 사무실에서 진한 커피 냄새가 퍼졌고, 사랑은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서야 좀 나아졌다.퇴근하기 전 사랑은 화장실에 가서 한번 더 토했다. 그녀는 자신의 입덧이 이렇게 심할 줄 몰랐다.찬물로 세수를 하자, 가방 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사랑이 전화를 받는 순간,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화장실이에요.”[지하 차고에서 기다릴게. 오늘 저녁 본가에 가서 밥 먹어야 하니까.]“네, 대표님.”다행히 두 사람이 매달 본가에 가서 식사를 하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박나은은 사랑이 하루 빨리 손자를 낳아주기를 기대했다.차에 올라탄 사랑은 태경의 옆자리에 앉으며 약간 긴장했다. 태경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마치 무언의 압박처럼 다가와 숨이 막힐 듯했다.차 안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야?”사랑은 방금 토했으니 지금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그래요? 괜찮은 것 같은데.”태경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입술은 오히려 빨갛군.”이 말에 사랑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태경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강 비서, 나 몰래 바람피운 거 아니지?”무심코 한 농담이었지만, 사랑은 가슴이 떨리며 잔뜩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그럴 리가요.”태경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요즘 고생했으니, 며칠 휴가 내서 푹 쉬어.”사랑은 생각해 보았다.‘이참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면 되겠다.’그녀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고 있었기에, 태경이 예약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동시에 태경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좋아요.”차는
사랑의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눈가에서 떨어진 눈물에 글씨가 번졌다. 그녀는 눈물을 닦은 다음, 메모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사랑은 태경을 잘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 줄곧 거절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 내가 조금 기분 상하게 했다고, 배로 돌려주다니.’손에 들어간 힘에 수표가 꼬깃꼬깃해졌다. 점차 냉정해진 그녀는 바로 수표를 가방에 넣었다.‘난 억지를 부릴 자격이 없어. 그 누구보다도 이 돈이 필요하니까.’...사랑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침을 먹었다.덕훈은 제시간에 사랑에게 전화를 하며, 건강검진 하러 가는 것을 잊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사랑은 전화를 끊은 다음,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갔다. 검사를 받을 때, 그녀는 돈을 써서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그 사람이 나오자, 사랑은 택시를 타고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 보고는 며칠 후에야 볼 수 있었다.의사는 사랑의 배를 만지더니, 임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사랑이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태경의 전화가 걸려왔다.[검사 다 받았어?]“네.”태경은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얼마 뒤면 덕훈이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그의 사무실로 보낼 것이다.간단하게 물어본 다음, 태경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 이때 사랑이 그를 불렀다.“대표님.”태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 비서, 또 무슨 일 있어?]사랑은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했다.“수표는...”그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무슨 뜻이죠?”태경은 목소리가 담담했고,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내가 분명하게 쓴 것 같은데?]그는 펜을 돌리며 쌀쌀하게 말했다.[네가 받아야 할 보수.]사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태경은 계속 말했다.[어젯밤 강 비서의 서비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거든.]그는 이런 말을 할 때도 무척 담담했다.모욕인지 아닌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평온했지만, 이는 여전히 날카로운 바늘처럼 사랑의 심장을 찔렀고, 무수
정헌은 대답을 듣지 못하자, 잠시 생각했다.“왜, 신경 쓰여?”태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전혀.”정헌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태경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건 강 비서에게 달렸지.”정헌은 쯧쯧 소리를 냈다.“너도 참 매정하다.”‘강 비서는 예쁘고, 성격도 아주 좋고, 몸매까지 섹시하니 어떻게 봐도 미인인데, 안타깝게 태경처럼 감정도 없는 상사를 만났다니.’정헌과 태경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에, 그래도 태경을 잘 아는 편이었다. 태경은 세영을 제외한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었다.‘그때 태경은 세영이에게 정말 잘해줬는데.’소년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했던 소녀였기에, 태경은 그녀를 뜨겁게 사랑했다.태경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별 감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장사일 뿐, 누구와 하든 다 똑같지.”정헌도 사실 농담을 했을 뿐인데, 태경이 이렇게 ‘대범’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예상했던 바였다. 태경은 원래 이성적이었으니까.정헌은 참지 못하고 조언을 했다.“좀 작게 말해, 강 비서 들으면 슬퍼하겠다.”태경은 나른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는데,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냉담했다. “나랑 상관없어.”계약 결혼한 이상, 절대로 상대방에게 마음이 움직여선 안 된다. 그럼 일이 매우 번거로워질 것이다.태경은 사랑이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적어도 이 반년 동안 그녀는 처신을 아주 잘했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절대 하지 않았다.눈치가 있고 능력이 있는 비서 겸 아내였다.정헌은 태경이 화를 낼지 안 낼지가 무척 궁금했다. 잠시 후 정헌은 술잔을 들고 사랑의 앞으로 다가갔는데,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것을 발견했다.사랑은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다 들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손은 떨리기 시작했고, 가슴도 이미 마비될 정도로 아팠다.정헌은 신사처럼 입을 열었다.“강 비서, 또 만났네.”사랑은 바로 뒤로 물러섰다.“구 대표님.”
사랑은 얼굴을 붉혔지만 또 안색이 창백해졌다.태경은 항상 그녀를 쉬운 여자로 취급했다. 아마도 사랑의 역할은 그의 욕망을 해소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술자국에 얼룩진 사랑의 손가락을 보며, 태경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손수건으로 사랑의 손을 닦아줬다.사랑은 갑자기 부드러움을 베푸는 태경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항상 태경의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그 사소한 사랑을 갈망했다.‘많이 안 줘도 돼, 조금이면 충분해.’사랑은 저도 모르게 어느 해 여름방학 전의 마지막 체육수업을 떠올렸다. 그녀는 교실 창밖을 지나고 있었고, 바람은 강의동 밖의 꽃나무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이때, 찬란한 햇빛은 마침 태경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소년은, 장난스럽고 유치하게 자신의 손목과 세영의 손목을 리본으로 묶었다. 세영은 책상에 엎드려 깊이 잠들어 있었다.태경은 머리를 받치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예쁜 눈에 환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렇게 애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자고 있는 소녀를 지켜보았다.교실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세영을 방해하면 안 되니까.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사랑은 마음이 쓰라리면서 씁쓸했다. 태경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뿐이었다.‘그치만 분명히 내가 먼저 태경과 만났는데. 이 남자도 날 직접 찾아와서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전부 잊어버렸다니... 아니야... 단지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뿐이야.’사랑은 정신을 차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선 연회가 끝났을 때, 사랑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배고파서 무척 괴로웠다.‘뱃속의 아이는 입맛이 아주 좋은 것 같아.’지금 사랑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냉장고에 케이크가 있었기에, 그걸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차에 타자, 사랑은 태경에게서 나는 술기운을 맡았다. 그리 짙은 냄새는 아니었다.태경은 술을 마셔도 항상 자제했다. 그는 접대할 필요가 없었고,
사랑이 자신을 세 번이나 거절했기 때문일까, 흥이 깨진 태경은 기사에게 그녀를 별장으로 데려다 주라고 지시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떠나버렸다.샤워를 마친 사랑은 거실에 앉아 케이크를 한 입 먹어 보았다. 달콤해야 할 케이크였지만, 그 맛은 지금의 사랑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 순간, 눈물이 한 방울씩 손등 위로 떨어졌다. 임신 탓인지 사랑은 요즘 감정이 쉽게 요동쳤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렸다.사랑은 눈물을 훔치고 한동안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음이 차츰 가라앉자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눈은 자꾸 감겨왔지만, 잠은 그저 멀기만 했다.결국 사랑은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고, 카톡을 열었다.[태경 씨, 나 임신했어요.]삭제하고 다시 편집했지만,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됐어. 말하면 뭐가 달라진다고.’사랑은 주말에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눈을 꼭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꿈속에서 사랑은 소년 시절의 태경을 보았다. 그의 손과 발은 날카로운 철사에 묶여 있었고,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호흡은 너무나 미약해, 마치 이미 숨이 멎은 것처럼 보였다.어린 사랑은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힘이 부족했다. 결국 손가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뒤에야 철사를 풀 수 있었다.그러던 찰나, 둘을 납치했던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남자는 사랑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고, 그녀의 귓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그때의 태경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경찰들이 그 남자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있었기에, 그는 화풀이로 태경을 무참히 때렸다.사랑은 태경이 죽을까 봐 두려워 매일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동화까지 들려주며 그의 곁을 지켰다.“꼭 살아야 해.”이것은 사랑이 태경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었다.잠에서 깨어날 때, 마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랑은 오랜만에 납치 사건과 관련된 꿈을 꿨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여전
사랑은 태연하게 돈을 받은 다음, 주방에 가서 저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담담한 척하며 태경에게 문자를 보냈다.[저녁에 돌아와서 식사할 거예요?]결혼한 후에도 사랑은 태경과 동거를 하며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솥 안의 국은 이미 끓기 시작했다.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은 냉담한 답장을 받았다.[아마도.]사랑은 식탁에 앉아 한 상 가득 차린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임산부는 감정이 예민해서, 이미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오늘 밤 여전히 외로움을 느꼈다.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는데, 이미 밤이 되었다. 식탁 위의 음식도 식기 직전이었다.사랑은 다시 음식을 데웠고, 또 30분이 지났지만 시종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신중하게 문자를 여러 번 편집했다.[저녁을 준비했는데, 언제 돌아올 거예요?]사랑은 눈을 드리우며 자신이 보낸 문자를 쳐다보더니 또 무뚝뚝하게 삭제했다.집안의 가정부도 곧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사랑이 그녀에게 말했다.“이모님, 이 음식들 다 버려요.”윤미숙은 이 여주인을 무척 동정했다. 집안의 가정부도 태경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네, 아가씨.”가정부의 월급도 태경이 책임졌다. 처음에 그들은 사랑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는데, 한 번은 태경이 이를 들었고, 불쾌해하지 않았지만 그저 앞으로 그녀를 아가씨라 부르라고 했다.깍듯한 호칭인 동시에 거리감이 있었다....밤 10시가 되자, 사랑은 소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그녀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게스트가 나오고 있었다.얼마 전, 이 여자 연예인과 태경이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로 떴다. 텔레비전 속에서 시크한 여신 같았던 그녀는 태경 앞에서는 활짝 웃으며 그의 팔을 다정하게 끼고, 한밤중에 호텔을 드나들었다.사랑은 태경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모두 태경에게 마음을 고백할 용기가 있었지만, 정작 사랑만은 그러
사랑은 몸이 뻣뻣해졌다. 지호가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사람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가 있었다. 사랑도 그때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팔지도 않았을 것이다.태경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다.그도 사랑이 왜 에스타나이트에 가서 아르바이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청연의 병원비는 결코 한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태경은 사랑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군.’지호는 태경이 무관심한 것을 보고 재미없다고 느꼈다.‘하긴, 신경 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강사랑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겠어.’지호의 머리는 또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참았다. 매번 사랑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지호는 머리가 따끔거렸고, 마치 바늘이 관자놀이를 호되게 꿰뚫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또 그렇게 빨리 사랑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려 하지 않았다.지호는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다. 도대체 자신의 병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 그렇게 얄미운 것인지. 그의 피부는 눈처럼 창백했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럼 너희들 방해하지 않을게.”‘더 이상 있을 순 없어.’몸을 돌려 떠나자, 애써 참았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호는 발걸음을 비틀거렸고, 옆의 난간을 짚어서야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숨을 깊게 쉬었다.이 순간, 전기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통증은 그제야 서서히 사라졌다.지호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눈빛의 살의는 전례 없이 짙어졌다. 그는 마치 악마처럼 이를 갈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강사랑을 죽일 거야. 그 사람이 죽기만 하면, 난 더 이상 그 여자를 볼 리가 없고, 이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을 거야.지호는 일찍 연회장을 나섰다. 그는 차에 앉아 미간을 비비다가, 갑자기 입을 열고 앞에 앉은 기사에게 물었다.“내가 예전에 병원에 있을 때, 어떤 치료를 받은
지호의 말은 모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랑을 향한 경멸이 넘쳤다.태경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거지?”지호는 평소에 남의 일을 알아보지 않았고, 그럴 흥미도 없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가족사업을 인수하면서, 그 깨끗하지 못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빠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지호의 안색은 차가웠고, 짙은 동공은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궁금해서.”태경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세영을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네가?”지호가 세영을 좋아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이미 누군가 알아차린 일이었고, 그때 태경도 오만하고 도도한 소년이었으니, 이 일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다만 그는 승부욕이 강했기에 지호에게 한 번 고백해 보라고 했다. 누가 세영의 마음을 얻느냐에 따라 진정한 승자가 결정된다고 말하며.태경은 지호가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그는 세영과 죽마고우였으며, 같은 골목에서 자란 이웃이었다고 했다.오랜 치료로 지호는 그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감정만큼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호는 태경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동창이었으니 당연히 궁금하지.”태경은 사랑과 지호가 동창이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 무척 의아해했다. 물론 태경도 사랑과 동창이었다.그러나 태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인상도 없어, 잠시 침묵했다.“중학교? 고등학교? 아니면 대학?”지호는 무슨 재미있는 일이 생각났는지, 입가에 미소가 천천히 나타났다. 그는 수려하고 정교하게 생겼으며, 뚜렷한 윤곽은 마치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웃으면 미간의 포악한 기운도 사라져 무척 매혹적이었다.그는 쯧쯧 소리를 내며 말했다. “네가 강사랑에게 물어봐.”걸레라 말하고 싶었지만, 지호는 또 억지로 삼켰다.지호는 동정심
사랑은 태경의 뜻을 알 수 있었다.“사랑 따위 없어.”이것은 태경이 준 충고였다.두 사람 사이에 호흡이 생겼는지,사랑은 자신이 지금 정서를 잘 숨길 수 있는 배우로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심장 전체가 유리 조각으로 뒤덮여 따끔거려도,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 행세할 수 있었다.그녀는 억지로 태경에게 웃었고, 조금도 자신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농담이에요.”말하면서 사랑은 손을 놓았다.“대표님께서 듣고 싶지 않으시다면, 앞으로 저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게요.”태경은 오늘 밤 사랑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기다, 그는 사랑의 너무 요염한 미소를 보며 입을 열었다.“강 비서 오늘 밤 기분이 좋은가 봐?”‘이렇게 환하게 웃다니. 하지만 너무 가식적이야.’태경은 사랑이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미소는 항상 뻣뻣하고 불편해 보였다.“괜찮은 편이에요.”“하지만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아. 제가 디자인과 관련된 것을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태경은 사랑이 전에 디자인과 관련된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러나 하나는 홈 디자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얼리 디자인이었다. 어떻게 봐도 관계가 없었다.사랑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직 직장을 구하지 못한 대학생이었다. 사랑은 매일 힘들게 뛰어다니며 여러 회사로 면접을 보러 갔다. 약간 초췌했지만 또 의욕이 넘쳤다.마치 바위 틈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잡초와 같았다.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니, 한없이 연약해 보이고 바로 끊어질 것 같지만, 또 생각보다 완고하고 강인했다.“주얼리 디자인과 홈 디자인이 같은 거야?”태경이 웃으며 물었다.“확실히 다르지만, 홈 디자이너는 주얼리를 좋아하면 안 되나요? 대부분 여자들은 주얼리를 좋아하잖아요.”태경은 사랑이 평소 주얼리에 관심을 가진 적을 보지 못했다. 박나은은 사랑을 엄청 좋아했는데, 때로는 친아들인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약혼하자마자, 박나은은 사랑에게
태경은 똑똑한 사랑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가끔 애교를 부리는 그녀가 좋았다.그는 눈앞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드러진 웃음은 진심이 아닌 짜낸 웃음이었지만, 이곳의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다웠다.“앞으로 그 사람들 건드리지 마.”태경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 한마디만 했다.사랑은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지만, 이 정도 따끔함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점차 웃음을 거두며,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입을 열었다.“제가 어찌 감히 엄 여사님을 건드리겠어요? 그런데 기어코 저를 귀찮게 하려 하시잖아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강 비서는 피할 줄도 모르는 거야?”사랑이 말했다.“제가 눈에 거슬리니까, 저를 해치려는 거잖아요. 그럼 어떡해도 피할 수 없죠.”사랑은 다정하게 태경의 팔을 안으며 다시 웃었다.“차라리 대표님이 가셔서 엄 여사님에게 직접 말씀드려요. 저와 대표님은 그저 계약 부부일 뿐이란 것을. 그럼 엄 여사님도 저를 봐줄지도 몰라요.”말을 끝내자, 태경은 줄곧 침묵에 잠겼다.엄수인이 그렇게 유치하고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서, 사랑을 괴롭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지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랑은 오늘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기 때문에, 태경의 앞에서 말할 때, 더 이상 주의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만약 엄 여사님이 오늘 절 봐주지 않는다면, 대표님께선 절 도와줄 건가요?”태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엄 여사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지?”“강세영 씨가 슬퍼할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요.”태경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랑의 턱을 들어 올렸다.“넌 항상 세영과 비교하길 좋아하더라.”그가 이렇게 말하자, 사랑은 그제야 자신이 늘 세영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남편이 바람난 조강지처도 아니고, 이러면 안 돼, 강사랑. 난 이런 사람으로 되고 싶지 않아.’사랑은 더 이상 웃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경은 무척
사랑은 태경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봐도, 그녀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사랑은 담담하게 엄수인을 바라보았다. 마흔에 가까운 여자는 마치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예쁘지는 않았지만, 기질은 무척 부드러웠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엄수인을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은 병원에 있었고, 병실 안에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남청연이 누워 있었다.엄수인은 문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며 가식적인 태도를 보였다.“어머 불쌍해라.”남씨 가문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었고, 사랑의 삼촌도 경제 범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강남복은 그런 사랑을 C시로 데리고 갔다.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진심으로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남들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억지로 자신을 키웠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엄수인은 강남복 앞에서 사랑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뒤에서 은근히 강남복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사랑이 오늘 또 울었어. 아마도 가족이 그리운 것 같아.’사랑은 줄곧 남씨 가문의 사람들과 아주 친했다.강남복은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해서, 그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고,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엄수인이 아무렇게 한 말 때문에, 사랑은 강남복에게 뺨을 두 대나 맞았다.“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이미 죽었고, 네 삼촌도 이미 감옥에 들어갔어. 정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너도 그냥 죽어. 내 앞에 와서 재수 없게 굴지 말고.”사랑도 그때 겨우 열 몇 살이었고,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녀는 강남복 앞에서 울지도 않고, 아픔을 참으며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울고 보채고, 또 강남복과 말다툼하면 엄수인의 함정에 걸려들 뿐이었다.그때 사랑은 강남복이 매달 주는 생활비를 받아서 남청연의 병원비를 내야 했다.그녀는 전에 엄수인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기에, 지금은 더욱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랑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엄 여사님, 나이가 드셔서 치매라도 걸리셨나 봐요? 절
사랑은 추위를 좀 타서 숄을 걸친 다음, 사람이 적은 구석에 가서 앉으며, 종업원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달라고 했다.경매장에는 화려한 등불이 켜져 있었고, 무척 눈이 부셨다.사랑은 C시에서 아주 잘나가는 거물들을 많이 보았다.‘강세영도 대단하네, 이런 분들을 초대했다니.’사실 사랑은 처음에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각 대회에 참가했다. 세영은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전공을 선택했고, 그저 학급과 교수님이 달랐다.매년의 디자인 대회는 신인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었다. 그해 사랑은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기 전에, 교수님이 보낸 최고의 디자인 대상을 보았다. 그 그림은 그녀의 컴퓨터에 있는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그것을 본 순간, 사랑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교수님은 세영이 디자인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녀를 천재라고 했다.사랑은 그 그림을 보고 머릿속이 좀 혼란스러웠다.“이게 강세영의 작품이라고요?”교수님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래, 너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특히 생기가 있어. 이미 오랫동안 이렇게 대단한 신인이 나타난 적이 없는데.”사랑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 왜 세영의 것으로 됐겠는가?그녀는 한 달 넘은 시간을 들여서야 이 작품을 설계했는데, 그동안 무수히 많은 원고를 쓰레기통에 버렸다.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을 때, 세영은 재빨리 사랑을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훔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사랑에게 출세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사랑은 자신의 컴퓨터가 영문도 모른 채 해킹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컴퓨터를 들고 수리하러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디자인 원고를 되찾았다.‘아마 그때부터 강세영은 이 일을 계획하고 있었을지 몰라.’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에, 사랑도 나설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유력한 증거조차 내놓을
병원의 간병인은 사랑의 엄격한 말투에 깜짝 놀랐다.평소의 사랑은 줄곧 얌전하고 부드러워, 여태껏 이렇게 큰 소리로 자신과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간병인은 전전긍긍했다.[꽃을 들고 오셨기에 나쁜 사람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또 어머님의 옛 친구라고 말씀하셔서, 들어오시라고 했어요.]사랑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그녀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얼굴을 하며 엄숙하게 경고했다.“앞으로 그 여자 또 온다면, 그냥 떠나라고 해요.”간병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어요.]사랑은 전화를 끊어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냉정함을 유지하며, 엄수인이 오늘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엄수인은 이유 없이 우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지 않았을 거야. 그 여자는 무슨 일을 하든 다 목적이 있었어. 그때 그렇게 오랫동안 참은 것을 보면, 엄청 교활하고 똑똑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강남복이 이렇게 쉽게 남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차지한 것도 다 엄수인이 뒤에서 도와줬기 때문이다.태경은 사랑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병원에 무슨 일 생겼어?”사랑은 화를 참으면서 태경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아니에요.”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챙겨주고 싶었다. 동정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사랑이 홀로 C시에 와서 학업을 마치고, 일자리를 찾는 게 확실히 쉽지 않다고 느꼈다.‘강 비서는 원래 N시의 사람인 것 같은데. 강 비서 어머니도 N시의 사람이었지.’C시에 배경도, 가족도 없었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무척 힘들게 나아갔다.태경은 사랑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솔직히 말해.”사랑도 사양하지 않았다.“알았어요.”사랑은 눈을 들어 태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엄수인과 맞설 때, 내가 이긴 적이 없는 건 아니야. 엄수인은 심태경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어 할 텐데.’심씨 가문은 강씨 가문과는 달리 명실상부한 명문가였다. 태경의 아버지는 정치인이었고, 작은아버지도 권세가 높은
태경은 들으면서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난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을 많이 하면, 내가 엄청 신경 쓰이는 것 같잖아.’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차가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때 가도 정말 이렇게 소탈하게 생각할 수 있길 바라.”태경은 남자를 잘못 만나 고생한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다.그에게는 멍청한 사촌 여동생이 있었다. 재벌가의 아가씨였던 그녀는 가난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몇 년 동안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겨우 그 남자를 손에 넣었고, 각 방면으로 잘 챙겨주었지만, 결국 그 남자는 사촌 여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돈을 충분히 모은 후에 그녀를 차버렸다.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태경을 찾아와 애원했다. 이를 갈며 그 남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태경은 그녀의 부탁에 짜증이 났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어떻게 하기도 전에, 사촌 여동생은 마음이 약해져 얼른 멈추라고 했다.당시 태경은 무척 냉담하게 물었다.“대체 어쩌자는 거야?”사촌 여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이렇게 맞는 것을 보니까, 내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태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마음이 왜 아파?”만약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그를 대한다면, 태경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날 놀리고, 내 감정을 짓밟는다면, 죽어도 싸지.’태경의 사촌 여동생도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당하면 반드시 갚아줘야 했고, 속도 좁아서 의심이 많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에게 거의 당한 적이 없던 재벌 집 아가씨가 남자에게 버림받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니.정신을 차리자, 태경은 사랑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럴게요.”태경은 사랑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면서, 나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자존심이 있었고, 강경하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항상 약속을 잘 지켰다.그러나 태경은 여전히 사랑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그때 가서 돈도 낭비하고, 시간도 낭비했지만 괜히 마음
이혼을 하든 말든 사랑은 상관없었다. 지금 이혼하나, 2년 후에 이혼하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렇게 되면 사랑은 다른 방법을 찾아 남청연의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다른 모든 것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터였다.사랑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태경에게 사실대로 말했다.“만약 이혼을 원하신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녀는 언제든 계약을 앞당겨 종료하는 것에 협조할 수 있었다. 태경이 계약서의 규정에 따라 상응하는 위약금을 배상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사랑은 자신이 말을 마치고 난 후, 태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은 무척 차가웠다.태경의 변덕스러운 기분을 줄곧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던 사랑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완곡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물론, 앞당겨 종료한다면, 나에도 배상금이 있는 거 맞죠?”사랑은 행여나 태경이 화가 나서 약속을 번복할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이제야 태경이 왜 감정이 없는 거래를 하기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확실히 간단하고 편리했다. 앞으로도 번거로움이 없을 것이고, 그저 충분한 돈만 있으면 된다.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랑을 쳐다보더니 냉소를 지었다.“강 비서, 나한테서 배상금을 충분히 받지 못한 거야?”이 말이 나온 순간, 사랑은 가슴이 아팠다. 정말 각박하고 매정한 남자였다.태경은 인정사정 없이 말했고, 사랑은 시간이 좀 걸려서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좀 초라해 보였는데, 생각해 보면 태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난 이미 심태경에게서 적지 않은 배상금을 받은 것 같아. 아이를 지우면서, 천만 원 넘은 돈을 받았잖아.’사랑은 마음이 이미 마비되어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못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욕심이 많은 법이죠. 돈이 많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태경은 손으로 사랑의 턱을 잡으며, 좁고 긴 눈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리고 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