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호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태경은 회사에서 회의 중이었다. 핸드폰의 메시지 알림음이 짧게 울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회의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아무도 대표의 개인적인 메시지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회의 중에는 참석자 가운데 그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참석자들은 긴장으로 등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셔츠가 등에 들러붙어 끈적거리고 불쾌했다. 부하 직원들은 오늘의 제안에 대해 대표인 태경이 만족한지 아닌지를 알기 어려웠다. 그의 표정으로 태경의 마음에 드는지 판단해보려 애썼지만, 태경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다. 태경은 무심히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리다 그쳤다. “오늘은 여기까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오늘은 야근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태경은 짬이 나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자 메시지의 발신번호의 주인은 성지호였다. 거기에는 짧고 강렬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 사랑이와 잤어.] 태경은 그 문장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맑았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차갑게 식어갔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농담으로 여겼겠지만, 지호라면 말이 달랐다. 태경이 아는 지호는 자신이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경은 잠시 생각한 뒤, 지호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지호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태경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태경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벽증의 소유자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건드린 것을 더럽다고 여길 것이 분명했다. 지호도 사랑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어딘가 천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태경은 지호에게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호가 사랑을 건드린 일이 태경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지호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상대가 걸려들지 않으니 자신의 유
뮤지컬 티켓 두장 다 VIP 석이었다. 연석이고 모두 최상의 시야를 자랑하는 좌석이다. 게다가 뮤지컬 거장 웨버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귀한 기회였다.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정도였지만 태경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태경이 한마디만 하면, 바로 누군가가 티켓을 그의 손에 쥐여주기 마련이었다. 사랑은 티켓에 적힌 공연 시간과 장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도 조금은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비록 구하기 어려운 티켓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보다 공연장 앞에서 태경과 세영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평소의 냉정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와, 손을 들어 태경의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3초 후, 하이힐을 신은 사랑이 조용히 태경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티켓을 태경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말씀하신 티켓입니다.” 태경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그녀를 쓱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근무 힘들지 않았어?” 사랑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사실 힘든 것 별로 없었다. 오늘은 사랑이 할 일이 거의 없었고, 자잘한 일조차 몇 가지 되지 않았다. 태경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사랑은 잠깐 망설였다. ‘여기는 회사인데 대표실이라도 언제든지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을 건데...’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뭐 하려고요?” 태경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면 와.” 사랑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대표님, 곧 누가 들어올 수도 있어요.” 태경은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말했다. “들어와도 다들 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거야.” 사랑은 태경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마지못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걸까?’ ‘설마 여기서 또...?’ 하지만 태경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부부생활은 일주일에 두세 번이면 충
사랑은 살아오면서 남자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은 긴장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현미는 계약서의 검토를 끝내고 퇴근 시간쯤에 여유가 생기자 의자를 끌어 사랑 옆에 바짝 다가앉았다. “사랑아, 이번에 너 복직하고 나서 심 대표님의 기분도 훨씬 좋아진 것 같아.” 사랑은 현미가 과장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모르는 척했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진짜야. 오늘 아침 회의 때, 완전 봄바람이 불더라니까.” 사랑은 아침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그런 분위기를 알지 못했다. 현미의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고 대신 현미를 보며 물었다. “현미야, 너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현미가 약간 놀라며 답했다. “만으로 스물두 살.” 현미는 올해 막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명문대학 출신에 수백 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인재였다. 사랑도 사실 현미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함께 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사랑은 긴장되어 떨리는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연애는 해봤어?” “당연하죠.” “그럼 너는 남자친구랑 데이트할 때, 주로 뭐해?” “그냥 밥 먹고, 쇼핑하고?” “아, 그렇구나.” 현미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왜?” 사랑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그리고 이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퇴근 시간 지났어, 얼른 집에 가서 쉬어.” 현미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유리문 안에 있는 사무실을 가리켰다. “대표님은 아직 안 나가셨어.” 예전같으면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사랑도 남아서 일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미가 갑자기 물었다. “사랑아, 몸은 정말 괜찮아?” 두 달이나 병가를 냈던 터라 사람들은 사랑의 병이 꽤 깊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은 작은 가방을 들며 대답했다.
사랑의 손가락은 추위에 얼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그녀의 손이 약간 떨렸다. 손목에 힘이 빠져 핸드폰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고, 뼛속 깊이 스며드는 서글픔이 사랑의 가슴에 가득했다. 마음속은 마치 텅 빈 벽처럼, 아무렇게나 두드리면 메아리만 돌아오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공연이 곧 시작됩니다. 관객 여러분, 질서 있게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공연장 위쪽 방송에서는 여전히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고, 사랑은 정신을 차리며 태경에게 이해심 많은 답장을 보냈다. [네, 나는 괜찮아요. 일하는 데 방해하지 않을게요.] 간단하게 답장하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사랑은 핸드폰을 꺼버리고 손에 쥐고 있던 티켓을 꼭 쥐고는 공연장 입구로 걸어갔다. ‘혼자 공연 보는 것도 괜찮아...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그 사람... 원래 바쁜 사람이니 갑자기 다른 일정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 사랑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하며 ‘괜찮아’라고 되뇌었다. ‘정말 괜찮아. 단지 조금 실망했을 뿐이잖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공연장의 스태프는 사랑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손님, 괜찮으세요?” 사랑은 티켓을 건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스태프는 티켓을 받아 들고 두 장 중 한 장을 다시 사랑에게 건네주었다. 사랑은 손을 내밀지 않고, 그 티켓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용이에요.” 스태프는 사랑의 친구나 남자친구가 화장실에 간 줄로만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친구분 오시면 말씀해 주세요.” “네.”사랑은 짧게 대답했다. ‘그 사람... 오지 않을 거야.’ ...뮤지컬이 시작되었고, 공연은 약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사랑은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었지만, 무대 위 배우들을 바라보면서
사랑은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비록 너무나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택시를 잡아 무심코 주소 하나를 불렀다. 아직 시간이 그렇게 늦지는 않았고, 주말에는 상점 영업시간도 한 시간 더 연장되곤 했다. 지금 그녀는 발뒤꿈치가 너무 아파 고통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미 살갗이 벗겨져 피가 맺혀 있었기에 사랑은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바닥을 걸었다. 발바닥이 조금 차갑기는 했지만 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사랑은 근처의 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녀는 약간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잠시나마 정리하며 그곳에 앉아 있었다. 카페 직원에게 머리끈을 하나 빌려 머리를 묶고 나니 축축했던 머리카락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사랑의 깨끗하고 단정한 얼굴이 더 돋보였고, 피부는 창백하지만 붉은 입술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카페 영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그녀는 킬힐을 다시 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태경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 화면이 잠시 빛나더니 곧 꺼졌다. 사랑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태경 역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 사랑은 별다른 의미 없이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마치 자신이 화를 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길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약간 지친 상태였고, 잠시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오늘은 세영의 생일이라서, 태경이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준 것만으로도 사랑에게 태경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다. 사랑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세영의 생일 파티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방금 전 구정헌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 일을 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은 다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카페 영업이 끝날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 계산을 마치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태경이 아직 강씨 가문 저택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태경은 자신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다. 거실에는 밝은 불빛이 가득했고, 태경은 소
태경이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직장에서 태경은 사랑의 상사였고, 사랑이 진행하는 모든 업무는 그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퇴근 후에도 이 사랑 없는 계약 결혼의 절대적 권력자는 태경이었고, 모든 결정은 이 남자가 내렸다. 사랑은 반항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손과 발은 차가웠고, 온몸이 떨릴 정도로 냉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표님의 말씀이 맞네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래요. 다른 남자와 데이트했어요. 그게 문제라면, 다음엔 안 그럴게요.” 태경은 사랑의 이런 무심한 태도를 가장 싫어했다. “강사랑, 난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태경은 냉정하고 감정 없는 사업가였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다 태경의 의도와 목적이 숨어있었다. 태경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도 편할 수는 없었다. 사랑은 오늘이 강세영의 생일이었으니 태경의 기분이 좋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약속을 어긴 것은 본인이면서 왜 되려 나를 ‘불성실하다’라며 탓하는 것 같지?!’ 사랑은 약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아마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맞은 비 때문일 것이다. 원래도 허약한 체질인 그녀는 조금만 방심해도 쉽게 감기에 걸리거나 열이 났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때문에 사랑은 눈앞에 있던 남자가 희미하게 번져 잘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평소와 다르게 붉어지기 시작했다.결국 사랑은 조용히 말했다. “심태경 씨.” 사랑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묘하게 나른했고, 발음도 명확하지 않았다. 태경은 사랑의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주며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사랑의 이마에 댄 손에서 열감이 충분히 느껴졌다. 사랑이 열이 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경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사랑이도 가끔 자신의 병약한 체질이 싫었다. 비라도 조금 맞기만 하면 고열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녀는 잠을 설쳤고, 밤새 꿈을 많이 꾸면서 온몸이 후끈거려 땀까지 흘렸다. 사랑은 몸 위로 덮은 따뜻한 이불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누군가 손과 발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더워서 땀을 줄줄 흘렸지만, 몇 번을 더 버둥거려도 단단히 이불 속에 갇힌 채였다. “너무 더워요...” 그녀는 괴로운 나머지 힘겹게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태경이 무언가 말을 했지만, 그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랑이 눈을 떴을 때 몸이 끈적거려 불쾌했다. 밤새 땀을 많이 흘린 듯했고,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태경은 그녀보다 먼저 깨어 이미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사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고, 태경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넥타이를 마무리하면서 조용히 물었다. “좀 괜찮아졌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열 시였다. 태경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사랑은 어젯밤 일에 대해 기억이 희미했지만, 태경과의 관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태경 씨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좀 나아졌어요.” 사랑이 대답했다. 태경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열이 이미 내린 상태였다. 사랑은 그의 시선을 피하고 먼저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저, 좀 씻을게요.” “그래, 다녀와.” 사랑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오니, 태경은 아직 떠나기 전이었다. 태경은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았다. 딱 맞는 정장 차림에 그녀의 몸매는 우아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사랑은 어젯밤 열이 났던 탓에 얼굴빛이 창백했고, 생각이 조금 느릿했다. “어디가 문제예요?” ‘평소에 출근할 때 늘 이렇게 입었고, 전혀 문제 될 게 없는데
오늘 아침, 강 비서가 심 대표의 차를 타고 출근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회사 내 모든 부서에 퍼졌다. 심지어 아침에 심 대표가 강 비서를 직접 대표 전용엘리베이터에 타라고 했다는 이야기까지 구석구석 퍼졌다. 원래부터 일부 직원들은 강 비서와 심 대표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지만, 심 대표는 늘 일에 철저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섞는 일이 전혀 없었기에 냉정하고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그의 성격상 사내 연애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사랑은 아침부터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몇 개의 이메일을 처리하고 태경의 향후 일정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침에 억지로 감기약을 먹은 탓인지 약 기운에 졸음이 몰려왔다. 사랑은 사무실에서 졸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아직 칸에서 나오기도 전에,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했잖아, 강 비서가 심 대표 내연녀라고.” “나는 전혀 몰랐는데.”“너도 참 둔하네. 심 대표가 강 비서한테만 좀 다정하잖아.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 한 여자가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덧칠하고는 계속 말했다. “게다가 강 비서는 원래 디자인 전공이었는데, 대학 때 표절한 전력이 있대. 그런 사람이 우리 회사 정식 채용 절차를 합격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네 말에도 일리는 있네.” 함께 있는 여자는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심 대표 같은 남자와 엮이는 거라면, 그저 숨겨진 내연녀라도 나는 좋아.” 또 다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결국 강 비서도 능력 있는 거지. 예쁜 얼굴로만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잘 모셔야지. 그렇게 순종적이니까 심 대표가 그렇게 그 여자를 아끼는 거겠지.” “그런데 강 비서가 언제 버려질런지 모르겠네. 만약 결혼이라도 꿈꾸고 있다면 그건 그냥 꿈이지.” “강 비서 출신이면 절대 심 대표의 배우자 못 되지.” “그러니까 가족으로 맞아들일 수 없는 여자야.” 사랑은 화장실 칸 안에서 조용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