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시간도 늦었으니까 얼른 남은 거 다 하세요. 그래야 맛있는 저녁을 먹죠. 아니면 이따가 식을 거예요.”윤슬은 남자의 손길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러자 부시혁은 드디어 이해가 갔다.‘그래서 내 품에서 빠져나온 거구나. 난 또 내가 안아준 걸 싫어하는 줄 알았네.’“알았어. 빨리 끝낼게.”부시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려 방금 내려놓은 칼과 호박을 들고 계속 조각했다.윤슬은 다시 원래 자리에 서서 그가 조각하는 걸 얌전히 지켜보았다.“불상 조각을 배운 사람이 꽃도 깎을 줄 알 거라고 생각 못
아무튼 지금까지 부시혁은 자기기 뭘 할 줄 아는지 통계를 한 적이 없었다.“그래. 그럼 기대할게. 네가 나의 어떤 재능을 발굴해 낼지.”부시혁은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윤슬을 보며 말했다.윤슬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기대하세요. 꼭 찾아낼 테니까요.”“응. 난 너 믿어.”부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윤슬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얌전해졌다.부시혁은 한참 하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자기가 조각하는 걸 지켜보는 윤슬의 모습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하던 걸 멈추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한번 해볼래?”부시혁은 경
“확실해요!”윤슬은 아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가 확실하게 배웠으니, 부시혀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다.부시혁은 그녀가 이렇게 자신 있어 하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 그럼 한번 해봐. 결과가 어떨지 기대할게.”‘내가 없어도 정말 해낼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걱정하지 마세요. 실망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윤슬은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계속 조각하기 시작했다.부시혁은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치고 팔짱을 낀 채 한쪽 벽에 기대고 섰
윤슬은 부시혁의 접시에 반찬을 집어주었다.그러자 부시혁의 마음은 솜사탕처럼 말랑하고 달콤해졌다.부시혁은 처음에 윤슬한테 좋은 일이 있어서 축하하려고 이 한 상을 차린 줄 알았다.예를 들면 다시 돌아온 부품, 이건 축하할 만한 좋은 일이었다.그래서 그는 술 한 병 따자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윤슬이 이 한 상의 요리를 만든 건 뭘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다.부시혁이 요즘 계속 윤슬이랑 있어 주느라, 많은 일이 밀려졌는데 그녀는 그게 마음에 걸렸고 미안해서 푸짐한 저녁을 준비했다.아무튼 오늘 이 한
아무래도 의심을 받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으니까.“제 추측이에요.”윤슬은 시선을 내리고 육재원이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추측이라고 했다. 만약 육재원이 그랬다고 하면 남자는 아마 질투가 나서 또 기분 나빠 할 수 있었다.‘그러니까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나아.’“왜 내가 사람을 보낸 거라고 생각해?’부시혁은 윤슬을 보며 물었다.그러자 윤슬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낮에 제가 재원이한테 점심 사준 것도 말 안 했는데 알았잖아요. 천강의 부품이 뺏긴 일도 그렇고. 그래서 또 천강에 사람을 보내서 절 감시한 게 아닌지
“만약 그게 중요하다면, 왜 나에게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아? 심지어 날 찾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는데, 왜 날 찾지 않아? 아니면 네 마음속에서, 나는 신뢰할 수 없는 남자인 거야?” 부시혁은 윤슬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었다.부시혁이 윤슬의 마음속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자 윤슬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왜 당신에게 말하지 않고 또 찾지도 않은 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에게 의지하기 싫어서였어요.”“이 생
“뭐?” 부시혁은 안색이 급변하고 동공이 떨렸다.“이전에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네.”윤슬이 말했다.“지난 6년, 당신은 날 안중에도 두지 않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고 천성의 주인이 바뀌었죠. 그때 저를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죠.”“이 때문에 당신의 새엄마, 당신의 동생, 당신의 파트너, 당신 뒤에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들, 모두 나를 비웃고 모욕했어요.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조금도 날 생각하지 않아서였죠. 그
윤슬은 부시혁과 차분하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제가 너무 연약한 상대였던거죠. 좋은 가문도, 부모도, 남편의 관심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약자를 괴롭히고 강자를 두려워해요. 이걸 알고 나니 내가 너무 약했던 사람이었구나 깨달았어요.”“그리고 결심했죠. 반드시 강해져야겠다고. 그리고 단순히 실력만 갈고 닦는 것이 아니라 인맥을 쌓아 더 높이 올려가야 한다고. 그래야만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그리고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혼자잖아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어요.”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