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옆에서 부시혁을 모시는 장 비서도 이 사실은 처음 듣는 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머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시혁이 제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항상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왕수란의 불만스러운 말투에도 육경자의 차가운 시선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곧이어 의사가 들어오고 부시혁에게 진통제를 처방했다. 약빨이 돌아서일까 부시혁이 다시 부스스 눈을 떴다.방금 전보다 훨씬 더 창백해진 안색에 육경자가 손자의 손을 꼭 잡았다.“시혁아, 괜찮아?”할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부시혁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
고개를 끄덕이던 육경자가 말을 이어갔다.“그래. 예전의 넌... 지금처럼 차갑지 않았었어. 오히려 살가운 성격이었지. 그런데 6년 전... 그 사고 뒤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됐지 뭐니... 정말 내 손자가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할머니의 말에 부시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내가 그렇게 많이 바뀌었다고? 예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왜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야?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머릿속에 또 이상한 화면들이 혼란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마등처럼 나타났다 바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기억의 단편들을
성준영의 말에 윤슬이 두 눈을 반짝였다.“찾았다고요?”“네.”“어떤 사람인데요?”“시골에서 자랐고 남아선호사상이 짙은 집에서 자랐어요. 딸이라는 이유로 학대를 당했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요.”성준영의 대답에 윤슬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그런 사람이 고유정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어요?”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사람이 스파이 노릇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그런 윤슬의 마음을 눈치챗을까 성준영이 싱긋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그래서 더 제격이에요. 일단 외모적으로 채연희 씨와 굉장히 닮았고요...
파일을 펼치던 부시혁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내가 평소에 유나한테 어떻게 했는데?”“순종에 가까웠지.”임이한의 대답에 부시혁은 미간을 찌푸렸다.“왜? 내 대답 마음에 안 들어?”팔짱을 낀 임이한의 질문에 부시혁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아니야.”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임이한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지금까지 고유나에게 그는 말 그대로 순종, 복종이었으니까.“그런데 왜 얼굴을 찌푸리고 그래?”“아무것도 아니야.”여전히 잡아떼는 부시혁의 모습에 임이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너 교통사고 이후로 많이 바
윤슬의 적반하장에 고유나가 이를 악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윤슬은 고유나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나? 원하는 거 없는데? 그냥 가만히 지켜봐. 나랑 시혁 씨가 다시 재결합하는 모습. 우리 세 가족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말이야.”한편, 엘리베이터, 윤슬의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하, 윤슬. 꿈 깨. 시혁이는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아직 부시혁은 윤슬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 아니 설령 부시혁이 눈치챈다 해도 두 사람이 다시 잘될 가능성은 절대 없을 것
한편, 윤슬은 집사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불편함을 넘어 왠지 소름까지 돋았다.게다가 방금 전 성준영의 이상행동까지...이 집 사람들 뭔가 이상한데...하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무례했음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윤슬 씨, 차 마셔요.”집사가 찻잔을 건네고 윤슬이 미소를 지으며 응답했다.“네,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고요. 그냥 자기 집에 있다 생각하시면서 편하게 지내세요.”“아... 네.”지나친 친절에 불편해진 윤슬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뭐야? 왜
한편 왕수란은 부시혁의 언짢은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혼자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유나가 너 퇴원했다는 소식 듣고 직접 여기까지 온 거야. 입원내내 유나 만나주지도 않았다면서.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모르지만 사랑 싸움도 너무 오래 끌면 안 좋아. 오늘 마침 퇴원했겠다 두 사람 얘기도 나누면서 서로 화해해. 아, 참. 유나는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어.”“아니요. 됐습니다.”하지만 부시혁은 단호한 말투로 왕수란의 제안을 거절했다.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부시혁의 차가운 모습에 고유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랬지. 엄마가 워낙 유나 누나 칭찬을 하기도 했고 형이 워낙 좋아했으니까. 형 정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무작정 좋아했었지. 그러다 유나 누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됐고 있던 정 없던 정 다 떨어졌던 거지 뭐.”부민혁의 대답에 부시혁은 침묵했다.그래.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좋아했다 해도 추악한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면 정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까?질문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부시혁의 모습에 부민혁이 고개를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