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이 흠칫하며 말했다.“우리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아뇨, 그게 아니라... 육씨 가문이요.”“육씨 가문?”“네, 전에 형 부모님께서 혼사를 정해주신 그 집안 말이에요. 형님 집안의 일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한 번 가보면 아실 거예요.”“응, 알겠어.”최군형이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앞서가고 있던 강소아는 최군형의 통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몸을 돌려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최군형은 어떻게 시간을 뺄지 고민하다 결국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했다.“동생이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한번 와보라고 해서요. 너무 오래는 안 걸릴 거예요. 사흘이면 충분할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들어 강우재와 소정애를 쳐다보았다. 그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세 진열대의 물건들을 여행 가방 속에 담기 시작했다.“아줌마, 아저씨, 이건...”“군형아, 어쩌다 본가에 가는데, 큰 건 못 해줘도 간식은 마음껏 가져가!”“맞아, 이거 사돈... 아니, 부모님께 드려. 우리 마음이야.”그들 부부는 큰 가방 두 개를 간식으로 꽉꽉 채우고 있었다. 최군형이 깜짝 놀랐다. 그는 감동받은 얼굴로 텅텅 빈 진열대와 부부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쳐다보았다.“아저씨, 아줌마, 이러실 필요는...”“그럴 필요가 왜 없어! 군형아, 언제 가? 우리가 짐 들어다 줄까?”최군형은 차마 전용기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말할 수 없었다.“맞다, 넌 집이 어디야?”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오성입니다.”그 대답에 부부가 금세 조용해졌다. 그들은 지금까지 절대 강소아의 앞에서 이곳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들의 딸은 그들이 훔쳐 온 아이이기 때문이다.한 살짜리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곳을 언급했다가 혹시라도 과거를 기억해 낼까 봐 두려웠다. 한 번 터진 기억은 화산처럼 폭발해 더는 수습할 수 없을 거였다.그들은 강소아가 평생 그들의 곁에 있기를 원했기에 그녀의 앞에서 절대 오성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
최군형은 눈을 크게 뜨고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어릴 적부터 그들을 보살핀 주씨 아줌마가 웃으며 다가왔다.“둘째 도련님, 이 기름 괜찮은 겁니다. 값도 싸고 양도 많아서 가성비가 아주 좋아요! 오늘 저녁에도 이걸로 튀김을...”“아줌마, 일단 이거 쓰지 마요!”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그러니까... 아껴 쓰란 소리예요!”최군형이 코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주씨 아줌마는 어리둥절했다. 천하의 최씨 가문이 이깟 식용유를 아낀다고?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겼지만 그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최군형은 그 음식들이 모두 완벽하게 정리된 뒤에야 만족스럽게 웃었다.“전 이만 부모님 뵈러 갈게요.”그 말을 남긴 채 최군형은 자리를 떴다. 최군성과 주씨 아줌마는 얼떨떨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둘째 도련님, 큰 도련님이 어쩐 일이래요? 주방 일은 종래로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며칠 전 문성원이 그의 집에 왔었다. 그는 강주에 있는 최군형의 근황을 조금 알려주었다. 총명한 최군성은 금세 이 일을 기억해 냈다.“이상해할 거 없어요. 강주에 있으면서 주방 일을 배운 모양이에요.”“네? 강주 별장에도 고용인들이 있지 않아요?”“형님이 거기 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그러니까... 큰 도련님이 강주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는 말씀이세요?”주씨 아줌마가 마음 아프다는 듯 말했다. 조금 생각하던 최군성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형도 즐기고 있을 거예요!”주씨 아줌마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고는 일하러 갔다.운전기사가 도착했다. 최군형은 차에 올라타고는 최상 빌라를 가로질러 부모님의 거처인 여주 별장에 도착했다.그를 마중 나온 방한서는 웃으며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올라가라고 했다. 최군형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왜요?”“올라가셔도 되긴 합니다만, 두 분을 방해하지는 마세요.”최군형이 금세 그 뜻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이 즐겁게 지내고 있을 게 뻔했다.그는 숨
최군형이 나른하게 양가죽 소파에 기댔다. 두 사람은 일찍부터 그가 즐겨 마시는 커피를 준비했다. 커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꿈을 꾸는 듯 몽롱했다. 꿈속에서 그는 강주에 있었고, 오성으로 돌아오니 꿈에서 깼다.강서연이 생글거리며 물었다.“아들, 어때? 케이크 맛있어?”최군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아 얼마 먹지도 않았다.최연준도 원래는 디저트를 싫어했지만 강서연 때문에 취향을 바꾼 것이다.강서연은 그를 ‘대머리 알감자’라고 불렀다. 최군형이 작게 웃었다. 최연준은 그 또래의 남자 중에선 잘생긴 축에 속했다. 비범한 유전자 덕에 중년이 되어서도 최연준은 잘생긴 아저씨가 될 수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그의 얼굴에서 더욱 멋스러워졌다.“엄마, 아빠.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최군형이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물었다. 최연준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성원이가 말 안 해줬어?”“자세한 건 얘기 안 해줬어요.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라면서.”“응, 그렇긴 해. 육소유 일인데... 군형아, 그 아이를 찾았대.”“네?”최군형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우리도 너와 같은 반응이었어.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이 다 있다 싶어.”강서연이 최군형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최군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찾은 거예요?”“육경섭 씨 사촌 동생이랬나? 육명진이라고.”“그 아이가 소유인 건 확실해요? 어떻게 아는데요?”“나와 네 엄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최연준은 고용인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 뒤 방한서에게 문을 지키게 하면서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 신신당부했다. 이제 거실엔 그들 세 식구만 남았다.최연준은 DNA 검사 결과지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최군형은 의학을 배웠기에 이 정도 검사 결과는 알아볼 수 있었다.“이게 뭐예요?”“육명진과 육소유의 DNA 검사야. 소유를 납치한 사람도 사고 생존자였대. 하지만 결국 경찰에게 잡혀서 사형당했나 봐.
“군형아? 군형아!”강서연이 몇 번을 불러서야 최군형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최연준이 그의 정강이를 툭 차놓았다.“뭐 하는 거야! 엄마가 얘기하시는데 정신을 놔?”최군형은 몸을 움츠린 채 살려달라는 듯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강서연이 웃으며 최연준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군형이 방금 왔는데, 혼내지 마요! 화내면 얼굴에 주름 생겨요.”최연준이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았다. 최군형은 이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엄마, 아빠, 그, 저...”“가지 마! 네 엄마 얘기 아직 안 끝났어!”최연준이 눈을 크게 뜨고 최군형을 쳐다보았다. 최군형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군형아, 네 아빠와 상의해 봤는데, 너 오성에 며칠 더 있으면서 육씨 가문에 가서 소유를 한 번 만나봐.”“네?”최군형이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 뜻을 알아챘다. 두 집안의 정도 있고, 혼약도 맺었던 사이인데, 가보는 게 예의이긴 했다. 어릴 적의 우정을 봐서라도 그는 육소유를 만나봐야 했다.최군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눈치였다.강서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20년 전 소유가 금방 태어났을 때, 우정 언니 보러 많이 갔었어. 같이 소유를 목욕시켰었는데, 허리에 옅은 반달 모양의 모반이 있었어. 얼굴에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었는데...”“맞아, 경섭 씨가 말했었어. 허리에 모반이 있으면 금전운이 좋다고. 소유를 찾았다 했을 때 그 모반에 대해서도 물어봤었어...”“뭐라고 해요?”“확인했대. 반달 모양 모반이 틀림없대. 위치도 똑같고, 나이를 먹으면서 더 커진 것 같다고...”강서연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최연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최군형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정신을 놓고 있었다. 강서연이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물었다.“아들, 강주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최군형이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최연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찬혁 삼촌 사건은 네가 조사할 필요 없어
4층은 그의 “천문대”였다.그는 어린 시절 별을 보는 걸 좋아했었다. 그 사실을 안 최연준이 그에게 이 천문대를 지어줬었다.방 중앙에는 커다란 지구본이 있었고, 천체 망원경이 창가에 세워져 있었다.이곳은 최군형의 비밀 아지트였다. 예민하고 마음 약했던 사춘기 시절,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그는 이곳에서 모든 아픔을 별에 담아 보냈다.지금 그는 또 망원경 앞에 서 있었다.두 개의 시공간을 이어줄 수 있는 웜홀은 정말 존재한다고 했다. 웜홀을 지나 육지유가 실종됐을 때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그는 누가 육지유를 데려갔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주말, 오성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강주는 맑았다.강소아는 기지개를 켜고는 티셔츠와 슬랙스 바지를 입고 내려와 소정애를 도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소정애는 그런 딸이 낯설다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얘, 언제부터 이렇게 철이 들었어? 엄마 도와줄 줄도 알고?”강소아는 얼굴을 붉히고는 수줍게 웃으며 소정애에게 안겼다.“저리 가! 가만히 있어, 튀김 하고 있잖아, 기름 냄새가 너무 세. 넌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말과는 다르게 소정애의 마음은 한없이 따뜻해졌다.“엄마, 제가 도와줄게요!”“아이고, 필요 없대도!”소정애가 옅게 웃었다. 지금껏 그가 딸에게 가르쳐 준 요리라고는 가장 기본적인,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요리밖에 없었다. 튀김 같은 고난도의 요리는 절대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였다.가끔은 강우재가 딸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라고 얘기했었다.“나중에 시집가서 밥도 할 줄 모르면 구박받아!”그 말을 들은 소정애가 강우재를 흘겨봤다.“내 딸이 왜 시댁에 밥을 해줘야 해? 우리 소아의 남편이 평생 밥을 해 주면 될 거 아니야?”할 말이 없어진 강우재는 소정애가 억지를 부린다고 했다. 소정애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어렸다.“걱정하지 마, 내가 배운 모든 걸 소아에게 가르쳐줄 테니까. 하지만 뭐든 천천히 해야
소정애는 진작에 딸의 마음을 알아냈다. 그녀도 한때는 강소아 같은 소녀였는데,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모든 게 확실해지기 전까지, 최군형을 완전히 교육하기 전까지 딸의 마음이 더 커지면 안 됐다.“됐어, 어서 가서 아빠랑 소준이 불러, 밥 먹자!”강소아가 힘없이 대답했다. 소정애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생각이 나면 전화라도 걸어서 언제 오는지 물어봐.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게 우리가 물어보는 것보다 나을 거야.”“엄마,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언제 군형 씨 생각을 했다고요.”“응, 그래, 네가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아무튼, 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줬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강소아가 볼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비록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그녀는 폴짝거리며 강우재와 강소준을 부르러 갔다.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녀가 팔을 뻗어 올리자 짧은 티셔츠 아래로 얇은 허리가 드러났다.“얘 좀 봐, 옷이 왜 이렇게 짧아?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소정애가 접시를 들고나오며 잔소리했다. 강소준이 그 말을 받아쳤다.“엄마가 뭘 알아요, 이거 요즘 유행이에요! 짧은 티셔츠에 하이웨스트를 입으면 다리가 길어 보인다고요! 우리 반에도 이렇게 입는 친구들 많아요.”“네 누나는 원래 다리가 길어서 이렇게 안 해도 돼! 네 매형도 누나가 이렇게 입는 걸 안 좋아할 거야.”그 순간 식탁이 조용해졌다. 강소준은 몰래 강소아를 쳐다보며 짓궂게 웃었다.“누나, 그분 수호신 형님 아니야? 왜 계속 매형이라고 해?”“됐어, 밥이나 먹어!”소정애가 젓가락으로 강소준의 머리를 툭 쳤다. 모두가 깔깔 웃었다. 이어 소정애는 뭔가 생각난 듯 강소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강소아의 허리에 가 닿았다.“응? 소아야... 네 허리에 있던 모반은 어디 갔어?”“모반이요? 아...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어요. 얼마 전에 시술로 없애버렸어요.”강소아가 머쓱하게
햇살 좋은 주말이었지만 최군형이 없는 탓인지 강소아의 시간은 유독 느리게 흘렀다. 그녀는 멍하니 문 앞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다. 이때 자동차 경적이 텅 빈 이곳에 쨍하게 울렸다.강소아가 급히 달려 나갔다. 문 앞에는 태양 아래 반짝거리는 빨간 스포츠카가 서 있었다. 컬 굵은 파마를 한 운전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강소아에게 손을 흔들었다.“나가서 놀자! 빨리 타!”강소아가 깜짝 놀라 소리 지를 뻔했다.“수영아? 네가 어떻게...”눈앞의 하수영은 강소아가 아는 하수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지난주까지 하수영은 수수한 옷차림에 매일 조용히 다니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강소아가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프다는 말뿐이었다.그런데 오늘은...“올 거야, 안 올 거야?”강소아가 웃으며 하수영의 차에 올라탔다. 차 안도 역시 호화로웠다. 가격이 상당할 것 같았다.강소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자기 티셔츠와 바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어 하수영의 원피스와 하이힐,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진주 팔찌를 쳐다보았다. 하수영은 백조가 되었는데 자신은 여전히 미운 오리인 것만 같았다.차 뒷좌석에는 하수영의 명품 백이 놓여있었다. 강소아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며칠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진 거지?’“야, 왜 그래?”하수영이 웃었다. 차가 달리자 그녀의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었다.“아무것도 아니야.”강소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다른 세상 사람 같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너 되게 예쁘다.”그 말을 들은 하수영이 환하게 웃었다.“소아야. 이렇게 치장하니 구자영도 나한테 안 될 것 같아, 안 그래?”“넌 원래 걔보다 예뻐!”“오늘 너도 나처럼 예뻐지게 해 줄게!”“응?”강소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하수영이 액셀을 힘껏 밟았다. 차가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
“소아야, 이 가방도 잘 어울려! 이것들 다 입어 봐. 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하수영이 소파에 털썩 앉자 직원이 즉시 예쁜 디저트를 갖다주었다.강소아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손에 물건을 가득 든 직원 몇 명이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강소아가 우물쭈물하며 탈의실에 들어가려 하지 않자 하수영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사실대로 알려줄게. 우리 부모님 벼락부자 됐어!”“뭐?”“그러니까... 전에 산 주식이 어떻게 된 일인지 미친 듯이 오르는 거야. 두 분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올랐어! 정말 하늘에서 떡이 떨어졌지 뭐야.”강소아는 반신반의했다. 그녀도 주식 쪽에 조금 관심이 있었다. 자세히는 아니지만 증권 시장의 시세쯤은 알 수 있었다.최근에는 대부분의 주가가 내렸으나 확실히 크게 오른 주식 몇 개가 있었다.정말 하수영의 부모님이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그래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돼! 다 네 부모님 돈인데, 막 써도 돼?”강소아가 하수영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하수영이 급히 설명했다.“아니, 내 돈도 있어! 그냥... 그냥 쓰면 돼. 마음에 드는 건 다 사줄게. 오늘은 내가 쏜다!”“수영아...”“소아야,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전에 부모님이랑 싸우고 쫓겨났을 때 네 집에서 묵던 거 잊었어? 넌 계속 날 받아줬잖아. 내가 어려울 땐 항상 나서서 날 보호해 줬고. 그 정은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소아야, 난 언제나 네게 보답하고 싶었어. 한 번만 그럴 수 있게 해줘, 응?”하수영이 강소아의 눈을 보며 진정성 있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원마저 섞여 있었다.강소아가 작게 웃었다.“바보, 우리 사이에 이런 게 필요해?”“소아야!”“알았어... 그럼 이렇게 많이는 말고, 옷이랑 신발 하나씩만 고를게. 되지?”강소아가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수영이 복잡한 표정으로 강소아를 바라보았다.“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작년에 그랬잖아, 올해는 엄청난 생일선물을 해주겠다고.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